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10장 가정은 행복의 터전이다
3. 인종과 국경을 무너뜨린 감동의 축복결혼식
1982년 7월 1일, 문선명은 미국의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2,075쌍 축복결혼식을 집례했다. 70개 이상의 국가에서 온 신랑신부들이 국제합동축복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들의 나이는 20살부터 62살까지 다양했으며 인종과 문화, 학력 등도 가지각색이었다. 이 축복식은 미국에서 열린 첫 번째 대규모 축복결혼식이었다. 1982년은 정치적으로 동서 대립이 심하던 때였고 경제적으로도 오늘날처럼 잘살지 못하던 때였다. 이러한 때에 70개국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참으로 진귀한 일이었다.
2,075쌍 축복식은 인종과 종교, 문화를 완전히 뛰어넘어 전 세계인의 축제가 되었다. 동서 화합을 이루고 종교 갈등과 빈부격차를 치유하는 평화의 마당이 된 것이다. 그날 축복식의 주제는 '이상가정을 통한 세계평화'였다. 문선명은 신랑 신부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투쟁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여자의 책임은 남자의 책임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을 버려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내가 먼저'라는 태도를 가질 여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남편과 아이들, 부모,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이 우선해서 처리해야 할 대상임을 명심하십시오. 남편은 아내가 미래의 영광을 위해 순간을 희생하는 가치를 기억할 수 있도록 아내를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초창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통일교는 미국에서 언론과 기성종교로부터 비판과 반대, 핍박을 받았다. 그럼에도 문선명과 신도들은 꿋꿋하게 신앙의 길을 갔으며 신도들이 늘어나면서 축복결혼식에 참여하는 청년들과 기성가정들도 늘어났다.
석 달 후인 10월14일에는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6천 쌍 축복결혼식을 집례했다. 축복식의 주제는 미국에서와 똑같이 '이상가정을 통한 세계평화'였다. 문선명이 늘 신랑신부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참다운 이상가정을 통해 세계평화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그날 축복식에 참여한 신랑신부들은 85개 나라에서 모였다. 산 넘고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한국으로 모여든 것이다. 이렇게 하여 1982년에 열린 두 번의 축복식에서 모두 8천 쌍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문선명은 그들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가정은 우리가 사랑을 주고받고, 태어나고 자라고, 조화와 기쁨을 경험하는 배움의 장입니다. 가족의 사랑 속에서 성장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배우자나 자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 서로에 대해 그리고 모든 인류에 대해 가장 높은 기준으로 사랑하고 봉사하며 헌신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시키기 위한 많은 일들을 해왔고,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축복결혼은 1980년대에 여러 번 이루어졌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의 축복결혼식은 통일교인들에게 참으로 뜻 깊었다. 처음 합동결혼식을 올리던 27년 전만 해도 신랑신부의 가족들이 몰려와 난장판을 치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딸 내놓아라. 내 아들 내놓아라" 한바탕 욕을 퍼부었던 부모들은 이제 한 명도 없다. 오히려 축복결혼을 받기 위해 전 세계에서 한국 땅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88년의 국제축복결혼식은 10월 30일에 6,516쌍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의식은 경기도 용인의 일화 맥콜 대강당에서 치러졌다. 축복식에 참여한 부부들은 대부분 한일(韓日) 가정이었다. 한국 신랑과 일본 신부, 일본 신랑과 한국 신부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한국과 일본이 지닌 씻을 수 없는 불행한 과거를 용서하고 화합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88올림픽 후에 치러진 축복결혼식 후에도 문선명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1989년 1월 10일, 11일, 12일 3일에 걸쳐 세 번의 축복결혼식을 연이어 집전했다. 특히 1월 11일에 치러진 축복결혼식은 문선명을 비롯한 신도들에게 뜻 깊은 행사였다. 통일교 2세 가정의 72쌍이 서울의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이다. 1954년 온갖 역경을 딛고 출발한 통일교 첫 번째 식구들이 낳은 자녀들이 성장해 어느덧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통일교가 사악하다 하면서 갖은 비난과 험담을 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로 꿋꿋이 견뎌내 2세들이 결혼을 하는 나이에 이르렀다. 온갖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35년 동안 변함없이 신앙을 지켜온 신도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감개무량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의 많은 통일교 신랑신부들은 축복결혼 후 한국에 와서 살기를 바란다. 특히 일본의 신부들은 한국을 신앙의 성지로 여기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낯선 타국 땅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문선명은 한국으로 오는 신랑신부들을 위해 축복결혼이 끝나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주는 많은 일들을 했다. 신랑신부들은 처음에는 낯선 땅에서 두려운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곧 한국인이 되어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