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옥 시인을 추모하며
이영식 시인
1998년 봄, 내가 박제천 선생님의 사무실(이화동 소재)에서 시 창작 강습을 받기 시작했을 때 송태옥 시인은 이미 기존 멤버로 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문학아카데미로 보면 나의 선배가 되는 셈이다. 왜소한 체격에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는 그를 더욱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를 대하는 뚝심만큼은 어느 시인에 못지않았다. 박제천 선생님이 그녀의 작품을 크게 질타하더라도 별로 큰 반응 없이 빙긋 웃으며 다시 첨삭을 가해서 다음 주에 같은 작품을 제출하는 남다른 뚝심이 인상적이었다. 그로부터 한참 지난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녀는 직업이 교사이며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단다. 2002년 시문학으로 등단하고 나서도 더 좋은 시를 써보고자 공부는 계속 이어졌다. 그의 신앙 첫 시집 『인생의 길을 위하여』에는 다음과 같은 시작품이 있다.
폐활량이 정상인의 50%도 못 되어 산을 오르지 못하는
호흡기장애인인 나는
산을 오르지 못하니까
기도원 산을 천천히 마냥 기어서 걸으며
마음껏 단풍을 감상하지요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라
장애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되지요
기어서 기어서 마음껏 단풍을 음미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지요
―「가을」 전문
시집을 받고 위 작품을 읽은 뒤에야 나는 송태옥 시인이 호흡기에 장애가 있음을 알았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장례식을 치르고 시제를 지내면서 장애인으로 등록되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감지했다. 그녀는 정상인의 50%도 되지 못하는 폐활량으로 살았던 것, 그러니까 시 공부 자리에서 자기 작품을 읽을 때도 모기만 한 목소리로 시를 읽었던 연유가 분명해 졌다. 송태옥 시인은 그랬다. ‘산을 오르지 못하니까/ 기도원 산을 천천히 마냥 기어서 걸으며/ 마음껏 단풍을 감상하지요/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라/ 장애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되지요’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아픔을 묵묵히 견디다가 우리 곁을 떠났다. 불꽃 같은 마음으로 시를 사랑하고 쓰다가 먼 길 떠나신 시인이여, 부디 하늘나라에서도 좋은 시 많이 읽고 쓰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