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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1(정읍의 시인들)
●신춘문예로 등단한 전주고 3인방
-강인한, 이가림, 박정만 시인-
-장 지 홍 <시인> <한국문인협회 정읍지부 고문>
●여는 이야기
정읍은 예로부터 문향의 고을로 널리 알려져 왔다. 우리나라 제일의 단풍 명소 내장산 뿐만아니라 인문학에 있어서도 다른 고을의 추종을 불허하는, 훌륭한 문화유산이 산재한 축복 받은 고장이다.
최초의 백제 한글 시가 정읍사, 최초의 가사문학 상춘곡이 탄생한 곳이며 한문학이 크게 융성하여 태인본(방각본)이 활개를 치던 한문학과 유학의 전당으로서도 손꼽힌다.
문학 암흑기라 부르던 1950년대 우리 고장 선배 예술인들은 예원계(정읍예총의 뿌리)를 조직해서 향토문화 창달에 첫돌을 놓는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1960년대 문예부흥기에는 해성과 같이 등장한 세 시인이 있었으니 강인한 이가림 방정만 시인이 바로 그들이다.
이 세 시인의 공통점은 고향이 같고 출신 학교도 같고 등단은 신춘문예라는 관문을 뚫었다는 점이다.
1, ″시가 나의 종교다‶라고 역설하는
강인한 시인
강인한(姜寅翰 1944, 3,26 - ) 본명은 동길(東吉), 인한(寅翰)은 그의 필명이다. 전북 정읍시 상사동에서 세무공무원인 부친과 고부 은씨(?) 어머니 슬하에서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은 유복한 환경이었으나 9살 때 부친을 여의고 가세가 기울자 광주 서석초등학교 5학년 때 고향 정읍으로 귀향했다. 그는 정읍중학교(8회)에 수석으로 합격했고 전주고등학교에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머리 좋은 재원이었다. 당시 중.고등학교 합격자 발표는 성적 순이었기에 자기 합격 순위를 알 수 있었다.
전주고등학교 입학식 날, 교장 선생님이 교사 소개를 하면서, "우리 학교에는 시인 선생님이 네 분이나 계신다."고 자랑스레 소개할 때 그는 그저 덤덤히 들었었다고 한다. 신석정, 김해강, 백양촌(신근) 선생님과 《현대문학》으로 막 등단한 박희연 선생님이 그들인데 생전 처음 듣는 시인들이라 그는 그저 이름 없는 향토 시인인가 보다고 혼자 생각하고 말았었단다. 그러다가 1학년 여름방학 작문 숙제로 처음 써 본 소설이 계기가 되어 그는 미술반에서 문예반으로 끼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신석정 선생님은 전북대학교에 출강하시면서 학교 문예반을 맡아 지도하고 계셨다. 과분하게도 문예반 소년들에게 맥랑시대(麥浪時代)라는 동인의 이름까지 지어주시고 선생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해 주셨다. 3학년 오하근 형은 서라벌예술대학 주최의 전국 고교생 문학 콩쿠르에 시가, 2학년 강일부 형은 같은 문학 콩쿠르에서 소설이 당선된 쟁쟁한 서클이 전주고 문예반인 맥랑시대였다. 그 무렵 학생 잡지 《학원》은 고교생의 소설‶ 원고지 30 매 분량으로 싣고 있었으나, 맥랑시대 동인들은 보통 70 매 이상 1백 매 이상도 곧잘 써냈다. 2학년 때 낸 국판 총 110 쪽의 《맥랑시대》 2집에는 이한기, 오하근, 오홍근, 강일부, 강동길, 송준오, 박기운, 이추원, 김준일의 시, 수필, 소설이 실렸고 '젊은 문학도에게'란 제하의 신석정 선생님의 서문이 얹혀 있다. ---
그후 인한은 전북대학 국문과에 입학하여 대학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치열하게 문학수업을 했다, 이때의 심정을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열아홉 살 무렵부터 나는 ‘목숨을 걸고’ 글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문학수업을 나처럼 치열하게 하는 친구가 내 주변에는 별로 없었다.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것은 죽어 버린 가치를 캐러 다니는 허망한 도굴꾼처럼 생각되었다. 내게 살아 숨 쉬는 학문은 현대문학이며, 창작이었다. 그리고 많은 습작 훈련을 쌓으면서 문학이나 철학 또는 수학까지도 궁극에 가서는 하나로 귀결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졸업을 앞둔 1965년 겨울의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동아일보사에서 신춘문예 당선 통지서를 보내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눈부신 기쁨은 사흘 만에 사라져버렸다. 열흘 전 전북대학신문에 발표된 작품이므로 당선을 취소한다는 사연과(그런 규정이 명문화된 것은 그 다음해부터지만) 내가 보낸 당선 소감이 반송되어 온 것이었다. 미등단의 학생이 기껏 교내 신문에 발표한 시가 당선 취소의 사유가 된다는 건 무척 억울하였다. 지금도 신문에 따라 그런 경우 그냥 당선시키는 것도 있고 취소시키는 경우도 있다.
신춘문예 입성에 실패한 그는 곧 정읍호남고등학교 교사가 된다. 학생을 가르치는 시간 말고는 온통 시작에만 골몰하는 생활이었다. 드디어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에에 ″대운동회 만세 소리‶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등단 최초의 시집 ′불꽃‵도 상재하였다. 호남학보 최초 편집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열성적으로 지방문단을 거느렸다.
호남고에서 만 10년을 근무하고 광주 사레지오 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기고 본격적인 문필활동에 매진한다. 신춘문예출신들 모임인 ′신춘시‵ 동인에도 가입하고 ′원탁시‵ 동인 그리고 ′목요시‵ 동인으로 치열하게 시를 쓰면서 교직에 솔선수범하는 모범 교사로 살았다. 1982년 전남문학상을 비롯하여 제5회 전봉건 문학상도 받았다, 그에게는 학생시절에 낸 시집 ′이상기후‵를 비롯해서 13권의 시집을 내고 퇴직 후에는 딸<율리, 국제변호사>의 간청으로 서울 영등포로 이사해서 현재는 ″푸른 시의 방‶이라는 문학카페를 개설하여 그 카페제기로 지금도 후진들을 지도하는, 선생티(?)를 못 면하고 목하 성업 중이다.
시인 강인한은 문인이면서도 한국문인협회 회원이 아니다.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서 곧바로 한국문인협회에 가입하였으나 1972년 시월 유신 이후 그는 문인협회와 인연을 끊었다. 헌정을 중단시키며 박정희 개인의 종신 집권을 위한 획책이 ‘10월 유신’이었다. 그 유신을 맨 처음 지지하는 성명을 내고 보란 듯이 가두시위를 벌인 건 육군사관학교였다. 그리고 뒤이어 여기저기 사회단체에서 눈치를 보아가며 마지못해 유신 지지 성명을 내었다. 한국문인협회도 유신 지지 성명을 냈는데 당시 한국문협 이사장이 서정주 시인이었다.
냉정한 머리로 판단할 때 어떤 가치개념에 수식어가 붙을 때 그건 순수성을 상실한다고 본다.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를 붙여도 그건 순수한 게 아니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로 유신을 합리화하였으나 그것은 민주주의를 배반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었다. 강인한 시인은 ‘시월 유신’에 개인적으로 도저히 찬동할 수 없었으므로 그 단체와 인연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십 년 뒤 민족문학 작가회의가 태동하였으나 문학단체의 집행부에서 단체 명의로 어떤 사안에 대하여 사회적인 의견을 표명할 때 개인의 의사는 묵살되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굳이 그는 새로운 문학 단체에 가입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사실상 문단에서 외톨이가 된 셈이었다. 강인한이라는 이름은 한국문인협회 주소록에도 없고, 작가회의 수첩에도 없다. 이것저것 다 물리치고 뒤늦게 아주 늦게사 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을 뿐.
대학 시절, 강인한은 국립 지방대학교에 다니는 자격지심을 씻기 위하여 죽어라고 글을 썼다. 닥치는 대로였다. 시, 소설, 희곡, 무어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잡문도 턱없이 써 댔다. 쓰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증거였다. 그렇게 쓰면서 문득 느껴지는 게 있었다. 인간이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창작 행위라고. 글을 쓰는 것은 가장 숭고한 창조 행위라는 것. 스스로를 준엄하게 돌아보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리하여 가당치 않은 불의와 부정에 대해서는 침묵해선 안 된다는 것.
그는 ‘목숨을 걸고’ 글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한 편의 시가 장편소설 한 권에 필적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치열하게 쓰고 읽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은 별로 가치가 없었다. 그러므로 문학은, 아니 시는 그에게 하나의 종교였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여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뒤틀리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문학이라는 종교의 힘이 컸다. 언제부턴가 진심을 담아 시를 쓰는 것이 결국은 자기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강인한 시인과 필자는 남다른 인연으로 오늘날까지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나의 중학교와 대학의 2년 후배이지만 직장(호남고)은 나보다 1년 선배가 된다. 강인한 시인의 추천으로 내가 호남에 37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재직할 수 있었기에.
--각설하고-- 1965년 동아일보 신춘문에에 당선되었으나 이미 발표된 작품이라고 당선 취소가 된 작품, 1965년이라는 시를 소개하면서 나의 장설을 맺기로 한다. 강인한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이고 아득한 예날 정읍극장<호남의 밤)에서 내가 낭송했던 작품임을 밝힌다..
● 1965년
1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겨울은 점령군(占領軍)처럼 급히 왔다.
2
부러울 게 없어야 할 시절에
교정에서, 그 커다란 미루나무 아래서 모표(帽標)를 반짝이며
애당초 글러먹은 기후(氣候)와 시(詩)를 이야기하던 친구가
몰래몰래 막걸리를 마시더니
무섭게 자라버린 그 친구가
애당초 글러먹은 나라의 특등 사수가 되어
터지는 포화(砲火) 속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우리들은 말릴 수가 없다.
사랑하는 친구가
떠난다 해도
사랑하는 친구가 우리를 떠난다 해도
하나 안 기쁘고 하나 안 슬픈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하나도 하나도 안 기쁜 환송(歡送)을 받으며
친구는 웃었다.
3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잠도 안 오는 이국 산천(異國山川)이 한꺼번에 빨려들어
풍선 속을 팽창하다가 수천의 비둘기 똥에 짓눌렸던 게지.
짓눌려 터지는 소리가 우리들의 방
문풍지를 울렸던 게지.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사랑하는 친구가 젊디젊은 나이를 총구(銃口)에 달고
가버렸을 때,
겨울은 무심히
우리들의 텅텅 빈 가슴에 무심히
겨울은 닻을 내렸다.
4
칫솔에 묻어난 피를 닦는 일상(日常)의 어느 아침
문득 받아든 에어 메일,
친구의 얼굴이 두 손바닥으로 감쌀 수 있는
그래서 안녕(安寧)이 더 그리운 수만리 밖의 체온
체온을 만질 수 있는 문명을
감사해야 할까,
날아온 친구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사랑하는 친구는, 하늘이 뜻한다면
고향 집 마당도 쓸고
보리밥 된장찌개도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낯선 바람에 깎여 코가 커지고 눈알이 파래진다고
사랑하는 친구는 웃고 있지만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5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겨울이
우리들의 내장 속에서 정박(碇泊)을 하고
우리들은 지금, 글러먹은 땅에서 어차피 굴러먹는다.
창자 속에 얼어붙은 겨울을 꺼내어
개선장군처럼 웃는다.
산다는 것이 즐거워서 웃는다.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6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우리가 떠나온 그 교정의, 그 미루나무 아래에선
우리들의 동생이 글러먹은 기후와 시(詩)를 마시며
아, 무섭게 자란다.
미루나무는 이파리도 없이 무섭게 자란다.
—〈1965〉전문
다음은 이가림 시인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겠다 - 끝
첫댓글 잘 읽고있습니다.
(1965) 일천구백육십오년 ㅡ 강동길 ㅡ 강인한시인
그 시대를 느껴보는 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