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4,1-12; 요한 21,1-14
어제와 그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루카복음의 말씀을 들었는데요, 오늘은 요한복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루카 5,1-11)처럼, 그들은 밤새 헛수고를 합니다.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시지만, 제자들은 알아 뵙지 못합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물으시는데요, “얘들아”(paidia)는 무척 다정하고 친밀하게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못 잡았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예전처럼 (“깊은 데로 저어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요한 21,6)) 지시를 하시고,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주님이십니다.” 사랑하신 제자는 주님을 알아“보고 믿었고”, 베드로는 그 제자의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숯불구이에 익숙해서, 이 장면이 신비스럽게 다가오지 않지만, 성경에서 숯불구이는 친숙하지 않은 광경입니다. 이 ‘숯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 전 경비병들과 함께 쬐고 있던 ‘숯불’(요한 18,18)과 같은 단어입니다.
베드로에게 그때의 일을 상기시키기 위해, 그의 잘못을 다시금 깨닫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숯불을 준비하신 것이 아니구요(예, 이런 걸 ‘뒤끝’이라고 하죠), 베드로에게 남아 있을 마지막 죄책감까지 다 씻어주시고자, - 숯불 옆에서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제자가 숯불 옆에서 ‘사랑한다’고 세 번 고백함으로써, 당신은 이미 용서하신 베드로의 잘못을, 베드로도 스스로 용서하도록, - 그리고 주님께 대한 ‘죄책감’이나 ‘죄송함’에 근거하지 않고, ‘사랑’에 근거하여 주님의 양 떼를 돌볼 직무를 받도록 배려하십니다.
예수님의 명을 따라 잡은 고기는 153 마리였는데요, 153 마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학설이 있습니다. (Thomas L. Brodie,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586-587)
(1) 상징: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100 (이방인 전체) + 50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 3 (삼위일체) 으로 해석했습니다.
(2) Gematria (히브리어나 희랍어의 낱말을 풀어 구성하는 알파벳을 숫자로 바꾸어 주석하는 방법)에 의하여, '다가올 시대', '사랑의 교회', '시몬'(76) + '물고기(예수님을 상징하는 '익뛰스')(77)' 등의 단어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3) 수학적 상징: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주창되어 호스킨스(553)에 의해 발전된 관점으로 ,
1
2 3
4 5 6
7 8 9 10
이처럼 정삼각형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숫자를 나열하면 각 열의 마지막 숫자가 10, 15, 21, 28,,,, 136, 153 이 되게 됩니다. 왜 하필 17번째 열의 153인가? 왜 정삼각형인가?에 대해 추가적인 학설이 있지만 길기 때문에 생략하고요,
(4) 예로니모 성인은 당시 그리스 동물학자들이 물고기 종류를 153가지로 분류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 지을 때, 모든 종류의 물고기를 잡듯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의 상징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는데요, 그물을 상하게 하지 않고 수많은 고기가 들어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풍성한 결과로서, 베드로와 ‘사랑받는 제자’의 리더십과 다른 제자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보편성을 상징합니다. (R.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2:1075; Moloney, The Gospel of John, 551)
예수님께서 “와서 아침을 먹어라”고 초대하시고, 빵과 물고기를 집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과 물고기보다 그것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보다 그 선물을 주시는 분께 우리의 시선을 향해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보다 그 약속을 해 주시는 하느님을 더 신뢰했듯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