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위만(衛滿)의 침노
부여 왕조에 백성들의 생활 중심은 대동강으로 정하고 민중이 이곳을 향하여 모여 들었다. 모든 문화 모든 부력(富力)이 이곳에 모인 고로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우리 겨레 뿐 아니라 저 지라 대륙에서 육지로 바다로 건너와 사는 사람이 많았다. 지라 진시황 시대에 학정에 쪼들리고 또 전쟁을 피하여 모여 들어왔다. 한참 동안 민족적 경쟁이 이 강을 중심하고 일어나게 되어 처음엔 지라에서는 민중이 쫓겨 들어옴에 왕조에서는 위로하고 어루만져 왕들의 덕택을 입고 이의가 없이 살던 것이 이민족 중에 수완과 지모가 있는 자가 섞여 들어옴에 이 자들은 백족의 지배를 받지 않고 종종 의란을 꾸며 민심을 불안케 하였다.
그 중에 연(燕)에서 온 위만(衛滿)이란 자 있어 왕조에 벼슬까지 한 자이다. 대개 지라의 귀화인들이 본토인에 비하여 문화 정도가 좀 더 우월하다. 조선인에게 큰 자극을 주며 정치적 사회적으로 점점 침입하여 처음엔 살기 위하여 왔다가 차차 욕심이 생겨 마침내 점차적으로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위만이 처음 들어 올 제 난을 의하여 천 여인을 거느리고 왕조에 와서 항복하고 우리 왕조에서는 그 의복과 위의가 백족과 맞지 않는 고로 거절의 뜻을 보였으나 그들이 차차 귀화하여 섞여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박사(博士)라는 벼슬까지 주어 서쪽 국방을 지키려고 보내었더니 위만은 도적이라 도적을 막으라 함이 도로 도적이 되어 가만히 도망하여 우리를 꾀여 가지고 왕조에 대하여 반항운동을 일으켜 침입하는지라.
왕조에서 신하를 보내어 꾸짖고 일변 동병하여 막으니 위만이 이에 서쪽에 있는 기자의 다스리던 고을 조선을 점령하거늘 왕조에서 너그러이 생각하고 상관치 않았다. 부여 왕조의 인후한 정치가 너무 관용하여 거룩한 국토가 위만으로 인하여 더러워진 것은 물론이요 또 이로 인하여 이민족 사이에 충돌이 생겨 국제적 도의를 잃었고 또 도적의 풍속이 우리의 거룩한 도덕을 파괴하여 많은 충동이 되었다. 정치상 너무 포용성이 많았던 것도 후회하고 우리 겨레와 이민족이 서로 동화되지 못할 줄도 깨달아 위만에 대하여 정치상 여러 가지 교훈이 많았다. 북으로 흑룡강 남으로 대해까지 광활한 지역 안에서 자유로 살던 것이 이제 위만으로 인하여 생활상 장애가 많이 생기고 나라의 권위를 잃게 되었으니 이에 대하여 많은 반성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