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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누가 뭐라든 오직 내 이익만 챙기자>의 줄거리:
지금 이 시각 현재도 풀가동 중인 천국에서만 받고, 이 땅에서는 오직 주기만 하는 것. 이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의 관계 맺음의 패턴입니다. 반면에 이 땅에서 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은 평생 죽을 때까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유익을 찾습니다. 이것이 평생 결핍감과 상실감과 피해의식에 매여서 손해만 보고 사는 이유입니다.
누가 뭐라든 오직 내 이익만 챙기자
(사도행전 20:13~38)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누가 뭐라든 오직 내 이익만 챙기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누가 뭐라든 오직 내 이익만 챙기자’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만나 권면합니다. 에베소 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에서는 이 권면이 유언과도 같은 것이 됩니다. 바울은 이제 다시는 에베소 교회를 마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령을 통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도 바울은 붙잡혀서 로마로 송치되고 두 차례 풀렸다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 결국 순교하게 됩니다. 본문의 내용은 에베소 교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여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에베소 교인들과 특히 장로들에게 유언처럼 남긴 말씀이니만큼 그 비중이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말씀을 정리할 수 있는 구절이 있다면 35절입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결론이자 핵심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목을 “누가 뭐라든 오직 내 이익만 챙기자”라고 정해보았습니다. 주라는 말씀과는 정반대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이익을 챙기는 것이 어떻게 주는 것이 될 수 있는지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이나 쌀을 주라는 것일까요? 혹은 시간과 노력과 재능을 주라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씀에 접근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 이 말씀에 관한 심각한 오해도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내 이익은 전혀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모두 진정한 유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엄격하게 따져보자면 상대로부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며 또한 진정으로 내게 유익한 일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죽을 때까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추구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너의 이익을 추구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해 없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입니다.
중요한 것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유익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추구해야 할 이익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 가지시는 첫 번째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마주하는 관계를 가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두에 둘 때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뜻은 나의 유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이유 또한 내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섭리 안에서 내 유익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나의 유익은 하나님의 첫 번째 관심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변 사람들과 나를 보실 때에, 내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된다는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의 유익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순간이라도 내 유익을 져버린다면 하나님의 뜻과 상충하는 것입니다. 이 땅을 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핵심이 나의 유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진실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어쭙잖게 “내 유익을 구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을 위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진정으로 구해야 할 이익은 놓치게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할 수도 없습니다. 나의 유익을 추구할 수 없다면 주님의 말씀대로 줄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라 하신 말씀조차도 결국은 주는 것이 내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복은 곧 유익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이익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익 추구는 어리석게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진짜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은 받음이 아니라 줌으로써 나타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실 때에 가장 먼저 생각하시는 것은 나의 유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유익을 제일 먼저 챙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내게 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내게 유익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8절에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라 하심은 받았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평강과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천국에 있으니 먼저 마음이 천국과 연결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이익을 챙기는 일에 어리석고 둔감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이익을 챙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쁘고 만족하고 행복하기 위한 모든 요소는 천국에 있으니 마음이 천국과 연결됨으로써 철저하게 이익을 챙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이익을 챙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만 땅에서 이익을 챙기는 방식은 관계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받으려 하지 말고 주려는 방향성을 고정시킴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정리해봅니다. 천국과의 관계에서 이익을 챙기는 방식은 무조건 받는 것입니다. 악착같이 받아야 하고, 절대적으로 받아야 하고,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받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땅과의 관계에서 이익을 챙기는 방식은 주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받으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손으로 직접 일하면서 선교비를 충당하였고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했던 바울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한 것은 목회를 하면서 생업을 위해 다른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행적과 말씀은 영적인 방향성을 제시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모든 것을 얻었기에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무엇을 얻고자 함이 없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주고자 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생업에 종사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이익을 악착같이 챙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천국과의 관계에서 받는 복을 챙기고, 땅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는 복을 챙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만날 때에 받으려고 하는 것은 주님의 기준으로 볼 때는 결코 복이 될 수 없고 유익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에게서 무엇이든 받으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손해를 보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설령 부부관계라 할지라도 사람의 관계이기에 각자가 이익을 추구해야 함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배우자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하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이익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주님의 기준에서 볼 때 스스로 손해를 보려고 안달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는 방향성으로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쭙잖게 희생이나 사랑이라는 말을 자꾸 손해와 연결을 시킵니다. 내가 손해를 자처함으로써 남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손해 보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주기만 하려는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손해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손해로 보이는 것은 주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입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희생과 손해를 언급하신 것은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기준에서 손해라 여겨지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세상과 하늘의 계산법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늘의 계산법으로 이익을 챙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 13~16절에서는 드로아에서 이루어진 철야 강론 뒤에 있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철야 강론 중에 3층 창가에서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졸다가 추락하여 죽었다가 살아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뒤에도 바울은 떡을 떼고 날이 밝도록 철야 강론을 하였고 조금도 쉬지 못한 채 드로아를 떠나게 됩니다. 드로아는 현재의 터키 북서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입니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남하하면 미둘레네, 기오, 사모가 있고 밀레도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은 밀레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에베소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 들르지 않고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전갈을 보내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17~38절의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기게 됩니다. 그 중심 내용이 35절의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부분이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장로들에게 모본을 보였음을 강조하였던 것은 장로들 또한 교인들에게 모본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유익을 위한다면 받는 것이 아닌 주는 것에 방향성을 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29~30절을 보면 이를 방해할 사람들이 나타날 것을 예고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교인들에게 주고자 하지 않고 받고자 하는 거짓교사나 이단들이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유언과도 같았던 마지막 당부의 핵심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였음을 전제하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대면하는 순간에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로써 이 땅에서 받으려 하지 말고 주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즉 진정한 이익이란 하늘에서 받는 것이며 땅에서는 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밀레도까지 이동한 것과 뒤에 장로들에게 내린 권면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살펴봅니다. 본문이 참 재미있습니다. 바울이 철야 강론을 끝내고 드로아를 떠날 때 특이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일행들을 먼저 배편으로 드로아에서 32km 정도 떨어진 남쪽 항구도시인 앗소로 보냅니다. 32km면 약 80리 길에 해당하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철야 강론에 지친 피곤한 몸을 이끌고 80리 길을 혼자 걸어갑니다. 그리고 이미 배를 타고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과 합류하게 됩니다. 바울은 왜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요?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기에 배를 타고 가면서 잠을 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렇게 했던 이유를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4~15절을 보면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일행과 떨어져 홀로 행동한 이유였습니다. 바로 전날에 유두고가 죽었다 살아난 사건은 일행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일행과 함께했다면 이 사건의 대화는 계속 언급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보다 자신이 언급되는 것을 꺼려하였기에 따로 떨어져서 80리 길을 혼자 걸어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기 이익을 챙긴 것이었습니다.
제가 강사로 다니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바울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2박 3일, 3박 4일 동안 아침과 저녁으로 3~5시간 동안 말씀을 전하면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러나 1년에 한두 번 있는 부흥회이기 때문에 교인들은 가능한 강사와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기 마련입니다. 강사로서 이러한 바람을 이해는 하지만 하나님과 마주하는 시간을 통해 내 이익을 챙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여겨집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유언과 드로아에서 철야로 강론하며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다 쏟아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와 동시에 사도 바울의 마음에서는 천국에 계신 하나님이 그리워지고 또한 하나님을 마주하고 계시는 주님이 그리워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떨어져서 홀로 산에 오르셨던 것처럼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80리 길을 홀로 걸어가기를 선택합니다. 몸은 철야 강론으로 지쳤지만 마음은 천국을 앙망하고 하나님을 앙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스스로의 체험과 이익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습니다. 사람들에 대해서는 주기만 하는 방향성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으로서 혼자 80리 길을 걸어가며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준비하신 천국의 이익을 받아 누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향할 때 하나님께서는 내 이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이유는 24시간 365일, 평생 마지막 날까지 우리에게 유익과 이익을 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오기를 기다리시며 모든 이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진정한 이익은 주님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게 됩니다. 하나님 자신과 그 외에 준비하신 모든 것들이 얼마나 다양한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마음에 전달되어서 기쁨과 평강과 행복으로 표현이 됩니다. 우리는 이 이익을 한순간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익을 받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홀로 걸으며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된 사도 바울의 방향성은 다시 사람들에게 주는 쪽으로 설정될 수 있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사람들에게는 줌으로써 이익을 얻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받으려는 기대를 하지 않게 됩니다.
본문에 기록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말씀은 복음서에서는 그대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을 보면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서 전해 들은 것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복음서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말씀의 진위를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을 보아도 주님께서 이러한 의도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짜 이익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나를 위한 이익을 생각하고 계시는데, 내가 나를 위한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없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방향성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만날 때에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은 주는 쪽으로 정해야 합니다. 타인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에 천국으로부터 계속해서 줄 수 있는 재료들이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에 천국과의 연결을 잊기 십상입니다. 십자가를 잊고 천국을 잊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사람과의 이해관계에 의식이 몰두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나를 위한 진정한 이익은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 천국을 잊지 않는 비결은 주어야 한다는 방향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 주어야 할 모든 것들이 천국으로부터 내게로 연결되어서 계속 흘러가게 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결국 “너에게 필요한 모든 좋은 것은 천국에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한시라도 천국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천국과 연결된 흐름이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익을 챙겼으면 이후의 인간관계는 무조건 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려는 방향성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를 통해서만 천국과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고 흐름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관계에서 줄 수 있는 유형무형의 모든 재료들이 천국으로부터 주어지게 됩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기 전에 먼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80리 길을 혼자 걸어갔던 사도 바울의 마음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천국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만을 위해 준비하신 이익을 챙길 것이고, 그로부터 기쁨과 평강과 행복을 누리게 된 이후에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이익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늘에 대해서는 받고 땅에 대해서는 주고자 하는 것이 나의 이익을 놓치지 않는 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을 전달함으로써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다만 내가 천국에서 받을 것을 다 받았다면 사람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해줄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면 나에게도 이익이 됩니다. 이를 통해 나와 천국과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나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천국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이익은 없기 때문입니다. 승진을 못해서 부장 자리를 놓칠지라도, 부동산 투자기회를 놓치더라도 실제로는 놓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있는 것이 독이 되기에 하나님께서 제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풀가동 중인 천국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할 때 천국과 연결된 흐름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배우자를 대할 때에도 받을 것에 집중한다면 천국을 놓치게 되지만 진짜 이익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나 역시 천국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32절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라고 유언과도 같은 말을 합니다. 은혜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의 여파로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게 하는 말씀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3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이르러 지금 이 시각에도 하나님을 마주하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이 은혜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은혜의 말씀이 에베소의 교인들과 장로들을 지킬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을 생활화한다는 것은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진정한 내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을 통해 내 이익을 챙기고 나면 땅에서 사람을 만날 때에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해주는 삶을 살며 천국과의 연결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나 깨나 불조심”이 아니라 “자나 깨나 이익 챙기기”입니다. 이익의 기준은 세상이 아닌 하늘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늘의 이익을 추구하고 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도 하루 종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한 뜻이 되어 여러분의 이익만을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땅에서는 주는 쪽으로만 방향을 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는 쪽으로 정한 방향성이 왜 내게 이익이 되는가를 직접 체험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뜻을 따라, 성령의 간절한 바람을 따라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 아버지가 갖고 계신 기준을 따라서 내 이익을 챙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