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에서만 보았던 황금가면이 출토되었다는 벌집 모양의 무덤. 웅장하기
그지없다.
이곳 미케네의 유적을 처음 발굴한 사람 역시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 슐리만은
어린 시절 호메로스의 장편 서사시 <일리어드>를
읽고 이야기 속의 현장을 찾아 발굴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하고자
그는 터키로 향했고 1873년 마침내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트로이를 발굴하여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이어서 그 다음 목표를 미케네로 정해 1876년 이른바 전설 속의 미케네를 신화가 아닌 역사 속의 실존
이야기로 세상에 드러냈다. 그야말로 땅속까지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진 신통술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붙이면 적당할까?
호메로스가 <일리어드>에서
황금이 흘러 넘치는 미케네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이곳 미케네에서는 수많은 황금과 보물이 무덤 속에 함께 묻혔던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유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황금가면은 그중의 하나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이곳 아트레우스 보고의 많은 부장품들은 발굴 당시 이미 도굴당한 상태였다고 한다.

아트레우스의 보고 입구에서.
지금부터 약 3천5백여년
전에 이처럼 육중한 큰 돌들을 직육면체로 다듬은 벽돌모양으로 수직 석축을 쌓고 입구 위쪽에는 특이하게도 삼각형으로 만든 천장마감 방식까지 갖추고
있던 미케네인들의 건축술이 놀랍기만 하다. 널길의 길이는 어림잡아도 30여m, 폭은 6m가 넘어 보이고 이 톨로스의 정면에 높이가 5m, 폭이 3m인 출입문이 있다..더욱
놀라운 것은 출입문의 육중한 돌을 깎아 만든 상인방(가로대) 위쪽에
삼각형 모양으로 벽돌을 쌓은 것은 디자인적 요소도 있지만 입구 부분이 받아야 할 상단의 무게를 좌우로 분산시키는 기능까지 고려한 것이라니 그저
고대인들의 지혜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무덤 입구에 있는 아트레우스의 무덤 안내도.
우선 미케네 문명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2천년대에
그리스 남부 각지에는 소왕국이 여러 개 건설되었다. 미케네, 오르코메노스, 필로스 등등. 이들은 기원전 1600년
그 세력이 팽창하여 남쪽에 있는 크레타 문명과 맞설 정도로 커졌다. 미케네는 크레타가 붕괴된 후 지중해
각 지역과의 교류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 두 국가가 구축한 왕궁의 구조로 볼 때 크레타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도 있던 관계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반면 미케네는 내륙에 위치한 특성상 외세의 침입이나 재해에 대비하여 폐쇄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리스 전설에 따르면 미케네 인들은 강력한 적수였던 도시국가 트로이를 두
번이나 패퇴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청동기 말기에 해당하는 이들의 문명 역시
기원전 1180년 경에 멸망한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철제무기를 사용하던 도리스인들에 의해 멸망했다는 설과 일종의 자연재해, 지진이나 가뭄과 같은
급격한 기후변화로 쇠퇴했을 것이라는 가설도 제기되고 있다.


멀리 밖에서 볼 때는 작은 동산처럼 보였는데 직선으로 뻗은 널길 양면으로는 직육면체의
육중한 바위를 다듬어 만든 돌벽돌을 수직으로 쌓은 석벽이 있다. 널길을 걸어 입구로 들어서면 거대한
원뿔 모양의 웅장한 천장 아래로 탁 트인 공간이 펼쳐진다. 마치 거대한 벌집 모양의 원형 지붕이라고
누군가 표현했는데, 이 무덤의 구조는 돌벽돌을 내쌓기로 반구형으로 쌓아 올리고 맨 꼭대기에서 커다란
돌 하나로 마감함으로써 밀폐된 공간을 만들어낸 구조이다.
수천 년 전에 건축술이나 기하학의 학술적 지식이나 측량술도 없이 이런 규모의 궁륭묘를
만들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호기심이 발동해 몇 개 층으로 이루어졌나 해서 세어보니 총 33열로 쌓아 올렸고 정확한 규모는 모르겠으나 발걸음으로 어림해 보니 바닥의 지름이 가로 세로가 15~6m, 높이 역시 그 정도는 되어 보인다.
게다가 입구 위쪽의 삼각 모양 아래쪽을 수평으로 떠받치고 있는 석재는 그 무게가 무려
120톤이나 된다고 하는데 당시의 기술로 이런 대공사를 해냈다는 사실에 절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이렇게 생긴 토로스(tholos) 안에는
신분이 높은 귀족들이 앉은 자세로 묻혔다고 한다. 시신과 함께 황금가면, 각종 금붙이, 보석이 박힌 무기 등도 함께 묻는 관습이 있었다고
함.
미케네 유적을 처음 발견했을 당시에는 이 무덤이 바로 전설 속에서의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가멤논의 무덤이고 여기서 나온 황금 가면과 기타 부장품이 그의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후에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아가멤논의
아버지인 아트레우스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무덤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도 아트레우스의 보고(TREASURY OF ATREUS)라는 표기가 되어 있다.

아트레우스의 무덤을
나서서 도로 건너편을 바라보니 작은 산 전체를 빙둘러 커다란 성터가 눈앞에 펼쳐졌다. 성 안에 들어섰던
옛 건축물들은 세월과 함께 무너지고 파괴되었지만 왕궁을 둘러싼 성은 수천 년이 흐른 지금도 늠름했던 옛 자취를 엿보게 한다.
이 미케네성을
좌우로 거대한 산이 천애의 요새처럼 에워싸고 있다. 성 입구를 기준으로 좌측에 프로피티스 일리아스, 우측으로는 사진에 보이지 않지만 사라 산이 가로막고 있다.
가이드는 왕궁터
탐사 전에 이곳에 있는 박물관부터 관람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서 일행을 박물관으로 안내했다. 이곳 무덤과
미케네 유적지에서 발굴한 수많은 보물과 금붙이 중 희귀한 부장품들은 아테네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으로 옮겨져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지만 이곳에도 일부
부장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박물관에 놓인 미케네성 입체 조감도. 성 아래쪽으로 보이는 것은 일반 민가가 있던 자리, 좌측 위로는 귀족들의 매장터와 물 저장소가 있었다고 한다.

간단한 문양이 새겨진 초기의 도기와 위쪽으로는 프레스코화도 보인다.

다양한 모양의 장신구와 술잔도 보인다.

투구와 술잔.

망자에게 씌웠던
데스가면(death mask)과 술잔, 장신구 등의 출토품.

다양한 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도기 또한 출토되었다.

자수정 빛의
투구 인장들

도끼 모양의 무기.
각종 장신구들과
위쪽의 프레스코화. 프레스코는 인류의 회화사에서 가장 오래된 표현의 형태로 기원전 3천년 미노스 문명의 중심지인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벽화가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졌고 아마도 미노스 문명을 계승한
것이라 추측된다.
중요한 유물은
아테네 박물관으로 옮겼다더니 이곳에 소장된 망자의 부장품들은 그 숫자도 많지 않거니와 좀 소박한 느낌이다. 박물관
탐험은 이 정도로 끝내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미케네 유적지를 둘러볼 차례이다. 성 안의 모든 건축물은
파괴되었지만 토대만 남은 성곽 안에서 화려했던 옛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보고 싶다.

성으로 들어가는
길 좌우로 우람한 돌들을 다듬어 쌓은 성곽이 보인다.

미케네성 입구의
사자의 문(Lion Gate) 안내 표지.

잠시 인파를
피해 사자의 문 앞에서 한 컷.
성문 위의 사자상
머리 부분은 황금으로 조각하여 권위를 상징했다고 한다. 기원전 124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 성문의 구조는 높이 2m의 육중한
바위를 깎아 세운 좌우의 돌기둥 위에 상인방을 얹고 그 위에 사자 두 마리가 좌우에서 앞발을 제단에 얹은 채 머리와 등으로 양면의 성벽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사자와 제단은 큰 돌을 다듬어 돋을새김으로 조각해낸 구조이다.

<미케네성 안의 사진은 다음주에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