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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숙의 수필세계
- 작은 것에 담긴 큰 세상, 더 넓은 세상에로의 산책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그날 밤 손자와 셋이서 새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달래려고, 글짓기를 하자고 제안하였다. 4학년짜리 손자는 먼저 삼행시부터 시작하는데, 아, 아기 새야/ 기, 기다리고 있을 테니 돌아와서/ 새, 새끼 낳고 살다가 가렴, 또 2학년 녀석은 글을 다 쓰고 나서 삼행시를 썼다. 아, 아주 귀엽고/ 기, 기특한/ 새, 새 육 형제, 둘 다 아기 새를 놓친 서운함과 또 기다리는 마음을 절절히 담고 있어 할미란 게 긁어 부스럼을 왜 만들었을까 후회가 막급이었다. 나 ㄸ한, “황갈색 어미 새야, 새끼 깔 장소가 마땅치 않거들랑 304호 편지함에 온다면, 통째 내어 주마”하는 글로 부디 새 가족이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았으며 하고 바라는 마음을 적었다.
- 서경숙, <위대한 모성> 中에서 -
I. 열며
수필은 정의 문학이다. 서경숙의 이 수필집은 우리 주위의 잊을 수 없는 이야기 42편의 수필을 싣고 있다. 바쁜 현대인들의 생활 속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의 잔잔한 행복을 전하고 있는 이 작품들을 통해 진정한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니 좋은 수필로 평가할 만하다고 하겠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서경숙의 수필은 조금도 그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작가라면 자기 자신의 주변과 삶의 언저리, 내면과 영혼의 소리뿐만 아니라, 사회의 흐름, 그리고 역사 흐름의 목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는 현미경도 망원렌즈도 가져야 할 것이다. 서경숙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면 모든 것이 수필감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소재에서 얻는 경이와 충격만으로 수필을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볼’ 시視의 차원이 아니라 ‘볼’ 견見의 차원으로 나아가서 종국에는 ‘볼’ 관觀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
수필집의 첫 작품은 화해해결구도의 백미를 보여주는 <검은 배경>으로 남편과의 인연을 다루면서 종국에는 성찰로 버무려 용서의 미학을 이끌어내는 수필이다. 주제의식을 제재와 연결시켜내는 것이 수필을 문예화하는 데 중요한데, 지금까지 서경숙은 이런 일을 잘 해내고 있다. 그녀의 인지시스템으로 들어온 제 물상은 의미화 작업을 거쳐 옹골찬 미학으로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내온 사십여 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관조 미학의 토대 위에서 빛나는 수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경숙의 눈은 확실히 남다르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보아야 할 것을 찾아 조리개를 맞추는 데 남다른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믿음직한 글쓰기를 수필의 문학성을 바로 세우려는 작업의 하나로 볼 때, 서경숙 수필집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문학은 실제로 일어났을 수 있는,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를 쓴다. 그것은 추측이나 상상, 아니면 사건의 자초지종을 보고 당연히 이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추리와 당위성에 의거한 개연성과 핍진성을 갖는 서술을 말한다. 문체상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그럴듯하게, 실감나게 이야기하는 것이 문학이다. 따라서 문학은 역사보다 훨씬 진지하며 철학적인 진리성에 가까운 것을 추구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서경숙 수필의 가치성이란, 작은 것을 사랑하며, 숙명적인 것을 운명으로 여기는 순리적 운명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내심에 투영된 감정이나 정서가 세련되게 반성적 성찰에 의해 표현된 것이다. 이것이 정의 문학으로서 수필이요, 인간학으로서 수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문학가와 철학자는 다르지 않다. 문학이 보다 깊은 철학일 때 우리는 세계인과 만난다. 관조 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서경숙의 수필에서 세련된 문학성의 향기가 세포 속으로 스며들어 오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필마의 기운이 주는 뿌듯한 감동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II. 펼치며
칸트에 의하면 예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논의 또는 평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의 미학적 또는 심미적 취향은 극과 극의 중간쯤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제시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함에 있어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그리고 정당한 기준이 존재 가능하다는 가정 위에 성립한다. 이와 같은 가정 위에서 서경숙 수필의 즐거운 가치평가는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순명의식과 솔직함과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작가적 정신에서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서경숙이 추구하는 세계는 <향기>라는 글 발단부,“아침 기도를 드리고 나면, 곧바로 손자의 방문을 열어보는 것이 내 하루의 시작이다.”는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코멘트에 포커스를 맞추면 대충 서경숙의 세계관과 일상 철학을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이 해설을 통해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힘으로 서경숙 수필의 가치와 마주했으면 한다. 작품 속 화자나 주인공이 나에게 건네는 이야기에 솔직하게 귀 기울여 보기 바란다. 한 편의 수필을 읽는 일은 작가의 수필적 서사를 거쳐 결국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여행이다. 수필이라는 기차를 타고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다 보면,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내가 사는 세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수필집이 멋진 기차여행을 선사하는 소중한 차표가 되리라 확신한다.
가. 동반으로 가는 인연 열차- 조약돌처럼
서경숙의 수필은 이러한 바슐라르의 이론처럼 상상력과 미의식의 관계를 통해 구축되고 있어 우리는 체험이 문학적으로 어떻게 변용되는지 그 과정을 행복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수필집을 통해 한 작가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과 더불어 참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승화시켜내는 지혜를 함께 읽어나갈 수 있다. 특별한 체험이 특별한 언어로 형상화된 문학도 필요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을 통하여 오늘을 소중히 아낄 줄 알고, 그 어제를 부끄럼 없이 애기 나눌 수 있는 인간의 인정이 넘치는 사랑의 문학도 필요하다. 한국문학의 전통 속에서 인연은 흔히 삶 속에 운명을 끌어들이는 힘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대체로 운명이란 선험적으로 주어지고, 그 힘에 의해 생의 인연이 이끌린다는 믿음을 갖고 산다. 하지만 서경숙은 운명의 힘에 의해 인연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삶의 지혜를 발휘하여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본다. 서경숙은 이런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가다. 그녀의 수필적 테마의 한 축은 동반으로 가는 인연 열차에서 들을 수 있는 소담한 가족들과의 갈등 극복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졸장부 쫌팽이께서 또 어떻게 내게는 또 그처럼 관대하고 편안한 언덕이 되어 주었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 곰곰이 지난날을 되짚어 보다가 캄캄한 하늘에 내리꽂히는 유성처럼 ‘세상에, 그랬었구나. 배려, 배려였구나.’ 내가 처음 시댁에 왔을 대 막내 누이는 종종걸음 쳤던 아기였다. 그 위로 올망졸망한 시누이가 모두 여섯이었다. 한창 자라는 어린 시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우리는 따라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 몇 푼을 내가 쥐고 있었다면 철모르는 동생들이 내게 손을 벌렸을 거고 못 주었다면, 그 여파로 부모님을 위시해서 형님들이나 온 가족 전체로부터 나만 외톨이가 될 것은 뻔한 결과였다. 그래서 동지가 아예 총대를 멜 수밖에 없었던 거구나. 그러고 보니 반백 년이 지나도록 나와 동기간 돈으로는 상충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검은 배경> 중에서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있고 소중한 것이 부부의 인연이 만들어내는 사연이다. 특히 부부의 연으로 이어진 관계 속의 그 절절한 사랑은 무엇에 비교할 수 없다. 서경숙 수필은 주로 인간을 둘러싼 끈끈한 삶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형상화시키는 것을 특색으로 한다. 인연을 축으로 하는 서경숙 수필의 한 특성은 <검은 배경>라는 수필에서, 그녀는 삶의 영역에서 갖는 사랑과 행복, 만남과 인연의 가치를‘검은 배경’이라는 제재로 형상화하여 수필미학이라는 고도로까지 잘 나아가고 있다. ‘배려’를 ‘배경’으로 전이시켜 언어를 순질이화하는 능력도 돋보이는 점이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주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남편의 보이지 않는 배려의 사랑을‘검은’이라는 어휘를 끌어와 시각적 이미지의‘형상미학’을 보여준다. 남편은 동기간 돈으로 한 번도 상충하지 않도록 총대를 메어준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수십 성상 쓰리고 아픈 것을 모두 동지가 감당해 준 것을 나는 몰라서 살아생전에 고마웠다는 말 한마디 그에게 못해 주었다. 그러나 영혼의 세계에서 다시 만날 때 정중한 사과를 올릴 것이다.’라고 보이지 않게 도와준 남편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다. 작가는 살아가면서 있었던 남편과의 갈등과 고뇌의 단면을 성찰을 통해 빛나는 사랑의 가치로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인연과 성찰로 얻어가는 정신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의미다.
나는 “봄비문고”라는 간판을 붙이면서 내 삶에도 촉촉한 봄비가 되어 줄 것을 바랐다. 읽히고 돌아온 책은 밭을 일구고 일꾼처럼 보여 그때부터 빈 병 수집도 하고, 양말도 팔면서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백과사진서부터 새 도서도 팔면서 곡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백과선서부터 새 도서도 많이 사게 되었다. 그러자 그해 경기도에서 우수문고로 선정이 되어, 문고경진대회 때 수원예술극장에서 성공사례를 연극으로 하라는 공문이 시지부로 내려왔다. 생전 처음 주인공이 되어 큰 무대에 오르자 조명이 햇살처럼 눈부셨다. 어설픈 학은 날개를 활짝 폈다. 그리고는 온 장내를 여한 없이 훨훨 날면서 소신과 의지를 맘껏 붐어낼 때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 <날개> 중에서
이 수필은 앞에서 소개한 수필과 마찬가지로 부부간의 갈등과 사랑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남편을 내조하며 삶의 보람을 찾아가는 작가의 가슴에 대못 이 된,“뭐 당신이 내 공부를”, “당신은 거꾸로 눕지.”라는 남편의 말 끝에 우울증을 앓았던 작가는 물 대접에 빠져 기를 쓰고 나와 삶의 희열을 느끼는 파리의 모습을 보고, 삶의 위기 극복을 향한 날갯짓을 시도한 것이 바로 문고설립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고 나자빠지는 것이 아니라 도전을 통해서 헤어 나오려는 몸짓이다. 바로 자연의 섭리에는 순응만 있는 게 아니다. 이겨내라는 ‘도전’에 따르는 것도 삶에 대한 순리다. 그녀가 이 수필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도전’요, ‘의지’다.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것과 대치되는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줄다리기의 위험한 연속행위와 갈등 속에서 오랜 시달림과 방황 끝에 마침내 구심력을 향해서 돌아오는 동작구조, 그 회귀행위의 근저에는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 잡게 된다. 그 겸허한 모습은 자신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삶의 영롱한 에센스가 될 것이다. 이 수필 <날개>는 무한한 원심적 탄력 속에서 가까이 존재하는 일상의 그것과는 다른 특별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영역이며 우리의 지친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이 수필을 읽고 나면, 우울증과 거친 열정의 파도를 넘어 우리의 영혼이 가장 낮은 자제로 임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나도 날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방지축이었던 바다 게는 이제 세상 풍파에 굳은살이 박였다. 이제는 모래사장을 떠나 민물 웅더이에 뒷다리로 물을 박차며 총알같이 돌진해야 하는 물방개가 되었다. 세월이 점점 어깨를 무겁게 누를지라도 휘지 않는 당찬 기둥이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 <바다 게> 중에서
인용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바다 게>는 자식을 키우면서 새겨지는 삶의 자리에서, 유한한 삶 자체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생활 속의 깨달음을 진리로 연결하는 그녀의 여유에 찬 삶이 주는 감동은 안식의 문학이라는 수필 고유의 특성을 전해준다. 지혜의 보고서라 할 만한 이 수필은 여기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생활수필을 한 단계 업그래이드시키고 있다.‘천방지축이었던 바다 게는 이제 세상 풍파에 굳은살이 박였다. 이제는 모래사장을 떠나 민물 웅덩이에 뒷다리로 물을 박차며 총알같이 돌진해야 하는 물방개가 되었다.’는 문장은 형상적 체험을 통해서 주제의식을 의미화하는 진술로서 비유의의 손맛을 느끼게 해서 문학 언어가 주는 미적 감동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통한 성찰의 가치를 전달해주기도 한다. 배려와 이해의 필요성과 여유의 중요성을 관념적인 언어로 설명하지 않고 아들의 성장에 대해‘총알같이 돌진해야 하는 물방개가 되었다’라는 구체적 진술로 제시함으로써 수필언어가 도달해야 할 원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독자와의 공감대 확보를 위해 작가는 결말부 의미화에 앞서 반드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런 설득적 논리는 공감과 감동을 위한 필수적 장치로서 기능한다고 하겠다.
저승 문을 바라보는 나는 그 무서웠던 날이 내게 없었다면, 입술이 남보다 얇아서 아마 여러 사람 마음을 실타래처럼 얽히게 하며 살았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얼굴에 묻은 얼룩은 거울을 보고 고칠 수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마음은 자신도 자기를 모를 때가 태반이다. 나는 경솔해서 남들 눈에 내 결점이 금방 드러나 비난도, 또 싸움으로도, 대로는 충고로 내 결점을 남보다 많이 지적받는 편이다. 내가 받은 수모나 핀잔까지도 세월에 곰삭아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나 하나가 되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파도처럼 깎아주고 갈아주고 다듬어 준 결과다. 세월은 잠시도 나를 그냥 두지 않았기에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빚어진 것이다.
- <조약돌처럼> 중에서
수필을 읽는 여러 매력 중에서도 가장 큰 매력은 작가의 내면 풍경을 읽어내는 데서 나온다. ‘나는 경솔해서 남들 눈에 내 결점이 금방 드러나 비난도, 또 싸움으로도, 대로는 충고로 내 결점을 남보다 많이 지적받는 편이다.’라는 작가의 진술은 솔직함의 보고다. 따라서 작가의 수필 스기는 사회거리 속에서의 모순된 삶의 방식에 대한 자기비판적 고백인 동시에 트라우마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인 것은 이런 트라우마가 모두 치유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결점을 가감없이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닌 데도 작가는 자신의 약점을 송두리째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성품이다. 이 수필의 쾌미는 모가 난 자신이 다듬어져 부드럽게 된 과정을 문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데서 느낄 수 있다. 예술의 가장 본질적 조건이 상상의 문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인지한 작가는 상상력에 의한 수필의 예술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 수필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나 하나가 되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파도처럼 깎아주고 갈아주고 다듬어 준 결과다.’라는 진술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자신의 성정인 원관념을 ‘세월에 곰삭아’ ‘조약돌’이 되었다는 말로 치환시킨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한다는 본격수필의 시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술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에 의한 유추와 상상의 기법을 극대화해 나가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발레리는 문학 속에서 사상이란 과일 속에 묻혀 있는 영양소와 같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엘리어트는 문학은 사상을 장미꽃 향기와 같이 감각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문학의 내용에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시도할지라도 그것이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사상의 정서화’,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사상 감정의 정서화는, 신선한 상징들이 신선한 미적 감각을 우려내어 감동을 전해준다고 하겠다. 물론 상상도 관념연상을 일으키지만 진폭이 다양하고 깊기 때문에 작가로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조약돌>은 위에서 말한 사상의 정서화나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아주 잘 된 작품이다. 위의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충분히 본격수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미의 발견과 반성적 성찰- 꿈을 일구는 자세
프로이트는 예술은 내적 불만의 승화라 하였다. 앤서니 엘리엇은 오늘의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표현하는 글이 수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아의 형성 과정이 개개인마다 다르니 글도 사람에 따라서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또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자기규정을 하여야 한다고 했다. 서경숙 수필의 또 다른 한 축에는 성찰의 보고할 할 만큼 그림자의 인격화가 잘 드러난 자아실현의 과정이 펼쳐져 있다. 수필 <가을의 결실>은 엘리엇이 말하는 자아이론의 핵심이 실린 작품이다. 성찰하는 과정은 삶의 궤적에 관하여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정보를 주시하고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수필쓰기에는 자아 성찰이라는 과정이 들어간다. 수필의 개념에는 내면의 고백 못지않게 자아성찰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수필을 통하여 고백하는 동시에 자기 성찰을 하므로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 수필이다.
‘밭농사 실패로 허망함을 느끼게 된 것이 어쩌면 알곡을 얻은 것보다, 내게는 더 소중한 깨달음과 자성의 기회가 된 것도 같아 헛고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봄부터 가을까지 소망이 가득했던 것도 좋았고, 또 많은 것을 체험한 값진 시간들이었다’는 고백에서 만들어지는 성찰과 자아발견의 세계는 수필의 고유한 예술적 기법이 된다. 왜냐하면 소설의 허구성이나 시의 압축적 언어와 달리 이것은 상상 아닌 실제적 사실의 세계를 전제로 하고 그 내면에서 또 하나의 상상의 세계를 상징적 연상으로 병행시켜 나가는 형태이며, 이는 오직 수필만이 가능한 특수한 상상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예술성은 물론 다양한 복합적인 조건에 의해서 형성되어야 한다. 수필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효율적으로 예술성을 나타내는 표현기법은 ‘또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씨는 씨 중에서 가장 으듬 씨라는 것도, 실감적으로 체험케 된 날도 그날이었다’는 함축에 의한 유추현상으로 만들어지는 상상력의 기법이다. 이런 독자적인 기법은 서경숙 수필의 우월성을 확보해 나가게 한다고 할 수 있다.
허울만 거창한 콩밭에 앉아서 부끄러움이 느껴지자 불현 듯 ‘내 인생의 결실도 실속없이 허옇게 말라가는 꼴이 아닐까.’농사는 다음 해에 만회할 수나 있지, 내 지구성 여행은 하번 떠났다 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생의 여권에 찍힌 기한이 다 되기 전에 얼른얼른 내 인생 농사나 서둘러야 되겠다는 당혹감이 느껴진다. 내가 콩 포기를 돌보듯이 변변찮은 내게도, 오늘이 있기까지는 부모를 위시해서 모든 이의 공이 숱하게 들었다. 내가 쓰다가 버린 쓰레기는 또 얼마며 내가 먹은 곡식이며, 물값이나 되도록 살기나 한 건지 하늘에서 염라대왕이 눈을 사발만하게 뜨고 살핀들, 나를 더 잘 아는 건, 나 자신이다.
- <가을의 결실> 중에서 -
수필문학이라고 하는 것에서 없어서는 안 될 두 가지가 ‘성찰’과 ‘반성’이다. 인간에게 성찰과 반성이 없다면 언제나 만족스럽고 꽉 있다는 오만한 느낌 때문에 행복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러한 만족감을 오래 누리고 있지를 못한다. 편안하다는 느낌이 오래 지속될 때 권태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무언가 일거리를 만들고 소일할 거리를 만들고 싶어 한다.‘허울만 거창한 콩밭에 앉아서 부끄러움이 느껴지자’는 진술은 반성의 정서를 대동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신의 삶을 지구성으로의 여행에 비유하고, 살아있음을 생의 여권에 찍힌 기한으로, 사는 것을 ‘인생농사’로 치환하고 있는 부분이다. ‘나를 더 잘 아는 건, 나 자신이다.’라는 말은 중심사상을 뒷받침하고, 주제의식의 상상화를 도모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자기 생각이 전부고 최고의 가치라 여기지 않는다. ‘밭공사 실패로 허망함을 느끼게 된 것’을 소중한 깨달믕ㅁ과 자성의 기회로 삼는다. 실패를 거울로 삼고, 지나온 과정을 의미로 채우며 삶의 근거로 삼는 모습이 아름답다. 실패를 통해 얻은 게 있었으나 헛고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작가의 말은 자신이 어떻게 세상에 기여할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고민하고 있다. 겸손한 반성적 성찰로 공감의 확대를 노린 전략이 좋다.
이런 청신한 삶을 보여주는 매체가 너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봄날에 움트는 새순처럼 선행도 자주 자극이 되면, 너도나도 시샘처럼 실천될 군중심리가 되지 않겠는가. 하늘만큼 큰 욕망 주머니를 다 채운 다음에, 남에게 베풀려고 하면, 이미 대는 늦게 마련이다. 삐삐할머니는 1억 원의 돈이 채워지기까지, 한 푼 두 푼 불어날 때의 기쁨을 상상할 때, 얼마나 행복했으며 보람이 느껴졌겠는가, 또 다 모였을 때는 마음이 변하기 마련인데 서슴지 않고 실천으로 일관했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했다. 그런 순수한 거름을 먹고 거목이 된 꿈나무들은, 이 다음에 틀림없이 받았던 대로 사회에 주렁주렁 열매를 맺어주는 나무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 <삐삐할머니> 중에서 -
한 작품의 서사구조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감동적인 플롯이 존재해야 한다. 이 수필은 첩첩 산중에서 염소를 길러서 모은 돈으로 1억원의 돈을 장학금으로 내어놓았는데, 그 돈으로 공부해서 대학에 합격한 꿈나무들이 할머니를 찾은 감동적인 이야기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쓴 글이다. 산 속에 묻혀 살면서 모든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삐삐할머니를 칭송하는 작가의 수필은 문학성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작가는 이런 할머니를 ‘마음속 슬픔과 욕심을 맑은 공기로 헹궈내며, 흰 구름 높은 산이 뿜어내는 정기를 마시면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고픈 마음으로, 근심 하나 없는 구릿빛 전사가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 돈으로 공부를 해서 할머니를 찾아온 학생들을 ‘순수한 거름을 먹고 거목이 된 꿈나무들’로 묘사했다. 작가가 놀라워하는 것은 1억원의 목표 달성을 위한 숨은 노력보다 꿈을 이룬 다음에 넘실대는 강물처럼 마음이 바뀌기 쉬운 유혹을 견뎌낸 삐삐할머니의 용기다. 서경숙의 이 수필은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 인간미가 서려 있던 시간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삐삐할머니의 선행과 그 가치를 빛내기 위해 동원된 대립항은 황금에 눈이 멀어 뱃속을 채우고도, 제 손자에게도 쑤셔 넣고, 사돈 팔촌까지 안겨 놓고는 전전긍긍해 대는 욕심꾸러기 모기다. 이런 비유는 인식의 어머니다. 작가가 담고자 했던 메시지는 이런 비유들의 도움으로 선명하게 드러나고 맛있게 읽힌다.
의원의 말은 눈을 깜빡거려야 먼지를 밀어내는데, 근육이 마비되어서 깜박거리지 못하니까 대신 눈물로 먼지를 씻어 내리느라 그렇다고 하였다. 그건 또 그렇다쳐도 뭘 먹을 대도 옆으로 쑤셔 넣어야 하고 더 비참한 건 또 칫솔질할 때다. 양칫물을 뱉을 때도 뺨으로 물이 푹푹 뿜어져 나와 기가 막혔다. 그래서 주름은 곧 모든 세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건강의 청신호라는 것을 알았다. 매일 거울을 보며 ‘주름아, 제발 얼른얼른 잡혀라’하며 예쁠 대보다 거울이 더 필요했다. 주름 아니면 짐승이나 사람이나 늘어진 근육이 움직일 대마다 덜렁거린다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근육이 늘어나도 시침하듯 근육을 조물조물 주름으로 당겨 놓았으니 활동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게 된 건 주름으로 생긴 산뜻한 미학인 것을 배우게 된 기간이었다.
- <주름의 미학> 중에서 -
수필의 특성 중 하나가 자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거와 같다. 수필 <주름의 미학>에서 작가는 인체과학에 초점을 둔다.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주름에 대해 긍정적 시선을 놓고, 그 주름의 속성과 기능에 탐닉해보는 데 재미를 느낀다. 작가는 주름에다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그렇게 해서 몸의 예감에 민감하라는 건강수칙을 보여주고자 한다. 수필은 발견이어야 하고, 그 발견이 의미 부여로 나타날 때, 좋은 수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구안와사라는 안면신경마비 증상을 통해 주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자기 성찰을 할 때 투사는 오히려 자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단초를 제공해준다. 그림자는 인격에서 제외된 부분이다. 그림자를 의식의 세계로 이끌고 나와서 자신의 인격으로 통합하는 것이 인격의 폭을 넓히고, 의식의 시야를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성찰의 바람직한 방법으로 수필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햇볕이 나도 그림자를 지울 수 없듯이 그림자도 우리 자아의식의 중요한 반려자가 되어 있다. 주름의 투사를 통해 작가는 과학의 신비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주름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나는 거울을 볼 대마다 주름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역설을 쏟아놓을 수 있는 것이다. 주름은 자기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이 수필은 주름의 새롭게 보기를 통해 문학적 향취를 풍긴다고 하겠다.
다. 작은 것에 담긴 큰 세상- 시골의 진풍경
동양적 사고에 근거할 때 자연은 인간 그 자체이며, 모든 것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시골의 진풍경을 통해 인간사를 돌아보게 된다. 생태계나 자연의 순환에도 명암이 엄연히 존재한다. 현대인은 편리함을 보장받는 대신에 무수히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산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을 향해 떠나온 사람들이 오늘의 현대인이다. 자연적인 삶과 문명적인 삶의 과도기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기억에 남는 향수가 있다. 바로 우리와 하께 삶을 살아온 미물들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네 인간적인 삶에 대한 무의식적 관심인지도 모른다. 이것을 어찌 작가가 놓칠 수 있으랴. 작가는 날카로운 곤충학자의 눈 같은 응시의 작가다. 서경숙의 수필을 구성하는 다른 한 축에는 삶과 함께 했던 미물들, 모기, 산밤의 벌레, 왕잠자리, 거머리, 까치, 지렁이, 벼룩, 빈대, 이 등이 놓여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삶에서 작은 행복을 기대하고 꿈꾸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결국 대자연이란 문학의 온상만은 끝내 이탈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확증인 것이다. 이런 미물의 세계를 여유롭게 관조함으로써 작가는 생의 참된 의의나 조화의 필요성을 밝혀낸다. 이 수필의 요지는 인간의 삶과 밀착된 제재일수록 향기를 더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오늘날처럼 환경이 개발논리에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 하에서 문학이 추구해야 할 사명은 인간적 고뇌와 삶의 향방을 재단하는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작가는 “우리의 유년 시절에는 자연 모두가 놀이의 소재였다.”고 말한다. 덧붙여 작가는 “이제는 대자연과 더불어 교감하던, 생생한 자연공부는 컴퓨터가 대신한다. 단 하번이라도 왕잠자리끼리 양철 부딪는 기운 찬 날개 음이 듣고 싶다. 그 소리도 자연의 음향인데 이젠 꿈처럼 아련하기만 하다.”며 사라져가는 것들에 아쉬움을 전한다. 작가는 희망의 땅으로 우리를 인도해 나갈 생성과 존재의 작가란 의미다. 거머리를 통해 무공해시대를 그리워함도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에 속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다. 그녀는 자연을 통해 인간이 배우는 것은 무한함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삶의 가치를 자연을 통해 획득하려는 서경숙의 의지다. 왜 인간을 못살게 구느냐는 모기에 대한 작가의 분노에는 안타까운 역설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이다.
석양을 등지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던 그 장난이, 지금 생각하니 참 가엾다. 명색이 왕손인데, 넓고 멋진 창공에 신선처럼 유람할 수 있는 멋진 일생을 한 순간 쾌락으로 꾀어 다 망쳐버렸다. 나는 그때의 그 암컷 잠자리가 혀를 깨물고라도 날지 않았다면, 그 많은 팔팔한 수컷 잠자리가 희생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도 더러 있다. 영상매체를 보면 종종 꿈에 들떠서 가출한 소녀들이 못된 놈들에게 걸려들어 잠자리 사냥 같은 짓거리로 재미를 보는 것이 영상에 비쳐질 때마다 잠자리 사냥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제는 그도 저도 공해에 밀려 미물들의 전성기는 지났다. 솦속 풀벌레 소리도 문명에 소멸되어 가는 형편이다, 흔한 고추잠자리까지도 희귀해보일 정도다. 고추잠자리가 바지랑대나 고추 대 위에 물구나무로 곡예하면 깊어지는 가을을 예고했고, 오곡이 푸짐한 수확도 예고했다.
- <왕잠자리> 중에서 -
작가는 왕잠자리와 함께 놀았던 시골 체험을 이야기로 들려주면서 공해에 떠밀려 미물들이 사라져간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자연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기도 한다. 이 수필에서 ‘공해에 떠밀려 사라져간 미물’은 두 가지 의미로 파악된다. 하나는 인간 위주의 생활에서 오는 미물들의 신음이다. 그들도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심각한 지구 오염에 따른 생태계의 아우성이다.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는 절규인 것이다.‘영상매체를 보면 종종 꿈에 들떠서 가출한 소녀들이 못된 놈들에게 걸려들어 잠자리 사냥 같은 짓거리로 재미를 보는 것이 영상에 비쳐질 때마다 잠자리 사냥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진다.’는 표현에 주목해 보면, 과거의 놀이와 현재적 삶의 위기가 교차되면서 연륜을 쌓아가는 인생살이의 명암을 작가는 반성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물화된 보조관념을 통해 작자가 숨긴 이면적 상징물에 도달함으로써 작품을 미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발견은 왕잠자리의 역할이 놀이의 소재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계절을 알리는 전령사였으며, 풍년을 예고하는 점쟁이였다는 것이다. 삶이 진니고 잇는 허위의 껍질을 벗기는 것이 수필의 소명이다. 작가는 자연 속의 미물들과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모두가 자연과의 교류를 통해서다.
그 징거러운 거머리도 아이들의 노리갯감이었다. 거머리는 뙤약볕에서 말라가다가도 물을 만나면 도로 사는 끈질긴 생명력이지만, 아이들이 그런 거머리를 잡아서 꼬챙이를 꽁무니에 대고 자루 뒤집듯, 홀딱 뒤집어 놓으면, 그 지독했던 놈도 어쩔 수 없이 말라갔다. 그런 끈질김 대문인지 거머리는 한약에도 요긴한 약재가 된다. 이런저런 장난기 어렸던 부푼 추억 안고, 찾아간 고향이지만, 푹 꺼진 풍선처럼 추억거리나 볼거리는 말짱 말라 버리고 가을 하늘처럼 냉랭하다.
사람 보면 반색해 대던 거머리조차 없어지자, 가 봐도 사람들도 본체만체 해서, 실없는 나그네처럼 또 옛날 사진 전시장을 둘러보듯 빙빙 겉돌다가, 멋쩍게 돌아오게 하는 것이, 문명의 혜택을 입어가는 고향이다.
- <거머리> 중에서 -
이 수필에는 작가가 무공해시대를 그리워하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발단부 첫 문장이, ‘저공해 시대만 해도,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란 미물이 버글거렸다. 그 시대에는 미물이 사람과 공생하였다.’로 시작한다. ‘물에서 뛰어 놀다가도 거머리가 뛰어나오면 기겁을 하고 나왔다’고 하면서도, 이 수필에는 환경오염에 대한 작가의 문명 비판이 넌지시 깔려 있다. 이 수필의 강점은 ‘거머리’란 제재를 통한 완곡하게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문학적 방식의 전개다. 또 다른 강점은 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질서정연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발단부에서 ‘뼈도 없는 놈이 개울이나 논에서 사람만 보면 반색을 하며’맨살에 달라붙는다고 하고, 그 다음에 ‘농약’으로 인해 거머리가 사라져감을 말하면서, 환경이 오염된 인간 사회를 진단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결말부에 가서 ‘사람 보면 반색해대던 거머리조차 없어지자’고향에 가서도 ‘빙빙 겉돌다가 멋쩍게 돌아오게 하는 것이 문명의 혜택을 입어 가는 고향이다’라는 말로 시선을 문명비판 쪽으로 향하는 수미상관 접근법의 활용은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철저한 주제의식의 간접화 전략으로 쓰여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본격수필의 매력에 빠지는 독자를 배려하겠다는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이런 단계별 구성이 질서 정연한 것은 이 수필이 가진 여러 장점 중에서 가장 빛난다.
미물인 빈대도 못할 것이 없는데, 하물며 사람이 최선을 다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무기 삼아, 어려움을 겁내지 않고 모험과 도전을 거듭하였다. 내전 후 경제가 바닥이었을 때, 한 노동자는 잠자던 민족의 저력을, 경제 발전으로 이끌어 성장의 촉을 세웠다. 그 외도 많은 국위를 선양하는 일화를 낳았던 것도 빈대에서 얻은 지혜와 융통성이었다.
남들은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미물로 인해 자신감을 가지고 비약과 도전으로 일관한 정주영 현대그룹 총수는 민족이 경제발전에 국민이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큰 별이 되었다. 그후 큰 별의 후광 옆에는 빈대도 노력의 표상으로 각인돼 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전설 같은 미담으로 이어질 것이다.
- <빈대> 중에서 -
수필은 자아와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작업이다. 이런 차원에서 서경숙의 유년 시절에 함께 했던 미물에 주목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미물은 무공해를 상징했다. 여기서 ‘빈대’는 ‘노력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배경으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신화를 든 것도 주제화 전략에서 매우 적절했다. 빈대에 얽힌 에피소드를 ‘도전의식’으로 연결한 것은 서경숙 작가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이런 이미지의 결합이 문학적 성과를 거두는 이유는 빈대라는 미물이 갖는 노력의 궤적을 연상케 하면서 정주영 회장의 도전정신이 한국의 경제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삽화를 인용해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문학성이란 말은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의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남들이 지긋지긋해 하는 미물로 인해 자신감을 가지고 비약과 도전으로 일관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야기는 공감의 지름길이라 하겠다. 수필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투영되어져 나오기 때문에 더욱 서경숙의 수필은 향기를 머금고 있다고 하겠다.
서경숙 수필의 가장 강한 특징은 솔직함이다. 고백문학이라는 수필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그녀는 문학의 쾌락성을 구축한다. 그녀는 재미있는 발상과 과감한 자기 노출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서양이 보는 것을 중시하는 시각문화라면, 우리 동양은 듣는 것을 중시하는 청각문화라 할 수 있다. 작가는 도시에 살면서도 시골에서 들려오는 미물의 발신음을 듣을 수 있는 영적 귀를 가졌다. 이 수필은 관계성을 중시하는 동양의 청각문화와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 특히 주제의식의 상상화를 돕는 전략은 매우 적절하다. 발단부에 전개예고 기능을 중시하는 작가의 인식은 수필 감상의 흥미를 더한다. 무엇보다도 서경숙 수필을 읽는 매력은 날카로운 관찰을 통한 깊은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오감을 이용하여 진리를 찾고, 그것을 현실의 삶에 투사시켜 내는 작가의 저력으로 그녀의 작품은 짙은 향기를 풍긴다고 하겠다. 즉 우리는 물화된 보조관념을 통해 작자가 숨긴 이면적 상징물에 도달함으로써 작품을 미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문학은 이런 형태를 따른다.
문학은 빠르고 정확한 의미 전달만이 아니라 그 전달의 효율성을 따진다는 것이다. 얼마만큼 감동적이냐가 성패를 가르며 그래서 수사적 장치가 필요하다. 만일 감동이 없다면 문학이 아니다. 그런데 설명적인 글은 감흥을 주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아무런 흥미 유발이 안 되기 때문이다. 독자에게도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 수필 <빈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런저런 장난기 어렸던 부푼 추억 안고, 찾아간 고향이지만, 푹 꺼진 풍선처럼 추억거리나 볼거리는 말짱 말라 버리고 가을 하늘처럼 냉랭하다’하면서 생명의 존재의 의미를 찾아 끊임없이 생태적으로 사색하는 작가의 내면을 따라가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독자가 작품을 음미하며, 미물이 갖는 상징성의 메시지를 찾아내어 감상을 완성시켜 나간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라. 더 넓은 세상으로의 산책 -세상이 달라졌다
가치관이 너무나도 달라진 요즘 풍경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쓸쓸하게 한다. 작가는 우리 사회의 변화된 모습을 정조준하면서 인정과 전통적 가치를 그리워한다. 서경숙은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꿈꾸는 작가다. 중년을 넘어선 사람이면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다. 좀 오래 산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공포일 수 있다. 잊혀진 현실의 메마름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는 바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인식통로를 통해 인간은 때로 인간다운 자신과 만날 수 있다. 인정이란 객관적 자각의 결과이다. 신세대와 신자유주의 물결과의 만남이라는 이 절묘한 현실의 세계에서 어떻게 차이와 다름을 극복하고 이해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어찌하면 그 갈대밭 끝으로 사라지는 바람소리 같이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허망하지 않은 존치로 되돌려 놓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신세대의 다른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인단 말인가. 어떻게 변화에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 영혼을 위로해야 할 것인가. 이것 또한 문학의 세상이 변화에 두려워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자에게 마련해 주어야 하는 커다란 선물이어야 할 것이다.
요즈음 달라진 게 졸업식뿐 아니다. 식 인사로 “많이 먹어라”또 외출 때, “많이 입고 가거라.”그런 말은 정이나 관심의 표시가 아니라 짜증나는 잔소리로 전락하였다. 밖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밥은 먹었니?”하고 물으면 “지금이 몇 시인데요,”도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어 늙은이들은 젊은이들과 적합한 대화거리가 없다. 그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죽치고 있는 것이 도와주는 시대가 되었다. 옛날에는 순종이 미덕이었고, 옳은 말도 어른에게 대꾸가 된다고 배웠으나, 지금은 자기표현의 시대라 어른이고 스승이고 간에 자기 소견을 말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교육도 개인의 사고방식도 달라서 대가족이 사는 것을 오히려 부모세대가 거부할 형편이 되었다.
꼭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할 것은 못 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한민족의 가족문화만큼은 말뚝처럼 흔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돌아왔다.
- <세상이 달라졌다> 중에서 -
서경숙은 눈물의 습기를 통해 황홀한 기적을 만나는 작가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제목만 봐도 대충 메시지가 다가온다.‘꼭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할 것은 못 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한민족의 가족문화만큼은 말뚝처럼 흔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손자 졸업식에서 돌아온 작가는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 한마디 꼭 하고 싶은 말을 남긴다. 시대도 사람도 변했다지만 역사 앞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것은 바로 한민족의 가족문화라는 것을 작가는 수필을 통해 말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늙은이가 세대차이로 인해 보릿자루 신세가 되고 있는 현실이 아프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귀갓길에 오른 작가의 심정이 되어 본다. 대가족이 모여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며 안락과 평화를 구가하던 옛날의 정취를 작가는 얼마나 그리워할까.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하는 의도다. 상상의 나래 속에서 전통의 가치와 가족정신을 옹호하는 이 수필은 나를 응시하고 있는 나의 차가운 진실을 사랑하고, 나의 고통을 껴안아, 나를 배반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남게 하는 아름다운 예술이 수필임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또 신생아가 태어나면 금줄에 솔가지를 꽂아 성역임을 표시하였다. 금줄에 솔가지를 꽃아 성역임을 표시하였다. 지금도 눈에 생생한 것은 유년 시절 부부의 연을 맺는 초례청에도 소나무 가지를 꽂아 청실홍실을 둘러놓은 것을 보았다. 사시 맑고 청정한 기백으로 소나무처럼 일생을 주는 가정이 되기를 기원한 뜻이라 여겨진다. 우리의 산에도 들에도 외래종이 수두룩하다. 계절마다 자기의 나라를 자랑하지만, 우리 소나무의 위용에는 견줄 수가 없다. 가지를 옆으로 뻗어 천하를 품으려 하는 적송의 여백이야말로 속이 확 뚫릴 만큼 고결하고 정결해 보인다. 비바람이 후려치는 높은 가지에 학이 둥지를 틀어 풍광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해주는 노송의 풍모는 달관한 선비요, 극치의 예술이다.
- <소나무의 위용> 중에서 -
‘나는 한솔 중 적송을 가장 사랑한다. 적송을 보면 스승을 닮아 슬프기 때문이다.’이렇게 시작되는 이 수필은 스승의 모습을 적송에 견줌으로써 문학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스승의 삶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비유를 써서 잘 표현하고 있다. 스승의 내면을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빈틈없이 묘사해내는 그녀의 형상화 능력은 문학적 가치를 드높인다. 수필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작가의 개성적 시각으로 발견하는 데서 가장 큰 매력이 있다. 여기에는 보편성의 공감대를 이루어주는 서정성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스승에 대한 고마움과 따뜻한 연민과 동정이다. “비바람이 후려치는 높은 가지에 학이 둥지를 틀어 풍광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해주는 노송의 풍모는 달관한 선비요, 극치의 예술이다.”고 한 것은 스승에 대한 사랑과 깊은 존경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수필을 보면,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환히 피어나는 피안의 세계를 가진 작가라는 걸 알 수 있다. 작가는 유년의 추억 속에서 발견한 소나무의 운명적 사슬이나 속성에 탐닉하며 스승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사박사박 몰래 내리는 함박눈 쌓이는 소리다. 그 소리는 정인의 입김 서린 속삭임으로도 들리고, 몰래 찾아오는 정인의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도 같았고, 아니면 풀 먹인 명주옷 옷깃 스치는 음향 같기도 했다’등의 산골 한 겨울 밤 배경 묘사는 작가의 감성과 외로운 심정을 잘 표현하여 산골의 풍경을 절경으로 만든다. 솜이불에 파묻혀 가물거리는 호롱불에 서책을 벗삼아 자연에 동화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서경숙 작가의 서경적인 심화를 감상할 수 있을까. 전개부로 이어지는 소나무와의 만남이 산골 생활 속에서도 책을 가까이하며 삶을 정결하게 지켜나갔던 작가의 선비정신의 가치를 전해준다. 그녀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이 삶의 진통과 창작의 고뇌 속에서 태어난다. ‘소나무는 아무 반항 없이 껍질과 살을 모두 주고 허연 뼈를 드러낸 채 사람 대신 수없이 죽어갔다.’는 표현처럼, 언어도 맛있게 잘 부린다. 문장은 수필의 생명이다. 롤랑바르트의 말대로, 그녀는 말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떤 언어적 물질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미물 거머리는 지금도 무공해로 농사짓는 논에는 버글거리지만, 스타킹을 신으면 제 아무리 찰거머리라도 붙을 재간이 없다. 딸집에서 아이를 봐줄 때다. 컨벤션센터 같은 큰 건물에 아침이면 청년 남녀들이 구호를 외치고 나올 때는 모두 까만 정장을 쭉쭉 빼입어서 큰 회사의 신입 사원들이 교육을 받는 줄 알았다. 밤에 이웃에 들리는 소리는 부모에게 돈 보내라면서 악을 쓰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하지 못할 말을 해댄다 하였다. 아이들 교육상 이런 불한당 같은 놈들은 동네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민들이 몰려가서 농성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갓 사회에 나온 청년들이 끼리끼리 연줄로 엮인 다단계 단체였다. 이런 허황한 일은 국가에도 큰 손실을 가져온다.
- <인간 거머리> 중에서 -
또 하나의 서경숙 수필의 중요한 내적 특성 중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저항성을 통한 현실비판이다. 수필의 상당수 작품들이 현실참여를 통한, 구원 구제의 문학이라는 특성에 기초하여 저항성의 추구로 설정되는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가치에 현혹되어 영혼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경향성을 잘 파악하고, 안식의 문학, 영혼의 문학인 수필의 목적을 제대로 살려서 독자로 하여금 이런 부정적 사고로부터의 탈피를 도와주려고 한다. <인간 거머리>는 영안으로 우리 삶과 관계를 꿰뚫고 있는 작품이다. 젊은이들의 물질주의 경도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보여주는 수필이기도 하다. 그렇다. 살아가면서 직장을 얻고 돈을 번다는 것, 그것도 번듯하고 큰 건물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 일인가. 직장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의 새로운 운명이 직조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녀가 본 젊은이들은 남의 돈을 피처럼 빨아먹는 다단계 회사원들이다. 작가는 발단부에서 ‘음흉한 근성을 삶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인간은 거머리다.’라고 규정한다.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좇아 육체적 근무 속 고난을 승화시키며 세상 속 건전한 청년의 삶을 바라보고자 하는 그녀는 그 젊은이의 화려한 외관에 초라한 영혼임을 인식하며, 그들에게 일확천금은 절대 없다고 질타한다. 인간적인 삶의 길을 찾으라고 촉구하는 그녀의 지성인적 모습이 성스럽기만 한 수필이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내 오늘은 잡초를 못 봅는 한이 있어도’하고, 벌통 앞을 지키고 있다가, 파리채로 댓바람에 어정거리는 말벌 다섯 마리나 잡았다. 강적이 없어지자 꿀벌들은 금방 생기가 돌았다. 금세 모두 총출동되어서 활개를 치며 자유롭게 팔팔거리며, 거침없이 드나드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 사회에도 말벌 같은 인간성만 제거된다면, 저런 평화가 올 텐데.’ 유심히 바라보면서 말벌의 횡포는 벌 농가에도 피해가 막심하다. 꿀벌이고 사람이고 간에 꼭 필요한 존재를 제자리에 갈 수 있도록 또 보호해 주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시답잖은 존재들이 가로막는 현상은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 잠시지만, 꿀벌들의 자유는 내가 열어 주었다는 뿌듯한 마음인지 말벌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꿀벌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자 가을바람이 마치 콸콸 흘러가는 개울물처럼 마음 속까지 시원함이 느껴졌다.
- <약육강식> 중에서 -
이 수필은 수필가인 작가의 현실의식을 담은 수필이다. 꿀벌의 자유를 찾아주기 위해 말벌 퇴치에 적극 나섬으로써 수필이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그리고 약자의 영혼을 치료하는 데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타자를 도구화하는 폭력적 기제에 대항하는 작가이며, 수필가는 인류의 교사여야 하고 영혼의 치료사인 까닭이다. 우리 사회는 양육강식의 사회다. 일단 약자가 강자로 인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삶을 건설적으로 변화시킬 만한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한다. 희생자라는 사실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강자에게 당한 피해의식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박혀 스스로를 부정적이고 인생의 실패자로 전락시킨다. 또한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작가는‘우리 사회에도 말벌 같은 인간성만 제거’되기만을 바란다. 의인은 이런 '위험'에서 약자를 벗어나게 해준다. 선을 선택한 이상, 어려운 이웃이 잇다는 걸 안 이상, 더 이상 피해의식의 덫에 빠져 아웃사이더나 실패자로 살아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지성인의 신념은 수필을 통해 선을 실천함으로써 약자나 타자를 도와 삶의 불안을 제어하는 것이다. 삶의 문학이자, 인간학인 수필은 실천적 지성을 통해 모든 이가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다고 하겠다.
III. 나가며
서경숙은 부드러운 곡선의 안식처가 있을 작가다. 서경숙 수필집을 읽고 나서 느낀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이분 글 참 재밌다.’였다. 문학신문사에서 본격수필이론을 접한 후라서 그런지 수필의 발전이 눈에 두드러진다. 서경숙 수필들은 맑고 잔잔한 샘물에 비유될 수 있을 정도다. 수필 속에는 잔잔한 감동이 있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정감이 있다. 깊은 깨달음의 경지가 느껴질 뿐만 아니라 수수하면서도 소박하고, 은근하면서도 조용하고 은은한 향취가 풍겨나고 삶의 진솔한 모습이 꾸밈없이 담겨 있다. 그녀는 깊은 의식과 상념으로 감성을 체계적으로 정리 압축하고, 다양한 시각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인간의 삶에 농축된 비의를 예리하게 포착해서 살피고 있다. 이는 평소에 영혼과 마음을 늘상 갈고 닦은 까닭이다. 서경숙의 수필의 특성을 분석 판단해 보면, 서경숙 수필은 다음과 같이 네 부류, 가) 동반으로 가는 인연 열차- 조약돌처럼 나) 미의 발견과 반성적 성찰- 꿈을 일구는 자세 다) 작은 것에 담긴 큰 세상- 시골의 진풍경 라) 더 넓은 세상으로의 산책 –세상이 달라졌다로 범주화해 볼 수 있다. 풍부한 인생 경험과 지혜가 좋은 수필집이 되도록 해서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덧붙인다.
들뢰즈에 따르면, 존재의 사유를 하는 사람과 되기의 사유를 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자신이 수필가이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사람과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가가 되는 사람은 다르다. 필자가 강의를 하면서 지켜본 바, 서경숙은 수필가이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수필을 씀으로써 자기를 위무하고, 나아가 수필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구원하려는 구도적인 자세로 인해 그녀의 수필은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문학보다 깊은 철학적 사유와 전통옹호 사상 그리고 사람다운 사람-되기 정신 속에 생명의 참된 의미와 본격수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수필을 통해 서경숙은 우리에게 전해준다. 자신에게 주어진 제도적 기호체계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응하는 수필가는 현대예술이나 철학의 과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수필이 문학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수필의 문학적 물음이 나를 넘어 사회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을 계기로 해서 평자가 제시하려고 하는 위대한 수필가 속에 서경숙도 이름을 새겨 넣을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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