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자유가 싫고 무서워 노예가 소원인 자>의 줄거리 :
내가 죄인임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교리에 갇혀 있을 뿐 실제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각에 도달한 사람이 흔치 않습니다. 정말 죄인이라고 자각한다면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삶에 관한 자유를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냥 앉아서 생각하는 자유조차 마음에서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유와 삶에 대한 주체성이 너무 두려워 노예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람들이 세상 삶에 대해서 자유를 원하는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사탄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자유와 주체성을 무서워하고 싫어함이 진정으로 사탄의 노예 상태와 죄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자유가 싫고 무서워 노예가 소원인 자
(창세기 38:1~18)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본문에는 유다와 다말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유다에 집중해서 본문을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11절 이후의 12~18절까지는 며느리 다말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막내아들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말의 남편으로 주지 않고 죽은 두 아들의 대를 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동침하여 아이를 갖게 됩니다. 다말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야곱과 유다에 관한 부분을 중심으로 ‘자유가 싫고 무서워 노예가 소원인 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자유가 너무나 싫고 무서워서 노예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유다입니다. 자유는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뜻을 세운대로 행하고 추진하는 일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삶에 대해 무엇인가 생각하는데 그 생각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생각에 대해서 뜻을 세우고 뜻대로 하려고 할 때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조차도 마음에서 싫고 거부감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지 않음이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것도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결국 외부에서 전달되는 주체성을 따라서 노예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네 번째 아들입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에 갑자기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창세기를 살펴보며 하나님의 선민을 향하신 거대한 노예 프로젝트가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야곱은 애지중지하며 편애하던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이십에 팔려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노예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야곱은 기근을 피해 칠십 명의 식솔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서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난 후에 그곳에서 자리 잡고 살게 됩니다. 이로부터 430년에 이르는 선민의 노예 생활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에 유다가 갑자기 끼어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시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이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예수님의 계보를 기억해 봅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이 탄생하시기까지 이어지는 계보의 주요한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라고 하였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는데 세라는 떨어져 나가고 베레스가 예수님의 족보의 한 사슬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야곱의 아들들 중에 하필이면 유다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야곱의 첫째 아들은 르우벤이지만 ‘야곱은 르우벤과 그의 형제들을 낳고’라고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요셉이 탁월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요셉과 그의 형제들을 낳고’라고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유다에 대해서도 아내에게서 낳은 아들이 아닌 며느리 다말에게서 낳은 아들이 기록되었습니다. 며느리에게서 낳은 아이니 아들이라 해야 할지 손자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참 난감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며느리에게서 낳은 베레스가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까지 쉽게 이해되던 계보가 유다에 이르자 갑자기 복잡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유다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시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과 할아버지 이삭과 아버지 야곱과 유다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이 네 사람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는 영적인 면모가 완전히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본 뒤로 그 하나님을 마음속 영광의 자리에서 지키는 것을 평생 본업으로 삼았습니다. 마음속 영광의 하나님을 밀쳐내고 들어올 만한 모든 소중한 것들을 자발적으로 버리는 일에 평생을 투자했습니다. 이것은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속 영광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지켜내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아들인 이삭을 버렸습니다. 이삭은 이렇게 하나님을 아까워하며 자기를 버리는 아버지를 봅니다. 그리고 아버지 마음에서 지켜지는 영광의 하나님을 보며 아버지와 같은 믿음을 상속했습니다.
한편 야곱에게서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루스 들판에서 사닥다리 꿈을 통하여 야곱에게 영광의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마음에서 영광의 세상 것을 고집합니다.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듯이 야곱은 영광의 세상 것을 지켜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세상을 향한 야곱의 애착과 열정과 사랑이 우여곡절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는 바뀜의 역사가 일어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이 하나님께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의 이런저런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에 이르러서는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유다는 영광의 세상 것을 바라보던 야곱에게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유다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하여 자유롭게 스스로 책임지는 주체가 되어 사는 삶의 빗나감과 어긋남에 대한 자각입니다. 유다는 ‘왜 이렇게 삶이 빗나가는가? 나는 자유인으로 주체가 되어서 생각하고 관심하고 손을 대는 일마다 왜 어긋남이 발생하는가?’라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본문에 기록된 유다의 삶의 분량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다의 삶을 언급하심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내용은 분명합니다. 우리 삶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빗나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야곱은 이 세상을 열정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빗나간 것이고 죄입니다. 마음이 빗나감의 죄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빗나감에 따라 실제 야곱이 원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삶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속아서 레아와 결혼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실질적인 영적 상속자는 레아에게서 태어난 유다입니다. 이러한 유다는 야곱이 원치 않았던 결혼을 통해 태어난 아들입니다. 또 야곱은 영광의 하나님 대신 영광의 라헬을 추구하는 죄악 된 삶을 살았는데 희한하게도 라헬과의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는 요셉입니다. 야곱의 마음은 하나님을 빗나간 죄악 속에 있었지만, 야곱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바람이나 기대에 어긋날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에서 어긋나는 일들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야곱에 비해서 유다는 독특한 모습을 보입니다. 유다의 삶은 모든 부분에서 빗나가고 어긋납니다. 앞서 살펴본 예수님의 계보에서 유다가 며느리인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았음이 언급됩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자식을 낳는 참혹하고도 패륜적인 어긋남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다말의 사건은 마지막에 일어난 일일 뿐 어긋남은 일찍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결혼과 관련해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이들의 결혼은 하나님의 선민을 향한 계획에서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한편 야곱의 경우는 영광의 세상 것을 추구하는 죄적 상태에서 자기가 원하고 기대하는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선민을 향한 계획 안에 있었던 일들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경우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라고 했습니다. 결혼했다는 말이 등장하지 않고 유다가 아내로 맞이한 가나안 여자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계보에 들이기로 결정하신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이 세상의 일들이 계속해서 어긋나고 빗나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결혼을 한 것이 아니고 ‘데리고 동침하니’라고 한 표현이 이것을 잘 드러냅니다. 야곱에 대해서는 레아와 라헬 그리고 그들의 몸종인 실바와 빌하의 이름까지 언급된 것과 비교됩니다. 유다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으신 여자와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데리고 동침하여 아이를 얻었습니다.
이 상황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떻든지 유다는 좋게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유다는 아버지 집에서 나와서 독립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데리고 동침해서 첫째 아들 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오난과 셋째 아들 셀라도 얻었습니다. 당시 가나안은 성적으로 문란한 곳이었기에 유다는 아들들을 일찍 결혼시키고자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에 엘의 아내로 다말을 데려옵니다. 이것은 모두 유다의 생각이고 유다의 자유로운 주체성이 표출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말이라는 며느리를 들이자마자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함으로 첫째 아들 엘을 죽이십니다. 당시에는 계대결혼법에 따라 형이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잇게 했습니다. 이에 유다는 다말을 둘째 아들 오난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오난 또한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여 죽이십니다. 이제 유다에게는 셋째 아들인 셀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셀라의 태어남에 대해 5절을 보면 특이한 표현이 언급됩니다.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라고 합니다. 셀라가 태어날 때 유다는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은 마치 유다가 셀라와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셀라가 살아남았다는 듯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유다의 삶이 어긋남으로 가득했습니다.
야곱의 경우 마음은 어긋났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선민을 향한 계획들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과제는 마음에서 영광의 자리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영광의 세상 것들로부터 영광의 하나님으로 마음의 대상을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한편 유다는 경우가 다릅니다. 삶의 현장에서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생각하여 이루는 일 중에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편 이러한 유다의 빗나감은 비단 결혼에서만 일어났던 것이 아닙니다. 1절을 보면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다는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할 때 동생을 죽이는 잔악함을 보기 싫었습니다. 이것은 딱히 요셉을 사랑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 잔악한 장면이 싫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동생을 애굽에 노예로 팔자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유다의 말을 따라 동생을 팔았고, 아버지에게는 동생이 짐승에 찢겨 죽었다고 속였습니다.
이제 유다는 아버지 야곱이 요셉의 죽음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봅니다. 유다는 차마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행실에 대해 ‘동생을 노예로 팔다니 내가 미쳤구나.’라고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어긋남과 빗나감이 발생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늙은 아버지가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고 불행해지는 모습을 봅니다. 자기 의견에 의해 애굽에 팔린 요셉이 노예로 살고 있을 것을 생각합니다.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빗나감의 일을 만들고 말았을까?’라고 탄식하다가 집을 떠납니다.
유다는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 속에 있는 괴물이 자꾸 튀어나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겜에서 디나의 사건으로 인해 피바람이 불었을 때도 유다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직접 칼을 들고 세겜의 남자들을 죽이진 않았지만 세겜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재산을 약탈하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형제들과 함께 하던 중에 동생 요셉을 팔고 아버지 야곱을 속이기까지 합니다. 아버지 얼굴을 볼 때마다 요셉이 떠오르는 상태에서 도저히 형제들과 함께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다는 집을 떠납니다. 그리고 나가서 아내를 얻고 세 아들을 얻습니다.
셋째 아들 셀라가 어렸다는 언급이 나온 것을 염두에 두면 첫째 아들 엘과 둘째 아들 오난도 나이가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20대 초반 정도였을 것입니다. 유다는 첫째 엘에게 일찍 아내를 얻어주며 많은 자손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두 아들이 연달아 죽을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제 막내아들이 장성하면 계대결혼법에 의해 며느리 다말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두 아들을 잃은 유다는 다말이 마땅치 않았고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셋째 셀라가 장성한 후에도 주지 않았습니다. 셋째 셀라마저 죽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더 큰 어긋남이 발생합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가 셋째 아들 셀라를 주지 않음을 이유로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동침해서 잉태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예수님의 족보에 끼어든 베레스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어긋남을 염두에 두자면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세우신 계획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서 애초에 다말과 결혼할 사람은 유다였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실제 삶은 하나님의 계획과 엄청나게 떨어져 어긋나 있었고 그 결과 두 아들이 죽고 며느리에게서 아들을 얻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한편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유다에게는 ‘나는 손대는 일마다 어긋나는 자다. 나는 더 이상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서 이 세상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자다.’라는 자아의식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저의 추측이 아닙니다. 창세기 44장을 보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야곱은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 곡식을 사 오게 한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이때 베냐민을 제외한 열 아들이 내려갔고 이들은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납니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고 요셉은 이들의 사정을 듣고 베냐민을 데려오게 합니다. 베냐민을 데려오자 베냐민을 곁에 두기 위해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 은잔을 넣어 누명을 씌웁니다. 그런데 이러한 누명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 유다가 나서서 호소합니다. ‘나의 주이신 애굽의 총리대신이시여, 아버지 야곱에게 라헬이라는 부인이 있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형은 죽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베냐민을 아끼기에 데려가지 못한다면 아버지가 상심하여 돌아가실 것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데리고 올 때 아버지에게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할 경우에는 내가 아버지 앞에 평생 죄인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했습니다. 베냐민 대신 나를 노예로 삼고 우리 형제들과 우리 아버지가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합니다.
유다는 만지는 것마다 어긋나고 빗나가는 삶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더 이상 세상일에 대해 관여한다면 큰일 나겠다.’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랬던 유다가 동생 베냐민이 애굽에 잡혀있게 된 상황에서 자기 인생을 끝내기로 작정합니다. 자유인으로서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삶에 대해 생각하고 이끌어 가던 인생을 끝내고 노예가 되기를 자처합니다. 유다는 집안에 일어난 모든 사건이 자기 때문이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내가 자유롭게 주체가 되어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뜻하는 바대로 세상을 만지면 만지는 대로 어긋났고, 베냐민을 데려가겠다고 아버지께 맹세했지만 지금 이 상황도 어긋났습니다. 유다는 이제 이러한 인생을 끝내기로 합니다. 더 이상 이러한 인생이 지속되다가는 주변의 모든 일에 뒤틀림과 어긋남과 빗나감이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노예를 자처함으로써 자유인으로서의 죽음을 택하고 주체성의 죽음을 택합니다. 그렇기에 ‘총리시여, 나를 노예로 삼아주시고 베냐민을 풀어주셔서 나로 인해 뒤틀어진 이 상황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앞으로 평생 내 삶에 대해 생각하는 자유조차 없는 자가 되어서 살기를 간원하오니 나를 노예로 삼아주시옵소서.’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의 결단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 갈 때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노예 프로젝트가 시작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 중간에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끼어든 이유는 우리가 유다의 자아의식을 가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내 삶을 생각할 자유, 생각한 대로 뜻할 자유, 뜻한 대로 행하고 추진할 자유를 지긋지긋하게 여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자유처럼 혐오할 만한 대상은 달리 없다. 나는 노예가 되어야 한다.’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유다가 가지게 된 노예의 자아의식이 요셉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노예 프로젝트의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 이 목표를 명확하게 그려내고 계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관심을 갖고, 책임지고, 주체로 추진하는 모든 것들은 다 어긋나고 다 비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 망쳐지고 다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아이를 낳는 참혹한 패륜적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자아의식이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있게 하는 죄인 됨의 의식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백과 지식이 우리의 실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을까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유다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유다처럼 ‘나는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싫다. 내가 뜻할 수 있는 자유가 싫다. 내 멋대로 이사할 수 있는 자유가 싫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하는 자유가 싫다. 주체가 되어 이 세상 일들에 손대는 것 자체가 싫다. 나는 노예이기를 바란다. 하나님! 이 세상 삶에서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단 한 건도 스스로 생각하는 자유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여겨야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내가 죄인임을 진정으로 인정한다면 삶의 현장에서 이러한 자아의식이 나타나야 됩니다. 이것이 삶의 현장에서 반영될 때 나타나는 자아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었다고 나를 속여야 됩니다. 육체를 입은 나는 빗나간 죄인으로서 삶에 대해 끊임없이 주체가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실제 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입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의식하여 주장해야만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육체를 입고 있는 나는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자유인이요, 이 세상을 관여하는 자유인이요, 추진하는 자유인이요, 뜻하는 자유인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자유인이자 주체로서 생각하는 것들을 요구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성경의 가르침 대로 죄인임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삶을 향한 여러분의 자유를 유다처럼 싫어하고 무서워해야만 합니다. 삶을 향해서 생각할 수 있는 자유, 뜻할 수 있는 자유, 뜻한 대로 행하고 추진할 수 있는 자유를 생각만 해도 온몸이 오싹해질 만큼 두려운 사람은 죄라는 단어를 몰라도 진짜 죄인임을 알고 삶의 현장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하나님을 향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야곱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으로 바꿀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유다를 통해 이 세상 삶에 대해서 철저한 노예 의식이야말로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럼으로써 십자가를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연적인 상황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유다는 빗나감만으로 채워진 인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삶에 대해 죄인임을 고백함과 그 죄인임이 반영될 때 어떤 자아의식을 갖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유다의 자아의식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자유롭게 주체가 되어 세상에 관여하는 것마다 빗나가고 어긋납니다. 마이더스의 손이 아닌 파괴의 손이고 뒤틀림의 손이며 빗나감의 손이고 어긋남의 손입니다. 이 자아의식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기 위한 근본이고 바탕이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저희 모두가 한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유다가 삶에 대해 가졌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자아의식을 우리 모두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죄인 의식을 갖는 자에게 맞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누릴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