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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산에산에는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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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 산에산에산에는 스크랩 하늘아래 첫 동네, 고위평탄면지형의 늘목동(訥木洞)
백수 추천 0 조회 319 14.01.19 15: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예로부터 감악산은 바위에서 감색이 돋는다 하여 紺岳山이라 불렀다. 높이 675m로 조선시대에는 적성현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파주시 적성면(북쪽), 양주시 남면(남쪽), 연천군 전곡읍(동쪽) 등 3개市의 경계를 이룬다. 정상에 서면 임진강과 개성의 송악산이 훤히 눈에 들어오는데, 산세가 매우 험하여  京畿 5岳의 하나로 꼽는다.

 

산 정상에 있는 감악산 몰자비는 당나라 장군 설인귀의 비라거나 혹은 진흥왕순수비와 같은 신라고비로 추정하고 있으며, 임꺽정의 전설이 서린 임꺽정봉과 임꺽정굴, 까치봉, 법륜사와 운계폭포 등이 있다.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고 四方에서 접근이 용이하여  휴일이면 산을 찾는 등산객이 많다.

 

그러나 정작 감악산에  남한산성(南漢山城)과 비슷한 소위‘고위평탄면'지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없다.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 high flat summit)이란?

 

고위 평단면은 오랜 침식작용을 받은 평탄면이 융기하여 높은 고도에 위치하게 된 지형을 말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고도에 따라 고위평탄면, 중위평탄면, 저위평탄면 등으로 나누어 중부지방의 침식기준면을 논하고 있으며, 고위평탄면은 여름에도 기온이 낮아 고랭지 농업지역으로 이용된다. 이런 예는 태백산맥 중부지역인 대관령 부근을 중심으로 한 산간지역에 잘 나타난다.

한편 중위평탄면?저위평탄면으로 알려진 곳은 군사 방어적인 측면에서 산성이 구축되기도 하였다.

 

태백산맥정상에는 기복이 작은 고원형의 지형이 곳곳에 나타난다. 특히 대관령 부근의 횡계리(해발 1,000m)에 평지나 구릉지에서 볼 수 있는 목장과 복잡한 도로망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지형이 오늘날 감자, 옥수수, 배추 등 고랭지 농업지로 이용되며 대규모 목장으로도 개발되어 있다.

 

또 남한산성 부근에서는 해발 500m 내외에 고위평탄면이 나타나는데 남한산성은 고위평탄면에 쌓아올린 대표적인 성벽이다. 또 함경산맥의 북쪽에 있는 개마고원은 아주 평평한 땅이 넓게 펼쳐지는 대표적인 고위평탄면 지형이다. <지도 읽기와 이해에서 발췌>

 

그렇다면 대체 감악산 어느 곳에 이러한 고위평탄면 지형이 있을까?

그곳은 바로 감악산 정상부 동쪽 능선 바로 아래에 위치한 늘목동(訥木洞)으로하늘아래 첫 동네라고 일컫는 곳이다.

  

 감악산을 넘어 南下하는 전략적 교통로.

 

삼국시대부터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에서 내려온 군사들이 임진강을 건넌 후, 높이 675m의 감악산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하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하나가 지도에서 보는 지금의 371번 도로다.

중성산을 지나 적성면소재지에서 설마계곡(설마천이 흐르는 협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설마치고개(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 남면의 경계)가 나온다. 이 고개를 넘어 양주군 남면으로 진입하여  의정부 - 서울로 남하하는 길이다.

 

이 길은 중요한 南下통로로 이 길목을 지키기 위해 백제는 七重山山城을 쌓았고, 삼국시대 이곳 七重城에서 치열한 전투를가 벌어졌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자세히 전한다.

 

6·25전쟁 때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영국군이 설마계곡에서 북한군과 중국군에 포위되어 4일 동안 격전을 치른 끝에 622명 중 39명만 살아 돌아왔을 정도로 한쪽은 꼭 사수해야 하고, 다른 한쪽은 꼭 넘어야만 하는 전략적요충지인 것이다. 이 전투는 유엔군이 치른 대표적인 전투 중의 하나로, 지금은 설마리 고지 아래에 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비가 세워져 있다.

 

  

 

또 다른 길은  지도에 보이는 지금의 357번 도로다.

37번도로 적암3거리에서 감악산과 마차산 사이를 흐르는 간파천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375번 도로다.

이 길을 따라 올라 간패고개(연천군 전곡읍과 양주시 남면의 경계)를 넘은 후 양주군에 진입하여 의정부 - 서울로 남하하는 길이다. 이 길 역시 중요한 남하통로로 삼국시대에 간파천의 한 쪽인 늘목리의 감악산 자락에 아미산성을, 그리고 계곡 건너편인 간파리의 마차산에는 수철성을 쌓아 이 길목을 지켰던 것이다.

  

적암3거리에서 375번 도로를 타고 적암리를 지나서 양주 쪽으로 가다보면, 간파천이 흘러내리는데 간파천의 오른쪽(감악산자락)이 전곡읍 늘목리지역이고, 간파천 왼쪽이 전곡읍 간파리지역이다.

 

아미성(할미성)

하늘아래 첫동네 가는 길.

 

길을 따라 간패고개를 향해 위로 오르다 보면 아미성(할미성) 남쪽에 마을이 있다. 이곳이 노두골(노대동)로 늘목2리가 된다. 이곳에서 더 올라가면 비석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바로 우회전해 감악산의 동쪽계곡으로 접어 들어야한다. 계곡 입구에 감악산 등산로 안내도가 서있고, 전곡초등학교 적동분교가 있는데 이 마을이 승배골(酸梨洞)로 늘목1리다. 협곡이라서 논밭이라야 손바닥만한 뙈기밭이 조금 있을 뿐이고, 계곡 따라 집 몇 채의 집이 있어 한적하기 그지없지만, 몇 백 년 묵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전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승배골에서 하늘아래 첫 동네까지의 거리는 2km, 자동차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다. 비탈진 산길을 굽이돌고 돌아 한참을 달리니 그 높은 곳에 별천지가 나타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지형도를 보면 이 곳의 등위고도는 300m 이상으로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으며 고산지성 산지가 남북 방향으로 발달하였다. 이곳은 꽤나 넓은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며 정확이 헤아려보지는 못했지만 20여호 정도의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늘목동(訥木洞)

 

이 동네가 늘목동(訥木洞)으로 늘목 1리에 속하며 마을유래에 본래 적성군 동면 지역으로, 고려 말에 눌처사가 살았다 하여 늘목, 늘무기, 늘메기, 눌목동으로 불려온다. 200년 전에 채광덕(蔡光德)이란 선비가 이 곳에 터를 잡은 후부터는 한국전쟁 전까지 평강 채씨(平康蔡氏)만 모여 살았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이 고려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는지는 알수 없는 일이지만, 마을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채광덕이란 선비가 200년전에 터를 잡았다는 것은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지명과 관련하여눌처사운운하는 말은 견강부회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늘목계통의 地名은 특이하지만 訓音借表記訥木(눌목)이나 獐項(노루목)등을 포함하면 전국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訥木말더듬거릴 눌자에 나무 목으로 한자의 훈으로 풀어내려면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 순우리말인늘목을 발음이 비슷한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늘목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늘목은 < + 목>의 합성어로 생각된다.

 

먼저 의 의미 부터 살펴보자.

 

0. 趙康奉2002년에 발표한 논문 ·河川合流分岐處地名硏究에서 늘목·느르·느리실·누르메·누리대·노루목·노리목 등의 地名과 이의 訓音差地名?木, 於義, 黃谷, 世代, 訥谷, 獐項 등은 그 뿌리가 같은 語辭라고 보았으며, 이를(nVrV)’계 지명이라 命名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물줄기가 합류하는 지리적 특징을, 分岐하는 것으로 인식한 당시 사람들이, 이러한 지형에(nVrV)’地名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0. 천소영은 위의 (nVrV)’계 지명을 느르계 지명이라 불렀고, 이는 山水가 중첩되거나 늘어져서 지형이 넓어지는 곳을 이르는 지명이라 하였으며, 느르계 지명에 느리가 있고, ‘느름>의 명사형과 등이 있다 하였으나, 趙康奉은 이에 대해일부의 지명에 적용될 수 있음은 동의하나 모든느르계 지명에 적용하는 것을 동의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0. 또 하나, ‘자가 들어가는 특이한 지명으로, 파주시 적성면의 파산서원이 있는 동네인늘노리(訥老里)’가 있다. 이 마을의 이름에 대해 블로거 슭마노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늘노리(訥老里)너르다는 뜻의 순우리말 [/nor]2번 중첩한 말이다. [+] [+]이라는 이름이라는 말이다.

 

[/nor]이라는 말은 옛날에아주 넓은 벌판을 가리켰는데 후에 [/////?/?/누르/너르/너브/..]등으로 넘나들었다.

 

趙康奉의 주장이 이곳의 늘목동(訥木洞)에 그대로 적용되려면, 마을 안이나 가까운 주변에 두 갈래이상의 물이 합쳐지거나 갈라지는 지리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고위평탄면지형인 이 마을은 조그마한 개울하나가 동네가운데로 흘러갈 뿐 合水나 分岐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차라리 이 보다는 산수가 늘어져서 지형이 넓어지는 곳으로 즉 천소영의 주장에 가깝고, ‘늘’넓다’‘너르다’는 말이라고 설명하는 슭마노르의 주장과 통한다.

 

따라서 趙康奉의 말대로어떠한 법칙이나 주장이 일부의 지명에 적용될 수 있음은 동의하나, 모든계 지명에 적용하는 것을 동의할 수는 없다는 말이 맞다.

 

그 다음  ’의 의미 알아보자.

 

1) 건널목: , , 내 따위에서 건너다니게 된 일정한 곳.

2) 나들목: 나가고 들고 하는 길목.

3) 여울목: 여울물이 턱진 곳.

 

여기서 우리말인 “- 은 위 1)3)과 같이 -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건널목은 건너는 곳이고, 나들목은 나드는 곳이며, 여울목은 여울이 지는 곳이다.

 

4) 길목: 중요한 통로가 되는 어귀(=드나드는 목의 첫머리).

5) 물목: 물이 흘러 들어오거나 나가는 어귀.

 

그리고 위 4)5)에서의 “- 人體에 비유하자면 머리 아래의 목과 비슷한 지형으로다른 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매우 중요하고 좁은 진출입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동차길이 나기전 옛날에는 어느곳으로 통행했는지 알수가 없으나,  지금은 늘목동에서 외부로 통하는 진출입로는 적동분교가 있는 승배골(酸梨洞)로 내려가는 외통수길이 유일하다. 그러나 지금도 굳이 험한 산길로 등산하듯 다닌다면야 장현리나 적암리 등으로 내려가는 길은 있는 듯하다.

 

우리말 '늘목'이란?

 

이곳 늘목동의 '山水가 늘어져서 지형이 넓어진 곳'이므로 늘목이라 이름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하나, 넓은 동네[늘]에서 외부로 나가는 이 동네의 유일한 좁은 출입구[목]를 '늘목이라 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늘목'은 같은 계통의 ‘느르'계 지명인 노루목과 상통한다. 노루목은 좁은 길목이란 의미로, 넓은 들에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좁은 지역 뜻하기 때문이다.

 

 

 

 

비석거리에 서있는 감악산 등산 안내도

 

늘목1리인 승배골 입구

 

승배골[僧配谷, 酸梨洞], 신배골*순박골 : 감악산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조선이 건국된 후 불교 탄압이 심해지자 감악산 내에서도 산세가 좋아 절이 많던 이 곳에 승려들이 모여 들어 승배골이라 하였다 한다. 일제 강점 후에 지명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신배나무골 [酸梨洞]'로 표기하여 오늘에 이른다.

 

 

적성초등학교 적동분교 입구.

전곡읍 늘목리(訥木里) 111에 있는 전곡초등학교의 분교(分校). 1954년 현 위치에 정착해 미군의 원조로 목조 교실 3개를 신축하였으며, 1958년 당시 학부형들이 모금하여 부지(敷地)를 구입하고 1961년과 1964년에 각각 3개 교실의 공사를 마쳤다. 1969년 화재로 5개 교실이 불에 타 같은 해에 6개 교실을 다시 지었다.

 

 

전곡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파주방향으로 가다 늘목리 酸梨洞마을을 찾아 약 400m 정도 들어오면 마을입구에서 전면에 흐르는 개울을 쳐다보며 우람하게 서있는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다. 이 은행나무는 예전에 벼락을 맞아 가지 일부가 枯死되었지만, 전체적으로 樹勢가 양호한 상태이다. 무성한 잎의 무게에 눌려 가지가 바닥으로 잔뜩 쳐져 있다.

株間 높이 2m 부위에서부터 가지가 갈라지기 시작하여 사방으로 고루 발달한 모습으로 나무아래 시원한 그늘을 즐길 수 있는 평상과 자연석이 놓여 있으나 바쁜 농사일과 주민들의 고령화로 최근에는 이용이 거의 없다고 한다.

한 해 평균 4~5가마의 중알크기 은행을 수확하는 생산성이 높은 암나무인데 흉고둘레에 비해 키가 큰 편이며 마른 이끼가 끼어있는 주간의 수피는 건조해서 만지면 부석부석 떨어진다.

수령은 300년이고, 樹高27m이며, 흉고둘레는 4.9m이다. 수관폭은 21m이다.

 

 

 

 

 

 

이곳이 하늘아래 첫 동네인 늘목동의 입구다.

 

아래 사진은 모두 늘목동의 모습이다.

 

 

 

 

 

 

 

 

 

 

 [참고자료 1] 다음은 20028월에 발표된 趙康奉의 논문 ·河川合流分岐處地名硏究중에서 제7장인 (nVrV)”계 지명의 내용을 요약 발췌한 글이다. * 블로그에 아래아한글이 제대로 표기되지 않는다.

 

<결론>(nVrV)’계 지명은 대개 강·하천이 합류·분기한 곳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우리말에 ()’이 있는데 이 말의 옛말은 ()이다. ()에는 날()이 있다. 그러므로 은 표리의 관계이다.

 

???은 물줄기에 의하여 대지가 갈라지기 때문에나리()’·‘??리()’造語되었다.

 

???(), ????, ??리()는 모두 ‘nVrV’地名素同根語라 생각한다. 이런????느르>형 수식지명소가 쓰인 지명은늘목·느르·느리실·누르메·누리대·노루목·노리목이 있고, 이의 訓音差 지명은 ?木, 於義, 黃谷, 世代, 訥谷, 獐項이 있다.

 

. 의 옛말인 ?????에 대하여 梁柱東가??의 명사형이라고 하였고 가??··의 뜻이라 하였다.

 

?????()가르다라는 의미의 가르(kVrV)’系 語辭라면, ()의 어원도 물줄기에 의해 두 지역이 갈라지기 때문에 옛 표기는 나리였다.

 

.나리가 변한내리다(옛 표기 ??리다) ’란 말과 同源의 어사라 생각하며, ??리다’‘내리다’‘??리의 공통점은 (nVrV)’형 이라는 것이다.

 

. 칼의 옛 어형이 임을 감안하면 은 물건을 가르는 기능이 중시되어 造語된 말이다. 칼에는 날()이 있는데 칼로 무엇을 자른다는 것은 로 자른다는 의미와 같다.

 

. 필자는 지명과 관련된이라는 어휘가 두 강이나 냇물이 합류되는 곳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는데 착안하여, 늘머리[?木], 늘목[於木], 느리실[黃谷], 누르메[黃山], 노루목[獐項]과 나리[], 나루[] 등의 지명은 그 뿌리가 동일한 어사라고 보았다.

 

칼날이 사물을 둘로 나누는 기능을 하듯 나리[], 가람[], ????[], ???[]을 모두 同根으로 보았다.

 

*?: 땅이름 얼, 땅이름 늘

*이다.<광주판천자문>

 

.우리주변에 두 냇물이 합류하는 곳이 많은데 그곳의 지명을 보면 을 뜻하는 지명과 두 냇물이 갈라진다는 의미에서 명명된 가르(kVrV)지명이 분포하고 있다.

 

이런 곳에는 늘·느르·느리·누르·누리·노루·노리 등을 수식지명소(修飾地名素)로 한 지명이 불리고 있다. 필자는 이런 유형을 (nVrV)계 지명이라 명명하였다.

 

[1] 늘머리(늘목이, ?木)

천소영은 위의 (nVrV)’계 지명을 느르계 지명이라 불렀고, 이는 山水가 중첩되거나 늘어져서 지형이 넓어지는 곳을 이르는 지명이라 하였으며, 느르계 지명에 느리가 있고, ‘느름>의 명사형과 등이 있다 하였으나,

 

필자는 이에 대해일부의 지명에 적용될 수 있음은 동의하나 모든느르계 지명에 적용하는 것을 동의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2] 늘목(於項. 於木)

이칭으로 於木, 訥木, 於項, 老木, 仍乙項, 板項, ?項 등과 또 이 -’修飾地名素로 쓰이고 있는 '‘’‘느르등과 대응하고 있다.

 

[3] 느르(·)

늘목은 폐음절 형태지만 개음절 형태(고대국어에서 폐음절보다 이른 형태)느르형이 있다.

··와 대응하고 있다.

물줄기가 합류하는 지리적 특징을 分岐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nVrV)’형 지명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4] 느리()

(nVrV)계 지명으로 느르에 접미사 ‘-가 첨가되어 생긴 지명으로···등이 지명 前部要素로 쓰이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에 느리목마을(訥木里)이 있다.

 

[5] 누르()

누르이외에 ·와도 대응된다.

 

[6] 누리(·)

 

[7] 노루·노리()

의 훈이 노??이므로 이노??는 날(nVrV)계 지명으로 물줄기가 합류되는 곳의 지명을 갈라지는 곳으로 인식하여 을 뜻하는 날(nVrV)계 지명을자로 訓音差했을 것으로 본다.

 

 

[참고자료 2] 다음 글은 네이버 슭마노르의 블로그 / 경기도 파주 늘노리의 [/nor]을 요약 발췌하였다.

 

늘노리(訥老里)너르다는 뜻의 순우리말 [/nor]2번 중첩한 말이다. [+] [+]이라는 이름이라는 말이다.

 

[/nor]이라는 말은 옛날에아주 넓은 벌판을 가리켰는데 후에 [/////?/?/누르/너르/너브/..]등으로 넘나들었다.

 

[/nor]노르(몽골어로 호수)’‘/(일본어로 평야)’‘누리, 나라, , 넓다, 너르다, 느긋하다, 느슨하다, 넉넉하다 등(현대한국어)’등으로 분화되었다.

 

충주의 老隱面의 노은, 論山시의 논, 黃山(누르)은 모두 너르다는 뜻으로 [/nor]에서 변음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이름인 놀부, 노리(백제법왕의 이름), 노르(신라 문무왕 법민의 이름), 訥祗王, 보조국사 知訥, 누르(누르하치), 노리코와 노리오(일본이름) 등도 너르다, 넓다는 뜻 [/nor]의 변음이라 했다.

 

 

[참고자료 3] 늘목리 지명유래(전곡읍 홈페이지)

 

늘목리

본래 적성군 동면지역으로, 고려 말에 눌처사가 살았다 하여 늘목, 늘무기, 늘메기, 눌목동으로 불리워오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늘목리'라 하여 연천군 적성면에 편입되었다. 194513일 파주군 적성면으로 편입되었다가, 196311수복지구와 동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하여 전곡읍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4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

-. 노두골(老大洞, 露臺洞)

노두골[老大洞, 露臺洞] : 할미성 남쪽에 있는 마을. 노대암(露臺岩)이 있어 노대동'으로 불려오다 노두로' 어휘가 변하였다. 전주 이씨(全州李氏) 효령대군파 후손들이 모여사는 지금의 늘목 2리 지역이다.

 

-. 늘목동(訥木洞)

앞자리 부근에 있는 마을. 고려 때 눌처사가 살았고, 200년 전에 채광덕(蔡光德)이란 선비가 이 곳에 터를 잡은 후부터는 한국전쟁 전까지 평강 채씨(平康蔡氏)만 모여 살았다고 한다. 감악산 정상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늘아래 첫동네'라고도 한다.

 

-.능안말: 망두개 남쪽에 있는 마을.

-.비석거리: 승배골 입구에 있는 마을. 예전에 비석이 서 있었다 한다.

-.주막거리 : 368번 지방도 옆에 있는 마을. 예전에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지명유래

간패고개 : 비석거리 남쪽에 있는 고개. 양주군 남면의 황방리로 넘어간다.

고두절고개 : 승배골에서 늘목동으로 넘어다니던 고개. 고려 말 불교가 번창했을 때 이 골짜기 곳곳에 절들이 많아 이 고개를 오르면 고기도 절, 요기도 절' 이란 말이 유행하여 고두절고개로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고진사모이등 : 승배골 안에 있는 산등. 고진사의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곰채골 : 늘목동 서쪽에 있는 큰 골짜기. 해마다 2*3월에 늘목 마을에서 감악산 산제를 모시는 곳이며, 약수가 유명하다.

구광터 : 능안말 동쪽에 있는 터.

노대바위[露臺岩] : 뾰족바위 아래에 있는 바위.

늘목이고개 : 능안말에서 늘목동으로 넘어다니던 고개.

달암절터 : 수리봉 남쪽에 있는 절터. 절을 험준하게 솟아오른 큰 바위밑에 매달아 지었다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우물이 유명하다.

독매기 : 앞자리 앞에 있는 개울

: 새우고개에 있는 경사가 심한 산비탈. 고갯마루에 오르는 지형이 가파르고 지나기가 매우 힘들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망두개 : 노두골 남쪽에 있는 산.

물퉁이자리 : 앞자리 동쪽에 있는 논.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방죽이, 방죽골 : 사태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방죽이 있다.

병풍바위 : 작은 노두골 서쪽에 있는 병풍같이 넓은 바위.

부도선골 : 고진사모이등 옆에 있는 작은 골짜기. 부도가 서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뾰족바위 : 작은노두골 서쪽 병풍바위 위에 있는 뾰족한 바위.

사지목고개 : 고진사모이등 남쪽에 있는 고개. 승배골에서 양주군 남면의 황방리로 넘어간다. 감악산에서 내려온 네 개의 큰 산자락 목에 있는 고개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사태골 : 곰채골 남쪽에 있는, 산사태가 잘 나는 골짜기.

삭정고개 : 노두골에서 늘목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산꾸지 : 설렁고개 옆에 있는, 수리봉에서 내려온 산부리.

산막골 : 문바위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상가마골 : 작은 노두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상가마골*작은상가마골로 나뉜다.

새산수개 : 곰채골 옆에 있는 산.

새우고개 : 승배골에서 늘목동으로 넘어다니는 고개. 길이 새우등처럼 굽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석문골[石門谷], 문바위 : 할미성 남쪽에 있는 골짜기. 큰 바위가 문처럼 서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설렁고개 : 늘목동에서 설렁골로 넘어다니는 고개. 파주시 적성면 장현리로 통한다.

설렁골 : 설렁고개 너머에 있는 감악산 북쪽의 골짜기. 대낮에도 호랑이가 설렁설렁 다녔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수리봉 : 늘목동 서쪽에 높이 솟은 바위산. 높이 470m.

숯굽밭 : 산꾸지 옆에 있는 밭. 예전에 숯을 굽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승배골[僧配谷, 酸梨洞], 신배골*순박골 : 감악산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조선이 건국된 후 불교 탄압이 심해지자 감악산 내에서도 산세가 좋아 절이 많던 이 곳에 승려들이 모여 들어 승배골이라 하였다 한다. 일제 강점 후에는 지명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신배나무골 [酸梨洞]'로 표기하여 오늘에 이른다.

앞자리 : 청룡뿌리 북쪽에 있는 논.

양지짝 : 천내개울 왼쪽에 있는 산비탈. 하루종일 해가 잘 든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음지짝 : 양지짝 동쪽에 있는 밭. 산이 높아 해가 늦게 든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작은노두골 : 망두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잣나무대기 : 사태골 동쪽에 있는 밭. 예전에 큰 잣나무가 많았다 한다.

절골 : 능안말에 있는 골짜기. 경내에 있던 우물이 유명했다고 하며 기와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 ‘고려당골'이라고도 한다.

진사래밭 : 늘목동 남쪽에 있는 긴 모양의 밭.

천내개울 : 늘목동에서 발원하여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로 내려가는 개울.

청룡끝 : 앞자리 옆에 있는 산부리. 채씨 묘의 좌청룡 끝에 해당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행자마골 : 능안말 남쪽에 있는 골짜기.

흠헌개울 : 설렁골에서 파주시 적성면 장현리로 흐르는 개울. 감악산의 험한 산세 사이를 흘러 내려간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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