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5: 6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 - 히 5: 7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히 5: 6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 -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
1]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저자는 앞 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더 우월하신 대제사장이심을 논증하기 위해 시 110: 4을 인용하고 있다.
2]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멜기세덱(Melchizedek)은 의의 왕이라는 뜻이다. 다윗보다 수십 세기 이전의 인물로 고대 살렘(예루살렘의 옛 이름)의 왕이요 제사장으로서 성경역사에서 갑자기 출현하여 아브라함에게 예물을 받고 축복을 베푼 신비스런 인물이다.
* 창 14: 18-20 -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구절에서 '반차'라는 원어(탁시스 tavxi)는 '반열, 특질'이라는 의미이다.
시편 본문에 나오는 원어(디브라)는 '모습'이라는 뜻이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말은 ‘멜기세덱의 특질을 가진 혹은 그 모습을 좇는 제사장’ 즉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카타 텐 탁신 멜키세덱)은 멜기세덱계열의 제사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멜기세덱과 같은 형태의 제사장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에게는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Morris, Moffatt, Hewitt).
성경은 이 같은 멜기세덱의 신비하고 독특한 신분에 근거하여 영원한 왕이며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로 삼았다. 히브리의 저자는 예수가 영원한 제사장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시편의 이 구절을 인용하였다.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은 다음과 같은 유사성을 지닌다.
그 리 스 도 | 멜 기 세 덱 |
존재의 시작과 끝이 없음(요 8: 58 계 1: 4) |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음(7: 3) |
대제사장이시며 만왕의 왕이심(계 19: 16)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면서 살렘 왕임(7: 1 창 14: 18) |
생명의 떡과 포도주로 예표되는 자신의 몸과 피를 인류의 대속물로 주심(마 26: 26-29) | 아브라함에서 떡과 포도주를 줌(창 14: 18) |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레위 지파를 좇는 제사장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제사장이 되심(5 절) | 레위 지파 이전의 인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됨(7: 1) |
저자는 이러한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의 유사성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더 우월하신 존재임을 논증하고 있다.
아론계통의 대제사장은 오로지 제사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는 제사장이며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로서 훨씬 더 우월하시다(Bruce).
히 5: 7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는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일을 가리켰다고 본다.
그 일에 대하여 누가복음 22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눅 22: 41-44).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의 신비를 증언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우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인성(人性)을 가진 사람이시다.
예수께서는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셨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는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간절히 눈물과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다는 말씀이나,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심을 인해 들으심을 얻었다는 말씀은 참으로 신비하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것은 신비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경이 증언하는 바이다.
1]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본 절은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음을 시사한다(2: 14-18).
'육체'(사르코스)는 '살'을 뜻하는 말로서 '영'과 반대되는 물질적인 육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연약성을 지니셨으며 인간이 느끼고 당하는 감정이나 어려움을 똑같이 느끼시는 대제사장이심을 시사한다. (4: 15, Bruce).
2]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본 구절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 중 겟세마네에서 드린 고뇌에 찬 기도 장면에 대한 묘사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Bruce, Robertson, Hewitt)
* 눅 22: 39-46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다(마 26: 36-46; 막 14: 32-42) -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셨을 때이다. 그 때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자기 한 몸에 짊어져야 한다는 깊은 고뇌 중에 이마에 땀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밤새워 기도 하셨다.
예수의 지상 사역 중 어느 특정한 순간에 적용하기보다는 그의 대제사장적인 사역 전체에 적용시키는 것이 타당하다(Lane, Maurer, Morris).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에서 '올렸고'(프로세넹카스)는 희생 제물을 '바치다'라는 의미의 제의적(祭儀的) 용어이다(Maurer). 이것은 1절에서 언급된 대제사장의 제사와 평행을 이룬다.
대제사장이 속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물'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올린 '간구와 소원'을 의미한다(Rasco).
3]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경외하심'(율라베이아스)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 '두려움'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기도했다(Morris).
예수는 죽음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을 느끼셨으나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복하셨다.
Ⓑ '율라베이아스'가 '잘'에 해당하는 접두사' 유'와 '붙들다'(람바노)의 합성어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나타낸다(Robertson).
이 두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4]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본문은 시 22: 24의 '부르짖을 때 들으셨도다.'와 상응된다.
* 시 22: 24 -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이것의 일례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을 들 때의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 36)라는 예수의 기도가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사실상 예수의 기도의 목적은 고난의 잔을 옮기는 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었으므로 그의 기도는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 막 14: 32-36 -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하나님은 예수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Boman, Rissi, Maurer). 이 사실을 저자가 본 절에서 밝히는 이유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의 제사가 항상 받아들여진 것은 아닌 반면에 예수의 기도는 받아들여졌음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Lane).
본문은 앞에서 언급된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과 연결된다. '죽음에서'(에크 다나투)는 예수께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예수를 지배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활을 통해 죽음의 영역을 극복하셨음을 시사한다(Vos, Friedri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