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증인(證人)
사도행전 1:8, 1:22, 2:32, 4:33, 13:31,
이사야 43:12, 요한복음 1:8, 누가복음 24:48
홍제원교회. 수표교교회
舊約이샤야時, 主謂先知曰 爾是我之證人. 四十三章十至十二. 神雖自在, 不證人不能知也. 故主擇先知爲證人, 而但證之爲神而已, 至於復活不能證也.至新約時, 主復活後謂門徒曰 爾爲我證人. 눅二十四章四八. 云, 門徒目覩故云耳. 故요한證之曰 我手捫目覩者也, 요一, 一章一至三. 識見不確則不能爲證也. 故官廳有公證人, 使證其是非, 更不變易也. 至於神亦有安排證人, 此證人據新舊約, 有確信而後可以爲證也. 證不確則人不可信, 故主擇證人, 有多方訓練, 終至神感而後爲確證也. 吾儕젼도有種種失敗者何也, 卽證不確也. 使徒時代證人十二名中, 一人不足故祈禱而擇之. 行一章二十二. 由此觀之, 復活오묘故尤要證人. 主使빌입, 使之手捫也. 現于弟子四十日, 或與之飮食, 或現于房中, 或訓之曰平安, 或訓曰勿疑. 爾往天下證我復活云. 人未見飛機時, 或證有飛機則人皆以爲虛妄, 而今則各國皆興行故信之不疑矣. 弟子目見主復活, 逢人直說, 人皆讜聞, 人以若聞見者言之則有力, 餘人雖不目覩, 證之者眞故信之, 吾等信主爲敎人, 且爲信者, 其名皆合而最要證人也. 證之有要道, 要道何也? 卽權能也. 行一章八. 此權能非信不能得也. 權出于信, 不信復活者無證能, 信主爲神之子, 信主爲救主, 信主爲復活, 信主爲再臨, 信主爲審判, 信主贖罪, 其血能洗我罪, 又信永生, 此皆得權之所由也. 故信仰爲得權之要. 信佛者證佛, 信孔者證孔亦皆要權. 且國家派公使于外國, 令證自國之權, 此公使非但信自國之政廳, 且愛其國而證之, 況主之使徒乎? 信愛幷篤, 借其權威而行公使之職也. 權威最要于信, 信而無權威則不能克己, 不能負架, 不能傳道, 絶惡無勇, 信與罪幷行, 似信非信, 似罪非罪, 一無眞面目也. 主說敎有弄權勢者. 太十一章二十. 二四. 十三章五四, 五八. 命鬼則鬼去, 命病則病退, 皆主之權能也. 權能得于祈禱也. 徒問何故病不退? 主曰爾不祈禱故也. 祈禱而後有權能. 엘이아祈禱則雨降, 祈禱則兒復生, 摩西祈禱則鶉降, 祈禱則磐出水, 主祈禱而四試退, 故權能得于信, 得于祈禱也. 如此而後可證復活也. 得權而後可至地極, 傳于万姓也. 行十三章五十一. 世上萬民皆不知復活, 如國民無識, 其國不可保, 不知政治, 不知法律, 不知經濟, 不知衛生, 不知道德, 安可與文明國比看哉? 故爲政者必欲使民有知識. 靈的亦然, 萬民暗然無覺, 使人證之有神國也. 神國不擴者, 卽證不足之故也. 余友某將證欲分明, 廣問人則答曰必以公證人分托可矣. 主爲公證人卞其眞假, 使主之事業復興於世矣. 確證在我, 我當證其證也. 有人服某藥而病愈則證其藥之效, 使人服其藥而亦愈病可也. 種種於新聞紙上見此證據矣. 吾等蒙主之血而得復活於罪惡之中則亦是證其復活之見矣. 살마리아女人, 得見救主故入城證其城中之人多信之, 敎會形殘無復起色者, 以其證之不確也. 余弟前飮酒行悖, 悔改而信主, 斷飮去煙, 言行善良, 隣人曰耶蘇之道眞好矣云. 故吾人之證在行不在言矣. 以身行主之道則可爲證, 崔先生沖時指弟子曰 不問可知, 爲先生弟子云者何也? 其行皆爲崔先生故云耳. 故吾信徒當法主言行, 使無欠過則人皆行之而信矣. 主曰爾爲證人云豈不美哉? 今敎人不證主, 但證人罪惡曰某人犯淫, 某人犯贓, 某人飮酒, 某人吸煙, 如此不美之言互相爲證, 是不知證自己罪惡也. 毁人則己所毁者十二種也云. 誠哉是言也!
<구약>의 이사야 때에는 주께서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증인이다’(이사야 43:10-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스스로 존재하셔도 증인이 없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선지자를 택하여 증인으로 삼으신 것은 다만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활에 이르러서는 증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약>에서 주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라’(누가복음 24:48)고 하셨는데 이는 제자들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증언하기를 ‘내가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보았다’(요한1서 1:1-3)고 말했습니다. 목격한 것이 불확실하면 증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관청에는 공증인(公證人)이 있어서 그 시비를 증언하게 하여 다시 바꾸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증인을 안배하셨습니다. 증인은 <신구약>에 증거를 하되 확신이 있은 뒤에 증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증거가 확실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증인을 골라서 다방면으로 훈련을 시킨 뒤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는데 이르러서야 확증을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전도가 종종 실패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곧 증거하는 마음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시대의 증인 열두 명중 한 사람이 부족하여 기도하고 택하여 세웠습니다(사도행전 1:22). 이로 말미암아 볼 것 같으면 부활은 오묘한 것이므로 더욱 증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빌립에게 직접 손으로 만져보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40일 만에 나타나셔서 음식도 나누어주시고, 혹은 방안에 나타나시기도 하며, 혹 ‘평안하냐’고 말씀도 하시고, 또 훈계하시기를 ‘의심하지 말고 너희는 나아가 천하에 나의 부활을 증언하라’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비행기를 보지 않았을 때는, 비행기가 있다고 증언하면 사람들은 모두 거짓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각국이 다 운행하기 때문에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주의 부활을 눈으로 보았으므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곧이곧대로 증거하니 사람들은 그대로 들었습니다. 직접 듣고 본 것을 말하면 힘이 있으며, 남이 비록 눈으로 보지 못하였어도 증언한 것이 진실하면 믿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어 교인이 되었고 또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름은 다 가장 중요한 증인으로서 합당합니다. 증명하는데 중요한 방도가 있으니 그 중요한 방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권능입니다(사도행전 1:8). 이 권능은 믿지 않고는 얻을 수 없습니다. 권능은 신앙에서 나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증거 능력이 없습니다. 주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구주이심을 믿으며, 부활을 믿고, 재림을 믿고, 주님의 심판을 믿고, 주께서 대속하기 위하여 그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심을 믿고, 또 영생을 믿어야 합니다. 이게 다 권능을 얻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권능을 얻는 요점이 됩니다. 불교를 믿으면 부처의 증인이고, 공자를 믿으면 공자의 증인이 되니, 이것은 다 권능의 요점입니다. 또한 국가가 외국에 공사(公使)를 파견하여 자국의 권리를 증언하게 합니다. 이 공사는 자국의 정체를 믿을 뿐 아니라 자기 나라의 사랑도 증명해 보입니다. 그렇거늘 하물며 주님의 사도가 된 자야 더 말할 나위가 있습니까?
신앙과 사랑이 아울러 돈독하여야 그 권위를 빌려 공사의 직책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권위는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니 신앙에 권위가 없으면 극기를 할 수가 없어서 십자가를 질 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전도도 할 수가 없고 악을 끊어버리는데 용기가 없어 신앙과 죄가 아울러 실행되니 믿는 것 같아도 믿는 게 아니고, 죄 같으면서도 죄가 안 되어, 참된 면목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의 설교를 권세로 농락한 자가 있었습니다(마태복음 11:20-24. 13:54-58). 귀신에게 명하면 귀신이 물러가고 병에게 명령하면 병이 나았으니 다 주님의 권능이었습니다.
권능은 기도에서 얻습니다. 제자들이 ‘저희들이 행하면 왜 병이 낫지 않습니까’ 물으니, 주께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으니, 기도를 한 뒤에 권능이 있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해서 비가 내렸고, 또 기도해서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모세는 기도하여 메추라기가 내려왔고, 또 기도하여 반석에 물이 솟았습니다. 주님은 기도를 하여 네 가지 시험을 물리쳤으니 권능은 신앙에서 얻고 기도에서 얻습니다.
이렇게 한 뒤라야 부활을 증언을 할 수 있고, 권능을 얻은 뒤라야 땅 끝까지 나아가서 만백성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사도행전 13:51). 세상 만민은 부활을 모릅니다. 국민이 무지하면 그 나라가 보전할 수 없고, 정치를 모르고, 법률을 모르고, 경제를 모르고, 위생을 모르고, 도덕을 모르면 어찌 문명국과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정치를 하는 자는 반드시 백성에게 지식을 갖도록 하여야 합니다.
영적(靈的)인 일도 그러합니다. 모든 백성은 어두워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증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바로 증언이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의 친구 아무개가 증거를 분명히 하고 싶어서 그 방법을 널리 물었더니, ‘공증인에게 부탁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답니다. 주님이 공증인이 되어 그 진가를 분변하게 함으로써 주님의 사업이 세상에서 부흥하도록 해야 합니다. 확실한 증거가 나에게 있으면 나는 마땅히 그 증거를 가지고 증명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약을 복용하고 병이 낫게 되면 그 약의 효험을 증명하여 다른 사람도 그 약을 복용하고 낫도록 하여야 합니다. 신문에서 자주 이러한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피에 힘입어 죄악 가운데서 부활을 얻었은즉 그 부활을 증언해야 옳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구주를 뵙고 성안에 들어가서 증언함으로써 성안 사람들이 많이 믿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형편이 쇠약해져서 다시 일어날 기색이 없는 것은 그 증언이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우가 전에는 음주하고 행패를 부리다가 회개하고 믿은 뒤에 술도 담배도 끊고 언행이 선량하여지니 이웃 사람들이 이르기를 ‘예수의 도는 참으로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증거는 행함에 있고 말에 있지 않습니다. 몸으로써 주님의 도리를 행하게 되면 바로 증거가 됩니다.
고려시대 대학자인 최충(崔沖) 선생이 제자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묻지 않고도 다 아는데 선생이고 제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다 최 선생의 행동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도는 마땅히 주님의 언행을 본받아서 흠과 허물이 없어야 사람들이 그 행동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르기를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으니, 이 어찌 훌륭한 말이 아닙니까? 지금 교인들은 주님을 증언하지 않고 다만 남의 죄악만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구는 간음을 범하고, 누구는 장물(贓物)을 범하고, 누구는 술을 마시고, 누구는 담배를 피운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불미스러운 말로 서로 증언을 하는 데, 이는 바로 자기의 죄악을 증언하는 것인 줄을 모릅니다. ‘남의 허물을 헐뜯으면 자기의 허물은 열 두 가지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참으로 그 말이 그럴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