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사건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때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 발생하는 것은 ‘소명’(calling) 사건이다. 에드가 멀린스(Edgar. Y. Mullins)는 소명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을 초대하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만일 하나님이 먼저 길을 마련하시고 우리를 그 길로 초대하시는 행위가 없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소명을 일반소명(general calling)과 특별소명(special calling)으로 구분한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것은 일반소명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소명으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오직 하나님이 특별히 예정한 사람들을 부르시는 특별 혹은 유효한 소명(effectual calling)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굳이 소명을 그렇게 분리시킬 필요가 있는가 하는 데 있다. 만일 소명을 이렇게 둘로 분리시켜 이해한다면 결국 하나님은 신뢰하기 어려운 분이 되지 않겠는가? 이는 한쪽 손에 누구든지 오기만 하면 구원해주겠다는 카드를 제시하면서, 다른 손에는 특별히 선택한 사람들이 이미 정해져있다는 숨겨진 카드를 가지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소명을 둘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사람들이 인용하는 본문 가운데 하나는 ‘혼인잔치 비유’다(마 22:1-14). 여기서는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은 자”가 서로 대립구도로 나타난다. 그래서 청함을 받은 자는 일반소명을 받은 사람이고, 택함을 받은 자는 특별소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논리로 본문이 해석되는 것이다. 언뜻 그럴 듯해 보이는 설명방식이지만, 이런 해석에는 중요한 문제가 간과되어 있다. 그것을 둘로 구분하게 된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그 기준은 바로 “예복”이었다(22:11-13). 하지만 이 성경본문을 이중소명으로 해석하면 이 예복의 의미를 놓치거나 왜곡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본문은 예복을 준비하지 않은 혼인잔치 손님이 결국 택함을 받지 못하고 내어쫓기게 되었다고 말한다. 만일 택함을 받은 자를 특별소명으로 해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예복을 주인이 미리 준비해서 제공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본문의 문맥상 그런 해석은 가능하지 않다. 누구나 초청을 받게 되었지만, 적어도 예복을 준비하는 것은 손님이 갖추어야 할 기본조건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명은 하나가 있을 뿐이다. 형식적이든 실질적이든 소명을 둘로 구분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특별소명은 하나님의 일반소명에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한 것이다. 그래서 데일 무디는 “누구든지 그것을 듣고 회개와 신앙으로 반응할 때 그것은 유효한 소명이 된다”고 주장했다.스탠리 그렌즈도 의미상으로는 일반소명과 특별소명을 구분한 듯했지만, 실제로는 일반적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들, 즉 회개와 믿음을 통해 복음에 응답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특별하게 받은 자들이라고 통합해서 설명했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43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