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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22 (예루살렘의 슬픔)
성경본문 : 예레미야애가 1: 1-22
1.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2.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3.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저가 열방에 거하여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4.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이 황적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저도 곤고를 받았도다
5.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6.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저의 목백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이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 같도다
7.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지나 돕는 자가 없고 대적은 보고 그 황적함을 비웃도다
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 같이 되니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 여김이여 저가 탄식하며 물러가도다
9.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게 낮아져도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10.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을 금하여 주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사오나 저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12.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찌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렘18:16
13.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베푸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고적하여 곤비케 하셨도다
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케 하셨음이여 내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붙이셨도다
15. 주께서 내 지경 안 모든 용사를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소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도다
16.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면에 있는 자를 명하여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저희 가운데 불결한 자 같도다 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근심을 볼찌어다 나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성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도다
20.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번뇌하오니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으로는 칼의 살륙이 있고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
21. 저희가 나의 탄식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고 나의 모든 원수가 나의 재앙을 들었으나 주께서 이렇게 행하심을 기뻐하나이다 주께서 반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 저희가 나와 같이 되겠나이다
22. 저희 모든 악을 주 앞에 나타내시고 나의 모든 죄악을 인하여 내게 행하신 것 같이 저희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곤비하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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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관지 목사
1. 슬프다. 이 성이여: 무엇을 슬퍼할 것인가? (애 1: 1∼2)
우리는 때때로 "나 홀로 심령부흥회"를 가져야 합니다.
"나 홀로 심령부흥회", 무슨 뜻입니까?
부흥회를 하면 우리는 모여서 손뼉치며 찬양하고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강사의 말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목욕탕에 가면 "온탕과 냉탕에 번갈아 들어가면 좋습니다"라고 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말한 부흥회는 "열탕(熱湯) 부흥회"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묵상하고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에 힘쓰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피정(避靜)이라고 부릅니다. "냉탕(冷湯)부흥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받는 은혜가 더욱 큽니다. 음식도 고급 음식은 약한 불에 천천히 익히지 않습니까?
예레미야에 이어 예레미야 애가를 강해합니다.
애가는 "슬픔의 노래"입니다. 원래 이 노래에는 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서의 부록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을 편수할 때 시작되는 말, "슬프다"를 따서 애가라고 했습니다. 히브리말로는 "애카하!"입니다. "애카하"와 우리말 애가, 음이 비슷합니다.
"슬프다"라고 번역된 "애카하"는 정확하게는 "어찌하여!" 이런 뜻입니다. "오호라!" 이런 뜻입니다. "아이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심한 슬픔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기가 막혀 어쩔 줄 몰라하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멸망한 것을 보고 이렇게 슬퍼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요시야 왕이 죽었을 때 예레미야가 그것을 슬퍼하면서 지은 노래이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슬퍼하는 노래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멸망당하고 파괴당한 모습이 이 노래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슬픔은 우리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까? 우리는 구경꾼처럼 예레미야가 슬퍼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까?
이산가족들이 만났을 때 처음에는 온 국민이 함께 울고 웃었습니다. 여러 번 만나니까 그런 면이 많이 식었습니다.
텔레비전으로 이산가족들이 만나서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듯 예레미야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됩니까?
아닙니다. 예레미야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슬퍼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슬퍼해야 합니까?
먼저 자신의 죄를 생각하며 슬퍼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앞에 서서 화장도 고치고 넥타이도 고쳐 맵니다. 그런데 영혼의 거울 앞에는 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영혼의 거울이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뿌애지고 흐려졌습니다. 잘 보이지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영혼의 거울을 닦고 그 앞에 서야 합니다.
영혼의 거울에 나를 비춰보면 어떤 모습이 보입니까?
죄인으로서의 내 모습이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거울 엉터리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 우리는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죄에 대해서 약한 존재인가?" "나는 죄에 대해 늘 패배하는구나!" "이 죄의 결과로 나는 멸망당할 수밖에 없을 텐데 어찌란 말인가!"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생각하며 시편 51편에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3절)라며 슬퍼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절)고 슬퍼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죄 문제를 생각하면 다윗처럼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애카하!", "슬프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죄 문제를 생각하며 애가를 부르는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이웃의 죄를 생각하며 슬퍼해야 합니다.
내 가장 가까운 이웃이 죄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당할 것을 생각하면서 슬퍼해야 합니다. 애가를 지어 불러야합니다. 이 슬픔이 없다면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은 여러 군데 나와도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이 성경에 왜 없을까?
인류의 죄를 짊어진 대 제사장으로서 인류의 죄 문제를 생각하면 예수님은 웃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생각하며 슬퍼하고 이웃의 죄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사람을 두고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나의 죄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가운데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복입니까?
구원의 복입니다. 믿음이 자라는 복입니다.
2. 유다는 사로잡혀 갔도다(애 1: 3∼5)
4절에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의인법(擬人法)이지요. 시온의 도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로들, 예루살렘 안의 도로들을 말합니다. 특별히 성전으로 가는 도로들을 말합니다. 이 도로들이 왜 슬퍼합니까?
예배를 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제사 드리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이 도로가 메어 터졌습니다. 특별히 유월절과 같은 절기가 되면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기 때문에 시온의 도로는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거의 포로로 잡혀가고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예배 드리러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온의 도로가 조용해졌습니다. 쓸쓸해졌습니다. 잡초가 우거졌습니다.
시온의 도로가 이것을 슬퍼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로 향한 길이 슬퍼하도록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로 향한 길이 성도들로 꽉 차게 해야합니다. 그럴 때 도로들도 기뻐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새벽기도회에서 초종(初鐘)을 치고 나가서 성도들을 기다립니다. 이제는 교인들 가운데서도 초종이 뭔지 모르는 분들도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교회마다 큰 종을 매달았습니다. 처음 개척해서 종을 달 여유가 없는 교회에서는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대포를 쏘면 큼직한 탄피가 남습니다. 그걸 매달아 놓고 종 삼아 두드렸습니다. 산소 통을 달아놓고 두드리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대개 예배 시작 30분 전에 종을 칩니다. 이것을 초종(初鍾)이라고 부르지요. 교인들이 대부분 교회 주변에 살았으니까 "이 종소리 듣고 어서 교회에 오시오"하는 뜻입니다. 예배 시작 직전에 치는 종을 재종(再鍾)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때 교회는 가난했지만 순수했고 열심히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그 때의 순수함과 열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순절이 순수한 믿음과 열심을 회복하는 절기가 되기 바랍니다.
이 목사님, 교회 앞의 길을 열심히 바라봅니다.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도로가 조용합니다.
어느 날 눈이 왔습니다. 길에 눈이 소복하게 쌓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큰길에서 교회로 연결되는 길 위를 왔다갔다했습니다. 길 위에 발자국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왔다갔다하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길에 예배 참석하는 성도들, 새벽기도회 오는 성도들의 발자국이 이렇게 많이 찍히게 해 주십시오", 이 목사님은 그 날 새벽기도회를 길 위에서 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담당하는 교회는 점점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동대문에 있는 중앙성결교회를 오래 담임하셨고 지금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으로 계시는 이만신 목사님의 목회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면서 "하나님, 이 길이 슬퍼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이 길이 예배 드리러 오는 사람들로 꽉 차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 오는 사람들 때문에 이 길이 두 배로 확장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유소에서 우리 교회 앞으로 해서 저 위에 고기리로 올라가는 길, 고기리에 음식 먹으러 가는 사람들이 탄 차가 많아서 확장해야 한다는 소리가 많지요. 목양교회에 영의 양식 먹으러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우선 목양교회 앞까지 만이라도 확장해야하겠다는 여론이 일어나기 바랍니다.
"악이 왜 세상을 지배하는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왜 잘 되는가?"하는 것은 보편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5절은 그 대답 가운데 하나를 들려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죄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를 많이 지으면 악이 머리가 되어 세상을 지배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 악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우리가 부족하고 우리가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죄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도 죄요, 알지 못하고 저지르는 잘못도 죄요, 알고 짓는 것도 죄입니다. 그와 함께 마땅히 해야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빛으로 살지 못하고 소금으로 살지 못하는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램프를 주셨습니다. 이 램프에 불을 켜서 주변을 밝게 만들지 않으면 그것도 죄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이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삼일운동 때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분들이 신석구(申錫九)라는 감리교 목사님을 찾아와서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 되어 독립선언서에 서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신 목사님은 기도하고서 대답하겠으니 기다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하나의 정치운동입니다. 목사인 내가 이 정치운동에 가담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강토를 네 대에 이르러 너희들이 부족하여 일본 사람들에게 빼앗긴 것은 죄다.", 그래서 신석구 목사님은 확신을 가지고 응낙을 했습니다.
신 목사님을 존경하는 분이 말렸습니다. "목사님, 일본이 얼마나 강한데 사람들이 만세 부른다고 우리 나라가 독립이 되겠습니까? 그만 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때 신석구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독립을 거두러 가는 것이 아니라 독립을 심으로 가노라"
우리 교회는 지금 부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여러분 부흥을 심는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5절 끝 부분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혀 갔도다", 어른들이 죄를 지으면 어른들만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혀 갔도다", 이 말에는 예레미야의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첫째는 "어른들 때문에 어린 자녀들도 고생하는구나!" 하는 안타까움입니다.
그 다음에는 "저 아이들이 신앙을 잃어버리기 쉽겠구나!" 하는 안타까움입니다.
어린 세대는 새 환경에 금방 동화되어 버립니다. 지금도 이민을 가면 어린이들은 금방 이민간 나라의 말을 하고 그곳의 어린이들과 사귑니다. 쉽게 적응하고 쉽게 동화됩니다.
'어린 자녀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갔으니 거기서 바벨론의 우상들을 섬기고 바벨론 전통을 따르겠구나!' 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어른 세대들은 어른 세대의 잘못 때문에 어린 세대가 잘못된 신앙의 길로 들어서는 일 없도해야 합니다.
교회 오는 도로들이 기뻐하게 만들고 맡겨진 사명을 다해 악이 지배하지 않게 하고 우리들 때문에 어린 자녀들이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어야겠습니다.
3.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애 1: 6∼9)
예레미야 애가는 슬픈 노래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탄식하는 아주 슬픈 노래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애가에는 하나님을 향한 기원이 여기저기 나옵니다.
9b: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11b: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20a: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21b: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이렇게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기 때문에 예레미야 애가는 슬픈 노래이기는 하지만 가장 슬픈 노래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다면 최고의 비극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 것,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없는 것이 제일 큰 비극입니다.
욥을 보세요. 재물을 다 잃었습니다. 자녀들을 다 잃었습니다. 건강을 잃었습니다. 아내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잃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욥은 이전보다 더 큰 축복을 받습니다.
다니엘을 보세요.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단6: 10).
하나님은 다니엘을 여러 가지로 축복하셨고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 3)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 그대로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고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이라는 유대인 정신병리학자가 있었습니다.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는 신앙요법이라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는데 빅터 프랭클은 의미요법이라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의 정신적인 질병, 심리적인 질병은 어떤 경우에든지 의미를 찾으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박해할 때 빅터 프랭클도 체포당해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가진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아내가 먼저 사형을 당했습니다. 옷도 다 빼앗기고 낡은 죄수복 하나가 주어졌습니다. 끝까지 보관하려던 연구 메모가 있었는데 그것도 빼앗겼습니다.
프랭클은 뒷날 이 때의 일을 돌아보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치는 나에게서 모두 빼앗아간 것 같아 보였지만 하나 빼앗지 못한 것이 있다.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선택하는 자유이다. 의미를 다 잃어버리고 주저앉느냐, 아니면 의미를 찾느냐 선택하는 자유는 빼앗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도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프랭클 박사가 한 유명한 말이 있지요. "나는 그래도 인생을 긍정한다. 인생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 묻기 전에 내가 인생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먼저 묻겠다"
예레미야 애가 곳곳에 나오는 이 기원들은 모래 속에 묻혀서 반짝이는 금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거친 바다의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등대와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떤 경우이든지 기도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 망가(望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소망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재물은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은 것은 많은 것을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기도를 잃은 것을 정말 모든 것을 잃은 것이 됩니다.
여러분, 기도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이렇게 비참하게 된 원인을 8절에서 간단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이미 5절에서 같은 말을 했지요.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음으로",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요즘 통일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예레미야와 같은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분단된 것은 우리의 범죄함 때문이요"
"우리가 이렇게 반세기가 넘도록 통일되지 못하고 있음은 우리의 죄가 많기 때문이요"
이산가족들이 울부짖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비극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요"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죄에 대한 고백은 경의선보다 더 튼튼하게 남북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합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돌보지 않습니다.
어떻게 됩니까? 예루살렘의 모든 영광이 떠나갑니다. 6절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는 그것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영광이 떠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6절, 지도자들이 도망갑니다.
7절,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합니다. 돕는 자가 없습니다. 대적들이 그의 멸망을 비웃습니다.
8절, 조소거리가 됩니다. 전에 영광 돌리던 모든 사람들이 업신여기게 됩니다.
9절, 더러운 것이 옷깃에 묻어 있어도 앞날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놀랍도록 낮아져도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게 됩니다.
여러분, 죄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개인에게나 가정에나 국가에나 그 시대에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7절 앞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이제 예루살렘의 영광, 열국 중에 크던 모습, 열방 중에 공주 같던 모습은 회상 속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모습이 과거의 것이 아니라 오늘의 것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일을 잊지 않아 애가가 변해서 소망의 노래가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죄의 고백과 회개와 사죄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가운데 축복 받는 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 바랍니다.
4. 나는 비천하오니(애 1: 10∼11)
예레미야는 성전에 바벨론 군대가 들어온 것을 슬퍼합니다. 신명기 23장에는 이방인들은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군대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게 된 성소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제사 드리러 성전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 있는 보물들을 빼앗기 위해서 성전에 몰려들어온 것입니다.
성전을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거룩한 성전에 이방인들의 군대가 짓밟고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셨을까요?
바벨론의 군대가 성전에 밀려들어올 때 벼락을 처서라도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면 바벨론 군대도 "아, 여호와는 위대한 분이로구나! 그를 섬기는 성전은 거룩한 곳이로구나!" 알게 되었을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욱 그랬을 텐데 왜 성전이 파괴되고 약탈당하는 것을 방관하셨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 성전 건물이 우리를 지켜 주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서 성전 건물이 이방인들에게 약탈당하고 파괴되는 것을 방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전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전 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성전 건물은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단히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언자들은 그것을 심하게 공격했습니다.
여기에 좋은 그릇이 있습니다. 여기에 좋은 음식이 담겨야 그 그릇이 제 값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좋은 골동품 도자기가 있는데 주인이 그 도자기의 가치를 모르고 간장을 담아놓았다면 그 도자기는 간장 그릇이 됩니다.
음식을 담았는데 썩은 음식을 담았으면 그 그릇에서는 냄새가 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이라는 좋은 그릇에 형식적인 제사라는 썩은 음식을 담아놓고 그릇 자랑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성전이라는 그릇이 깨지는 것을 방관하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성전 건물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성전이 차도록 해야 하고 이 성전에서 신령과 진정의 아름다운 예배가 드려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성전건물만 자랑하는 것은 성전우상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성전에 이방인인 바벨론 군대가 들어온 것을 슬퍼했습니다. 성전에 들어와서는 안 될 것이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교회에는 들어와서는 안 될 것이 들어온 것은 없습니까?
보면 들어와서는 안 될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들이 들어왔습니다. 경건하지 못한 행동과 주장들, 세상 풍조, 정통에서 어긋나는 사상들, 이런 것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그런 것들을 물리쳐 교회가 본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찾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에 양식이 떨어져서 사람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을 말하고 11절 끝에서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같이 드려야 할 간구입니다.
욥은 큰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 항의도 하고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끝에 가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욥기 42장 3절과 4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자기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는 자,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욥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의롭게 살았습니다' 할 때 회복시켜 주지 않고 자기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고백할 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처음에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일이 있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곧 무엇이라고 합니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며 순종합니다(눅2: 38).
그리고 마리아의 찬가라고 불리우는 누가복음 1장 46절 이하에서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고 노래합니다. 이 말은 "나는 비천한 여종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귀하게 사용하여 주셨습니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잘 났습니다. 나는 이런 재주가 있습니다. 나는 이런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내 세우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을 돌보십니다.
눅18: 9 이하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나 잘 났소"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세리는 "나는 비천합니다"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까?
오늘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5.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애 1: 12∼15)
오늘 말씀을 「표준 새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길 가는 모든 나그네들이여 이 일이 그대와는 관계가 없는가?
주께서 분노하신 날에 내리신 이 슬픔,내가 겪은 이러한 슬픔이,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주께서 저 높은 곳에서 불을 보내셔서 내 뼈 속 깊이 들어가게 하시고,내 발 앞에 덫을 놓아서 걸려 넘어지게 하셨으며, 나를 폐인으로 만드셔서 온종일 힘이 없게 하셨다.
주께서 내가 지은 죄를 묶고 얽어서 멍에를 만드시고 그것을 내 목에 얹어서 힘을 쓸 수 없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내가 당할 수 없는 사람의 손에 넘기셨다.
주께서 내 청년들을 무찌르시려고 내게서 용사들을 모두 몰아내시고,나를 칠 군대를 일으키셨다.
주께서 처녀 유다를 술틀에 넣고 짓밟으셨다".
예레미야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라고 묻습니다.
정답은 "없다"입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고통이 그만큼 큽니다. 다른 민족이 겪지 않는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있을 수도 있다"라고도 대답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와 같이 유난히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인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죄를 범하면 죄를 믿지 않는 백성이 죄를 범한 것보다 더 크게 벌하십니다.
사무엘하 7: 14를 보면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라는 말씀이 있고 잠언서 13장 24절에는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범죄하면 이스라엘이 받은 것과 같은, 아니 그 이상으로 무서운 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주는 말은 12절에 나오는 "나의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고통은 곧 자신의 고통이었습니다.
좀 심한 이야기이지만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파괴된 것을 보고서 기뻐할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그렇게 열심히 말했는데도 내 말 듣지 않고, 오히려 나를 때리고 잡아 가두고 하더니 내 말대로 이렇게 당하지 않느냐? 쌤통이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내 말 듣지 않으면 이렇게 되! 알았지? 앞으로는 내 말 잘 들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이 겪는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며 "나의 고통"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겨야합니다.
민족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겨야합니다.
나가서는 방글라데시, 소말리아, 에디오피아, 기아지역 주민들의 고통도 나의 고통으로 여겨야합니다.
목사는 성도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겨야 하고, 지역장님들은 지역에 속한 성도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겨야 하고, 속장님들은 속도원들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겨야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의 예수님의 태도를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 그가(마리아)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요11: 33), 나사로의 죽음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생각하면서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12: 27) 괴로워하셨습니다.
오래 전에 들은 어느 목사님의 간증을 지금도 은혜롭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어려움을 만난 분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분, 병든 분, 자녀가 문제를 일으킨 분, 목사님은 새벽마다 이 문제들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무개 장로님이 사업에 실패했습니다. 그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일어서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무개 권사님이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고통을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무개 집사님이 자녀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의 고통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응답의 확신도 없고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이유를 깨닫고 기도의 내용을 바꿨습니다.
"하나님, 아무개 장로님이 사업에 실패했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의 종인 제가 심히 괴롭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 문제를 해결해 주옵소서. 아무개 권사님이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심히 괴롭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의 이 고통을 덜어 주옵소서" 이상하게 문제들이 빨리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하겠습니다.
속장님들도 속도원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이라고 부르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속 부흥할 것입니다.
새 학기가 되면 수험생들 명단을 작성합니다. 이름, 부모의 이름, 어느 교구, 그 다음에 어느 계통을 지망하고 언제 기도 받고 계속 적어나갑니다. 강단에 올라올 때 들고오는 홀더에 그 명단을 들고 올라옵니다.
나중에 빨간 펜으로 "어디 합격", 이렇게 적을 때 참 기쁩니다. 2001학년 수험생 명단을 어제 빼내서 파일에 넣었습니다. 이제는 2002학년도 명단을 작성해서 기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주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6.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애 1: 16∼19)
예레미야애가서는 중간 중간에 짧고 강한 메시지들을 품고 있습니다. 18절 시작부분도 짧고 강하면서 깊은 교훈을 품고 있는 단정적인 메시지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이 말은 예레미야의 지금 처지에서 나오기 어려운 고백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다 파괴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잡혀가고 일부 남은 백성들은 양식을 구하지 못해 쩔쩔 맵니다. 그 한 가운데 서서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여호와는 지나치시도다"라고 하기 쉽습니다.
심지어는 "여호와는 잔인하시도다"라고 하기 쉽습니다.
"여호와는 무력하시도다" 할 수도 있고 "여호와는 믿기 어렵도다"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지만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겪는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은 과연 의로우신 분인가?" 하는 질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면 이 세상에 모순된 일이 이렇게 많은가?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면 왜 악한 사람들이 잘 되고 선한 사람들이 고생하는 일을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는가?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면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이것을 간단하게 줄여서 "Why m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3월 4일 홍제동에서 일어난 화재를 진화하기 위해 출동했던 소방관 가운데 여섯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가운데 김기석이라는 소방관이 친구에게 보낸 E-Mail 내용이 공개되어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나는 몸을 던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내 직업을 성직으로 여긴다", 이렇게 사명감에 투철한 소방관이라면 오랫동안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켜 주어야지 그렇게 일찍 불러간단 말인가?
이런 질문은 성경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3대 제자인데 하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는 왜 일찍 순교하게 하고 요한은 끝까지 살아남게 하셨을까?
많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먼저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이것을 전제하고서 그 문제의 답을 찾아야합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전체가 흔들립니다.
군인들이 정열을 할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한 사람이 자리를 잡고 "기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중심으로 횡대로, 혹은 종대로 줄이 질서정연하게 이뤄집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이것이 움직이지 않는 기준이 되어야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이치들이 질서정연하게 제 자리를 잡습니다.
"나는 의로운데"하면, 나를 기준으로 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욥이 그런 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는 답이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욥기 1장에서 37장까지, 아무리 울부짖어도 답이 얻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못 하실 일이 없고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을 압니다", 말을 바꾸면 "여호와는 의로우십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욥기 42장에서 당장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 없습니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1: 7)라는 말씀에 따라 열심히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은 왕이고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너희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라고 합니다. "내가 좀 더 강력하게 말씀을 선포했더라면…"하는 자책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쉰들러가 최선을 다해 유대인들을 도와줍니다. 자기의 재산을 다 써가며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해 줍니다. 독일이 패망하고 쉰들러가 피신하게 될 때 그는 남은 자동차라든가 몇 가지를 돌아보면서 "저것들도 팔았으면 유대인들의 목숨 몇은 더 구할 수 있었을 덴데…", "이것도 팔았으면…"합니다. 그 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김교신(金敎臣)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우리 나라에서 무교회주의 운동을 시작한 분입니다. 양정고등학교 박물 교사(동물·식물·광물·지질학 따위의 총칭)를 지냈는데 양심적인 교사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마라톤 선수 손기정, 서울농대 교수를 지낸 유달영 박사 등이 이 분의 제자들입니다.
힌 번은 시험을 치는데 김교신 선생님이 감독으로 들어왔습니다. 학생들이 커닝을 했습니다.
커닝을 해도 선생님이 가만히 있습니다. "아, 선생님이 모르시나 보다" 또는 "선생님이 눈 감아 주시나 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커닝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가 분위기가 이상해서 눈을 들어 선생님을 보니 선생님은 커닝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목이 메어서 한 마디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쳐서…" 하고는 흐느껴 우셨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뒤로는 커닝을 절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추도문을 모은 김교신 선생님 추도집을 보면 이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 부끄러운 일들이 참 많이 얼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나?"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보도됩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내가 전도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이 한 마디 말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안 풀리던 문제들이 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7. 여호와여 보시옵소서(애 1: 20∼22)
기도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무엇을 간절하게 구하는 간구의 기도가 있고 원망의 기도도 있고 불평의 기도도 있고 회개의 기도도 있고 자복의 기도도 있습니다. 오늘 이 기도는 자복이 기초가 된 기도입니다. 20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21절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그 다음에 호소도 하고 간구도 합니다.
20절 앞부분을 「표준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주님, 나의 절망을 살펴 주십시오 애간장이 다 녹습니다.내가 주님을 얼마나 자주 거역하였던가를 생각하면,심장이 터질 것 같이 아픕니다.
"내가 주님을 얼마나 자주 거역하였던가를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아픕니다.",
우리도 이 사순절에 "내가 과연 주님을 얼마나 자주 거역하였나?"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아픔을 가져 보아야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너무나 자주 거역했던 것을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라고 했습니다. 심장질환을 앓아본 일이 있는 분들은 심장 아픈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아실 것입니다. 마치 면도로 생살을 가르는 것 같이 아픕니다.
세상에는 아픈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아픔도 있습니다. 아기를 낳기 위한 진통, 필요합니다. 주사를 맞을 때 아프지만 그래야 병이 낫습니다. 자녀가 주사 맞을 때 "애야, 하나도 안 아프단다"해서 맞게 하는 부모도 있고 "애야, 아프지만 참아야 한다. 그래야 병이 낫는단다" 하는 부모도 있는데 "애야, 아프지만 참아야 한다. 그래야 병이 낫는단다" 하시기 바랍니다. "애야, 하나도 안 아프단다"해서 안심하고 팔을 내밀었는데 따끔 아프면 아이는 부모를 불신하게 됩니다.
청소년들이 쑥쑥 자랄 때 근육 마디가 쑤시고 아픈 경우가 있습니다. 성장통(成長痛)이라고 부르지요. 어떤 조직이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성장할 때 아픔을 겪는 일이 많습니다.
이런 아픔들은 필요한 아픔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겪은 아픔, 없어서는 안 될 아픔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내가 주님을 자주 거역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갖는 아픔이 있어야겠습니다. 이 아픔은 필요한 아픔이고, 경건을 이루게 하는 아픔이고, 고상한 아픔입니다.
이런 아픔은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더 간절해지게 만듭니다.
고생하지 않고 자란 사람이 큰일하기 어려운 것 같이 이런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은 신앙적으로 큰일을 하기 어렵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바늘 뭉치 같은 것으로 피부를 꾹꾹 지르고 있는 환자를 보았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신경무력증이라고 피부가 감각을 잃어버리는 병에 걸렸습니다. 아픈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픈 것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축복이로구나!' 깨달았습니다.
나환자들은 피부가 감각을 잃어 다쳐도 아픈 줄 모르고 손가락이 하나 떨어져 나가도 아픈 줄 모릅니다. 우리는 영혼의 나환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예레미야, 참 옹졸하다"하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를 비웃는 사람들도 내가 겪고 있는 것을 겪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자기 혼자서 고통을 겪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남까지 끌어들여?'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옹졸한 마음으로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했을 때 주변 부족들은 그것을 기뻐하고 조롱했습니다. 모압, 암몬, 블레셋, 이런 이방 족속들입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방민족 같이 행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우리는 탄식하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서 위로해 주어야합니다.
찬송가 373장 가사를 아시지요?
이 찬송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뇨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 소리 뿐일세",
이 찬송가는 이렇게 끝납니다.
"저희 소리 들을 때 가서 도와줍시다.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이번 사순절이 사람들의 탄식 소리를 듣는 기간이 되기 바랍니다. 전에는 탄식소리를 들으면서도 무관심했거나 못들은 척했거나 오히려 조롱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이번 사순절에는 크게 듣고 찾아가서 위로해 주어야겠습니다. 사순절에는 선행과 구제에 힘쓰게 되어 있습니다.
21절 중반절,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이렇게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남이 재난 당하는 것을 보면 동정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를 위한 중보의 기도를 해야합니다.
"주님, 저들을 재난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중보의 기도를 해야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 20절에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참 따르기 어려운 말씀이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시험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 34) 하심으로 이 기도를 이루셨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내가 주님을 배반한 일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 아픔을 느끼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탄식 소리 듣고, 재난을 보고 위로하고 도와주기 바랍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