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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41장 1-36절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시다
창세기 40장에서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해석한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일을 두 관원장의 꿈을 통해 보여주셨기 때문이요, 요셉은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대로 말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요셉 편에 신비로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꿈이라는 방식으로 알리셨을 때 그 꿈의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에 알게 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하는 자로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줄 때 그 해석이 그에게 좋은 소식으로 있었기 때문에 바로 앞에 서거든 자신의 억울함을 아뢰어 풀려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술 맡은 관원장이 옥에서 풀려났지만 그는 요셉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요셉 입장에서는 자신이 풀려날 것을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런 기대가 사라졌을 때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기억하는 것과 잊는 것조차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로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모든 만물에 대해서지만 그것을 통해 유익이 있게 하시는 대상은 자신의 교회요, 자신의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요셉을 단련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술 맡은 관원장의 기억을 잊게 만드신 것을 통해 나타난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요셉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단련의 시간이 끝나고 창세기 41장에서는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면서 온 애굽의 총리가 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죄수의 자리에서 영광의 자리로 올려주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 때문에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이 꾼 꿈을 단순히 비전이라는 이름 아래 이 땅에서 높은 지위를 꿈 꿀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 온 땅의 총리로 삼으셨지만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교회와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요셉 스스로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45장 5절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절도 보시면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러니까 자기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보존하시어 그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요셉을 그런 방식으로 사용하셨던 겁니다. 이런 내용과 상관없이 인간의 욕심과 맞물러 요셉이 꾼 꿈을 마치 자기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비전이라도 되는 것인 양 그렇게 해석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내용은 아닙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보시면, 우선 1절 이하 8절은 애굽 왕 바로가 꿈을 꾼 것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서 있더니 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만 2년 후라는 것은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서 풀려나 복직하고 난 뒤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요셉 입장에서는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고난의 시간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편에서는 그 고난의 시간이 요셉을 단련하시던 과정이었습니다. 특히 서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술 맡은 관원장이 풀러날 때 요셉은 조금의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기대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본문 1절을 통해 알려주고 있듯이 2년이라는 시간을 감옥에서 더 보내야 했습니다. 기대를 가졌다가 기대대로 되지 않을 때 그만큼 더 큰 실망을 가질 수 있지만,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하는 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때가 되었을 때 하고자 하시는 바를 실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내가 기준이 되어 판단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쯤이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는 이쯤이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내게 하시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혹 고난 속에 있다면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기준이 되어 판단하는 모든 일 속에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만이 남게 됩니다.
이미 살핀 바 있지만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때 꿈은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로서의 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애굽 왕 바로가 꾼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인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미리 알리시는 내용으로써 꾸게 하신 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꿈을 주시면서 그 꿈을 그들 마음에 새기셨던 것처럼 애굽 왕 바로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이런 내용은 하나님이 만유의 주재이심을 드러내시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만왕의 왕이시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들의 주인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운행을 주관하시며 친히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불신자일지라도 그들을 통해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결코 자기 백성에게만 제한되어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면 그 주신 바에 대하여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8절에 의하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 모두를 불러 그들에게 꿈을 말하였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미신적 요소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미신적 요소뿐 아니라 현인들도 있다고 하는데, 지식층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신적인 능력이 있다고 하는 자들, 지식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을 불러 자신이 꾼 꿈을 말해 주시면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해석해 보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들이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점술가와 현인들이 있어서 자신의 꿈을 해석해 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꿈이 뭔가 찝찝할 때 그것을 해석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시간 신명기 18장의 내용도 언급했지만 이방인들 가운데는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나 초혼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요구할 때 왕에게 말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었습니다. 많은 부분 거짓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러나 다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미신적인 방식 속에서도 참된 것을 알리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는 내용인데, 거기서 하나님은 실제 사무엘은 아니지만 거짓 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어쨌든 이런 내용을 생각해 본다면 본문에서 왕이 꿈을 해석하라고 할 때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다는 것은 거짓으로라도 해석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막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 거짓으로 해석하여도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 가운데 평안함을 주시지 않았겠지만, 해석하는 자가 없다는 것은 어떤 해석으로든 왕의 꿈을 해석하는 일을 완전히 차단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요셉을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곧바로 이어지는 내용 속에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떠올리게 되고 요셉을 바로 앞에 세워 꿈의 내용을 해석하게 되는 내용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때도 요셉이기 때문에 꿈을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수 없고 16절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요셉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바로에게 그 뜻을 알려주신다는 것이 사실로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전에는 무지한 자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많은 것들을 발견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사실로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창조주 안에만 진실이 있고, 창조주 안에만 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발견하는 답은 그 사람의 뛰어남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발견토록 하신 역사로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불신자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발견케 하시는 사실들dl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런 이해 때문에 무엇을 발견했다고 할 때 발견한 사람을 하찮게 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발견케 하셨다면 발견케 하신 그 일로 인하여 칭찬 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는 점에서 칭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그 일이 가능한 것인 양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을 모든 일에 있어서 삭제하는 것은 매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9절 이하 13절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떠올리게 되면서 왕에게 아뢰는 내용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내 죄를 기억한다는 말은 2년 전 왕께 범죄하여 옥에 갇힌 그 사건을 말합니다. 요셉이 기억해 달라고 했을 때 기억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옥에 갇힌 일이 결코 부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뢰는 것인데, 그런 그가 지금 복직되어 왕 앞에 서 있는 것은 왕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아뢰는 내용이 복직하기에 앞서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을 때 요셉이 해석해 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 해석대로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자 애굽 왕 바로는 요셉을 부르게 됩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시면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감옥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왕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수염도 깎고 옷도 갈아입힙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 서게 하는데, 바로가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의 꿈을 아무도 해석하는 자가 없는데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40장에서부터 요셉이 했던 말은 무엇입니까? 8절에 의하면 분명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꿈을 해석하는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꿈의 해석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요셉이 꿈을 해석하는 주체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바로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요셉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16절을 보시면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간단히 말해 요셉은 자기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어떤 힘이나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비밀을 해석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칼빈). 이런 내용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 무엇을 드린다는 개념에 앞서 우리가 받아야 할 영광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심는 것과 물 주는 것, 둘 다 수고와 애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조차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그만큼 하나님만이 주체로 계시다는 겁니다. 그럼 주체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자들은 무가치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3:8)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9) 하나님만이 주체이신데 어떻게 하나님과 동역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이 주체이신데 어떻게 상급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역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신학적으로 신인협력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상을 말할 수 있다고 해서 공로에 대한 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여전히 사실로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요셉이 바로 앞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자신은 꿈의 해석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석을 받아 말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불신자들의 경우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요셉이 그렇게 말해도 여전히 요셉을 주목하는 경우들이 많을 것입니다. 혹 하나님의 이름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믿고 있는 그런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들 가운데 네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식을 하든, 인식을 하지 않든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로서 요셉의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마땅한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17절 이하 24절에서 바로는 자신의 꿈을 요셉에게 말합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에 나일 강 가에 서서 보니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그 파리하고 흉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진 소를 먹었으며 먹었으나 먹은 듯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흉하더라 내가 곧 깨었다가 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더니 그 가는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점술가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풀이해 주는 자가 없느니라” 1절 이하 7절 내용의 반복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꾼 꿈을 들려줘도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꿈에 대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입장에서는 답답함으로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요셉이 해석하게 되는데, 25절 이하 36절을 보시면 해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과 함께 해결 방책까지 말하게 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라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
우선 요셉의 해석 자체만 보면 애굽에 한정해서 말하고 있지만 실제 흉년은 애굽 땅만이 아니라 창세기 41장 57절에 의하면 ‘온 세상’입니다. 이때 온 세상이란 지구 전체라는 의미보다는 애굽을 중심으로 그 주변국, 나아가 가나안 땅까지라는 한정된 장소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애굽을 중심으로 말하고 있지만 이후 내용 속에서 주변국 및 가나안에서 온 사람에게까지 양식을 팔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 요셉 자신도 애굽만이 아니라 온 땅에 기근이 심할 것을 알았다고 봐야 합니다. 때문에 해결책을 내놓는 것은 결코 애굽 사람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자기 백성의 구원과 그들의 보존을 위하여 요셉을 앞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창45:5,7 참조). 당연히 양식을 비축해 두는 것도 누구를 위해서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와 자기 백성을 위해서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교회와 자기 백성을 위해 양식을 비축해 두셨지만 그 유익을 누구도 받게 하시느냐 하면 애굽과 주변국까지 받게 하신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옆에 있는 나라, 이웃에게 복 주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이 있다면 이때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냥 우리를 복 주시면 좋겠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굳이 애굽 땅에 복 주셔서 야곱 일가가 어려울 때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란 물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다를 뿐 아니라 그분의 생각이 훨씬 더 높습니다(사55:8-9). 우리는 그분의 생각을 따라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유한한 자가 무한한 자를 다 받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하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또한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당연히 애굽을 부하게 하셔서 가나안에 있는 야곱 일가를 구원하시는 거기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내용 속에서 반드시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되어야 한다는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실 때 나를 부요하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실 수 있지만, 항상 그런 방식으로만 일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을 부요하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양식을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사는 방식으로 있는데, 이처럼 우리가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고 높은 지위 아래에서 수고와 땀을 흘려 가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우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이 뒤바뀐 삶이었으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역사하시는가?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좀 더 실제적인 내용을 말해보자면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겸비케 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요, 일용할 양식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수고와 땀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역사하기도 하시는 겁니다.
소위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할 때 우리가 말하는 복은 외적인 복의 내용이 아닙니다. 영적인 복입니다. 변할 수 있는 복이 아니라 변할 수 없는 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영원한 복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한 지금도 그 사실을 알기 원하십니다.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기 원하시며,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주목하기보다는 주시는 하나님 자신을 주목하길 원하십니다. 때문에 이웃에게 외적인 복, 물질적인 복 주시는 일이 있다면 복 자체보다 하나님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이웃을 보면서 배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 즉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말씀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이 꿈을 해석할 때 하나님을 주체로 두고 있는 것은 비록 저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아니지만,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할 영광을 올바르게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꿈을 해석하고 있지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꿈의 해석자라는 것입니다. 꿈의 해석자일 뿐만 아니라 그 꿈을 주시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심지어 그 꿈을 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럼 꿈을 정하시고 꿈을 주시고 꿈에 대한 해석까지만 주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지는 의미와 더불어 그것이 곧 문제로 있다고 할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까지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 그분 안에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열쇠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답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학생들의 경우 학교에서 여러 가지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것이 유익함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 진정한 답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분 안에만 진정한 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의 말씀으로 배워야 하고, 그분의 말씀으로 배우는 것이 익숙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사고가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이 하나님을 주체로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말씀으로부터 배운 것으로만 세상 앞에 내놓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할 때 세상 앞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내놓는데, 말씀과 상관없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이 삭제되어 사고하는 방식으로 내놓는 것 역시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주체로 두는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거기에만 참되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