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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과 나를 못(?) 구분하시는 아버지>의 줄거리: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신다는 뜻은 예수님이 구하시는 것으로 여기시고 주신다는 것입니다. 조금 비유적으로 보자면 아버지께서 독생자이신 예수님과 나를 구분하지 못 하시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그만큼 예수님과 나의 연합이 깊고 진하고 철저해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님과 나를 못(?) 구분하시는 아버지
(요한복음 16:16~24)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과 나를 못(?) 구분하시는 아버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과 나를 못(?) 구분하시는 아버지”
본문의 중심 구절은 23절의 “그 날에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제목을 “예수님과 나를 못(?) 구분하시는 아버지”라고 했습니다만,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나를 구분을 안 하시면 안 하시지 구분을 못하실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비유할 정도로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는 “내 이름으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비유적으로 아버지께서 독생자이신 예수님과 나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예수님을 구분하지 못하실 수는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님과 구분이 안 되는 상태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구분이 안 될 정도이기에 아버지께서는 내가 구하는 것을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구하시는 것으로 여겨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과 연합의 상태는 언제 어디서나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한다면 예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구하면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는 말씀대로 받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아버지께 구하면 주십니다. 연합되어 있기에 독생자 예수님께서 구하시는 것인지 내가 구하는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어서 독생자가 구하는 것으로 여기시고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아버지께 구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구한 것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아버지! 지금 아버지께 구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라고 묻는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의 독생자 예수가 구하는 것인지, 네가 구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상태가 아버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예수님과 철저하게 연합하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는 말씀은 그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이면에는 예수님이 구하는 것으로 보일정도로 예수님과 철저하고 깊게 연합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성경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충고를 듣고 아버지께 나가 장자인 에서의 흉내를 냅니다. 이때 이삭은 나이가 많아 눈이 침침했기에 앞에 서있는 사람이 에서인지 야곱인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이삭은 에서가 털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만져보고자 합니다. 리브가는 이삭이 이렇게 할 것을 예상하고 염소 새끼를 잡아서 야곱의 팔과 목에 털을 두르게 했습니다. 이삭이 만지며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속아 넘어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는 말씀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과 연합된 상태가 너무 철저하기에 아버지께서 구분할 수 없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실 때에 구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독생자 예수님이 구하는 것인지 내가 구하는 것인지 구분을 못 하실 정도가 되면 예수님이 구하셨던 것을 다 들어주셨던 것처럼 내가 구하는 것도 들어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 성령님의 책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성령님의 책망의 이유는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께 연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에게도 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연합은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8절에서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연합할 때에 예수님의 윤곽으로부터 벗어나는 부분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나와 예수님이 연합함으로 누가 예수님이고 누가 나인지를 모를 정도로 연합하는 상태를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이 연합을 위해서 우리가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나의 차이점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그대로 나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차이가 벌어져 있는 상태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구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구해야 되고 예수 이름으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보실 때에 예수님이 구하는 것인지 내가 구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포개어져서 연합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신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구분하지 못하실 정도로 연합되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상태가 예수님과 너무 다르다면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을 수 있는 기도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우리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의 16~18절을 보면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수님과 내가 포개어질 때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알아서 십자가 예수님과 잘 포개어져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자가 될 때 무엇이든지 구하면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이 구하셨던 것처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이름으로 구하고 예수 이름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라고 기도를 마쳐야 연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포개어진 상태가 되면 구하기만 하고 끝내도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됩니다. 문제는 예수님과 엄청난 차이가 나서 확실하게 구분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예수 이름으로 구해봐야 예수 이름으로 주시는 것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하신 것은 부활하시고 40일을 머무시며 제자들을 만나실 것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승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동고동락하며 기적과 표적의 현장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이 일어날 것임을 반복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은 예수님 사역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은 이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동고동락했지만 그리스도로서는 전혀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의 연합도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은 3차원 세상에 대한 엑소도스(ἔξοδος) 즉 탈출이고 하늘 아버지가 계시는 4차원 천국으로 가시는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로서 하신 일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속사람이 3차원 세상을 탈출하여 4차원 천국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 통로를 가는 방법이 바로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제자들에게 어려웠던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자신들과 같이 계셔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이 계시면서 독립 전쟁과 국가 재건과 선민의 번영을 이루시겠다는 포부와 계획을 말씀하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라를 독립시킬 것이다! 나라를 재건할 것이다! 번영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만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과 차이나는 상태였기에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상하게만 들렸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못마땅하게 들렸을 것이고 말씀의 의미를 알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독립이나 번영을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의아해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도였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에 그리스도의 사역은 선민의 나라를 이방 민족들 위에 우뚝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기에 이에 대해 불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만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다!”라고 화내며 불평불만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상태는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까지도 이어집니다. 사도행전 1장 6~7절을 보면 “그들이 모였을 때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과 너무 달랐습니다.
이러한 다름의 핵심적 이유는 바로 세상에 속함과 세상에 속하지 않음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는 말씀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탈출시키는 엑소도스의 과정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에 예수님께는 기이할 정도로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온 인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을 간절하게 좋아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죽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예수님처럼 이 세상을 떠나고자 안달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죽음을 초연하게 맞이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을 동안 세상을 이토록 빠져나가고자 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자살은 세상을 빠져나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빠져나가는 것은 세상이 아닌 진짜 좋은 외계(外界)가 있음을 알아야 가능합니다. 자살은 그저 세상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지금도 전 세계의 기독교 종교인들은 제자들과 같은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이후의 세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그 사건에 담긴 의미를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 속에는 세상이 아닌 외계로서의 천국에 계신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열정이 있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리움과 열정을 몰랐듯이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또한 예수님의 그리움과 열정을 모릅니다. 그 그리움과 열정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다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해야 정상입니다.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 상태가 아니라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본문의 제자들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잘 살고 싶어 안달이 나있습니다. 이것이 나와 예수님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연합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철저하게 죽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성령님의 책망이 가해집니다. 제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세상에 대한 애착과 친화성에 대해 책망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21절을 보면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해산하는 대상은 이 세상에 속해 있던 속사람입니다. 엄마의 뱃속에 있던 아기가 산도를 따라서 세상에 나오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비유적으로 제자들은 속사람을 천국에 낳아야 했습니다. 속사람을 천국에 태어나게 하는 산도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길을 만드셨습니다.
이 비유를 그대로 사용하자면 “천국에 속사람 해산하셨어요?”라는 인사가 가능할 것입니다. 속사람은 의식과 마음입니다.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껴 채우고 싶어 열망하는 마음이 속사람의 본질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던 아기가 산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의 속사람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이라는 산도를 따라서 천국이라는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속사람이 천국에 태어난 상태가 예수님과의 연합이 온전히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는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는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구하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시니 독생자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연합한 내가 보입니다. 예수님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 세상의 존재감을 의식함이 전혀 없고, 이 세상의 좋음을 추구함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실 때까지는 오직 예수님만이 그러한 상태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처럼 세상의 존재감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세상의 좋음을 전혀 추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과 연합한 나를 구분하지 못하실 정도로 구하는 것을 다 들으시고 주십니다.
다만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에게 아버지의 생각과 계획과 뜻을 알려주시면 예수님은 그것을 구하셨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대해 구할 수 있는 어떤 계기나 동기가 마련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으니 세상에 대해 구할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에 대해 갖고 계시는 계획만이 구할 수 있는 계기와 동기의 근거가 됩니다.
앞서 아버지의 뜻과 계획이 따끈따끈하게 알려지는 것이 계명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15장 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기쁨이 출렁거리는 상태가 되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만을 받아서 살아가던 에덴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고 철저하게 세상에 대해 죽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구함은 아버지의 생각이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함은 무조건 이루어지게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들으시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실 때 구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구하는 것인지 내가 구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예수님을 꼭 껴안고 연합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숨을 못 쉴 정도로 꼭 껴안을 수 있는 상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 차이는 세상에 대해서 살았느냐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죽었느냐가 기준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의식에서는 세상의 존재감이 제로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에서는 세상의 어떤 좋음도 추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세상 안에서 세상을 향하여 구하는 것이 예수 이름으로 구함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연합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구함을 예수님께서 구하시는 것으로 여기셔서 다 들어주십니다. 공생애 때에 예수님의 구함을 응답하셨던 것처럼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이름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삽니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낼 수 있고, 예수 이름으로 부모 노릇도 할 것이며, 예수 이름으로 남편과 아내 노릇도 할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대통령 노릇도 해야 하며, 예수 이름으로 직장인 노릇도 해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내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내가 예수님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연합할 때 나오는 모든 생각은 아버지의 뜻이 됩니다. 아버지께서 직장에 있는 나에게서 나오는 구함을 독생자 예수님과 구분하지 못하실 정도가 예수 이름으로 사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구하고 예수 이름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노릇하는 사람들입니다. 삶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노릇을 예수 이름으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정말 좋은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 이름만으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나를 구분하지 못하실 정도로 예수님을 꼭 껴안아 예수님이 숨도 못 쉴 정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