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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진산(鎭山) 계룡산(鷄龍山)에서 읊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거제시 계룡산(鷄龍山)은 거제도의 진산(鎭山)이자 주산(主山)으로, 높이 566m의 산이다. 거제도 중앙에 우뚝 솟아, 동서남북 4개의 산이 마치 머리를 조아리듯이 하고 있는데 북쪽의 대금산, 동쪽의 옥녀봉, 남쪽에는 가라산(585m)과 노자산, 서쪽은 산방산이 그들이다. 계룡산의 동쪽으로는 고현만에서 문동에 이르기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서쪽에는 거제면과 한려해상국립공원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1) 거제도 계룡산에 올라(登鷄龍) / 이윤(李胤) 1506년.
詩成寫蒼石 시를 이루자 바위에 쓰니
快若麻姑搔 시원스럽기 마고가 긁는 듯,
盡日窮壯觀 온종일 마음껏 보는 장관
眼底無纖毫 눈 아래 털끝만한 장애물도 없네.
한나라 채경(蔡經)이 마고(麻姑)라는 선녀(仙女)를 만나서 그녀의 손톱이 긴 것을 보고 속으로, “그 손톱으로 가려운 데를 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마고가 등을 긁어 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모두 해결된다는 뜻으로 시름겨운 현재의 귀양살이가 풀려서 고향으로 돌아가길 기원하는 이윤(李胤)선생의 마음을 나타낸 글이다.
◯ 이려(李膂 1484∼1512) 선생은 조선 중기 문신이고 본관은 고성이씨, 자는 강재(强哉)이다.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해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거제로 이배되었고, 형 쌍매당 이윤(李胤) 선생이 앞선 무오사화로 1498년~1500년까지 거제시 신현읍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다시 갑자사화로 연좌되어 거제도에서 아우들(이전,이육,이려)과 함께 유배된다. 당시 거제도에는 이려선생의 4형제와, 홍언승 선생의 4형제, 이행, 김세필, 최숙생 등이 함께 귀양살이 하며 교분을 나누었다. 1506년 봄에 거제로 이배되어, 여러 유배자와 함께 꽃구경하다가, 그리운 고향 생각에 아래 시를 짓게 된다. 칠언절구(七言絶句).
(2) 계룡산(鷄龍山) 1870년대 作. 조익찬(曺益贊)
珍重鷄龍數疊峯 진중한 계룡산, 겹겹의 봉우리,
上遊日暮月惟東 올라가 노닐다 날 저무니 오직 동쪽 달만 떴구나.
座岩望景千年海 앉은 바위에서 바라본 경치는 천년의 바다일세.
橫路汗醒萬里風 험한 길에 젖은 땀, 만리 바람 불어 사라진다.
갈도(葛島, 해금강)
洛洛寒松無盡處 언제나 푸른 소나무 다함이 없는 곳,
層層石壁有碁蹤 층층 석벽에 바둑판의 흔적 있다네.
徐市過此銘於蹟 '서불과차' 새겨 자취 남겼으니
仙藥應生是邑中 선약(仙藥)은 응당 이 고을에 있으리라.
조선말기 경상우도 육군 대장이었던 조익찬(曺益贊) 장군이 거제도 계룡산에 올라가 해지자 보름달이 뜬, 장면을 보고 쓴 시가 첫 수(首)이다. 둘째 수(首)에 따르면, 해금강에 '서불과차' 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거제도에 서불이 새긴 자취가 있으니 이 고을에는 불사초(신선의 영약)이 있었던게 아닌가? 하며, 마지막 화두를 던지고 있다.
(3)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이 1560년경, 거제도의 주산(主山) 계룡산에 올라가 지은 ‘계룡산시(鷄龍山詩)‘는 총26절 104구로 이루어진 장문(長文)의 칠언고시(七言古詩) 한시(漢詩)로써, 운(韻) 자(字)는 ‘선(先)’이다.
선생은 1548년 거제도로 유배와 약13년 간 귀양 살다가 거제도 고현동에서 타계하신 분이다. 거제 유배동안 지은 유헌집(游軒集)을 통하여 많은 글을 남겨 거제도 유배문학의 큰 획을 그었고, 이 작품 ‘계룡산시‘는 10여 년째 귀양살이 하면서 자주 찾던 계룡산에 올라가 거제도 지세의 웅장함과 국토의 끝자락에서 보고 느낀 점을 표현했다. 또한 선생은 남명 조식,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의 성리학의 거두로써, 당시 편지로 학문을 주고받으며 거제가 성리학의 한 축을 담당케 한 인물이다.
이 글에서 거제도지역 지명이 나오는데 "오아포 오양역 가라산 구천동 유자도(죽도)" 등이 언급되어 있어 참으로 반갑다. 선생의 배소 위치를 대략 알 수 있는 문장이 있는데, 서쪽은 계룡산, 남쪽바다 고을현, 북쪽은 2개의 유자도가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구련(拘攣)병(손발이 굳어 못쓰게 된 병)이 걸린 것으로 보아 타계하기 직전인 1559년~1560년 사이에 이 글을 지으신 것 같다. 특히 작품 후반부에는 인간세상의 깨달음과 자연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병중에 아픈 몸인데도 불구하고,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인생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양 겨드랑이 날개가 가볍게 나부껴 훨훨 날아 볼까나" 마지막 이 표현은 저자가 마지막으로 이 땅에 남은 이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문장이다.
雞龍山在海中碧 계룡산은 푸른 바다 가운데 있어
崢嶸勢壓扶桑天 한껏 높은 산의 기세가 부상의 하늘을 압도한다.
鯨噴萬頃屹砥柱 고래가 물을 뿜는 아주 넓은 바다에 지주처럼 솟아나
滄波幾見爲桑田 푸른 물결이 몇 번이나 뽕나무 밭이 되어 오고갔나..
嚴巒競秀壯南鎭 바위산들이 다투듯 빼어나고 장엄한 남쪽의 진영은
東西百里根相連 동서 백리에 기인하여 서로 잇닿아 있다
環列關防趁要害 변방의 방어는 요해처에 따라 둘러 이어졌고
形勝八分山後前 지세가 뛰어나 八자로 나누어진 산의 앞뒤에 위치한다.
烏兒自古置大帥 오아포는 예로부터 대장수를 두어 다스리고
五浦烽火通危巓 다섯 포구에서 봉화가 가파른 산꼭대기로 통한다.
縣郭嚴排就民衆 고을현 성곽은 경비가 빈틈없어 대다수 백성이 줄지어 따르니
爲土中央公私便 고을땅(거제) 가운데에 관인과 백성이 편안해졌다.
烏壤廢堡且六歲 오양역의 무너진 보루 또 여섯 해인데
循一時見不念先 한때 돌아다니다가 예전엔 생각지 못한 것을 보았다네
國家德厚內外服 나라의 덕에 남녀의 옷이 두텁고
刁斗無警應萬年 야경의 동라(징)소리에 한결같아 만년에 응당할 일이다.
萬年若容一有梗 언제나 늘 용모가 한 개의 꽃자루와 같아서
絶嶼何自通援船 외딴 작은 섬에 어찌 몸소 도와 줄 배로 내왕하셨는지..
孤軍無復引聲勢 고립된 군사는 다시는 명성과 위세를 세울 수 없는데
有如魚鼈潢汙煎 물고기와 자라가 웅덩이를 더럽혀 마음 졸이는 것과 같음이다.
雄峙加羅是南趾 가라산 웅장한 고개 여기가 남녘의 발꿈치인데
遙拖練白走九川 먼 곳을 끌어당겨 자세히 보니 아홉 내(川,구천동)가 달리는구나.
龍種幾匹任自牧 용종(다대포)의 말은 몇 필이나 스스로 길러짐에 맡기었나
飢則有草渴有泉 주리면 풀을 먹고 목마르면 샘물 먹었지.
窮荒不及伯樂顧 궁벽하여 가난하니 백락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天閑十二今無傳 임금의 마굿간에는 이제 12년째나 소식이 없구나
三年驅點亦隨例 3년마다 하는 구점의 역은 또한 법식의 예에 따르나
惜哉誰能爲汝憐 애석하도다~ 누가 백성을 가엾게 여길까?
別有空羣矯矯性 성품을 바로잡아 고쳐서 백성을 동원함을 없애면 별천지라..
遊息不與同近阡 가까운 논두렁에도 한가지로 함께 못하면서 편히 쉰다네.
峯轉谷阻蹤不到 산봉우리 선회하다 골짜기에서 막혀 도달치 못하고
每至驅期晦雨煙 매번 말을 몰아내는 기한에는 그믐밤 빗속 안개가 덮는다.
求固循常汝無意 상례(常規)에 따라 가두어 불러들이니 너에겐 의미가 없다네
死首且買應不然 죽은 머리를 또한 사들여도 아마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北有二島如母子 모자(母子) 같은 섬이 북쪽에 두 개 있는데
森立柚樹擅地偏 후미진 땅에 제멋대로 빽빽하게 유자나무가 들어섰네.
貫冬豈但柚可賞 겨울 내내 어찌하여 단지 유자나무만 즐기리오
環島衆植春常延 섬 둘레에 무리지어 심어놓아 봄이면 항상 넓게 퍼진다.
其中㝡愛有一木 그 중에 최고로 사랑하는 나무가 하나 있는데
諺號甘陽功可甄 속담에 일컬어 "햇빛이 많아 맛이 좋은데 질그릇을 공치사한다네“
蒸暑卑濕憎蚊蚋 찌는 무더위와 저지대 습기가 많아 모기가 극성을 부리고
羣飛拍空逐腥羶 떼를 지어 날아다녀 손뼉을 쳐도 쓸데없고 비린내와 노린내가 뒤따라 풍긴다.
投罅沿物變黑白 물건을 쫓아 그 틈에 달려드니 검고 희게 변하면서
汙我豆實玷我籩 나의 제기그릇이 이지러지도록 나의 제물(祭物)을 더럽힌다.
爰削木皮搗作粘 이에 나무껍질을 깍아 질펀하게 찧어 만들어
可縛巧鼠塗烏鳶 얽어 놓으니 약삭빠른 쥐를 잡아 솔개와 까마귀가 먹게 한다.
矧玆尋香無不到 하물며 이에 냄새를 찾아 물으니, 설명하지 못하고 따지지도 않는다.
便觸翅股紛自纏 문득 넓적다리 안쪽에 닿아 찌르면 스스로 얽매여 번잡하다.
前羅後陷快可盡 먼저 그물을 친 후에는 함정에 빠져, 통쾌히 없애니
庶潔飮食安寢眠 음식이 넉넉하고 조촐하여 편안히 잠을 잔다네.
扁曰君子自我始 현판에서 가로되, "군자는 자아가 근원이라"
其用豈下于烏圓 그것을 행하니 어찌 고양이보다 낮게 하리오.
其西氣接南海縣 아~ 가을 기운을 남해현에 붙이니
錦山兒戲敢比肩 금산의 아이들이 감히 어깨를 견주구나.
雲帆風檣劈高浪 구름속의 배는 돛대 가득 바람을 맞아 높은 물결을 가르고
一望浩浩浮坤乾 한번 바라보니 넓고 광대하여 하늘과 땅이 떠다니네.
(4) ‘계룡산’ 시편에 등장하는 거제도의 지명들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고려말기 당시 거제섬은 왜구가 눈앞에 놓여 있었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요해처(要害處), 즉 적을 막기에 긴요한 용반호거(龍蟠虎踞)의 땅이었다. 現 가배량에는 당시 오아포 경상우수영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고려말기에는 해상방어를 위해 가라산방어소를 설치하였고, 조선태종 때 수군절도사(수구도안무처치사, 정3품) 대장군이 거제해상을 사실상 통치했다. 이후 경상우수영으로 바뀌면서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1550년대 당시 거제도는, 영등포(구영등) 옥포 지세포 조라포(구조라) 오아포(가라산) 다섯 포구에서 봉화가 처음 올려, 서울로 위급함을 알렸다. ‘오아포‘의 지명어원은 2가지인데, 고대 우리 고유말 "오아"는 온전, 완전하다는 의미이니 오아포(烏兒浦)는 "완전무결한 항구"로 해석해도 되고, 덧붙여 ≪孟子≫편에 따라, "오획(烏獲)같은 아이" 즉 '힘센 무인이 지키는 곳'으로 해석해도 된다.
그리고 現 구천동(九川洞)을 당시 구천장이라고도 했는데 선생이 전하는 말로는 아홉 굽이의 하천(아홉 내)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또한 용종포(現 다대포)는 많은 수의 말을 키우는 좋은 목장지였고 그 말의 우수함을 칭찬한다.
그 옛날 거제도는 고대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써 교역에 의존해 살아왔다. 우리나라 남부해안 지역과 제주도 대마도 이끼섬 큐우슈우 등지로 왕래하여 재정이 풍부하였고 여러 문화가 용광로처럼 융해되어 다양성과 역동성이 넘쳐난 곳이기도 했다. 삼국시대 백제국이 조수를 이용하여, 물품과 재화가 서로 옮겨가며 일본과 무역을 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간 곳이라고 선생은 언급한다. 또한 국토의 끝이 대마도라 일컫는 바, 이 당시 대마도는 우리나라 영토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 거제도는 거대한 목장지였다. 그러므로 정황(丁熿 ) 선생은 3년마다 하는 구점의 역(방목한 말을 점검)은 또한 법식의 예에 따르나 동원된 백성들의 고충이 크다 하시고, 고현성 북쪽에는 모자(母子) 같은 섬에 빽빽이 유자나무가 들어서 있다한다. 지금의 죽도와 유자도(귤도)를 말함이다. 이에 “거제유자가 맛이 좋은데 유자를 담은 질그릇을 공치사한다”하며 거제유자를 찬양한다.
潮通商賈百濟國 조수를 이용하여 백제국이 통상하고 장사를 했다는데
昇平物貨相貿遷 나라가 태평하여 물품과 재화가 서로 옮겨가며 무역을 했었다.
惟東案對是對馬 생각해보니, 대마도를 마주보며 땅의 경계에서 동쪽으로 갔을 꺼고
晴日分明一眸邊 맑은 날에 한번 훑어보아도 또렷이 국토의 끝(대마도)이 보인다.
陋夷獸心而人面 오랑캐는 천하며 사람 얼굴에 짐승처럼 사납고 야만적이고
頻頻乞求溪壑塡 빈빈하게 남에게 구걸하여 끝없는 욕심이 가득 하다
嶺南之入且鉅萬 영남에 침입함에 또 만금을 버렸으니
朝廷胡不愛其捐 조정에서 어찌 그 버림을 아깝게 여기지 아니했으랴
當因其絶議須熟 마땅히 그것을 단절하기 위해 반드시 면밀히 의논해야 하며
縱不拒來宜與權 설령 그 후로도 거부하지 못하더라도 마땅히 더불어 권해야 한다.
輸無用貨取有用 수출은 무용한 재화로 하고 취해 오는 것은 유용한 재화로 사용해,
黠奴巧計今舍㫋 영리한 종에게 지금 집과 깃발을 공교하게 계산하도록 하자.
伊余流落托山足 또한 내가 떨어져 내린 타향살이 산기슭에 의지한지도
三度花開極嬋姸 세 번이나 꽃이 피었는데도 곱고도 선연 하구나.
事同零陵不可出 일은 영릉(零陵,九疑)과 같아 감히 나갈 수가 없어
國於其下阻攀緣 나라가 그 아래로 원조해 줌이 막혔다.
杖頭生苔屨滿粉 지팡이 손잡이에 이끼가 생기고 신발엔 먼지가 가득하니
屋我平生十餘椽 내 평생 지붕에다 서까래 열 남짓을 올렸구나.
堂枕碧澗玲瓏水 집에서 베개 베고 누우니 푸른 물 골짜기 아름답고 맑은 물 시내,
吾其智兮纓可湔 나는 그 지혜의 물에 갓끈을 가히 씻을만하구나
窻排四山雲䯻立 창을 밀어 젖히니 사면이 산이라 구름 덮인 산봉우리가 서있어
吾其仁兮眼可穿 나는 그 인자함에 눈을 가히 뚫어지게 본다.
君子(似)哉松與柏 군자는 소나무와 더불어 측백나무를 닮았다는데
歲寒共汝幽盟堅 너는 추운겨울에도 한가지로 그윽한 맹세는 변하지 않으리라.
柳州誤作囚山賦 (유종원이) 유주(영주 永州)에서 수산부를 잘못 지어서
豈不爲多洞壑專 어찌 깊고 큰 골짜기에 오로지 차지하지 않았나
孰云吾其貧且窶 누가 말하랴. 나의 집이 대단히 가난하다고....
有山有水可盤旋 산과 물이 있어 꾸불꾸불 돌아다닐 수 있는데.
朝以及夕亦云幸 아침부터 저녁까지 또한 행복하니
衣雖懸鶉有分焉 비록 노닥노닥 기운 옷이지만 분수가 있다네.
求之分外不知命 구하려 하여도 분수에 넘쳐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지만
苟知命矣是爲賢 진실로 하늘의 뜻을 깨달으면 이에 현명하다 하겠지
四德範圍鐫石字 사덕(四德,인의예지)의 범위를 돌에 글자를 새겨 넣고
解詩斤正考槃篇 고반편(考槃篇) 시경을 이해시켜서 밝게 살펴 바로잡는다.
暮雲孤嘯懷虞帝 저물녁의 구름 외로이 읊조릴 때, 순 임금을 떠올리고
夜月深林拜杜鵑 무성한 수풀에 뜬 야밤의 달, 두견새에 절을 올린다.
容顔雖保涪陵老 얼굴을 아무리 그대로 유지할래도 거품같이 차차 쇠하여 늙어가고
薪水且絶吉陽仙 땔감나무로 밥을 지어 끝내니 인간세상 신선같이 상서롭구나.
古固有玆我其僭 예로부터 참으로 나의 주제넘음이 여기에 있어
豈變初心沛與顚 어찌하여 나의 초심이 변하는지.. 비가 쏟아지니 엎드리게 되구나
雨邊栽菊北窻下 비 온 후 북쪽 창 아래 모퉁이에 국화를 심고는
爲愛寒花霜雪鮮 늦가을 국화꽃을 사랑하기에 서리와 눈도 고와 보인다.
簷前種薑十餘本 처마 끝에 열 남짓 생강 뿌리를 심고는
神明可通邪穢蠲 천지 신령에게 사악하고 더러운 것을 밝게 하여 달라고 빌었다.
於焉逍遙以卒歲 어느새 한해를 보내면서 슬슬 돌아다녀도
豈念身是爲拘攣 손발이 굳어 못쓰게 된, 이런 몸이 어찌 가엾지 않는가?
何當一凌高頂望 높은 꼭대기에서 바라보니 어찌하여 순간 업신여겨 보이는가?
兩腋羽翰飛翩翩 양 겨드랑이 날개가 가볍게 나부껴 훨훨 날아 볼까나.
[주1] 지주(砥柱) : 중국 하남성 섬주의 동쪽 황하 가운데 있는 작은 산이다. 모양이 기둥과 비슷하고 황하의 물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난세에도 의연한 절의를 지켜 굴하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2] 5포구 봉화(五浦烽火) : 옥포 옥산(옥녀봉), 지세포 눌일곶(와현 지세포), 가배량(남망봉대), 가라산(갈곶망), 등산망.
[주3] 백락(伯樂-본명:孫陽)은 비루먹어서 아무리 비실거리는 말이라도 그 말이 천리마임을 알아내는 혜안을 가진 명수(名手)였다. 중국 주(周)나라 사람.
[주4] 구점(驅點) : 목장에서 기르는 국마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현장 감사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정기적으로 시행해야 할 일이지만, 구점의 역(役)에는 백성들이 몇백 몇 천의 인원이 동원되어 농번기나 흉년에는 그 고역이 상당했다.
[주5] 감양공가견(甘陽功可甄) : 양지바른 곳 땜에 잘자랐는데 나무가 좋아서라 한다네
[주6] 수산부(囚山賦) : 당나라의 문인 유종원(柳宗元)은「산에 갇힌 사람의 노래」(囚山賦)를 지은 일이 있다. 영주(永州)에서 폄직되어 있을때 산에 갇혀 있다는 뜻을 붙여 지은 시이다. 고달픈 유배 생활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주7] 사덕(四德) :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天道(천도)의 네가지 덕인 元(원), 亨(형), 利(이), 貞(정). 군자(君子)가 행(行)해야 할 네 가지 덕목인 仁(인), 義(의), 禮(예), 智(지). 여자(女子)로서 구비(具備)해야 할 네 가지 품성(稟性)인 마음씨, 말씨, 맵시, 솜씨. 인륜의 네 가지 덕목인 孝(효), 悌(제), 信(신). 忠(충).
[주8] 고반편(考槃篇) : 고반은 시경의 편 이름인데 은자(隱者)가 산기슭 골짜기 사이에 살고 있음을 읊은 것이다.
● 김진규(金鎭圭) 선생이 1689년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거제여상 터에 유배 와서 지은 '망계룡산기(望鷄龍山記)'은 선생의 선산이 있는 충청도 지역의 계룡산과 거제 계룡산의 이름이 같은 걸 알고 자신의 귀양살이 동안 많은 위안을 삼았다는 내용이다. 또한 산의 위용과 아름다움이 충청도 계룡산과 유사하여 자산(玆山), 즉 짙푸른 색에 더한 검은 산으로 표현했는데, 조선시대 유배 간 학자들은 그 지역의 수려한 산 이름을 대개 '현산(玆山)' 또는 '자산(玆山)'이라 표현했다(흑산도 남해도 거제도 등). 또한 “거제읍지 1759년 여지도서편”에는 계룡산은 거제부의 주산으로 읍치 관청의 북동쪽 5리, 대금산 내맥이 이어진 산줄기이다[鷄龍山 府主山在府東北五里大金山來脈].
그리고 1881년 8월, 이유원(李裕元)의 거제향교 풍화루중수기(岐城鄕校風化樓重修記) 내용 중에 계룡산을 보고 감탄한 글이 있다. ‘계룡산은 주봉으로써 꾸불꾸불하게 산줄기를 이루며, 사슴골(거제면 녹반골)이 넓어지니 포구가 즐거운 표정이다. 그런 기운에서 문명이 나온다하네. 나는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돌아왔다.’[以鷄山爲主峯 落脉蜿蜒 拓鹿洞而面鷰浦 毓文明之氣 余欽歎而歸]
(5) 망 계룡산 기(望鷄龍山記) / 김진규(金鎭圭) 거제유배 1689~1694년.
거제도에는 산이 많은데 높고 험한 산이 쭈빗하고 겹겹이 둘러싸여 겹쳐있다. 그리고 산이 최고로 뛰어나게 높고 우뚝 서 있어 어떤 때에 큰 인물이 나올 것 같다. 나는 일찍부터 기대하고 거제토착민에게 "산 이름 무엇입니까?" 물으니, 그 사람이 말하길, "이 산이 우리 고을 읍진(주봉)이다." "대지에서 나타났기에 그 이름이 '계룡'이다" "자손들은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나는 이 소리를 듣고 놀라서 물으니, "또 다른 산 이름이다." 이에 우리 고향 충청도 연산현진(논산)의 이름과 같구나. 어찌하여 이같이 또 같은 이름일까? 남북은 먼데, 옛날에 이름 지은 자는 서로 알거나 방문하지 않았을 텐데 충청도 계룡산과 거제 계룡산 이름이 같구나. 각각 같은 의미로 파악하는데 이를 비록 알 수 없었다하더라도 나는 이름을 도용한 것에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슬프구나~ 하늘도 무심하여, 나는 고향에서 멀리 떠나 가, 이 검은 산(玆山) 아래에 처소가 있다. 고향 땅을 떠올리는 생각이나 하는 것에 작은 위안이 된다. 나는 벼슬살이를 탐내 하늘의 저주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느끼고 마음을 움직여 반성하는 깨달음으로써 멀리 떠나있다.
보통사람은 고향을 떠나면 벼슬살이로 가지만 나는 추방당해 떠돌다가 지금은 이전에 추방당해 귀양살이 하고 있다. 영남 해안 변방 요새에서는 불가함도 없음이라. 이로서 검다는 것으로 불리어져 이와 같은 지난 인연이 있게 되었다. 조석으로 산 이름을 듣는데 고향의 진영도 이와 같겠구나. 푸른빛이나 바랜 색의 형상으로 뛰어나게 우뚝 솟아 있고 또 간략히, 서로의 눈에 삼삼하기까지 하니 이에 말미암아 미루어 생각하는 이유다. 봉분은 조상의 터전(고향)과 더불어, 다 마음속에 있는데 옛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유배 온 사람들이 넘어가는 곳이라고.. 볼만하고 맛볼만한 곳인지라, 나라 안의 사람들이 즐거워 할 곳이다. 이제 자산(玆山)은 아마도 고향에서 맛보던(감상)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즉 내 생애가 이와 같음이라, 이로서 바다 가운데 섬이 나의 고향과 같게 느껴지고 산을 보는 것으로서, 고향 떠나 벼슬살이가 어떠하냐고? 하늘이 슬퍼하는 것 같구나. 만일에 고향 동네로 살아 돌아간다면 뜻밖의 행운이다. 또한 한번 자산에 올라 지난 인연을 돌려 갚고 잇닿아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다만 과오로 돌아가지 못해, 전날에 도움이 있기를 바랄뿐이다. 뛰어나고 은둔한 은사를 끝까지 찾아보고는 저쪽과 견주어보니 같지는 아니하다. 옛날에 이름을 취해 세운 뜻을 헤아릴 뿐, 그러나 감히 바라는 바가 아닌지라, 부족하나마 내 마음의 뜻을 이에 기록해 남겨 놓고자 한다.
[裳郡多山 嶂嶠重複環遶 而有巍然最高而大者出於其間 余始至而望之 問土人曰山何名 人曰此爲吾邑鎭 鷄龍之名 著於輿地 子豈未之知乎 余聞而驚曰 異哉山名 此吾故鄕湖西連山縣鎭之名也 何爲而又名於此 南北遠 古之名之者 不相聞歟 彼此之名 各有取義歟 是雖未可知也 余於此竊有所感 嗟乎 豈天憐余去鄕遠遷 使處玆山之下 少慰懷土之思耶 抑天惡余之狃於仕宦 不歸故鄕 使遷此而因以感發省悟耶 凡人之離土 有以仕宦 有以流遷 今余旣流遷 嶺海關塞 無不可也 而乃來于玆 是若有宿緣 而朝夕聞山之名則是故鄕之鎭 而巍然之形蒼然之色 又略相髣髴焉 由此而想像 丘壠與桑梓 皆在眼中 古人云越之流人 見所甞見於國中者喜 今玆山盖無異乎故鄕之甞見 然則雖沒齒於此 以海島爲吾鄕 其視以仕宦離土何如也 若天哀之 萬一幸而生還田里 亦當一登玆山 以償宿緣 歸居于連 庶補前日不歸之過 而窮探山林之勝 以較彼 此同異 而究古取名之義 然而非所敢望也 聊志之以爲記 ]
● 1504년 갑자사화에 연류되어 약 25명 정도의 중앙관료가 거제시 舊 신현읍 일대에 이배되거나 유배되어 왔다. 이후 거제 유배객은 어느 정도 거제의 환경과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를 위안하는 자위(自慰)의 정서로 바뀌면서 긍정적 정서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에 유배문학도 교류를 통한 차운(次韻)·화운(和韻)·기증(寄贈)·연구(聯句)한 시(詩)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여러 인물들과 교류를 통해, 자신이 느낀 좌절과 고독감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오히려 스스로를 되돌아 볼 기회를 찾는다. 자조(自照)의 정서로 가닥을 잡게 된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고, 혼란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를 형성해 간다. “성찰과 순명(順命)” 그리고 “진실의 발견”의 과정이 이어짐을 엿볼 수 있다.
(6) 1506년 음력 9월 6일 날, 택지(擇之 李荇이행), 자백(子伯 이윤)과 공석(公碩 김세필) 및 자선(子善 이전), 원숙(元叔 이육), 강재(強哉 이려)와 함께 거제 주봉(主峯)계룡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연구(聯句)로 짓는다. 3수(三首)[六日 從子伯擇之及子善 元叔 强哉 登主峰望海 聯句三首]. 중종반정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거제 계룡산에 올라, 다음 한시 연구(聯句)를 귀양살이 벗들과 주고받는다. 9일 날 저녁 늦게 사면령이 거제현령에게 도착하고, 10일 날 거제유배객은 이를 통보받고 모두 견내량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① 時序重陽近 절서는 중양절이 다가오고 -자백- 이윤
江山落日催 강산에 지는 해는 바쁘구나 -택지- 이행
東南迷遠目 동남쪽 멀리 눈길은 아득한데 -공석- 김세필
衰病且深杯 병약한 몸으로 깊은 술잔 마신다. -자백- 이윤
萬里心逾壯 만리 밖의 마음은 더욱 씩씩하고 -강재- 이려
孤雲首屢廻 외로운 구름에 고개 자주 돌린다 -택지- 이행
乘桴千古意 뗏목 띄우는 것 천고의 뜻이라, -공석- 김세필
人事轉悠哉 사람의 일은 더욱 아득해지구나 -자선- 이전
② 目斷滄溟夕 멀리 푸른 바다의 저녁 바라보니 -원숙- 이육
天高九月秋 하늘이 높은 구월의 가을이구려 -공석- 김세필
登臨今日意 오늘 이 산에 올라온 뜻은 -택지- 이행
風物暮年愁 풍물은 늘그막의 시름이지
夷島蜒涎外 푸른 바다 저편의 오랑캐 섬, -자백-이윤
淸樽鰈海頭 접해 가에서 맑은 술잔을 나누네 -공석-김세필
坐中誰主客 좌중에 누가 주인이고 객인가 -자선- 이전
談笑付悠悠 이야기와 웃음이 오래도록 그치질 않네. -자백- 이윤
③ 未覺吾身遠 내 몸이 먼 곳에 있음을 모르겠고 -택지- 이행
唯看馬島平 오직 수평선에 걸린 대마도만 본다. -공석- 김세필
層雲生眼底 겹겹의 구름은 눈 아래서 일어나고 -자선- 이전
斜日媚秋淸 기운 해는 맑은 가을에 아양을 떠네. -택지- 이행
衰鬢淵明菊 쇠한 머리털은 도연명의 국화요 -자백- 이윤
歸心張翰羹 돌아가고픈 마음 장한의 국이로다. -택지- 이행
悠悠今已幸 유유한 요새 생활도 다행이니
莫惜醉宜城 의성에서 취하는 걸 아까워 말게나. -공석-김세필
[주1] 뗏목 띄우는 것 : 무도한 세상을 피해 바다에 뗏목을 띄워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않는지라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리라.[道不行 乘桴 浮于海]”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주2] 접해(鰈海) : 우리나라 바다를 뜻한다. 우리나라 바다에 가자미가 많이 난다 하여 우리나라를 접역(鰈域)이라 부른다.
[주3] 도연명(陶淵明)의 국화 : 도연명(陶淵明)의 〈잡시(雜詩)〉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하였다.
[주4] 장한(張翰)의 국 : 후한(後漢) 때 오군(吳郡) 사람인 장한(張翰)이 낙양(洛陽)에서 벼슬하다가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순챗국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고사를 차용하여 고향 생각을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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