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 2: 7 그리스도의 사도 - 살전 2: 8 너희를 사모하여
살전 2: 7 그리스도의 사도 -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
바울 일행은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영혼들을 위해 온유한 심령으로 자기들의 목숨까지 즐거이 줄 마음으로 일하였다.
그들은 유모가 어린아이들을 기르는 것과 같이 유순한 자들이 되었고 영혼들을 사모하고 사랑하여 단지 말로만이 아니고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주기를 즐거워하는 심정으로 일했다.
여기에 복음 사역자들에게 필요한, 중요한 또 하나의 덕이 있다.
1]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사도'(*, 아포스톨로이)는 '보냄을 받은 자', '대리자'란 뜻으로 신약 시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널리 사용되던 용어이다.
성경에서 '사도'란 말은
(1) 세례 요한 때부터 주님과 같이 한 자.
* 행 1: 21 -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 주께서 친히 임명하신 자.
* 마 3: 14 -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3) 주의 부활을 목격한 자.
* 행 1: 21 -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위의 세 가지의 용어로 사용되었으나 때때로 바나바, 주의 형제 야고보 등 넓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 행 14: 4, 14 -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 고전 15: 7-8 -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갈 1: 19 -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란 문구에서 권위를 주장한다는 뜻은 물질적 짐을 지운다는 뜻이다. 9절에서 바울 자신의 생활비 해결 방도에 대하여 말한 것을 보면 이 해석이 옳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자기의 생활비를 부담시키려 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 고전 9: 11-12 -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 고후 11: 9 -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 고후 12: 16-17 - 16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 살후 3: 8 -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바울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열중하기 때문에 자신은 잊어버린 듯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으레 쓸 수 있는 권(權)을 쓰지 않았다.
사역자는 자기 속이 썩어서 교인들에게 거름이 될지라도 마땅히 쓸 만한 권리도 쓰지 않아야 한다.
화풀이를 해야 할 경우에도 죽은 듯이 침묵해야 한다. 사역자로서 참된 자라면 지식이나 은혜 면에 있어서 일반 성도들보다 우월해야 되지만, 겸손에 있어서 교우들보다 깊어야 된다.
무의식중에라도 교만하기 쉬우니 이것을 잘 제재해야 된다.
2]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순한'(*, 에피오이)은 종에 대한 주인의 태도나 신하에 대한 왕의 태도,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와 같이 하급자에 대한 상급자의 관대(寬大)한 행동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따라서 바울과 그 일행이 존경받을 권리와 지배력의 행사를 버리고 마치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유순한'이란 말은 시내산 사본의 제 4 교정인(校正人)이 지지한다. 반면에 B, C, D, 사본들은 모두 네피오이(* ) 곧, '갓난아이들'이란 뜻을 가진 말로 표시되어 있다.
외증(外證)으로는 후자(後者)가 강하다. 만일 후자가 옳다면 그 의미는, 사도 바울이 무사기(無邪氣)하게 교제한다는 것이다. 그런 교제는 마치 젖 먹이는 어머니가 그의 어린아이를 양육하면서 뻣뻣하지 않고 아이와 동화(同化)되어 노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유순'이란 말이 적합하다. 바울이 '유순'하여 사랑의 희생을 아끼지 않음이 마치 젖 먹이는 어머니가 그의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과 같다.
3]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유모'(*, 트로포스)는 '자기'(*, 헤아우테스)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강조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자식을 위해 큰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고 특별한 사랑과 노력을 쏟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바울 자신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하여 그러한 사랑과 열정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지도하였음을 가리킨다.
살전 2: 8 너희를 사모하여 -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
1]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너희를 사모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호메이로메노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동사로서 간절한 마음의 깊이를 의미한다.
이 동사의 시제가 현재 분사형인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애정이 복음 전할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바울은 그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권해준 선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말한다.
본 절의 '목숨'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카스'(*)는 '생명', '영혼'을 의미하나 이는 한 사람의 전인격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RSV는 본 절의 '우리 목숨'을 '우리 자신을'(our own selves)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실라와 디모데를 포함한 바울 일행이 일심 단결하여 목숨을 내어놓고 전도하였음을 보여준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젖만 아니라 그의 생명까지 주기를 아까와 하지 않는다.
* 사 49: 15 -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그와 같이 바울은 그가 친히 영적으로 나은 성도들에게 생명까지 주기를 아까워 않을 정도로 그들을 사랑한 것이다.
이것이 선한 목자의 도덕이다.
* 요 10: 11 -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바울은 그의 일행이 생명을 내어놓고 복음을 전한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온화한 어조로 말한다. 사랑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장 고귀한 덕이다.
* 고전 13: 13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자기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다.
* 요 15: 13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기뻐함'의 헬라어 '유도쿠멘'(*)이 미완료 과거형인 점은 바울 일행의 희생적인 사랑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3]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 요 21: 15-17 -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그들도 이제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가니 그들에 대한 사랑이 또 다시 뜨거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