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실제적 본증 ( 15 : 29-34 )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전 15: 29 다시 살지 못하면 -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받는다는 말은 비세례교인이 세례받기 전에 죽었을 때 그의 가족이 그를 대신하여 세례를 받았던 초대교회의 한 잘못된 풍습을 가리킨 것 같으나, 그 풍습은 부활 신앙에 근거했었다. 바울은 그것을 들어 그들의 부활 소망을 증언하려 한 것 같다.
1]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여기 이른 바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몇 가지 해석을 가진다.
(1) 이것이 산 사람으로서 별세(別世)한 사람을 위하여 대신 세례를 받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런 대리적(代理的) 세례는 이단에 속하는 것이니, 바울이 그것을 인정하는 듯이 여기 관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이것은 죽어가는 자가 그의 불신(不信)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더러 예수를 믿고 세례 받으라고 한 부탁대로, 그 부탁받은 자들이 순종하여 세례 받음을 의미한다.
(3) 이것은 죽은 자들 위해서(=무덤 위에서) 세례 받음을 의미한다.
"위하여"란 말(* )이, 이 해석에 있어선, "위에서"(above)라고 생각되었다.
(4) 여기 "죽은 자들을 위하여"란 말씀이 "죽은 자들(세례받는 자신도 포함시킴)의 부활할 것을 염두에 두고"란 뜻이라고 한다.
이 해석은 "부활할 것"이란 말을 보충(補充)하는 것이나 자연스럽지 않다.
이 밖에도 학자들이 거의 30내지 40여개의 다른 해석을 이 말씀에 붙인다고 한다. 어쨌든, 세례받는 자들이 부활 소망을 가지고 받는다는 것이 바울의 염두에 있은 것은 사실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사람들이 세례받을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활 소망을 가지고 세례를 받는 것은 사실이다.
고전 15: 30 위험을 무릅쓰리요 -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
신자들이 의(義)를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는 것은 장래의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그같은 모험적 신앙(冒險的信仰)을 가짐이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1]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활신앙(復活信仰)을 기뻐하시어 그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된다.
하나님이 부활신앙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고전 15: 31 나의 자랑을 두고 -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바울의 생활이 죽음의 위험이 가득하였음을 증거한다.
그는 날마다 죽음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생활을 피하지 않는 것은 부활의 확실한 소망 때문이었다.
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종말론적 공동체
정신 물리학의 창시자 페이 나도시는 자기가 일생 연구한 정신 물리학의 마지막 결론을 이렇게 발표했다. 인생은 3단계의 삶을 살아간다. 1단계는, 계속 잠만 자는 단계. (어머니 뱃속) 2단계는, 자다 깨다 하며 사는 단계 (자기 일생) 3단계는, 잠을 안 자고 영원히 깨어있는 단계다. (내세)
▲ 좀처럼 죽음 이후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시카고 대학의 정신의학 교수 퀴블러로스 박사는 임종을 앞둔, 다시 소생할 수 없는 환자 수백 명을 인터뷰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부인→분노→타협→우울→수용(내세를 생각하며 준비)단계를 거친다고 했다. ( 참고자료 :http://blog.daum.net/ofsangela/7274950 )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마지막, 최후의 단계에 이르기 전에는 결코 내세를 실제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숨넘어갈 일이 코앞에 닥쳐야 비로소, 자기 내세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미 때가 늦는 경우가 많다. 젊어서부터 영생을 생각하고 미리 대처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았을 터인데...
신자들은 죽어서 무조건 천당에 턱걸이라도 가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턱걸이만 겨우 하려다가는, 어쩌면 탈락하기 쉽다. 내세와 상급 - 이런 부분에 많은 신학적 정립과 밀도 높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 영생의 진리 탐구에 투신한 간호사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에서 임종 환자를 담당하던 한 간호사가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어떤 환자들은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재앙으로 대하는데, 어떤 환자들은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이고, 편안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간호사는 그들의 종교를 조사해 보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대체로 죽음에 대해 초연하다는 통계를 얻었다.
‘이것은 기독교에는 분명히 죽음을 초월하는 어떤 힘이 있다’고 느끼고, 불신자였던 그녀는 그때부터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의 진리에 심취했다. 그녀는 간호사를 그만두고 외국에 가서 신학을 연구하고, 칼 바르트의 권위자가 되어서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이 진리를 전하는데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바치는 삶을 살았다. (앞으로도 이런 투신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
미국에서는 의사가, 도저히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는,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해 주는 관습이 있다. 그것은 ‘죽음을 준비하라’는 암시이다. 하루는 상속된 재산도 어마어마하게 많고, 잘 나가는 직장을 가진 한 젊은이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 종합검진을 받아보니, 의사로부터 장미꽃 한 송이를 받게 되었다. 그는 의사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 제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의사는 병원에 있는 목회자를 소개했다. “당신은 죽고 싶어도 못 죽을 수 있습니다. (지옥에서는 그렇다.) 이제부터 당신은, 과거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극심한 고통을 영원히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죽으면, 영원히 영생하는 곳으로 가든지, 영원한 형벌의 곳으로 가든지, 둘 중에 한 곳은 꼭 가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으세요!”
◑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두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간다. 그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이다. 예수님의 모든 설교와 가르침의 관점 중에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은 종말적 관점, 즉 영혼 구원을 통한 영생이다. 바울 신학의 초점도 역시 영혼 구원을 통한 영생에 있다. 인간 죽음을 넘어서 얻는 영원한 삶에 초점이 모아진다. 이런 종말적 신앙 관점을 가진 바울은, 자기 육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 31)
▲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 사도의 이 고백은 무슨 의미인가? → 신자는 오늘(매일)을,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는 뜻이다. 오늘 하루를 살아 지내온 것을 감사하며 내일 하루를 더 주시면 또 감사하고, 그 날 하루를 나의 최종의 날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심정이 바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도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하셨다. (마 6: 34)
▲ 죽음을 자랑한다.
바울은 이러한 종말론적 삶을 절망적으로 생각지 않고,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한다고 말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 31) 나는 자랑의 마음으로, 날마다 죽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순교적인 삶을 살았다. 날마다 죽는(순교하는) 삶이다.
▲ 죽음을 희망한다.
죽어야 부활하기 때문이다. 부활의 영광이 있으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고전 15장은 부활장이다. 바울의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은(고전 15: 31) 다른 의미로 날마다 산다는 뜻이다. 죽는 것 같지만, 이 길이 사는 길이요, 가장 미련한 자 같지만, 가장 지혜로운 인생의 길이다. 십자가의 도(죽음)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부활)이라. (고전 1: 18) 영원한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천국 영생과 그 상급)에 두고 이 지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기는 날마다 죽는 그런 신앙 관념으로 살아갈 때, 가장 가치 있게 살 것이다. 그래서 '죽음, 종말(준비)적 삶'은 오히려 희망이 된다.
▲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바울의 ‘날마다 죽는다’라는 표현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주님 말씀의 연장선상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나도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약속이다. 바울과 같이 날마다 죽고, 수없이 죽어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러 오는 것이다. 어제도 죽고, 오늘도 죽고, 내일도 죽고, 날마다 죽는 곳이다. 교회 생활도 그런 죽는 자세로 해야 한다.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아져서는 안 된다. 이렇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이 모인 종말적 공동체(마라나타 커뮤니티)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날에도 이 땅에 이루어지려면, 누군가 이 땅에서 한 알의 밀알로 떨어져 죽는 일이 있어야 한다. 바울처럼 날마다 죽겠다는 각오를 가진 사람들이 나올 때... 이루어진다.
▲ 천국 재회를 꿈꾸며 사시는 할머니
제가 타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면, 이런 일이 심심찮게 생긴다. 회중석 맨 앞자리에서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시는 할머니가 종종 계시는데, 손수건으로 계속 눈물을 훔치시니 ‘큰 은혜 받으시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면 이러신다. “목사님을 보니, 죽은 우리 영감이 생각나요. 죽은 우리 영감과 어떻게 목소리까지 똑 같아요!” 이런 할머니들은 평소의 삶에 늘 먼저 가신 영감님에 초점이 맞춰 있다 보니, 늘 비슷한 또래의 사람만 보면, 자기 영감님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 할머니처럼,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귀한 피를 흘리시며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늘 생각하면, 이 세상에 너무 연련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