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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참된 잠언대로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이니 “개는 그 자신이 토해 낸 것으로 다시 돌아가고 또 돼지는 씻고 나서 그녀의 진창 속에서 뒹군다.” 하였도다(벧후 2:22).
본문 벧후 2:22은 난해 구절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난해 구절처럼 된 경우라 할 수 있는 구절이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크게 "교리"와 "교훈"으로 구분해서 읽고 공부해야 되는 줄 알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혼란이 적다. 그러나 올바로 나누어 성경을 읽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 교리와 교훈을 구분할 줄 모르는 목사와 교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66권 전체를 지켜야 구원받는 무서운 율법책이거나 아니면 <믿거나 말거나> 단물만 빨아 먹으면 되는 "교훈집"이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
이 글은 곧 이어서 올릴 송요셉 목사의 잘못된 성경 강해, 벧후 2:22의 개는 "목사", 돼지는 "교인"이라는 그 해석을 정정하고 올바로 재해석하기 위해 올리는 사전 포석의 글이다.
우리가 성경의 비유법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부 본문만 발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요소 요소 필요한 성구들을 연결시켜 볼 수 있어야 한다. 본문은 비유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육신을 발동시켜서 어떤 정죄하고 싶은 대상을 비난하기 위해 써먹는다던지, 신천지 같은 데서 하듯이 기존 교회를 "개와 돼지"로 규정하기 위해 기존 교회 목사를 "개"라고 부른다던지 하는 식으로 편의적으로 마구 써먹으면 극히 곤란하다는 것이다. 물론 문제의 발언을 하는 송요셉 목사가 신천지가 기존 목사들을 "개"라고 부르는 그 해석법을 알고 따라가는 것인지 무의식중에 그렇게 했는지는 내가 모르기 때문에 단정하지 않겠다. 적어도 송목사는 기존에 했던 발언들을 보면 신천지를 비난하는 이야기를 약간은 하는 것으로 봐서 나도 송요셉이 신천지가 아니라는 것은 일단 믿어주겠다. 꼭 신천지가 아니라 해도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모든 이단 집단들은 비슷한 해석 툴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으니 그 자의 엉터리 해석의 혐의가 벗겨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다음 날 그들이 계속 길을 가다가 그 성읍에 가까이 왔을 때 베드로가 제육시경에 기도하려고 지붕 위로 올라갔는데 몹시 시장하여 먹고자 하더니 집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그가 무아지경에 빠져 하늘이 열리고 어떤 그릇이 그에게로 내려오는 것을 보니, 마치 네 귀를 맨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땅 위에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갖가지 네 발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있더라(행 10:9-12).
성경은 사람을 식물(나무, 꽃, 풀)로 비유하거나 육상 동물(나귀, 독수리, 여우, 사자, 곰, 표범), 바다 생물(물고기), 공중의 새(펠리컨, 올빼미 - 시 102:6) 등으로 비유한다. 특별히 사람을 육상 동물로 분류할 경우 정결한 짐승, 부정한 짐승의 2분법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율법에서 정결하다고 인정되는 짐승은 구원받은 사람(구원받은 유대인, 구원받은 이방인)이고 부정한 것으로 분류된 짐승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특히 구원받지 않은 이방인)을 뜻한다.
행 10장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부정한 류로 여겨지는 로마의 이방인들(그들이 왜 부정한 자들인지는 로마서 1-2장을 잘 보라)에게 설교하기 위해 간다. 이미 갈보리 십자가에서 율법이 완성됨으로 인해 이방인들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한번에 모든 사실을 알려주시는 대신 순차적으로 알려주고 계셨다. 당시 베드로는 아직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성령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주께서 그의 생각을 "향상된 계시"로 고쳐주시기 위해 이 환상을 그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베드로는 가축들과 들짐승들과 공중의 새들이 있는 보자기를 보았는데 그것은 구원받지 않은 부정한(영적, 육적 의미 모두 해당된다) 이방인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간주되는 짐승들을 그는 본 것이다. 물론 개와 돼지도 거기에 포함되었을 터이다.
그런데 한 음성이 그에게 들리기를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으라.” 하더라.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나는 결코 속되거나 불결한 것을 먹은 적이 없나이다.”라고 하니 음성이 다시 두 번째 그에게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그 그릇이 다시 하늘로 올리워가더라(행 10:13-16).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실제로 그것들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그가 구원받은 이후에도 안식일과 정결례와 율법의 음식 규례들을 다 지켰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무할례자로 살라고 강요하지 않으셨다.
할례를 받은 후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느냐? 그는 무할례자가 되지 말라. 무할례시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느냐? 그는 할례를 받지 말라(고전 7:18).
거듭난 크리스찬들은 우상들에게 바친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삼가라는(행 15:29, 21:25) 권고를 받았으며 이것을 행한다고 해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것을 교훈으로 알고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으로서 구원받은 사람에게 억지로 이방인처럼 살라던지, 이방인으로서 구원받았는데 억지로 유대인처럼 살라고 하지 않으신다.
베드로는 부정한 짐승과 같은 이방인들과 "교제"(먹는다는 것은 "소통"을 뜻한다)하라는 주님의 지침을 받은 것이다.
요 6:56 말씀의 경우처럼 행 10장에서 "부정한 짐승들을 먹으라"는 것은 "그 이방인들과 밥도 먹고 대화도 하고 그들에게 성경도 가르쳐 주고 그러한 교제, 친교를 나누라."라는 말씀인 것이다. 진짜로 코넬료 일행을 식인종처럼 잡아 먹으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로마 카톨릭과 그들의 카니발 의식인 미사에서는 요 6:56을 진지하게 "식인과 흡혈을 하라는 뜻"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들은 행 10장의 환상은 식인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성경에 무식하기 때문에 모르고 넘어간 것일 터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며 나도 그 사람 안에 거하느니라(요 6:56).
이 글의 주제로 돌아와서, 성경이 부정한 짐승들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상징으로 썼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이 본문에서 확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환상 속에서 "더러운 짐승들"로 묘사된 그 코넬료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카이사랴에 코넬료라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이탈리아 부대라고 하는 부대의 백부장이더라.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라(행 10:1-2).
여기 2절에서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 때 "경건한"은 영어 킹제임스 단어로 "devout"인데 해당 단어로 성경을 검색해 보면 코넬료의 경우를 예외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율법적으로 경건하게 사는 유대인"에게 적용된 표현들이다. 한 구절만 인용해 보면 이렇다.
그곳에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율법에 따라 사는 경건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대인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더라(행 22:12).
행 22:12에서도 아나니아가 "경건한 사람"이라 할 때 devout man이라 한 것이다. 아나니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을 지키고 사는 경건한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그 아나니아와 마찬가지로 카이사랴의 코넬료도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로마인이었다. 자신만 경건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자기 온 집안이 구약 성경을 믿고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집안이었다.
그런 경건한 사람을 "개"나 "돼지"로 간주한다면 다소, 다소가 아니라 많이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한 것이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단락이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코넬료를 만나서 첫 마디를 떼기도 전에 먼저 코넬료를 찾아오셨고 그를 깨끗게 하셨다라고 나온다. 구약 시대의 이방인들은 코넬료와 같은 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정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정결하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가 완벽히 제거되었다는 그 의미에서 정결하게 된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의 신실한 유대인들처럼 코넬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거룩하게 삶으로써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들이라는 분류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시각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양심과 행동"이 올바른가, 그렇지 않은가로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욥이나 라합, 룻과 같은 의롭게 된 이방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양심적으로 살아서" 그렇게 인정받은 것이다.
벧후 2:22로 돌아와서, 이 구절의 교리적 대상이 누구인지를 확정지은 다음 개와 돼지의 의미를 분석해야 맞기 때문에 그 앞의 본문을 좀 보겠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저주받을 이단들을 비밀리에 불러들여서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며, 급격한 파멸을 스스로 불러들이느니라(벧후 2:1).
2:1에는 개와 돼지가 누구인지 확정 진술이 나온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인데 그들이 하는 일은 저주받을 이단들을 비밀리에 불러들여서 ... 급격한 파멸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짓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초대 교회 당시에도 교회 안에서 자매들은 성인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회중 설교를 하는 것을 제외하면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 교사 역할을 했었다. 사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성경 교사로는 일반적으로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형제보다 자상하고 세심한 여자들이 더 어울리는 면이 있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 내에서 남녀 성경 교사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급기야 이단을 불러들이는 오염의 유입 통로가 되는 현상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몰몬교 같은 경우도 창시자들이 잘못된 성경 교사에게서 쓰레기 같은 헛소리를 배웠거나 성경 교사를 본인이 하다가 헛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서울 성경침례교회 같은 경우도 어떤 신학교 강사들이 은밀히 이단 교리를 받아들이더니 더러운 영에 감염되어 은밀히 자기들끼리 눈짓을 교환하다가 떼로 배교를 하는 일이 수차 있었다.
사탄은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지역교회를 어디서부터 공격해야 약화시킬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성경 공부는 제도 교회의 '제자 훈련' 같은 형식적인 눈가리고 아웅 같은 성경 공부가 아니다. 우리가 하는 공부는 설교에서, 구령 현장에서, 개인의 경건 생활에서, 영적 전쟁에서 실제적인 지침이 되고 싸울 무기를 단련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생수의 근원"인 성경 공부를 오염시켜 버림으로써 지역 교회를 망쳐놓고 집단 배교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잠언대로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이니 “개는 그 자신이 토해 낸 것으로 다시 돌아가고 또 돼지는 씻고 나서 그녀의 진창 속에서 뒹군다.” 하였도다(벧후 2:22).
영어에서도, 우리말에서도 "그녀의 진창"은 변함없이 한 가지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메리 베이커 에디"(크리스찬 사이언스)의 교훈을 잊지 말라. 신지학의 거두 "마담 블라바츠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에도 신접해서 예언하고 방언하는 여자 목사들이 처처에서 크게 입을 벌리고 거짓말들을 뱉어 내고 있으니 "그녀의 진창 속에서 뒹구는 돼지들"은 우리 곁에 많이 있는 것이다.
성경대로 믿는 신약 지역 교회들은 "남녀 차별"이 아니라 성경적인 이유 때문에 지역 교회에 여자 목사를 세우지 않는 것이다. 여자 집사나 성경에 없는 여권사라는 직분도 마찬가지이다.
"개는 그 자신이 토해 낸 것으로 다시 돌아가고" -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만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개들"은 출입 금지이고 물론 돼지도 사절이다. 사절한다고 해도 양처럼 위장하고 들어오는 개와 돼지들은 언제나 있다. 개들과 돼지들은 교회가 편안한 장소가 아니다. 탕자가 마음을 돌리고 뉘우치기 전까지 그는 돼지 우리에 살았다. 그가 돼지 우리에 대해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시점에 그는 회심한 것이다. 돼지들은 거듭나지 않은 여자들을 말한다. 개들은 거듭나지 않은 남자들을 말한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거듭난 남편이나 거듭난 아내에 "덤"으로 붙어서 교회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보통 악의적으로 자신의 거듭남을 속이고 거짓말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은 거듭나지 않은 채 교회에 숨어들기 훨씬 전에 벌써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을 것이다. 혹은 첫 번째 설교를 듣고 나서, 또는 첫 번째 친교 모임에 참석하고 나서 "내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지각을 하게 되었을 때 바로 "선생님들이여,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이까?”(행 16:30)라고 묻고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2장에서 말씀하는 그 "개들과 돼지들"은 여러 해 동안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교회 안에서 활약하는 마귀의 2중대(첩자들)인 것이다. 그런 자들이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 안에도 항상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1인자(담임 목사)로 올라서는 모험을 절대 하지 않으며 2인자의 위치에서 교회를 성경대로 믿는 노선으로부터 이탈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활동한다. 그들이 "성경 교사"의 자리에 있게 되면 지역 교회를 쓰러뜨릴 수 있는 "취약점"을 잡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들이요, 둘째는 선지자들이요, 셋째는 교사들이요, 그 다음은 기적들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들이며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여러 가지 방언들이라(고전 12:28).
고전 12:28은 "교리적으로" 초대 교회 이후의 교회들에 1:1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인지해야 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 지금은 지역 교회의 감독들(장로, 혹은 목사)이 목양의 역할을 하고 있다. 초대 교회 당시에도 "(성경) 교사들"은 선지자나 사도와 직분이 분리되어 있었다. 물론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가 유능한 성경 교사가 아니었다는 것은 아니다. "교사"는 오직 성경 연구와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기독교 대학과 신학 대학의 "교수들"이 사실 교사라고 봐야겠지만 그들이 지역 교회 내에서 그 직분을 맡은 것은 아니므로 제외해야 할 것이다. 사실 신학자들은 지역 교회에 "성경 교사들"을 공급하는 매개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인데 그들이 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 같은 오물들을 자기들의 제자들을 통해 지역 교회 안으로 유입시키는 영적 전염병 근원이 되고 있기에 아주 부정적이다.
이제, 여러분은 개와 돼지가 "유대인을 제외한 이방인"을 가리키는 뜻으로 벧후 2:22에서 쓴 것이 아님을 알았을 것이다. 물론 개는 목사요, 돼지는 교인이라는 해석도 불가한데(송요셉 식의 해석) 본문상에서 돼지는 "여성형"이기 때문이다. 개와 돼지는 본문에서 거짓 '성경 교사들'인데 올바른 성경 교사들은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를 떠받치는 "간성"과 같은 존재로서 사탄이 가장 쓰러뜨리고 오염시켰으면 하는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 "경제적인 원칙"을 존중하시는 것처럼(세대주의란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경영 방침"이다) 마귀도 경제적으로 자신의 악한 역사들을 수행한다. 한 사람의 성경 교사를 타락시키고 이단 사상에 물들이면 수 천 마리의 군단 마귀들이 수행하지 못하는 엄청난 일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개들과 마술사들과 음행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누구든지 거짓말을 즐겨 행하는 자는 모두 다 바깥에 있으리라(계 22:15).
송요셉식 해석에 따르면 계 22:15에는 "개와 돼지"가 커플로 등장해야 적절할텐데 돼지는 어디로 가 버리고 개만 남았다. 송요셉식 해석에 따르면 돼지들은(거듭나지 않은 교인들) 성 바깥(불못, 지옥)이 아닌 성 안에 들어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계 22:15과 벧후 2:22을 연결지을 방도가 없다.
성경은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고 여우는 구원받지 않은 교활한 이방인의 상징이다. 적그리스도는 사자, 표범, 곰 같은 짐승으로 상징적으로 묘사된다. 왜 계 22:15에는 여우, 까마귀, 개, 표범 같은 짐승은 없고 개만 나오는가? 벧후 2:22과는 별개로 계 22:15은 이 구절 자체로 심층 분석을 해 봐야 답이 나올 수 있는 구절이다. 대체 이 구절의 "개"는 정확히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것인가?
이 글이 길어지기 때문에 계 22:15에 대해 여기서는 깊이 논하지 않고 전제만 몇 가지 놓고 가겠다.
너는 창녀의 몸값이나 개로 번 돈을 주 너의 하나님의 집에 어떤 서원하는 일로도 가져오지 말라. 이는 이 두 가지 모두가 주 너의 하나님께 가증함이니라(신 23:18).
"개로 번 돈"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the price of a dog"이라 되어 있다.
또 그가 주의 전 곁에 있던 남색자들의 집들을 헐었으니, 그곳은 여인들이 아세라를 위하여 벽걸이 천을 짜는 곳이었더라(왕하 23:7).
왕하 23:7 당시 예루살렘 성전 옆에는 "남색자들의 집들"이 있었는데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게이 교회"가 있었다. "호모들"이 결혼할 권리가 있다면(최근 미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서처럼) 그들이 교회를 결성하는 것을 저지할 근거가 있겠는가? 성경을 버린 휴머니스트들에게는 그 논리를 반박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남색자들"이 주의 전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도록 거절하는 구절이 이렇게 분명히 등장한다.
또한 그 땅에 남색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모든 가증함을 따라 행하였더라(왕상 14:24).
그 남색자들은 재판관기 19장의 경우처럼 이스라엘의 한 지파(베냐민)를 거의 멸망으로 몰아넣기도 했고 이방인들의 가증함을 백성 가운데 확산시켰기에 "벨리알의 자식들"(판 20:13,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자들)이라 불렸다.
남색자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케 만든 핵심 원인이었고 이스라엘의 배교와 멸망에도 한 몫을 했으며 그보다 앞서서는 홍수 이전에도 똑같은 가증함이 땅에 넘쳐났기에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다. 주님께서는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병렬로 놓고 말씀하시는데 그 두 시기에 유사한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첫 번째 책에서(창세기) 하나님께서 극히 혐오하고 싫어하는 존재로 언급된 그 자들(호모, 남색자들)은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도(계시록) 불못에 있어야 하는 대상 중에 1번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 "개들"은 단순히 여자 같은 남자들, 트렌스젠더라 불리는 성전환자들, 혹은 크로스드레서(여자 옷을 입기 좋아하는 남자)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같은 남색자들에게 몸을 팔아서 돈을 버는 직업 "창남들"인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 주변에서 어슬렁거렸던 자들도 "직업 창남들"(개로 번 돈)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들을 불못에 쓸어넣겠다고 벼르고 계신데,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개들"에 대한 확실한 경고를 남겨두신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성경의 약간 미스테리하다고 생각했던 계 22장의 "개들"에 대해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필자는 약간의 구절들을 인용했을 뿐이고 뒷받침할 수 있는 구절들은 훨씬 많이 있다. 단지 약간 언급했을 뿐이지만 증거들이 이렇게 나오고 있다.
여러분이 거짓 성경 교사에게 혼을 의탁하고 구원을 안 받은 채 살면 지옥에 가겠지만 구원을 받았다면 육신이 더러워지는 것이다. 구원받은 여러분이 "개들"과 상관한다면(계 22:2) 마찬가지로 육신이 더러워지겠지만 영은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벧후 2:22의 "개들과 돼지들", 계 22:15의 "개들"은 실제로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는 거짓 교사들과 "창남들"이다.
그러므로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그들에게서 나와 따로 있고 더러운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며(고후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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