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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 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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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º━···불교 기초교리 스크랩 사색의광명 관법觀法_불교수행의 개괄
대선화 추천 0 조회 44 09.01.19 18: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관  법 ( 觀 法 )


Ⅰ. 불교(佛敎) - 수행(修行)의 종교(宗敎)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다. 불교는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와는 달리 수행을 중심으로 하면서 자력적(自力的) 구제(救濟)와 타력적(他力的) 구제(救濟)원리의 조화를 함께 추구하는 종교이다.

   현재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각 종파마다 각기 다른 수행법인 참선, 간경, 염불, 발원, 참회, 예불, 사경, 지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실천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실천의 궁극적 목적은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깨달음의 존재로 전환되는 것이다.  불교의 수행은 단순한 닦음이나 앎이 아니라 바뀌는 것이요, 깨달음의 존재로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범부(凡夫)에서 성인(聖人)으로의 전환인 것이다. 「알에는 나비가 없으나 적절한 여건을 충족시켜주면 알에서 애벌레로,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그 번데기에서 나비로 전환되듯이」

   그러나 그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가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으며, 대승불교에서도 법상(法相), 삼론(三論), 천태(天台), 화엄종(華嚴宗)과 같은 현교(顯敎)는 각기 그 교의와 닦고 증득하는 방편이 있고, 선종(禪宗)에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정토종(淨土宗)에서는 왕생성불(往生成佛)을 밀교(密敎)에서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말하는 것이 다르다. 그러므로 이른바 백천방편(百千方便)과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이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 이래로 깨달음의 길로 가려는 수많은 중생의 노력이 끝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제 그 처절했던 수행법의 행적을 더듬어봄으로써 소모임의 주제인 관법(觀法)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관법이란 마음에 전심하여 부처나 법의 일정한 대상을 관찰하고, 염(念)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불교의 실천 수행법이다. 사리를 마음에 떠올려 밝게 하여 마음의 움직임을 막고 그 결과로 생기는 정신집중에 의해 모든 법의 참된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법이란 실천수행을 의미하며, 관(觀)․수관(修觀)․관념(觀念)․관상(觀想)․관행(觀行) 등도 비슷한 말이다. 일상관(日想觀)․월륜관(月輪觀)이나 구상관(九想觀) 처럼 갖가지 구체적인 생각을 마음에 떠올려 관하는 초보적인 것에서부터, 구체적인 것에 의탁하여 깊은 교의(敎義)나 불교의 이치를 관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류가 있으며, 그 내용도 극히 다양하다. 예를 들면, 호흡의 숨을 세는 것에 의해서 마음을 통일하여 흐트러진 마음의 혼란을 제어하는 수식관(數息觀), 시체의 부정함을 관찰하거나 항상 마음에 그 변화의 상태를 생각해 내는 것에 의해서 애욕적인 탐욕의 마음이 높아짐을 억제하는 부정관(不淨觀), 아름답고 우아한 것을 관찰하고 항상 마음에 생각하는 것에 의해서 노여움의 마음이 높아지는 것을 억제하는 자비관(慈悲觀), 모든 존재가 인연에 의해서 성립되고 있음을 관찰하여 실제적인 선입견이나 억견(臆見)을 버리고 올바른 깨달음에 도달하는 인연관(因緣觀), 아미타불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 이름을 외우는 것에 의해서 죄에 대한 두려움에서 빠져 나와 청정하고 편안한 심경에 이르려고 하는 염불관(念佛觀) 등이 있다.


Ⅱ. 초기불교의 수행법

1. 붓다의 수행법


   고타마 싯타르타는 정반왕(淨飯王)의 아들로 태어나 물질적 풍요 속에 젊은 시절을 보냈으나 현세적인 삶의 만족보다는 인간의 근본 문제인 생노병사(生老病死)에 깊은 사색을 하던 중 모든 부귀와 영화를 뒤로하고 태자라는 신분마저도 버린 채 무상(無上)의 도(道)를 얻기 위해 사문(沙門)의 길을 걷는다.

   그는 숲 속에 자리를 잡고 깊은 명상에 잠긴다. 그러나 이래가 지나도록 얻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완전한 수행자가 된 그는 스승을 찾아다닌다.

   처음으로 ‘박가바’라는 선인을 찾아가 육체적 고행법을 배운다. 그러나 고타마 싯타르타의 목적은 천상에 태어남이 아니라, 생사의 고통을 떠남에 있었기에 다른 스승을 찾아야했다.

   태자는 ‘알라라 칼라마’라는 선인을 찾아 아무 것도 없다고 관(觀)하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배워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싯타르타는 다시 그 당시의 최고의 수행자로 알려진 ?타카 라미?다를 찾았다. 그에게서는 상념(想念)이 있는 것은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觀)하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서도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깨달아야겠다는 비상한 각오로 피나는 육체적 고행을 육 년간이나 지속했으나 고행에 대한 회의만이 생겨나고 고행도 결코 정도(正道)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태자는 당시에 유행하던 수행(修行)의 이조류(二潮流)인 수정주의(修正主義)와 고행주의(苦行主義)를 다 버렸다.

   태자는 지나치게 지쳐버린 몸을 회복하기 위하여 니련선하(尼蓮禪河)에 목욕을 한 후 근처에 사는 ‘수자타’라는 소녀가 주는 우유죽을 마셨다. 기운을 차린 태자는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어린 시절 쟝부 숲 속에서 명상하고 정신을 통일하여 사선(四禪)에 도달한 경험을 기억해내고 보리수 아래에 단정히 앉아 깊은 명상에 들게된다. 그리하여 칠일 째 되는 날 찬란한 샛별이 반짝일 때 세상의 모든 이치는 환히 그 앞에 드러났다. 드디어 무상(無上)의 도(道)를 얻어 부처를 이룬 것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두 극단을 떠난 깨달음, 즉 중도(中道)의 이치를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는 출가 후 교법(敎法)을 배워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라 수행(修行)을 통하여 깨달음을 성취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붓다의 모든 법은 수행의 결과로서 체득(體得)된 것이다.


2. 초기 불교수행법 속의 관법


   초기불교에 있어서 수행의 중점은 자신의 심리를 제어하는 것에 있었다. 어떤 심리에도 제약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대상을 그대로 볼 때 진리가 구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자신이 갖고 있는 편견과 집착을 제거하는 중점을 둔다. 번뇌는 본래 청정한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에 이것을 제거하면 본성인 지혜가 그대로 현현(顯現)하여 진리 자체를 체득한다는 것이다. 번뇌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은 원래의 마음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하는데 이와 같이 번뇌를 벗고 자성청정심에서 얻는 경지를 초기불교에서는 피안(彼岸)․윤회(輪廻)에서의 해탈(解脫)․부사(不死)․안은(安穩)의 경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부사(不死)는 윤회(輪廻)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의미하며 이러한 경지는 불교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인도사상계의 해탈관이었다.

   붓다가 본 생노병사(生老病死)의 허물이란 것도 편견과 집착을 말하며 이는 다시 말해 무명(無明), 갈애(渴愛), 아(我), 아만(我慢) 등의 자성청정심을 흐리게 하는 속박이다. 이 속박들을 관하여 붓다는 무상의 안은(安隱) 열반을 얻은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었던 붓다의 수행법의 특징은 무엇인가?

   붓다 수행의 특징은 한 순간의 완전한 성취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성취 아님도 아닌 것에 있다. 피안(彼岸)․해탈(解脫)․안은(安穩)의 성취라는 것은 보리수 아래의 성도(成道)에 의해서 성취한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지만, 이러한 경지는 6년의 고행기간 동안에도 체험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붓다가 내세운 중도행(中道行)이란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녹야원(鹿野苑)에서 행한 최초의 설법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모든 욕락(欲樂)에 탐착하는 것은 하열(下劣)한 범부(凡夫)가 행할 바로서 거룩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짓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하는 것도 그 자체가 괴로움이며 거룩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짓이다. 이 양 극단을 여읜 중도(中道)야말로 여래(如來)가 깨달은 바이다. 이것은 눈을 뜨고 지식을 열어, 적정(寂靜)․증오(證俉)․정각(正覺)․열반(涅槃)에 이르게 하는 도(道)이다. 비구여! 무엇을 일컬어 여래(如來)가 깨달은 중도(maijhima patipada)라고 하겠는가...... 이것은 곧 8지(支3)의 성도(成道)이니,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이니라.


   이는 당시 수행법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으로, 양극단(兩極端)이라 함은 육사외도(六師外道)중 쟈이나교의 고행주의와 푸라나․아지타의 쾌락주의로서 붓다는 이 두 가지를 다 버린 것이다. 이는 또한 태자 시절에 경험한 쾌락의 생활과 출가 후의 고행의 경험에서 체득된 것이라 더욱 귀중한 득과(得果)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중도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붓다가 중요시한 것은 의식작용(意識作用)의 지멸(止滅)과 오관(五官)의 통제이다. 즉 수행자가 끊어야 할 심리로서 들고 있는 것은 kodha(怒), raga(欲情), taha(渴愛), mana(自意識), kopa(憤怒), vitakka(辱), vicara(伺), lobha(貪), dosa(瞋), moha(惠), middha(隨眠), kama(愛欲), mivarana(五蓋) 등이다. 말하자면 감관(感官)에 의한 감애(感受)와 그것에 의해서 초래되는 생각이다.

   붓다가 오관(五官) 즉 오근(五根)의 통제를 수행에 있어서 중시한 것은 오관은 외계(外界)와의 접촉기관이므로 이를 방일(放逸)하면 마음이 혼란 되기 때문이었다. 오관의 통제에 대해서는『사문과경(沙門果經)』을 위시하여 『아함』과 『니카야』의 도처에 설명되고 있다. 예를 들면,


眼으로 色을 보되 그 相에 집착하지 말고 그 味에 집착하지 말라


   라고 하여 이(耳)․비(鼻)․설(舌)․신(身)의 성(聲)․향(香)․미(味)․촉(觸)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형식으로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이는 견(見)․문(聞)․각(覺)․지(知)에 대하여 욕심과 집착을 내지 말라는 것인데 이를 불교용어로는 섭근(攝根 ; guttindriya)라고 한다. 붓다의 섭근법(攝根法)의 특징은 외계의 사물을 보지도 느끼지도 않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초기불교 수행의 핵심은 중도행(中道行)을 기반으로 한 의식의 지멸(止滅)과 감관(感官)의 통제, 아욕(我欲)의 법욕(法欲)으로의 전의(轉依)에 의한 심리적 안정의 추구였다.

   이를 위해 심신을 닦는 수행법은 교화할 대상이 다양한 만큼 여러 가지로 시설되고 있다. 붓다가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 밝히고 있듯이 올바른 지혜를 체득하는 길은 팔정도(八正道)의 실천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하였다. 이는 초기불교에서는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으로 정리될 수 있다.

   삼학(三學)이란 모든 행위에 있어서 악(惡)을 버리고 선(善)을 키워 몸을 보호하는 계율(戒律)로서의 계학(戒學)과, 일체 마음의 경동(傾動)을 없애고 고요하고 편안한 경지를 나타내는 법으로서의 정학(定學)과, 모든 번뇌를 없애고 진리를 철견(徹見)하려는 법으로서의 혜학(慧學)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 계(戒)․정(定)․혜(慧)․삼학(三學)은 실천 수행의 총괄적 보편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니원경(般尼原經)』에는


만약 계․정․혜의 행(行)을 갖추지 못하면 윤회(輪廻)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갖추면 마음이 저절로 열리어 문득 천상(天上)․인간(人間)․아귀(餓鬼)․축생(畜生)․지옥(地獄)의 세상을 보게되고 온갖 중생들의 생각하는 바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총괄적이고 보편적인 것에 따른 행법(行法)도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 많은 수행의 행법(行法) 가운데에서도 특히 그 하나의 주된 과정으로 되어 있는 것이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이라는 것인데 초기불교시대의 출가자(出家者) 들이 행하였던 전문적인 수행법이다.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이란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혹은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堤分法)이라고도 하는데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신족(四神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를 합한 37가지의 행법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모두 불교의 목적인 보리(菩提)를 얻게 도와주는 법이란 뜻에서 일컬어지는 말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수행자가 정학(定學)의 수습(修習) 이전에 먼저 계학(戒學)을 닦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즉 수행자는 불(佛), 법(法), 승(僧) 삼보에 귀의하여 믿음을 확고히 한 연후에 계(戒)를 몸에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를 지켜야만 심신이 안정되기 때문에 선정(禪定)의 실수(實修)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선정의 실수에 들기 전에 그 예비적인 수행으로 호흡관(呯吸觀 ; 수식관), 부정관(不淨觀), 사념처관(四念處觀), 삼해탈문(三解脫門) 등 여러 가지 관법이 있다.


(1) 수식관(數息觀 ; 호흡관)


   그러면 초기불교의 예비적 수행법으로 고른 호흡 즉 조식(調息)하는 것을 관하는 수식관(數息觀 ; 隨息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수식관은 안반염(安般念) 또는 입출식념(入出息念)으로 한역(漢譯)되고 팔리어로는 ānāpāna-smrtih이다. 이는 입식(入息)의 수나 출식(出息)의 수를 헤아려 이로써 마음을 한 경(境)에 거두어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산란한 마음을 없애고 바로 정(定)에 들게 하는 수행법(修行法)이다. 수식관(數息觀)에 대해서『잡아함경(雜阿含經)』과『안나반나념경(安那般那念經)』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을 닦아야 한다. 만약 비구가 안나반나념을 닦아 익히되 많이 닦아 익히면 심신(身心)이 쉬게 되고 각관(覺觀)이 있어도 고요하고 순수하며 분명한 생각을 익혀 만족하게 된다.

그래서 들이쉼을 생각하고는 그 생각을 잘 잡아매어 잘 관하고, 내쉼을 생각하여 그 생각을 잡아내어 관 한다. 짧고 긴 호흡이 몸에 들어올 때, 일체 호흡을 느끼고 몸에 들어오는 모든 호흡을 잘 관하고 몸에서 나가는 모든 숨에 대해서도 잘 관 한다. 또 모든 몸에서 작용하는 숨과 들이쉼을 관하고 모든 몸에서 작용하는 숨과 들이쉼에 대해서도 잘 공부하고 모든 몸에서 숨과 내쉼을 관하고 모든 몸에서 작용하는 숨과 내쉼에 대해서도 잘 관한다.

기쁘고 즐거울 때 심신(身心)의 작용에서 들이쉼과 내쉼을 느낀다. 마음의 작용 속에서도 들이쉼과 내쉼의 느낌을 잘 관한다. 또 그 느낌을 관하는 것을 관 한다. 마음 속 깊이 마음의 기쁨과 마음의 고요함과 마음의 해탈에서 들이쉼을 느끼고 그것들과 함께 들이쉼을 느끼는 것을 관한다. 또 마음의 해탈에서 내쉼을 느끼고 그것들과 함께 내쉬는 느낌을 관한다. 무상과 단절과 무욕에서 들이쉬는 숨이 없어짐을 관찰하고 들이쉬는 숨이 없어짐을 잘 관한다. 내쉬는 숨의 없어짐을 관찰하고 내쉬는 숨의 없어짐을 관찰하는 것을 관한다. 이것이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이다. 이것을 닦으면 신심이 쉬게 되고 각관이 있어서 고요하고 순수하며 분명한 생각을 닦아 익혀 만족하게 된다.


   안나반나(安那般那) 호흡수련에 관한 위의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을 관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에 수반되는 모든 마음의 작용까지 모두 관찰하라는 점이다. 또한, 모든 작용을 관찰하는 당체(當體)도 관(觀)하라고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수식관을 비롯하여 모든 수행방법들은 심상(心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관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 심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영상(影像)들은 바깥의 경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변현(變現)된 것이다. 훗날 대승의 유식(唯識)에서는 이 모든 마음의 작용을 식(識)의 소변(所變)이라고 한다.

   또한 위 경문(經文)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현상을 관하는 그것을 또 관하라고 한 점이다. 이는 실제로 수행을 해본 이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으로  항상 관하면서 그냥 그대로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붓다는 안나반나를 행하면서 모든 영상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하는 그 체(體)도 관하는 것이다.

   붓다는 깨닫고 나서도 다양한 수행을 취하였고 수식관을 통해서도 성인(聖人)․신(神)․범(梵)․유각(有覺)․무각(無覺)․여래(如來)의 세계를 성취할 수 있으며, 그 세계를 호흡의 관찰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완결된 해탈도(解脫道)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수식관이 보다 높은 차제의 수행으로 가는 징검다리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수행법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니카야』의 경문(經文)을 참고해 보면 안나반나념을 통해서 초선(初禪)․이선(二禪)․삼선(三禪)․사선(四禪)에 들고 숙명통(宿命通)․천안통(天眼通)․누진통(漏盡通)의 삼명(三明)을 깨닫고, 사제(四諦)를 깨닫고, 해탈을 성취하고 해탈했음을 아는 해탈지견(解脫知見)을 성취했다고 한다.


(2) 사념처관 (四念處觀 ; 수식관, 부정관, 백골관)


   호흡법외에도 여러 수행법이 있다. 이들 수행법들은 삼십칠도품에서 일정한 순서로 등장한다. 즉 사념주(四念住) 또는 사념처(四念處, smrtyupasthānāni,satipatthānā)․사정근(四正勤,samyakprahānāni,sammāppadhānā)․사신족(四身足;rddhipādāh, iddhipādā)․오근(五根, indriyāni)․오력(五力, balāni)․칠각지(七覺支, bodhyanhāni,bojjhangā)의 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때때로 팔정도(八正道, aryāstāngamārgah, ario atthangiko maggo)도 언급된다. 이 중 초기경전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수행법이 사념처관(四念處觀)이다.

   사념처관를 붓다가 어떤 수행법 보다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 육신으로 이루어진 이 몸으로 모든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행하고 고집하므로 모든 중생들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를 맹목적으로 집착하여 출세간의 도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붓다는 경전 곳곳에서 몸(身:kāyah)은 부정하다고 관하고, 느낌들(受:vedanāh)은 고(苦)라고 관하고, 마음(心:cittam)은 무상(無常)하다고 관하고, 사물들 또는 관념들(法: dharmāh, dhammā)을 무아(無我)라고 관하는 사념처(四念處)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육신의 구성요소를 관하여 수행의 틀로 삼았으므로 사념처관을 신관(身觀)이라고도 한다. 사념처(四念處)에 대한 『아함』의 교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음에 사법(四法)이 있으니 사념처(四念處)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비구는 육신(肉身)을 신(身)으로써 관하되 게으르지 않게 정근하며 잊지 않고 억념(憶念)하며 세속의 탐욕과 근심을 버린다. 수(受)․의(意)․법(法)에 대한 관도 이와 같다.


   사념처(四念處)에 대한 내용은『중아함(中阿含)』의『염처경(念處經)』에 자세히 설명되어 신(身)․수(受)․심(心)․법(法)의 사념처에 대하여 어떻게 관(觀)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념처(身念處)는 관신부정(觀身不淨)이니 우리의 육신이 깨끗하다[淨]고 집착하는 것을 떠나 이 몸은 부정(不淨)하다고 관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상당히 깨끗한 것 인양 여겨 다듬고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어느 구석 어느 구멍하나 깨끗한 것이 없는 것이다. 가죽․살 ․피․고름․뼈 등의 물질이 합해져 이루어진 부정물(不淨物)이 이 몸이 아닌가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떻게 몸을 身念處와 같이 觀하는가. 비구는 行하면 행하는 줄 알고, 머무르면 머무르는 줄 알며, 앉으면 앉는 줄 알고, 누우면 누운 줄 알고, 자면 자는 줄 알고, 깨면 깨는 줄 알고, 자다 깨면 자다 깨는 줄 안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의 몸(內身)을 觀하는 것처럼 觀하고 밖의 몸(外身)도 몸을 관하는 것처럼 하되 생각(念)을 오로지 하여 몸에 머물게 한다. (그러면) 知․見․明․達이 있게 된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고 하는 것이다

…  중 략  …

또한 비구는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 비구는 아래윗니를 서로 붙이고 혀를 위쪽 잇몸의 천장에 붙이고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려 치유하고 끊고 멸하고 그치게 한다.


   행(行)․주(住)․좌(座)․와(臥) 뿐만 아니라 잠을 잘 때까지도 관하라고 하며 안의 몸(內身)과 밖의 몸(外身)도 관하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위 경문(經文)에서는 혀를 입천장에 붙이는 구체적 좌선 행법까지 설명하고 있다. 안의 몸을 관하는 데에『念處經』에서는

머리털․터럭․손톱․살갗․가죽․살․힘줄․뼈․힘줄․심장․콩팥․간․허파․큰창자․작은창자․지라․위․똥․뇌수․눈꼽․땀․눈물․가래침․고름․피․기름․골수․침․오줌을 들고 이를 관(觀)하되, 그릇에 담긴 벼씨․조씨․갓씨․무우씨․겨자씨등 여러 가지 종류를 분명히 보듯이 하라


   고 한다. 또한 낱낱이 경계에 대하여


비구는 몸에 있는 모든 계(界) 즉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계(識界)를 관 해야 한다.


   고 하여 내가 몸에 있다고 하는 아상(我想)을 몸 그 자체를 관함으로 소멸시키고 있다. 그래서『염처경(念處經)』에서는 신념처(身念處)를 설하면서 수식관(數息觀)을 더불어 설하고 부정관(不淨觀)․백골관(白骨觀)을 설하는 것이다.

   이로써 붓다의 수행법은 수식관을 하더라도 사념처의 관법으로 하는 것이며 사념처(四念處)를 관하더라고 호흡을 관하는 것이 포함되니 각각의 수행관은 독자적인 체계를 갖고 있어도 실질적인 내용은 서로 넘나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신념처(身念處) 가운데 시설되는 부정관(不淨觀)과 백골관(白骨觀)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는 몸을 몸 그대로 관해야 한다.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에 가죽과 살과 피가 없어져 오직 힘줄만이 이어져 있음을 보고 난 후에 그것을 본 그대로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몸도 이와 같아서 이 法이 함께 있는 한 떠날 수가 없구나


   붓다는 아상(我想)이 범부 중생에게는 가장 끊기 어려운 것임을 알고 신념처를 설하는 가운데에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보고 자신의 몸도 그와 같이 됨을 관(觀)하라고 한 것이다. 『염처경(念處經)』에서는 이외에도 시체가 날이 가면서 까마귀나 솔개에게 쪼이고 승냥이나 이리에게 먹히며 불에 태워지고 땅에 묻히어 다 썩어 문들어지는 것을 관하라고 하기도 하고 해골이 묘지에 뒹굴면서 여러 가지 색으로 문들어지는 것을 관하라고 한다. 관하는 목적은 자신의 몸도 그와 같이 됨을 자각시키기 위함이니 이러한 수행법은 실재로 티벳의 관법(觀法)으로 도입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몸을 관하게 되면 몸의 더러움과 깨끗함을 모두 여의어 몸의 공성(空性)을 체득하게 된다. 몸의 공성의 체득은 위 경문에서도 인용했듯이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육체이기에 신념처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수념처(受念處)란 관수시고(觀受是苦)니 우리의 마음에 낙(樂)이라고 느끼는 음행(淫行)․자녀(子女)․재물(財物) 등을 보고 참다운 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괴로움을 수반하는 것이니 참다운 낙이 아니고 이는 모두 고통(苦痛)이다라고 관하는 것이다.


어떻게 각(覺)을 각념처와 같이 관(觀)하는가. 비구는 즐거운 감각을 느끼면 즐거운 감각을 느꼈다고 알며 괴로운 감각을 느끼면 괴로운 감각을 느꼈다고 알며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는 감각을 느끼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이라고 안다. 즐거운 몸․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몸, 즐거운 마음․괴로운 마음․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마음을(이와 같이 알며) 즐거운 식사․괴로운 식사․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식사를 즐거운 식사도 없고 괴로운 식사도 없으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식사도 없다고 알며, ........


   심념처(心念處)는 관심무상(觀心無常)이니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常]이 아니고 늘 생기고 멸하고 하는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줄로 생각하기 쉽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몸을 움직이고 있는 마음조차 항상 찰나찰나(刹那刹那)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 찰나(刹那)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어떻게 마음(心)을 심념처(心念處)와 같이 관(觀)하는가. 비구는 욕심이 있으면 욕심이 있다고 참다이 알며, 욕심이 없으면 욕심이 없으면 욕심이 없다고 참다이 알며, 성냄이 있고 성냄이 없는 것을 (참다이 알고), 어리석음이 있고 어리석음이 없는 것을 참답게 알고........


   심념처관(心念處觀)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을 그대로 아는 것인데, 마음의 현상 그대로를 관하게 되면 마음의 현상이 무상하여 본래 없는 것을 알게 된다. 법념처(法念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법념처(法念處)는 관법무아(觀法無我)이니 위의 세 가지를 제외한 만유(萬有)에 대해서도 실로 실체(實體)가 없다[無我]라고 관하는 것이다. 실로 이세상의 모든 것은 다 인연이 화합으로 이룩된 것이어서 본래 어떤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결코 변하기 말아야 할 것이나 아무리 눈을 돌려봐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순간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체의 제법(諸法)은 무아(無我)라고 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법(法)을 법념처(法念處)와 같이 관(觀)하는가. 눈은 색(色)을 연(緣)하여 안으로 번뇌가 생긴다. 비구는 안에 실로 번뇌가 있으면 안에 번뇌가 있다고 참답게 알며, 안에 번뇌가 생기면 그것을 참답게 알며, 만일 생겼던 번뇌가 소멸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것을 참답게 안다. 이와 같이 귀․코․혀․몸 또한 이와 같으며 뜻(意)은 법을 연하여 안으로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법을 관한다는 것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로 그 대상 즉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받아들일 때 생기는 모든 결과, 다시 말해 번뇌를 그대로 아는 것이다. 내육처(內六處)와 칠각지(七覺支)를 관하는 것은 법념처에 포함된다.

   지금까지 사념처관(四念處觀)의 각 지분(支分)을 살펴보았다. 사념처 관법은 어떤 곳에서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수행방법이고 그 안에 다양한 수행법과 수행에 나타나는 현상이 포함되어 있어서 수행차제의 한 단계이면서 동시에 완결된 수행체계임을 알 수 있었다.

(3) 그 밖의 수행을 돕는 도품(道品)


  1) 사정근(四正勤)

   사정단(四正斷) 사의단(四意斷) 사정승(四正勝)이라고도 하는데 악(惡)을 막아 선(善)을 증장시키기 위한 네 가지의 정진(精進)을 말하는 것이다.

율의정근(律儀正勤 ; 律儀斷)

   -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을 미리 방지하려고 부지런히 정진함.

단정근(斷正勤 ; 斷斷)

   - 이미 생긴 악을 없애려고 부지런히 정진함.

수호정근(隨護正勤 ; 隨護斷)

   -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부지런히 정진함.

수정근(修正勤 ; 修斷)

   - 이미 생긴 선은 잘 길러내어 더욱 증장하도록 부지런히 정진함.


  2) 사신족(四神足)

   사여의족(四如意足)이라고도 하는데 신족(神足)이니 여의족(如意足)이니 하는 말은 뜻대로 만족하게 된다는 말이다.

욕신족(欲神足 ; 欲如意足)

   - 위의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을 닦은 힘에 의하여 구도(求道)의 욕구(欲求)가 강렬하여져 공부하고 싶은 대로 됨.

정진신족(精進神足 ; 精進如意足)

   - 정진하여 나아가는 힘이 저절로 강성해져 물러감이 없이 계속 나아감.

염신족(念神足 ; 念如意足)

   - 바른 생각이 한결같이 계속되어 나아감

사성신족(思性神足 ; 思性如意足)

   - 사성(思性)은 곧 선정(禪定)을 말함이니 선정(禪定)이 마음대로 잘 진행되어 감.


  3) 오근(五根)

   이는 오정근(四正勤) 사신족(四神足)을 닦았으므로 더욱 정진하여 얻어지는 것으로 번뇌를 항복 받고 성도(聖道)를 이끌어 내는데 더욱 필요한 것이다.

신근(信根)

   - 성스러운 도법(道法)에 대한 신념이 굳어진 것

정정근(精進根)

   - 선법(善法)은 길러나고 악법(惡法)은 퇴치하는데 용맹스러워 물러나지 않는 것

염근(念根)

   - 모든 세속적인 탐욕과 근심 걱정을 여의고 항상 바른 마음을 갖는 것

정근(正根)

   - 심신(心身)이 안정되어 탐욕과 불선법(不善法)을 여의는 것은 물론 감각적인 희수(喜受) 낙수(樂受)마저 여의어 제사선(第四禪)의 경지에 머무르는 것

혜근(慧根)

   - 사제(四諦)의 이치를 여실히 알아서 바른 견해를 갖는 것


  4) 오력(五力)

   오력이라 함은 신력(信力)․정진력(精進力)․염력(念力)․정력(定力)․혜력(慧力)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곧 위의 오근(五根)이 이미 불법(佛法)에 깊이 뿌리를 박았으므로 계속 정진하여 모든 세속적 불선법(不善法)에 동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불선법(不善法)을 꺾어 엎어버릴 힘을 얻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5) 칠각지 (七覺支)

   칠각지(七覺支), 칠각의(七覺意), 칠제선분(七提善分)이라고도 하는데 보리의 道를 이루는데 앞서 말한 것보다 가장 선제(菩提)의 지위에 접근하여 자조(資助)함이 수승한 것을 말한다.

① 택법각지(擇法覺支)

   - 지혜의 힘으로 모든 법이 선악(善惡) 정사(正邪)를 잘 가려내어 선(善)과 정(正)은 취하고 악(惡)과 사(邪)는 버리는 것을 말한다.

② 정진각지(精進覺支)

   - 고행(苦行)같은 쓸데없는 것을 버리고 수행의 바른 길을 따라 일심( 一心)으로 정진하여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③ 희각지(喜覺支)

   - 一心으로 끊임없이 정진하므로 그 결과 참된 道의 기쁨을 얻는 것을 말한다.

④ 제각지(除覺支)

   - 참된 道의 기쁨을 얻는데 그치지 않고 모든 그릇된 소견이나 번뇌를 끊어버리고(除) 능히 참되고 거짓됨을 알아서 바른 선법(善法)을 계속 길러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⑤ 사각지(捨覺支)

   - 마음이 모든 경계에 평등하여 즐겁고 기쁜 모든 감수(感受) 작용(作用)이 없고 지내는 일을 추억하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⑥ 정각지(定覺支)

   - 고요히 定에 들어 있어서 번뇌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⑦ 염각지(念覺支)

   - 정(定)과 혜(慧)가 평등하여 일심(一心)이 늘 명료(明了)한 경지를 말한다.


   이상의 것 중에서 만일 마음이 혼침하면 ① 택법각지(擇法覺支) ② 정진각지(精進覺支) ③ 희각지(喜覺支)로써 마음을 일깨우고 만일 마음이 들뜨면 ④ 제각지(除覺支) ⑤ 사각지(捨覺支) ⑥ 정각지(定覺支)로써 그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다고도 한다.

(4) 팔정도(八正道)


   팔정도(八正道)란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염(正念)․정정(正定)으로서 이는 보리(菩提)를 성취하는데 가장 긴요한 것으로 앞의 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선족(四神足) ․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는 이 팔정도(八正道)에 들어오는 예비과정인 동시 또한 이 팔정도(八正道)는 이들을 통털어 집약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사염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신족(四神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의 칠과(七科) 중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역시 이 팔정도(八正道)이다. 그것은 이 팔정도가 석존 최초의 설법 도량인 녹야원에서 최초의 설법으로 나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봐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이다. 물론 이 이외에도 실천 수행법으로는 비록 특수한 것이라 할지는 몰라도 사선정(四禪定)․사무색정(四無色定)․삼매(三昧)․팔해탈(八解脫)․팔승처(八勝處)․십상(十想) 등의 여러 가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경전에 의하면 모든 제자들에게 보편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바로 팔정도(八正道)이다. 따라서 팔정도는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수행법까지 합쳐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Ⅲ. 소승불교의 수행체계(修行體係)


(1) 수행체계 속의 관법


   불멸 후 100년경 불교교단은 보수파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파인 대중부(大衆部)로 크게 이분(二分)되었다. 이후 계속 분열이 일어나 20여 개로 나뉘어, 그중 상좌부 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교리체계를 잘 갖추어 크게 번창하여 소승불교를 대표한다.

   세친(世親, vasubandhu)이 저술한『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30권은 설일체유부의 방대한 철학과 실천체계를 잘 보여주는 문헌이라 하겠다.

   여기서는 아함의 지관교설(止觀敎說)이 부파불교에 잘 계승된『아비달마집이문족론(阿毘達磨集異門足論)』등에 나타난 관법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아비달마불교에 이르면 수식관(數息觀)이 오정심관(五停心觀)의 하나로써 그 체계를 정립하게 된다.

   오정심관(五停心觀)은 오정심(五停心)․오도관문(五度觀門)․오도문(五度門)․오문선(五門禪)이라 하기도 하며 줄여서 오관(五觀)․오념(五念)이라고도 한다. 거칠고 강한 다섯 가지 장애를 정지(停止)하기 위해서 닦는 다섯 가지 관문(觀門)이다. 다섯 가지 관문 중 첫째는 부정관(不淨觀)이고, 둘째는 자비관(慈悲觀)이며, 셋째는 연기관(緣起觀)이고 넷째는 계분별관(界分別觀)이다. 현재 남방불교 위빠사나 수행법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유부의 논서 가운데 수식관(數息觀)에 대하여 설명을 하는 것은『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다. 『구사론(俱舍論)』에서도 『아함』에서 설명한 내용에 의거하여 나름의 주석을 붙이고 있다.


  “생각[尋]이 많아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이를 심행자(尋行者)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식념(息念)에 의지하여 능히 바로 수행에 들어갈 수 있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 탐욕이 치성하게 현재전(現在前)한 사람은 부정관(不淨觀)을 해야 하고, 많은 생각으로 마음이 산란해지는 사람은 식염(息念)을 닦아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심신을 깨끗이 한 뒤라야 비로소 본격적인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고 한다. 그 수행 과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수행방법┌ 五停心觀 ┌不淨觀 - 貪欲이 많은 중생이 그 몸의 부정한 실상을 관찰하여 탐          │          │         심을 정지하는 것이다.

        │        ├慈悲觀 - 瞋恚가 많은 중생이 다른 중생을 부모와 같은 受境相으           │          │         로 관하여 진에심을 정지하는 것이다.

        │         ├ 緣起觀 - 어리석은 중생이 12연기를 관하여 진리에 대한 어리석           │          │           음을 관하는 것이다.

        │       ├ 界差別觀- 六界[지․수․화․풍․공․식]의 인연 화합으로 我가              │          │          성립된 것으로 분별하여 我․我所의 악견을 정지하는 것이다.

        │        └ 持息觀 - 出息․入息을 헤아려 산란심을 정지하는 것으로 入修의          │                     二要門[부정관과 지식념을 말함]인 부정관과 지식관은 止          │                     와 觀 중 의 止의 수행이다.

        ├ 別相念住 - 부정관과 지식관을 통해 止수행을 닦은 후에 觀을 얻기 위해 별상          │           념주와 총상념주를 닦는다. 念住란 身․受․心․法의 四念處이다.           │             身은 不淨, 受는苦, 心은 無常, 法은 無我라고 관함으로써 각각

        │             淨․樂․常․我로 보는 4願倒를 대치한다.

        └ 總別相住 - 身․受․心․法을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각각 無常․苦․無我․空                        을 관하는 수행이다. 아상의 오정심관 별상염주 총상염주가 三賢인                        데 賢란 범부보다 지혜가 좀더 수승한 자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아                        직은 범부쪽에 가까우므로 外凡位라고 한다.

   『구사론(俱舍論)』의 수행론의 특징은 오정심관을 닦고 나서 사마타 즉 지(止)의 상태가 구족되면 그 다음으로 관수행(觀修行)의 사념처관(四念處觀)을 닦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사념처관(四念處觀)에 여러 가지 수행체계가 결합하고 있어서 사념처관(四念處觀)만을 닦아도 완전한 수행도를 닦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구사론(俱舍論)』에서는 사념처를 닦고난 후에 그 결과로서 선근(善根)이 생긴다고 하고 선근을 닦은 후에 비로소 과위가 있는 수행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를 간단히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사선근(四善根) - 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으로 네 가지 상태는 모두 사제(四諦)를 관하는 수행단계이다. 고제(苦諦)를 무상(無相)․고(苦)․공(空)․무아(無我)로 관하고 집제(集諦)를 인(因)․집(集)․생(生)․연(緣)으로 관하고 멸제(滅諦)를 멸(滅)․정(靜)․묘(妙)․이(離)로 관하고 도제(道諦)를 도(道)․여(如)․행(行)․출(出)로 관 한다. 즉 총 16행상(行相)으로 관 한다.


수행방법 ┌ 煖 - 성도(聖道)의 전조(前兆)로서 번뇌의 불길을 다 태우는 위(位).

         │      욕계(欲界)와 上二界의 4제를 관하고 16행상을 닦아서 유루의 觀慧를 나타낸다.

         ├ 頂 - 동요가 있어 불안정한 선근[動善根]가운데 최상의 선근이 일어나게 하는           │     최상의 位로서 나아가느냐, 물러나느냐의 경계에 있어서 四諦 16行相을            │      닦는다.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선근을 끊는 일이 없다.

         ├ 忍 - 四諦의 이치를 명확히 알아서 여기에 이르면 선근이 확정되어 움직이지           │      않는 不動善根位. 악취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  ┌ 下忍位 - 4제의 16행상을 닦는다.

         │ ├ 中忍位 - 觀行을 생략하고 결국 최후에 남은 욕계 고제의 1행상을 그 刹           │  │           那에 관한다.

         │  └上忍位 - 五種不生을 얻는다. 즉 生(卵生․濕生)․처(無想天․大梵王處․

         │           北俱盧洲)․身(半擇迦․二形)․有(욕계의 第八有와 色界의 第二             │              生)․惑(見惑)은 곧 나지 않는다.

         └ 世第一法 - 세간 곧 유루법 중에 최상의 善根을 上忍位와 같이 욕계의 하에                         서 1行相을 닦고 다음 찰나에는 見道위에 들어가 성자가 된다.


   이상의 사선근(四善根)은 유루지(有漏智)이긴 하나 삼현(三賢)보다는 성도(聖道)에 가까우므로 내범위(內凡位)라고 한다.

   또 삼현 외범위와 사선근 내범위가 합하여 칠방편(七方便)또는 칠가행위(七加行位)라고 부르고 현위(賢位)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이상의 칠방편도(七方便道)를 힘써 수행함으로써 세제일법(世第一法)에 연이어 무루지(無漏智)가 생기는 바 이 무루지를 얻는 자는 삼도사계(三道四界)의 단계를 거쳐 삼계(三界)의 견수혹(見修惑)을 모두 끊고 성자가 된다. 여기에서 삼도(三道)란 것은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를 이르는 것이요 사계(四界)라는 것은 예류과(預流果), 일래과(一來果), 불환과(不還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이르는 것이다.

   각각의 수행 방법을 간략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견도(見道) - 무루도를 얻어 사제(四諦)를 현관(現觀)하는 位. 고법지인(苦法智忍)을 처음으로 하고 견현지인(遣顯智忍)을 마지막으로 하여 총15찰라가 있는데 모두 견도에 포함된다. (예류향)

인(忍) - 번뇌를 끊는다.

지(智) - 번뇌를 끊는 상태를 획득한다.

수도(修道) - 견도 뒤에 다시 구체적인 事에 대처하여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수련․수습하는 位.

             (예류과, 일래향, 일래과, 불환향, 불환과, 아라한향)

무학도(無學道) - 궁극적 최고의 깨달음에 들어가서 배울 것이 없는 位. (아라한과)


   이상을 사향사과(四向四果)〔예류향, 예류과, 일래향, 일래과, 불환향, 불환과, 아라한향, 아라한과〕라고 한다.

(2) 소승(小乘)의 삼승(三乘)


   우리는 위에서 모든 번뇌를 끊고 아라한과를 얻는 수행의 위계(位階)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면 누구나 다 똑같은 방법에 의해서만 아라한과를 증득하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같은 아라한과를 증득한다 하여도 그 근기에 따라 다르듯이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이 다르고 보살(菩薩)은 위와 같은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불(佛)이된다고 한다.


1) 성문승(聲聞乘)

   성문(聲聞)이라 하면 원시적 해석으로는 석존의 음성을 직접 들은 불제자를 말하나 연각 보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석존의 직제자(直弟子)에게 국한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교법에 의해 사제(四諦)의 이치를 관하여 아라한이 되고자 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 성문들은 아라한이 되기까지에는 삼생육십겁(三生六十劫)동안의 수행기간을 필요로 하는 바 삼생(三生)이란 가장 빠른 자에게 해당하는 기간으로


① 일생(一生) - 외범위(外凡位)에 있어서 순해탈분〔順解脫分; 해탈은 열반, 분(分)은 인(因)의 뜻으로 삼현(三賢)은 열반에 순응하여 해탈하기 위한 인(因)이 된다는 뜻에서 이렇게 말함〕을 성취하는 것.

② 이생(二生) - 내범위(內凡位)에 있어서 순결택분〔順決擇分; 결택(決擇)은 성도(聖道)를 말하니 결택분(決擇分)인 견도(見道)의 무루지(無漏智)에 순(順)하여 그것을 내게 하는 지위(地位)이므로 이렇게 말함〕을 성취하는 것.

③ 삼생(三生) - 인성득과(入聖得果)하는 것을 말하고 육십겁(六十劫)이란 삼생(三生)을 각각 20겁(劫) 씩 필요로 하여 수행하는 기간으로 가장 느린 자에게 해당하는 기간이다.


   그러면 삼생(三生)의 수행자와 60겁의 수행자 중에서 이근(利根)은 어느 쪽인가를 생각하면 삼생의 수행자가 이근일 것 같으나 그것은 그렇지 않아 60겁의 장기간 수행자가 이근(利根)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선 둔근자(鈍根者)는 장기간에 걸쳐 수행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며 부처님께선 가장 이근(利根)이시고 또 대비(大悲)의 소유자이시기에 장기간의 수행을 하실 수 있다고 한다.


2) 연각승(緣覺乘)

   연각(緣覺)은 독각(獨覺)이라고도 하며 또 흔히 벽지불(辟支佛)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교화에 의하지 않고 홀로 십이인연(十二因緣)의 도리 등을 사유 관찰하여 깨닫는 성자를 말하는 것인데 이에는 두 가지가 있다.


① 부행독각(部行獨覺) - 본래는 성문이었던 이가 아라한과를 얻을 때에는 부처님 곁을 떠나 여러 사람이 부처(部處)를 만들어 수행하는 이들을 말한다.

② 인각유독각(麟角喩獨覺) - 무불(無佛)시대에 홀로 나서 혹은 피는 꽃, 혹은 떨어지는 낙엽, 혹은 12인연의 도리 등을 사유 관찰하여 독오(獨悟)하는 이, 마치 기린의 하나의 뿔과 같다고 하여 인각유(麟角兪)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의 수행기간을 보면 성문보다는 이근(利根)이므로 제일 빠른 이가 사생(四生), 제일 늦은 이는 백겁(百劫)이라 하며 또한 수행의 위계(位階)를 보아도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차례를 거치지 않고 오로지 아라한과 일과(一果) 뿐이라고 한다.


3) 보살승(菩薩乘)

   소승에선 보살이 불(佛)이 되는데는 사계성도(四階成道)가 있다고 하니 사계성도란

   ① 제일계(第一階) : 3아승지겁 동안 수많은 부처님 밑에서 6바라밀을 닦는 것.

   ② 제이계(第二階) : 100대겁(大劫) 동안 32상(相) 80종호(種好)등의 상호(相好)를 초감(招感)할 복덕행(福德行)을 닦는 것.

   ③ 제삼계(第三階) : 보살의 최후신(最後身)으로 왕궁(王宮)에 강생하는 것.

   ④ 제사계(第四階) : 전 삼계(前三階)에선 하나의 번뇌도 끊지 않고 있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삼십사심(三十四心)으로 번뇌를 끊고 성불(成佛)하는 것[三十四心 斷結成道]이다.

   여기서 삼십사심(三十四心) 단결성도(斷結成道)라는 것은 보살은 제삼계(第三階)까지는 번뇌를 끊지 않고 있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소 강렬한 무루지(無漏智)를 발휘하여서 인인인지(八忍八智)의 십육심(十六心)으로써 삼계(三界)의 견혹(見惑)을 끊고 다음 무색계(無色界) 비상비비상처지(非想非非想處地)의 구품(九品) 수혹(修惑)을 구무간도(九無間道) 구해탈도(九解脫道)의 십팔심(十八心)으로 끊어 총 삼십사심(三十四心)으로 성불(成佛)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무소유처지(無所有處地) 이하 욕계(欲界)까지의 수혹(修惑)은 이미 유루도(有漏道)인 육행관(六行觀)으로 끊어 다시 끊을 필요가 없다고 하니 육행관(六行觀)이란 추(麤)․고(苦)․장(障)의 삼관(三觀)과 정(靜)․묘(妙)․이(離)의 삼관(三觀)을 말하는 것으로 이생범부(異生凡夫)가 이를 써서 단혹(斷惑)하기 때문에 세간도(世間道) 또는 세욕도(世俗道)라고 하는데 이를 쓰는 방법은 이렇다. 즉 자기가 처해 있는 그 지(地) 및 그 하지(下地)에 대해선 이 곳은 추한(麤) 곳, 고통스러운(苦) 곳, 장애스러운(障) 곳이라 관하고 다음엔 상지(上地)에 대해서 상지(上地)는 적정한(靜) 곳, 妙樂한(妙) 곳, 더러움을 떠난(離) 곳이라고 관하여 차츰 상계(上界)로 올라가면서 그 하지(下地)의 번뇌를 끊어간다. 그러나 비상비비상처지(非想非非想處地)는 상지에 대한 근락(欣樂)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이 곳의 번뇌는 못 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최후까지 번뇌를 끊지 않는 이유는 보살은 원래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 그 뜻이므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선 먼저 삼계(三界)에 태어나야 하며 또 태어나기 위하여선 태어날 수 있는 업(業)의 연(緣)인 번뇌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이런 필요에 의해 일부러 번뇌를 끊지 않고 있다가 최후 성불 때라야 그를 끊는다고 한다.

   따라서 성문․연각․보살의 삼승(三乘)으로 볼 땐 보살은 이타(利他)를 자리(自利)로 한다고 하였으니 제일 이근(利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보살이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개념의 보살이 아니라 어느 특정한 보살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성자(聖者)가 되면 그는 해탈의 과덕(果德)으로서 삼명(三明) 육신통(六神通)등을 갖추게 되는 것이라 한다.

   소승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아라한이다. 그 아라한은 삼계의 번뇌를 다 끊고 해탈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설사 그것이 자리적(自利的)인 것에 그친다 하더라도 삼계를 벗어나려는 철저한 수행면을 배워야 할 것이다.


Ⅳ.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관법

1. 대승의 의미와 사상


   대승이란 Mahāyāna의 어역이며 소승(Hīnayāna)에 상대되는 말이다. 소승에서는 출가인(出家人)들이 개인적으로 생사고해를 떠나 열반(涅槃)에 드는 것을 궁극으로 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는데 그쳤으나 대승에서는 부처님의 본의(本意)를 찾아 그 대상을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대비심을 일으켜 다같이 보살도를 실천하고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겸비한 무상(無上)의 불과(佛果)를 얻는데 궁극점을 두었다. 따라서 자기의 번뇌를 끊는 것도 어렵지만 실로 이 대승의 실천이 그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승의 이타(利他)란 것은 자리를 무시한 이타(利他)가 아니다. 자기자신의 수행이 없이 이타행(利他行)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의 모순일 뿐이다. 이타(利他)가 이타(利他)답게 되려면 스스로 철저한 수행력이 따르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관념적인 대승이 아닌 실천적인 대승이 되도록 노력하며 대승의 주요한 사상의 전개과정과 그 속에서 실천수행으로서의 관법(觀法)을 살펴본다.


2. 대승(大乘)의 관법(觀法)


   불교가 중국으로 유입되면서 경전번역을 통한 격의(格義)불교적 경향과 교상판석(敎相判釋)에 의한 종파불교가 형성되면서 발전되었다. 격의불교는 당시의 도가(道家)사상이 변형된 불교의 궁극적 수용이며, 종파(宗派)불교는 중국이라는 넓은 땅에서 교통과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각기 그 지역에 전래된 경전을 중심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발전하였다. 그 결과 중국불교는 남북조 시대부터 수․당대에까지 계속되어 마침내 13개에 이르는 종파가 형성되었다.

   그 분류를 논서(論書)중심과 경율(經律)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나누어 보면 논서(論書)를 소의로한 것은 구사종(俱舍宗), 성실종(成實宗), 지론종(地論宗), 섭론종(攝論宗), 삼론종(三論宗), 법상종(法相宗)이며 경(經)과 율(律)을 소의(所衣)로 성립된 것은 열반종(涅槃宗), 율종(律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선종(禪宗), 정토종(淨土宗), 진언종(眞言宗) 등이다.

   이들 중 논(論)을 소의(所衣)로 한 대부분의 종(宗)과 열반․율종 등은 학파로서의 성격이 강하여 후대에까지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천태, 화엄, 법상, 선, 정토, 진언종은 당대(唐代) 이후까지 교학을 발전시켜 교단을 형성하였으며 우리나라 불교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종파 형성의 사상적 기반으로 요구되는 것이 교상판석(敎相判釋)이다. 남북조 이후의 모든 교상판석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천태의 오시팔교판(五時八敎判)과 화엄의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이다. 중국 불교의 대표적인 종파별로 수행법을 알아보고 그 속에 관법(灌法)을 정리하여 본다.


(1) 천태종(天台宗)


   천태종은 용수보살로부터 북제의 혜문(慧門)과 남악혜사를 거쳐 천태지의(天台智顗)에 이르러 그 사상과 수행체계가 완비되었다. 천태의 중심사상은 제법실상(諸法實相), 원융삼제(圓融三諦), 일념삼천(一念三千)을 들 수 있다. 또 대표적인 교상판석인 오시팔교판(五時八敎判)을 세워 삼관(三觀)을 정립하였다. 삼관은 3종의 관법으로 모든 존재가 그대로 진여(眞如)에 합당한 것을 3가지 방면으로 관찰한 것이다. 이를 삼종관법(三種灌法)이라 하고 관심(觀心)의 세 가지 방법 곧 탁사관(託辭觀)․부법관(附法觀)․약행관(約行觀)을 말하는 것이다.

   첫째, 탁사관(託辭觀)은 역사관(歷事觀)이라고도 하며 사상의 낱낱의 부분을 마음에 떠올려 실상의 이치를 관하는 것을 말하는데, 예컨데 왕사성을 관하는 경우 왕을 6식(識) 또는 심왕(心王)으로 사(舍)를 오음(五陰)으로 연결시켜 왕사성은 곧 공(空)․가(假)․중(中) 이라고 관(觀)하는 것. 또는 왕사성을 심왕으로 관하고 1만 2천의 성문(聲聞)을 12입(入)[6근(根)․6경(境)]에 각각 천여(千如)를 갖춘 1만 2천으로 관하는 예가 그것이다.

   둘째, 부법관(附法觀)이란 석존이 설한 사제(四諦)․십이연기(十二緣起)등의 법문을 마음에 새겨두고 그 실상의 진리를 관하는 것이다. 이 관법은 이 앞의 관법과 같으면서도 특별히 다른 점은 능관(能觀)의 지(智)와 소관(所觀)의 경(境)[觀할 바의 대상]을 한정하지 않는데 있다. 곧, 사제(四諦)등의 진리를 마음속에 새겨두고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경계로 승화(昇華) 시켜 관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 약행관(約行觀)은 종행관(從行觀), 직달관(直達觀)이라고도 하며 일념(一念)의 심(心)을 소관(所觀)의 경(境)으로 하여 심성(心性) 그대로가 즉공(卽空), 즉가(卽假), 즉중(卽中)이라고 관(觀)하는 것이다. 곧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묘법(妙法)을 관(觀)하는 것과 같은 예이다.

   이 3관을 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 에 배대(配對)하면 법화문구(法華文句)는 탁사관에, 현의(玄義)는 부법관에, 지관(止觀)은 약행관에 해당한다.

 또 이 삼관(三觀)은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 권상(券上)의 종가입공이제관(從假入空二諦觀), 종공입가평등관(從空入假平等觀), 중도제일의제관(中道第一義諦觀)을 바탕으로 정립하였으며 공관․가관․중관 이라고도 약칭하며 공가중 삼관 이라고도 한다. 오시팔교판에 의하여 분류하면 삼관은 사교(四敎) 중 별원이교(別圓二敎)의 관법이지만, 이 삼관을 사교에 배열하면 공관(空觀)은 장(藏)․통(通) 이교(二敎)에 속한다.


※오시팔교판(五侍八敎判)에 의한 분류


八敎

교화형식

頓敎

漸敎

秘密敎

不定敎

교화내용

有門

空門

赤有赤空

非有非空門

돈교-화엄시

장교-아함시

점교-아함, 방등, 반야

 

화엄, 법화, 열반

分類

析空觀

(소승)

體空觀

(성문,연각,보살)

(보살)

(원만한 가르침)

但空觀

不伹空觀

假: 사로잡히는 마음을 파하고 모든 것이 그대로 현상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中: 절대적 세계에 체달(體達)하는 것을 一念가운데 거두는 觀

假觀(伹中觀)

離別相三觀 次等三觀,融歷三觀

空위에 건립된 현상 그대로를 관함

中觀(不但中觀)

二卽空卽假, 卽中의관 通相三觀, 一心三觀

空假의 둘을 하나라고  관함

 

   또한 중론(中論)의 관사제품(觀四諦品)의 게송(偈頌)에서 「중인연생법(衆因緣生法) 아설(我說) 즉시공(卽時公) 적위시가명(赤爲是假名) 적시중도의(赤是中道義)」라 하였다. 즉 모든 존재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므로 공하며[空諦] 또한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으로 드러나 일시적으로 존재한다[假諦]. 따라서 공함에도 치우치지 않고 일시적인 현상에도 집착하지 않아서 존재의 진실된 모습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中諦]. 이와 같이 하나의 존재에 공(空)․가(假)․중(中)의 세 가지 진리가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원융삼제(圓融三諦)������라하고 한 순간의 마음(一心) 가운데서 이 세 가지의 진리를 원만하게 비추어 보는 것을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 말한다. 즉 원융삼제란 존재의 참모습에 대한 다른 표현이며 일심삼관은 그것을 밝게 비추어 봄을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존재의 모습을 다시 풀어 말한 것이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이다. 한 생각 속에 삼천 세계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천태(天台)는 먼저 모든 존재를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하늘(天)의 여섯 범부(凡夫) 세계와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부처의 네 성인(聖人) 의 세계로 분류한다. 이 열 가지 세계는 각각 다시 열 가지 법계를 갖추고 있어 100법계가 된다. 이들 각각에는 다시 다음과 같은 십여시(十如是)「여시상(如是相), 여시성(如是性), 여시체(如是體), 여시력(如是力), 여시작(如是作), 여시인(如是因), 여시연(如是緣), 여시과(如是果), 여시보(如是報), 여시본말구경(如是本末究境)」가 갖추어져 1000법계를 이룬다. 끝으로 이 1000여시에 다시 국토세간(國土世間),중생세간(衆生世間), 오음세간(五陰世間)이 갖추어져 삼천세계(三千世界)가 된다.

   즉 어떤 존재든 모두 참된 상태에 있으며 참된 상태가 모든 존재에 내재해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옥세계에서 헤매이는 중생도 보리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며 부처님도 악한세계의 교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원교(圓敎)의 지관을 닦음에 있어서 준비적 조건으로 이십오방편(二十五方便)을 마치고 대상을 관하는 경우 그 궤범(軌範)이 되는 10종의 관법을 십승관법(十乘觀法)[십법성승관, 십종관법, 십승, 십관]이라 하여 지의(智顗, 538~597)의 마하지관(摩詞止觀) 권5에 상설(詳說)되어 있다. 그 내용을 약술(略述)하면 다음과 같다.

   「바로 지금 나의 존재인 음입계(陰入界)의 경계(境界)로 시작하여 지관수행(止觀修行)을 할 때 일어나는 온갖 장애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여기에는 번뇌나 병환과 같은 나쁜 경계로부터 이승(二乘)이나 보살(菩薩)과 같은 성인의 경계까지 포함되어 있다.

   음입계경(陰入界境), 번뇌경(煩惱境), 병환경(病患境), 업상경(業相境), 마사경(魔事境), 선정경(禪定境), 제견경(諸見境), 증상만경(增上慢境), 이승경(二乘境), 보살경(菩薩境)의 열 가지 관찰대상이다.

   이들 대상을 각각 열 가지 방법으로 관찰한다. 즉 관불사의경(觀不思議境), 기자비심(起慈悲心), 교안지관(巧安止觀), 파법편(破法遍), 식통새(識通塞), 수도품(修道品), 대치조개(對治助開), 지차위(知次位), 능안인(能安忍), 무법애(無法愛)가 그것이다. 이 십승(十乘)의 법문은 대경(對境)이 곧 불사의(不思議)한 경계임을 바르게 관하여 자비와 방편으로 지관(止觀)에 머무르며 장애를 대치(對治)하는 원만한 수행자의 모습을 차례로 제시한 것으로 자비의 방편시설(方便施說)이다.

   이와 같이 천태지의는 초기의 선바라밀(禪波羅密)중심의 실천법에서 후기로 가면서 지관(止觀)수행법을 체계화하였으며,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를 통일하고 제법실상론(諸法實相論)의 심오한 체계를 세워 한 종파를 이룩하였다.


(2) 화엄종(華嚴宗)


   화엄종은 당(唐)의 현수법장(賢首 法藏, 643~712)에 의해 개종되었으며 『화엄경(華嚴經)』을 소의경전으로 한다. 화엄종의 초조(初祖)는 많은 이적을 보여 돈황보살라 불리운 두순(杜順 ; 557~640)이며 제2조(祖)는 지엄(智嚴 ; 602~668)이다. 지엄은 주로 운화사에서 화엄경을 설해 운화존자(雲華尊者)라고도 하였고 지상(至相)대사라고도 하였다. 화엄공목장(華嚴孔目章)․화엄경수현기(華嚴經搜玄記)등을 지어 화엄종 성립기초를 마련하였다.  화엄 제3조는 현수법장(賢首法藏 ; 643~712)이며,  제4조는 청량대사라 불리운 징관(澄觀) 제5조는 규봉(窺峰) 종밀(宗密)이다. 이상을 화엄오조(華嚴五祖) 라고 한다. 화엄종 문하(門下)에 수천의 제자가 있었으나 의상(義相)과 법장(法藏)이 유명하다. 의상(義相)은 귀국하여 신라에 화엄종을 일으켜 그 초조(初祖)가 되었고 법장은 중국에서 화엄종의 개창자가 되어 화엄의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을 세운다.

   오교(五敎)란 소승교(小乘敎)․대승시교(大乘始敎)․대승종교(大乘終敎)․돈교(頓敎)․원교(圓敎)이다. 소승교는 아함의 교설이며 대승시교는 대승에 처음 들어가는 가르침으로 공시교(空始敎 ; 般若經類)와 상시교(相始敎 ; 解深密經)가 있다. 대승종교는 대승 종극의 가르침으로 『열반경』『능가경』이 해당되며 돈교(頓敎)는 단박에 깨달음을 이루는 교설로 『유마경』 등을 말하지만 후대에는 선종을 여기 이야기한다. 원교(圓敎)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가르침으로 삼승을 융섭하는 별교일승(법화경)과 삼승(三乘)의 구별을 떠난 구경일승(究境一乘)으로 동교일승(同敎一乘 ; 화엄경)을 말한다. 십종판(十宗判)은 경전에 담긴 종취(宗趣)를 중심으로 분류한 것으로

我法俱有宗 - 나와 법이 모두 있다.

法有我無宗 - 현재의 제법만 있으며 과거나 미래의 법은 실체가 없다.

法無去來宗 - 현재의 제법만 있으면 과거나 미래의 법은 실체가 없다.

現通假實宗 - 현재법 중에도 거짓과 진실이 있다.

俗妄眞實宗 - 속세는 허망하고 진제는 참이다.

諸法但名宗 - 일체법은 다만 이름뿐이고 실유가 아니다.

一切皆空宗 - 일체법은 다 진공이다.

眞德不空宗 - 일체법은 진여로 부터 연기한 것이니 진여에는 무한한 공덕이 갖추어져 있는 여래의 실덕이 있다.

相想俱絶宗 - 능연심과 소연상이 모두 끊어진 무념 무상의 경지

圓明具德宗 - 사사무애법계 이므로 낱낱의 현상은 모두 일체의 공덕을 모두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다.


   이 있다. 이 가운데 앞의 여섯은 소승(小乘)이며, 뒤의 넷은 대승교설(大乘敎說)로 특히 끝의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이 바로 별교일승(別敎一乘)으로 다함이 없는 무애자재(無碍自在)함을 드러내는 화엄경(華嚴經)의 법문이라 한다.

   화엄종의 사상은 천태사상과 더불어 중국불교사의 쌍벽을 이룬다. 천태를 성구사상(性具思想)이라면 화엄(華嚴)은 성기사상(性起思想)이다. 즉 모든 존재는 여래의 성품이 발현된 것이라고 파악한다. 『大方廣佛華嚴經』이라는 경의 제목이 뜻하듯이 삼신(三身)이 원융(圓融)한 비로자나 부처님이 우주 존재에 그 빛을 두루 밝게 비추시며 동시에 모든 존재는 비로자나불의 현현(顯現)이 아님이 없으니 그것을 여래출현(如來出現) 또는 여래성연기(如來性緣起) 혹은 줄여서 성기(性起)라고 한다.

   화엄종에서의 우주관(宇宙觀)으로 네 가지 법계를 말한다. 사법계(事法界 ; 현실의 차별성), 이법계(理法界 ; 현상의 평등성),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 보편과 차별성이 걸림이 없이 서로 의존하고 있는 모습),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 개체와 개체가 자재하게 서로 용납되고 하나가 되어 圓融無碍한 無盡緣起를 이루어 현상계 자체가 곧 절대적 진리의 세계라는 것)가 그것이며 이는 곧 화엄의 법계 연기이다.

   십현연기(十玄緣起)는 법계연기의 모습을 열 가지 측면에서 열어 설명한 것으로 ①同時具足相應門 ②廣狹自在無碍門 ③一多常用不同門 ④諸法相印自在門 ⑤秘密玄俱成門 ⑥微細相容安立門 ⑦因多羅綱境界門 ⑧托事顯法生解門 ⑨十世隔法異成門 ⑩主伴圓明俱德門의 열 가지이다.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 무진법계(無盡法界)를 그대로 비추어 보는 관법(觀法)을 통해 무애자재한 경지에서 노닐게 함이 화엄교의 수행법이며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철저히 자각하여 본래 구족(具足)된 불성(佛性)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 화엄의 보살행(菩薩行)이다.

   『화엄경(華嚴經)』의 수행은 보살도(菩薩道)로 요약 할 수 있다. 보살은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위하여 마음을 내며(發) 그렇게 얻은 깨달음을 널리 회향하기 위하여 서원(誓願)하는 존재이다. 보살도(菩薩道)는 바로 발심(發心)하고 서원(誓願)하는 보살의 삶의 과정이며 수행과정이다. 화엄경(華嚴經)에 등장하는 무수한 보살(菩薩) 가운데 이러한 실천(實踐)과 원력(願力)을 대표하는 이가 보현보살(普賢菩薩)이다. 보현(普賢)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인행(因行)시에 세운 원(願)을 따라 자신도 그와 같이 하여 부처를 이루리라고 서원하며 실천해 가는 보살이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서원(誓願)과 함께 깨끗한 믿음을 강조한다.[淨行品] 믿음은 여래의 발바닥[如來足下相輪]에 비유되듯이 보살서원의 밑거름이 되며 나아가 모든 공덕(功德)의 어머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전개[十信]되는 보살도를 다시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묘각(妙覺)의 모두 52위(位)로 설명한다.

   화엄종의 조사들은 법계연기(法界緣起)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 들어가는 방법으로서 여러 가지 관법을 제시했다. 그 중 두순(杜順)의 법계관문(法界觀門)과 징관(澄觀)의 삼성원융관이 대표적이다.

   두순(杜順)의 관법을 살펴보면, 법계관문(法界觀門)의 관법은 다음 세 가지 문으로 요약된다. 첫째는 진공관(眞空觀), 둘째는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 셋째는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이다.

   진공관(眞空觀)은 다시 회색귀공관(會色歸空觀), 명공즉색관(明空卽色觀), 공색무애관(空色無碍觀), 민절무기관(泯絶無寄觀)의 네 문으로 구체화된다. 다음의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은 앞의 공관에 바탕으로 하여 이치가 현상에 두루하고 현상이 이치에 두루함을 보여, 이(理)와 사(事)가 서로 두루하여 서로 이루면서도 각각의 공능을 살리는 측면을 빠짐없이 관하는 법이다. 마지막의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은 앞의 두 관에 바탕으로 하여 이와 사가 두루 받아들임이 걸림 없으며 넓고 좁음이 걸림 없이 널리 융섭 됨을 관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순(杜順)의 삼중관법(三重觀法)은 화엄교학의 사사무애법계를 그대로 관하는 것이며 십현연기로 나타나는 법계연기를 관하는 법을 집약하여 보여 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화엄 제4조인 청량대사 징관(澄觀)이 세운 삼성원융관(三聖圓融觀)을 알아보기로 한다. 삼성원융관(三聖圓融觀)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보현(普賢)․문수(文殊)의 두 보살의 삼성(三聖)이 서로 융합하여 일체가 되어 거리낌이 없다고 관(觀)하는 것이다. 비로자나불은 온갖 덕(德)의 총체(總體)이고, 과분불가설(果分不可說)을 상징하며, 보현(普賢)․문수(文殊)의 두 보살은 비로자나불의 별덕(別德)이고, 인분가설(因分可說)을 상징하며, 두 보살 중, 보현(普賢)은 신(信)의 대상(對象)으로서의 법계(法界), 법계(法界)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닦는 행(行), 증득(證得)한 법계(法界)의 진리를 나타내는데 대해서, 문수(文殊)는 법계(法界)의 진리를 믿는 마음, 법계(法界)의 진리에 대한 지적(知的)인 이해(理解), 법계의 진리를 깨닫는 대지(大智)를 나타낸다. 그리하여 보현(普賢)에 있어서의 소신(所信)과 행(行)과 이(理), 문수(文殊)에 있어서의 능신(能信)과 해(解)와 지(智)는 각각 서로 원융하고, 또 능소불이(能所不二)하여 서로 원융(圓融)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 보살로 표현된 법(法)이 서로 융합(融合)해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불과(佛果)에 이르는 인(因)이 완성된 것이며, 거기서는 인(因)의 입장이 과(果)의 입장과 완전히 동일(同一)해져서 불과(佛果)의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감으로 삼성(三聖)을 융합(融合)하여 일체화라는 것으로 된다. 이 삼성원융(三聖圓融)의 법문은 화엄경에 설한 깊은 교의(敎義)이므로 화엄경에 의해서 수행하려는 하는 자는, 이 법문을 자기의 일념상에 관(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곧 심(心)과 불(佛)과 중생(衆生)이라고 하는 삼법(三法)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깨달아야 할 이(理)도, 증득해야 할 지혜도, 마음을 여읜 것도 아니고, 또 중생의 심(心)은 곧 여래장(如來藏)인데, 그것이 공여래장(空如來藏)인 점에서는 보현(普賢),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인 면(面)에서는 문수(文殊), 또 총여래장(總如來藏)의 이(理)는 비로자나이기 때문에, 일념상에 갖추어진 삼성원융(三聖圓融)의 상(相)을 관(觀)하라는 것이다. 또한 화엄 제5조(祖) 규봉종밀(圭峰宗密)의 『원각경[대방광원각수다라료의경]』주석서에 기준하여 관을 닦는 정신상태에 사마타(奢摩他 ; Śamatha)․사마빠티(三摩鉢底 ; samāpatti)․드야나(禪那 ; dhyāna)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하고, 이것을 민상징신관(泯相澄神觀 ; 靜觀), 기혼소진관(起幻銷塵觀 ; 幻觀), 절지영심관(絶待靈心觀 ; 寂觀)이라 이름하고, 이것을 닦는데 25종이 있다고 하였다. 또 이 삼관(三觀)은 분류의 의도에 따라 마음의 상태에 관할 분류이므로 천태(天台)의 삼관(三觀)과는 다르나 그 의미 내용으로 말하면 공(空)․가(假)․중(中)에 해당한다고 했다.

(3) 선종 (禪宗)


   선종(禪宗)은 여러 종파 중에서 가장 중국화된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선(禪)은 범어 dhyana의 음략(音略)이며 선나(禪那)라고 음역하고정려(靜慮), 사유수습(思惟修習), 공덕총림(功德叢林) 등으로 번역한다.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전주(專住)해서 자세히 사유하는 것을 말하고, 정(定)과 혜(慧)가 균등한 것을 말한다. 선(禪)은 대승․소승․외도․범부의 전체에 걸쳐서 닦게 되는데 그 목적이나 사유(思惟)의 대상은 각기 다르다.

   대승(大乘)에서는 육바라밀(六波羅蜜) 혹은 십바라밀(十波羅蜜)의 하나로 선바라밀(禪波羅蜜․靜慮波羅蜜)을 들고, 보살(菩薩)이 반야(般若)의 실지(實智)를 얻어 또 신통을 얻기 위하여 닦는다고 한다.

   선정(禪定)은 깨달음의 바른 지혜(智慧)를 낳는 원천(源泉)이며 바른 행인 계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연기법(緣起法)의 이치는 선정(禪定)의 힘을 통하지 않고는 체득할 수 없다. 이러한 선(禪)의 실천을 종(宗)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중국의 선종(禪宗)이다. 선종(禪宗)은 다른 종파(宗派)와는 달리 갖가지 틀에 얽매임이 없다. 경전(經典)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경전 밖의(敎外別傳), 경전 이전의(不立文字), 참된 존재의 성품을 바로 가리켜(直指人心), 그 참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것(見性成佛)을 표방(標榜)한다.

   불교 전래 초기부터 번역(飜譯)되어 온 갖가지 선경(禪經)에 의하여 행해져 온 선수행(禪修行)의 실마리들은 당대(唐代)에 이르러 하나의 종파(宗派)를 형성(形成)하게 된다.

   중국 선종은 남북조 시대에 들어온 (470년 혹은 520년) 인도 승(僧) 보리달마(菩提達磨)를 초기로 하여 혜가→승찬→도신→홍인을 거쳐 육조(六祖) 혜능(慧能 ; 638-713)에 이르러 조사선(祖師禪)의 전통이 확립된다. 혜능(慧能)과 아울러 홍인(弘忍) 문하의 신수(神秀)에 의하여 남돈(南頓) 북점(北漸)이라는 남북양종(南北兩宗)의 선(禪)이 형성된다. 남종은 혜능(慧能) 이후 남악(南岳) 회양(懷讓)과 마조(馬祖) 도일(道一)을 거쳐 백장산사(百丈禪師) 회해(懷海 ; 720~814)에 이르러 비로소 교단(敎團)으로서의 선종이 성립된다. 백장선사의 선농일치(禪農一致)정신과 청규제정(淸規制定)으로 계율과 반농반선(半農半禪)의 풍토가 확립되었고 백장이후 선의 황금기에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가풍(家風)에 따라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나뉘어 교단(敎團)이 확장되어 갔다. 그것은 임제종(臨濟宗)․위앙종(偉仰宗)․조동종(曹洞宗)․은문종(雲門宗)․법안종(法眼宗)과 함께 임제종(臨濟宗) 내의 황룡파(黃龍派)와 양지파(楊岐派)를 합한 것이다. 이중 임제계와 조동계가 번성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져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黙照禪)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선종의 모습 속에는 중국역사상 대중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부정적인 면도 있다.


①지나치게 경전을 도외시한 점 :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손가락을 달이라 해서도 안되지만 달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됨)

②계율을 경시 한 점 : 백장 청규 등이 이었으나 우파니샤드적 전법형태 (제자에게 비밀스럽게 법을 전하는)에 의존한 선종은 인도 불교의 승가 공동체적 구도 생활과는 다른 개인적이고 자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간화선과 같이 단박 깨치는 가르침과 경전에 의거한 원만한 깨달음의 전통을 잘 융화하여 올바른 실천 수행의 모습을 정립해 가야 하겠다.


(4) 정토종


   「밤길을 가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 때에는 부처님을 생각하고[念佛] 법을 생각하고[念法] 승가를 생각해라[念僧]」『잡아함경』권35는 말씀과도 같이 불교 대중들 사이에 가장 넓고 깊게 행해지고 있는 수행은 염불행이다.

   정토사상(淨土思想)의 대두는 초기 대승불교 시대에 정토계(淨土界) 경전이 성립되면서부터이다. 그 가운데『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이 정토종의 소의경전이 되었다. 『무량수경』은 아미타불이 극락세계를 건설하게된 원인인 법장 보살의 48가지 큰 서원과 염불을 통한 극락왕생을 설하고 있다. 『관무량수경』은 주로 극락왕생의 방법으로서 16가지 관법을 설하며 『아미타경』은 아미타불과 서방정토의 장엄을 설하고 그곳에 왕생하는 길로서 아미타불의 칭명염불(稱名念佛)을 제시하고 있다.

   정토종의 핵심인 아미타불 신앙은 동진 불교계의 지도자 노산(廬山) 혜원(慧遠 ; 334~416)이 일으킨 백련사(白蓮社)를 계기로 집단적으로 전파되었다. 혜원(慧遠)을 중심으로 하는 결사(結社)에서는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며 선정을 통하여 아미타불을 염하며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였으며 혜원(慧遠)은 노산(廬山)에 들어가 입적할 때까지 30여 년간 세속으로 나오지 않았다. 후일 정토종 신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 그를 정토종의 초조(初祖)로 받들게 된다.

   혜원(慧遠)이후 정토(淨土)의 교리와 수행법을 사회적으로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한 이는 담란(曇鸞 ; 476~542)이다. 그는 보리류지로부터 『관무량수경』을 전수 받고 개종한(530년 무렵) 이후 오직 정토교리를 전파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스님은 용수의 〈십주비바사론〉에 근거하여 정토교를 역행도(易行道)로 규정하였으며 침명염불(稱名念佛)을 적극 권하였다.

   『관무량수경』에 나타난 십육관법(十六觀法 ; 十六觀, 十六觀門)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몸이나 정토(淨土)의 모습을 마음에 떠올림에 의해서 그 정토(淨土)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을 16종의 관법(觀法)으로 나누고 있다.

   1) 일상관(日想觀) - 태양(太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극락(極樂)이 서(西)쪽에 있는 것을 생각한다.

   2) 수상관(水想觀) - 이세상의 물이나 얼음의 아름다움에 비기어 극락(極樂) 대지(大地)의 상태를 생각하여 떠올린다.

   3) 지상관(地想觀) - 수상(水想)을 관하는 것에 의해서 분명하게 극락(極樂)의 대지(大地)를 생각한다.

   4) 보수관(寶樹觀) - 극락(極樂)에 있는 나무의 부사의(不思議)한 작용을 생각한다.

   5) 보지관(寶池觀) - 극락(極樂)의 못(池)물을 생각함

   6) 보루관(寶樓觀) - 극락(極樂)에 있는 5백 억의 건물(建物)을 생각한다. 이 생각을 이루어 나갈 때에는 1)-5)의 관법(觀法)이 곧바로 성취되기 때문에 총관(總觀)이라고 한다.

   7) 화좌관(華座觀) - 아미타불이 앉아 계신 연꽃의 대좌(臺座)를 생각한다.

   8) 상관(像觀) - 불상(佛像)을 보고 아미타불의 모습을 마음에 떠올린다.

   9) 진신관(眞身觀) - 아미타불의 참다운 모습을 생각한다. 이 생각을 성취하면 모든 부처를 뵈올 수가 있다.

   10) 관음관(觀音觀) - 아미타불을 따르는 보살 중에서 관세음(觀世音)에 대해 생각한다.

   11) 세지관(勢至觀) - 같이 대세지(大勢至)에 대해서 생각한다.

   12) 관음(觀音) - 널리 정토(淨土)의 불(佛)․보살(菩薩)․국토(國土)를 생각한다.

   13) 잡상관(雜像觀) - 이상과 같은 진불(眞佛)․진보살의 관상(觀想)을 할 수 없  는 자가 1장(丈) 6척(尺)의 아미타불의 상(像)을 보고, 겸하여 대신(大身), 소신(小身), 진불(眞佛), 화불(化佛) 등을 두루 관(觀)한다.

   14) 上輩觀(상배관)

   15) 中輩觀(중배관)

   16) 下輩觀(하배관) - 중생이 제 각기의 능력이나 성질의 잘나고 못남에 따라서  거기에 적당한 수행을 하여 극락(極樂)에 태어나는 모양을 생각한다.

   일반적으로는 상(上)․중(中)․하(下)의 삼배관(三輩觀) 14)-16)에 설(說)하는 수행(修行)은 일상적(日常的)인 행위[散善]인데, 이것을 닦아서 왕생(往生)하는 사람의 생태를 관(觀)하는 것이 삼배관(三輩觀)이기 때문에, 16관을 관상(觀想)하는 그 일은, 마음을 통일하여 행하는 정선(定善)이라고 한다.


(5) 법상종(法相宗)


   유식종(唯識宗), 응리원실종(應理圓實宗), 보위승교종(普爲乘敎宗), 유식중도종(唯識中道宗), 중도종(中道宗)이라고 하며, 이 종의 소의경전은 『해심밀경(解深密經)』〈성유식론(成唯識論)〉〈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다.

   불멸(佛滅) 후 1천년경 북인도 사람인 무착(無着 ; Asanga)과 세친(世親 ; Vasubandhu)이 세우고, 중국에서는 인도의 계현논사(計賢論師)에게서 법을 배운 현장(玄奘 ; 632-664)이 규기(窺基 ; 632-682)에게 전하다. 규기(窺基)는 자은사(慈恩寺)에서 주석 하였으므로 자은종(慈恩宗)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원측(圓測 ; 613-696)이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현장(玄奘)에게 유가론(瑜伽論)과 유식론(唯識論)을 배우고 유식소초(唯識疎抄)를 저술하였다. 또한 경덕왕 때에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金山寺)에서 계법(戒法)과 점찰법(占察法)을 수행(修行)하고 법상종(法相宗)의 종지(宗旨)를 보종(寶宗), 영심(永深), 신방(信芳) 등에게 전하여 법주사(法住寺)와 동화사(桐華寺)에서 크게 성하였다. 이 종(宗)은 우주 만유의 본체(本體)보다도, 현상을 자세히 분류(分類) 설명하였으므로 법상종(法相宗)이라 하고, 유식종(唯識宗)이라 함은 일체 만유는 오직 식(識)이 변해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불교의 유식론(唯識論)으로서 만유(萬有)는 오로지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연기(緣起)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 연기(緣起)의 주체(主體)인 능변(能變)의 처음은 제8식이요, 2능변(能變)은 제7식, 3능변(能變)은 통6식이라 하고, 이것들은 모두 내심(內心)으로 외경(外境)을 변현(變現)하는 것이므로 삼계유일심(三界唯一心)과 심외무별법(心外無別法)이라 말한다. 만유(萬有)를 분류(分類)하여 오위백법(五位百法)으로 정하며, 만유의 진정한 사(事)․이(理)․미(迷)․오(悟)를 밝히기 위하여 편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의 3성(性)을 말한다. 식(識)이 외경(外境)을 인식하는 과정에 나아가서는 이것을 4분(分)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만법유식(萬法唯識)의 이치를 깨달아 알게 하는 방법으로 5중유식관(重唯識觀)을 세웠다. 이 5중유식(重唯識)의 설은 규기(窺基)에 의해 성립되고 주창(主唱)되었다. 견도(見道) 이전의 상이관(相以觀)에 오중(五重)의 순서가 있는데 견도진관(見道眞觀)에서는 제일중(第一重)의 유식관을 체달(體達)할 때 곧바로 진여(眞如)를 증득한다고 한다.

   ① 유허존실식(遣虛存實識) : 삼성(三性)중, 편계소집(遍計所執)은 허망(虛妄)으로부터 일어난 것으로 체(體)도 용(用)도 없다고 관하여 공(空)으로 돌리고, 의타(依他)․원성(圓成)의 이성(二性)은 제법(諸法)의 체(體)와 실(實)이며 근본(根本)․후득(後得)의 이지(二智)의 대상(對象)이라 관하여 유(有)로 본다. 이것이 제일중(第一重)이다.

   ② 사남유순식(捨藍留純識) : 제일중(第一重)에 의해서 식(識)등의 사(事)와 진여(眞如)의 이(理)가 모두 식(識)을 여의지 않는다고 관하지만, 그 내식(內識)에 객관(客觀)인 경[境-상분(相分)]과 주관(主觀)인 마음[見分․自證分]이 있어서 상분(相分)의 내경(內境)은 심외(心外)의 경(境)과 혼남(混藍)하기 때문에 버리고, 순전한 마음만을 머물러 둔다.

   ③ 섭말귀본식(攝末歸本識) : 제이중(第二重)에 의해 마음만이 머물렀지만, 그 마음 가운데 자증분(自證分)은 변(變)한 주체(主體)인 근본이고 견상이분(見相二分)은 변해 나온 말이며, 말(末)은 본(本)을 떠나서 있지 않기 때문에, 끝(末)을 거두어(攝) 근본(本)에 돌아온다.

   ④ 은세현승식(隱劣顯勝識) : 제삼중(第三重)에 의해 자증분(自證分)으로만 돌렸지만, 그 중에 심왕(心王)과 심소(心所)가 있기 때문에, 심소(心所)의 열(劣)한 것을 감추고 심왕(心王)의 승한 것을 나타낸다.

   ⑤ 견상증성식(遣相證性識) : 제사중(第四重)에서 심왕(心王)만을 두었지만, 심왕(心王)에 사(事)와 이(理)가 있어. 사(事)는 상용(相用)인 의타기성(依他起性), 이(理)는 체성(體性)인 원성실성(圓成實性)이기 때문에, 의타(依他)의 상용(相用)을 보내고 원성(圓成)의 실성(實性)을 증(證)한다. 이것은 심왕에 대해서 말한 것이지만 널리 심왕(心王)․심소(心所)․색법(色法)․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진여(眞如)의 五法의 사리(事理)상에 대해서도 전사를 보내(遣)고. 제오(第五)를 증(證)한다. 또 이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중생의 해탈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중생의 성품에는 선천적으로 보살정성(菩薩定性)․연각정성(緣覺定性)․성문정성(聲聞定性)․삼승부정성(三乘不定性)․무성유정(無性有情)의 5성(性)이 각각 다르므로 영구히 해탈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종(宗)의 삼승교(三乘敎)만이 옳고, 다른 종파의 일승교(一乘敎)는 가설(假說)이라 하므로 이 종을 권대승(權大乘)이라 부른다.

   특히 이상의 오중(五重)은 삼성(三性)에 오입(悟入)하는 순서를 보인 것이므로 삼성관(三性觀)을 떠나서 따로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유식학파(唯識學派 ; 瑜伽行派)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분별유가품」에서는 지관수행에 대해 설해져 있고 「지바라밀품」에서는 불과(佛果)를 이루기까지 지관수행의 단계를 보살의 십지행법(十地行法)과 십바라밀(十波羅密)에 배대하여 설하고 있다.

   또 경(經)에서는 지관의 종류를 말하는데 관(觀)의 종류를 셋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는 유상관(有相觀)으로서 오로지 삼매에서 행해지는 분별 있는 영상을 사유하는 것이다. 둘째는 심구관(尋求觀)으로서 아직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일체 법을 두루 알기 위하여 지혜로서 작의(作意)하고 사유하는 관법이다. 셋째는 사찰관(伺察觀)이니, 이미 잘 아는 일체 법 가운데서 두루 궁극의 해탈을 잘 증득하기 위하여 지혜에 의거해서 작의하고 사유하는 관법이다. 지(止)에도 마찬가지로 유상(有相)․심구(尋求)․사찰(伺察)의 세 가지가 있다. 또 초선(初禪)에서부터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가지의 색계 4선과 무색계 4선 각 하나의 사마타가 있으며, 자(慈)․비(悲)․희(喜)․사(捨)의 무량심(無量心) 가운데 가가 하나의 사마타가 있다.

   이상은 「경」에서 지와 관의 종류를 한정하여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바라밀품」에서는 수행의 계위를 5위(位)로 나누어 보살이 불타(佛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① 자량위(資糧位-유루(有漏)의 善을 섭행(攝行)하여 불과(佛果)를 깨닫는 바탕의 位인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의 30心 [대승三賢位]에 해당).

   ② 가행위(加行位;앞에서 닦은 쌓은 바탕 위에 다시 무루지(無漏智)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수행을 더하는 位로서 십회향(十廻向)의 만심(滿心 ; [大乘의 사선근위(四善根位)]에 해당.)

   ③ 통달위(通達位 ; 처음으로 무루지(無漏智)를 얻어 진여(眞如)의 진리를 체득(體得)하는 位로서, 초지(初地)[見道]에 해당).

   ④ 수습위(修習位 ; 初地에서 본 진여의 진리를 몇 번이고 거듭하여 섭행(攝行)하는 位로서 이지(二地) 이상[修道]에 해당).

   ⑤ 구의위(究竟位 ; 佛果를 말함)의 5位로 했으며, 이것을 대승의 오위(五位)라고 한다.

   이것에 준하여, 지량(資糧)․가행(加行)․견도(見道)․수도(修道)․무학(無學)의 소승오위(小乘五位)가 있다고도 한다.

   사심사관(四尋思觀)이란, 이중 제2의 가행위(加行位)에서 닦는 관법(灌法)을 말한다. 인식의 대상인 명(名)․의(義)․자성(自性 ; 자체의 體性)․차별(差別 ; 모양과 작용의 차별성)의 4법은 거짓존재(假有)이고 실무(實無)라고 심구(尋求)하여 사찰(思察)하는 관법(灌法)을 사심사관(四尋思觀)이라고 한다. 인식의 대상이 가유(假有)이고 실무(實無)라고 하는 심구사찰(尋求思察)뒤에 다시 명확히 인가결정(印可決定 ; 확인)하는 또 이와 같이 관(觀)하는 마음(能取心)까지도 가유실무(假有實無)라고 인가 결정하는 관법을 사여실지관(四如實智觀)이라 한다. 전자(前者)는 사선근위(四善根位) 중 ․정(頂)의 전이위(前二位)에서, 후자(後者)는 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의 후이위(後二位)에서 닦는다.

   이상으로 유식학파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에서 설해진 관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해심밀경』의 지관수행의 가장 큰 특징은, 붓다의 교설에 의지하며 보살의 서원에 머물러 행하는 대승적 실천이라는 점이라 할 수 있다.


(6) 율종(律宗)


   율종(律宗)은 율법(律法)을 지키는 종파(宗派)의 뜻을 말하며 불멸 후(佛滅後) 제1 결집 때에 우파리(優波離)가 80회에 걸쳐 80송율(誦律)을 결집(結集)하고, 불멸후 100년경 5부로 분류되었다. 중국에서는 위의 가평2년(250) 중인도(中印度)의 담가가라(曇柯迦羅)가 최초로 사분률(四分律)의 일분(一分)을 전하고, 그후 150년후 구마라집이 〈십송률(十誦律)〉을 번역하고, 불타나사(佛陀那舍)가 〈사분율(四分律)〉을 번역하였다. 당나라 남산종(南山宗)에 이르러 대성(大成)하여 율종(律宗)이라 한다.

   성공(性空), 상공(相空), 유식(唯識)의 삼관(三觀)을 세워 남산(南山)의 삼관(三觀)이라 하며, 각각 삼승(三乘)․소보살(小菩薩), 대보살(大菩薩)의 법이 있다고 했다.

   성공관(性空觀)은 천태종(天台宗)에서 말하는 석공관(析空觀) 및 체공관(體空觀)에 상당하고, 상공관(相空觀)은 모든 존재의 본래의 모습이 무상공(無相空)이라고 관하는 것이며, 유식관(唯識觀)은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고 오직 식(識)만을 실다운 본체라고 관하는 것이며, 유식관에 뛰어난 이가 닦는 직이총관(直爾總觀)과 초심자(初心者)가 닦는 역사별관(歷事別觀)이 있다고 한다.


(7) 삼론종(三論宗)


   인도 대승불교의 중관계, 왕유가계(王兪加系)중의 중관계에서 시작되어 중국에서 크게 번성한 종파로 성종(性宗), 공종(空宗), 파상종(破相宗)이라고 하며, 용수보살이 지은 「중론(中論)」「십이문론(十二門論)」과 제파(提婆)가 지은 「백론(百論)」의 3부를 주요 경전으로 한다.

   삼론종(三論宗)에서는 생(生)․멸(滅)․법(法)․거(去)․래(來)․일(一)․이(異)․단(斷)․상(常) 등 8종의 미한 고집을 부정하는데서 나타나는 불가득(不可得)한 중도의 이치를 관하는 팔불정관(八不正觀 ; 八不中觀 ; 無得正觀)을 세웠다.

   중도(中道)를 말함에 있어 중생들의 미(迷)하고 삿된 견해를 없애고, 다시 따로 중도라는 어떤 법이 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삼론종(三論宗)에서는 삿된 것을 파하는 외에 따로 정법(正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迷)하고 삿된 생각을 끝까지 없애는 그것(8不)이 곧 명상(冥想), 심상(心想)을 떠난 진여(眞如)의 경계를 떠난 무상이념(無相離念)의 경지라고 한다.


(8)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나타난 관법(觀法)


   「대승기신론」은 우리나라 불교의 근본경론인 『금강경』『원각경』『능엄경』 등과 함께 불교전문강원의 사교과(四敎科)과목으로 예로부터 학습되어 왔던 논서(論書)이다.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서 대승불교의 중심적인 사상을 요약한 것으로서 단편(短篇)이기는 하지만 불교사상 극히 중요한 문헌이다.

   「기신론」의 현존 문헌으로는 두 가지 한역(漢譯)본이 있다. 하나는 마명(馬鳴)이 짓고 진제(眞諦 ; 499~569)가 번역한 것이며, 또 하나는 마명이 쓰고 실차난타(實叉難陀 ; 652~710)가 번역한 것이다. 이를 각각 구역(舊譯)과 신역(新譯)이라 말한다.

   이 논은 불교문학상으로 볼 때 최대걸작중의 하나로서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그 연구가 활발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진제(眞諦)의 한역본이 널리 유통되어 왔다. 이 논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은 한마디로 단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오하고 풍부하다. 특히 「기신론(起信論)」은 일정한 경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므로 그 전개하는 이론이나 용어가 독창적이며, 불교사상사의 양대 조류인 반야사상(般若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의 일부가 조화를 이루고 있고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까지 원숙하게 표출되어 있다. 이 논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의 2문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는 일심(一心)에 대한 설명이다. 대승이란 중생심이고 그 중생심이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으로 구분되는데 어느 것이라도 일체법을 받아들인다. 심생멸문에서는 깨달음이나 어리석음이라는 마음의 활동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은 심진여문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적인 전개를 거쳐 궁극에는 믿음으로 이끌고, 믿음에서 나아가 실천적인 행위로까지 옮기도록 하는 것이 이 논의 내용이다. 기신론은 옛부터 이 논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이에 주석서(註釋書)가운데 중요한 것만 해도 170여종이 넘는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혜원(慧遠)․원효(元曉)․법장(法藏)의 것은 「기신론」의 3소(疎)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해동소(海東疎)’라고도 불리는 원효(元曉)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疎)」는 가장 유명하여, 그의 다른 7종의 주석서와 함께 그 뒤 「기신론」연구가들의 중요한 지침서 구실을 하였다.

   「기신론」의 내용은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첫째는 인연분(因緣分), 둘째는 입의분(立義分), 셋째는 해석분(解釋分), 넷째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다섯째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이다.

   그 중 넷째의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서는 사신(四信)과 오행(五行), 염불행(念佛行)을 설한다. 사신(四信)이란 진여법(眞如法), 불(佛), 법(法), 승(僧)에 대하여 믿음을 내는 것이며, 다섯 가지 실천이란 보시, 지계, 인욕, 정신, 지관행 이다. 또 마음이 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에게는 아미타불을 설하여 그 진여법신을 볼 수 있도록 염불의 실천을 권하였다. 여기서는 「수행신심불」의 오행(五行) 중 지관문(止觀門)의 내용을 주석서에서 보기로 한다. 「론」에서는 지와 관을 이렇게 정의한다.


지(止)라 함은, 모든 경계의 모습을 그치는 것을 말하니 사마타관(奢摩他觀)의 뜻을 따르기 때문이다. 관(觀)이라 함은, 인연으로 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분별함을 말하니 비발사나관(費鉢舍那觀)의 뜻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는 아함으로부터 유식에 이르기까지 같은 맥락에 있다. 즉, 분별없이 오직 하나인 마음의 모습[心一境生]을 지(止)라하고, 존재의 분별상을 여실히 관찰하는 것을 관(觀)이라고 하는 인도 불교사에서의 이해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관(觀)을 담음에 대해서는 크게 네 가지 내용을 말한다.


만일 수행자가 지(止)만 닦으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게으름이 생기거나 믓 선(善)을 좋아하지 않고 대비(大悲)를 멀리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관(觀)을 닦는다. 관(觀)을 닦음은, 일체 법이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며 깨끗하지 않다는 등을 살필 뿐 아니라, 무명(無明)으로 훈습되어 깨닫지 못하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대비의 마음을 내며, 다시 온갖 방편으로 모든 중생을 건져 열반을 얻도록 하리라는 큰 서원을 세워, 오로지 선법(善法)으로써 쉼 없이 정진하는 것이다.


   원효나 법장의 〈소〉에 의하면, 이것을 법상관(法相觀)․대비관(大悲觀)․대원관(大願觀)․정진관(精進觀)이라 이름한다. 이렇게 「기신론」에서의 관법(灌法)은 존재의 실상을 비추는 것 뿐 아니라 보살의 자비와 서원 그리고 끊임없는 정진을 강조한다. 『해심밀경』에서도 지관행을 전제조건으로서, 아뇩보리를 이루리라는 서원을 말하며 반드시 대승 가운데서 지관을 행하도록 하였다. 「기신론」도 같은 맥락이지만, 전제조건이 아니라 구체적인 관행(觀行)으로서 대승보살의 행법을 제시한다.


   대승은 소승에 비해 그 대상이 넓고 온 중생이 같이 타므로 크고 또 불과(佛果)를 목적으로 하니 훨씬 뛰어난 것이다. 즉 대승에선 소승의 개인적이고 자리적(自利的)인 것에서 이를 뛰어넘어 범중생적(凡衆生的)이고 이타적(利他的)인 부처님 본래의 뜻으로 되돌렸던 것이다.

   대승의 정신은 자기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포함한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소승보다 더욱 뼈저리게 느낌으로써 끝없는 자비심을 일으켜 내가 희생되더라도 남의 고통을 먼저 건져주자는 대비원행(大悲願行)의 정신인 것이다.

   실로 석존의 교법이 자리주의(自利主義)였다면 석존의 성도(成道)후 입멸까지 45년간의 중생교화는 무엇이며, 처음으로 60인의 제자를 얻었을 때 각기 교화를 위하여 떠나도록 하고 석존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로 가신 것은 무엇이겠는가.

   또 그것이 출가위주(出家爲主)였다면 어찌 석존께서 출가(出家)건 재가(在家)건 다함께 제자라고 하여 서로 돌보며 의지하여 다함께 열반에 이르도록 하라고 하셨겠는가.

   우리는 관법의 체계를 살펴보기 위해서 위에서 본바와 같이 대승의 삼장(三藏 ; 경, 율, 론)이란 실로 방대하다. 이 많은 대승의 체계를 근본교리에 비추어 정리함은 어려운 일이다. 그 주요사상을 보더라도 공사상(空思想), 반야사상(般若思想), 연기설(緣起說), 중도사상(中道思想), 유심사상(唯心思想), 열반사상(涅槃思想), 보살사상(菩薩思想), 법신사상(法身思想), 성불사상(成佛思想)과 화합(和合), 교화사상(敎化思想) 등 수없이 열거된다.

   대승의 차원은 실로 높고도 높아 실천보다는 관념에 떨어질 우려도 없지 않음에 관념적인 대승이 아니라 실천적인 대승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Ⅴ. 밀교에서의 관법

1. 밀교의 의미


   밀교는 서양에서는 보통 Esoteric Buddhism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것은 근대학자에 의해 Exoteric Buddhism(顯敎)의 대응어로서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밀교는 ‘탄트라불교’라 불리기도 하지만 ‘의궤(儀軌)’, ‘다라니 dhārani' 등의 용어도 쓰여, 밀교 전체를 포괄하기엔 다소 협소한 감이 있다. 그 외에도 ‘진언승(眞言僧)mantra-yāna' ‘금강승(金剛乘)vajra-yāna' ‘구생승(俱生乘)sahaja-yāna' ‘시륜승(時輪乘)kālacakra-yāna' 등의 용어가 사용되지만 탄트라불교와 마찬가지로 의미가 협소하다. 특히 탄트라불교의 경우 서양에서는 ‘비밀’이라는 의미와 함께 ‘左道’ ‘性力’이라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어 타락의 뜻으로 강하게 사용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이나 인도, 일본에서 사용하고 있는 ‘밀교’의 의미 역시 각각 이여서 총체적인 용어접근이 필요하다.

   불교에서는 밀교를 중요시하고 공개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지만, 밀교를 넓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탄트라불교나 시륜교(칼라차크탄트라) 등도 포함시켜 밀교의 의궤에 기초하여 실습되는 불교라 말할 수 있다. 동시에 밀교에는 기도를 채용하는 등의 신비주의적 의미도 함축되어 있고, 만트라와 다라니를 외우고 기도를 올리면서 신비적인 힘이나 지혜를 얻으려는 성격도 의미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로 『대일경』이나 『금강정경』에서 설하는 가르침은 성불의 가르침으로써 기도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성불의 실현을 위해 넓은 의미의 기도가 채용되고 있다.


2. 밀교의 관법


   밀교관련 관법은 글자․소리․실상(實相)을 관하는 것으로 나누어 질 수 있는데, 이러한 분류는 편의에 의한 것에 불과하고 보통 서로 어우러져 행해져야 한다고 한다. 글자로 보았을 때에는 아자(阿字)를 주안점으로 하고 있으며, 『대일경』 제3 「전자륜만다라행품(轉字輪曼茶羅行品)」에


이 아자는 일체여래가 가지한 것이니라. 진언문에서 보살행을 닦는 모든 보살은 능히 불사를 작하여 널리 색신을 나타내어서 아자문에서 보살행을 닦는 모든 보살로 하여금 만약 부처를 보려고 하며, 만약 공양하고자 하며, 보리심을 증발(證發)하고자 하며, 모든 보살과 동회(同會)하고자 하며, 중생을 이익케 하고자 하며, 실지를 구하고자 하며, 일체지지를 구하고자 원하는 자는 이 일체불심에 마땅히 부지런하게 수습할지니라. 그 때에 비로자나세존께서 다시 결정해서 대비장생만다라왕(大悲藏生曼茶羅王)에게 성천의 위(位)를 베풀어 두는 삼매신통의 진언행 불사의한 법을 설하시다. 저 아사리는 먼저 아자의 일체지지문에 주하여서 수다라(修茶羅)를 지(持)하고서 일체제불에게 이마가 땅에 닿도록 예를 올리느리라.


   라고 하여 아자는 진언행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또한, 오대(五大)와 오자(五字)는 소생(所生)과 능생(能生)의 관계가 있으며, 또 오자 가운데는 아자가 근본이 되고 나머지 네 자[四字]는 아자에 종속되어 있다.


(1) 아자관(阿字觀)


   밀교에서 우주인생을 아자(阿字)에 견주어서, 일체법이 그 자체가 근본적인 것으로 생멸(生滅)이 없다는 본불생(本不生)의 이치를 관하는 것. 밀교에서는 보리심(菩提心)을 관상(觀想)하는데, 대략 阿字는 연화(蓮華)와 월륜(月輪)의 3종의 관하는 방법이 있다. 이 3종은 어느 것이나 一心에 지나지 않고, 동시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지만, 초학자(初學者)의 수관(修觀)의 편의상 따로따로 관하게 하는 것으로서, 이 가운데 阿字를 관하는 것을 阿字觀이라 하고, 성(聲)과 자(字)와 실상(實相)의 삼관(三觀)의 구별이 있다. 특히 阿字를 그릴 적에, 흔히 月輪과 蓮華를 그려서 월륜 중에 아자를 둔다.

   금강계법에 의하면 큰 백색의 월륜 가운데 연꽃을 두고 그 위에 금색으로 실담글자인 阿字를 쓴다. 태장계법은 먼저 연꽃을 그리고 그 위에 월륜을 두고 가운데에 阿字를 쓴다. 자신의 앞면 사척정도의 곳에 눈과 평행하는 높이에 두고 그 앞에 결가부좌, 또는 반가부좌해서 손에 인계를 맺는다. 눈빛을 阿字에 집중하고 혀는 입천장에 붙이며 입은 간신히 숨이 통할 정도로 열고 조용하게 호흡한다. 주변의 공기가 자신의 코로 들어와 인후를 지나쳐 아래로 내려와 하복부와 발끝에까지 이른다고 생각하고, 또 나올 때에도 하복부로부터 위로 입안을 통하여 바깥으로 나와서 방을 지나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다고 관하고 크게 호흡을 한다. 그 관이 진행됨에 따라 아자가 눈에 분명해지는데 한층 숙달하여 크게 하거나 줄이는 데에 자재해지면 일체만물이 하나로서 이 아자 가운데에 들어오지 않음이 없으니. 위로는 부처의 세계로부터 아래로는 육도의 중생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우리 일심의 나타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약 탐욕이 일어나면 탐욕의 마음 위에 아자를 관해야 한다. 탐욕과 성냄, 사견 등의 크고 작은 번뇌 위에 아자를 관하면 그 망상과 번뇌와 집착은 자연히 본래 태어남 없는 과거에 돌아가니, 미망을 여의어 본래 갖추어진 덕을 드러내게 된다.

(2) 자륜관(字輪觀)


   범어의 종자(種字)를 관하는 수행법. 법계체성삼매관(法界體性三昧觀), 입법계삼매관(入法界三昧觀), 법계삼매관(法界三昧觀), 입법계관(入法界觀)이라고도 한다. 본존의 종자 또는 진언 등의 문자륜(文字輪)을 관하는 의미이다. 행자의 심월륜 위에 떠올리는 자륜과, 본존의 심월륜 위의 자륜이 동일한 모습으로서 본래 하나인 이치를 믿고 깨달아가는 것이다. 즉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공덕이 바로 본존의 법계체성과 같다고 관상하는 밀교의 관법이다. 「대일경소」에,


자륜에서 륜(輪)은 전성(轉成)하여 온갖 글자를 생하게 한다. 륜은 생한다는 뜻이니 그 한 자로부터 많은 글자를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아자로부터 모든 문자를 내는 것도 아자가 본래 상주불변이기 때문이니 그래서 자륜이라고 한다.


   라 하며 또


자륜이란 부동(不動)의 뜻으로서 비로자나가 보리심의 체성에 머물러 갖가지로 시현하여 널리 이익하게 하고 갖가지로 변현해서 무량무변하다. 또한 상주부동해서 일어나고 멸하는 상이 없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이 자륜에는 전성과 부동의 두 가지 뜻이 있다. 그리고 관하는 방법으로는, 〈아촉여래염송공양법〉에 ‘곧 자륜관으로 들어가 마음의 월륜 위에 금색으로 위광이 갖추어진 진언의 글자를 펼쳐놓고 실상의 이치를 사유하라’라고 하는 것처럼 먼저 법계정인(法界定印)이나 미타정인(彌陀定印)의 자세에 들어서 자신의 심월륜 위에 아(阿,a), 바(縛,va), 라(羅,ra), 하(賀, ha), 카(佉,kha)의 5자가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관한다. 각각의 글자에 대하여 그 뜻을 사유하는데 ① 아자: 제법은 본래 생함이 없으므로 불가득이다. 이 원리에서 다시 ② 바자: 자성은 언설로 불가득이다. ③ 라자: 번뇌[塵垢]는 불가득이다. ④ 하자: 인(因)과 업(業)은 불가득이다.⑤ 카자: 등허공(等虛空)은 불가득이라는 도리를 앞의 원리에 의해 연이어서 차례로 관한다. 그리고 다음에 방향을 바꾸어서 ⑤ 카자가 등허공불가득의 원리이므로 ④ 하자의 인과 업은 불가득의 원리를, 이렇게 ① 아자의 원리까지 역관하므로 마침내 본래 생함이 없는 본성을 체득해 들어가는 것을 통관이라 한다. 이와 같이 월륜 가운데에 본존의 범어로 명칭, 진언, 종자 등을 범자의 중심부터 차례로 돌아 배열해서 각 글자의 의미를 역순으로 관한다. 혹은 한 글자가 많은 글자에 들어가기도 하고 많은 글자가 한 글자 속에 수렴되기도 하는 것을 관하며, 마음의 월륜을 점차로 법계에 충만하게 하여, 둥근 구슬과 같이 종횡으로 자재롭게 관상한다. 이어 본존과 자기가 절대무분별의 경지에 이름을 종극으로 한다. 관하는 대상인 문자는 4종으로 분류되는데 즉 ① 통관(通觀)으로서의 5대(五大)의 종자, ② 별관(別觀)으로는 본존의 종자, ③ 본존의 진언, ④ 본존의 범어로 명칭으로 이것을 사종자륜관(四種字輪觀)이라 한다.


(3) 오자엄신관(五字嚴身觀)


   5륜관․5륜성신관․5대성신관이라고도 한다. 밀교에서 수법할 때 행자가 자기의 신체 위에 지, 수, 화, 풍, 공이 5대의 종자인 아(阿)․반[鍐]․란[囕]․함(唅)․?[欠] 또는 아(阿)․바[縛]․라(羅)․하(賀)․카[佉]의 5자를 슬(膝)․제(臍)․흉(胸)․면(面)․정(頂)에 배치하여, 내 몸이 곧 대일여래로 관하는 행법이다. 태장문법에서는 도량관 앞에서 닦는다. 이것은 또 금강문의 5상성신관에 대응된다.

(4) 오장삼마지관(五臟三摩地觀)


   삼종비밀 의궤에 설한 것으로 나의 5장을 5대(大), 즉 5여래로 관하여 이 몸이 성불하는 삼마지. 의궤에 “아(阿)자〈지(地)대〉는 금강부가 간장을 주체로 하고, 밤[鍐]자〈수(水)대〉는 연화부가 폐를 주체로 하고, 람(覽)자〈화(火)대〉는 보부가 심장을 주체로 하고, 함(含)자〈공대〉는 갈마부로 위장을 주체로 하고, ?[欠]자〈공대〉는 허공부(허공은 불의 다른 이름)로 비장을 주체로 한다.”고 하였다. 또한 같은 경전에 “아자는 동방의 아촉여래며, 밤자는 서방의 아미타불이며, 람자는 남방의 보생여래며, 함자는 북방의 불공성취여래며, ?자는 상방의 비로자나 대일여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5자는 곧 5대가 되며, 5대는 곧 5지(五智)여래가 된다. 이같이 5장 삼마지가 되어 이 몸이 성불한다고 한다.


(5)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


   5전성신, 5법성신이라고도 한다. 5상을 구비하고 본존의 불신을 행자의 현실의 몸 위에 완성하는 것을 관하는 것. 3밀관과 같이 금강문법에 있어서 중요한 관행이 되고, 3밀관이 횡(橫)으로 본존과 행자가 서로 들어와 합하는 것을 관하는데 대해서 5상성신관은 종(縱)으로 5상의 순서를 관한다. 이것은 또 태장문의 5륜성신관에 상대한다. 5상은 순차로 대원경지․평등성지․묘관찰지․성소작지․법계체성지의 5지(五智)에 배속되어, ① 통달보리심(通達菩提心, 자기의 본성 곧 보리심을 이론상으로 깨달음), ② 수보리심(修菩提心, 그 것을 실증한다), ③ 성금강심(成金剛心, 본존의 삼매야형을 관하여, 광금강과 검금강(劍金剛)의 양 관(觀)에 의해서 자신과 제불간의 융통무애한 것을 증득한다) ④ 증금강신(證金剛身, 행자의 몸이 곧바로 본존의 三昧耶身이 된다) ⑤ 불신원만(佛身圓滿, 관행이 바야흐로 나와 부처가 일치한다)의 다섯이다.


(6) 본존관(本尊觀)


   밀교에서는 대일여래를 보문(普門)의 본존, 그밖에 모든 불보살 등을 일문(一門)의 본존으로 하고 수법의 목적이나 종류 등에 따라서 본존을 달리 한다. 본존에는 자(字)․인(印)․형(形)의 세 가지가 있으며, 각각 유상과 무상으로 나눈다. 유상의 본존이라 함은 자기가 봉안하고 있는 것 밖에 따로 본존을 세우는 것으로, 제존 중에서 특히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본존, 또 자기와 인연을 맺은 뒤 계속하여 공경하고 있는 본존불을 의미한다. 무상의 본존이라 함은 자기 자신을 곧바로 본존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자신은 나면서부터 깨달음의 공덕을 갖추고 세간, 출세간을 통하여 최상의 불이라고 믿는 것이다. 밀교에서는 부처와 자기가 서로 섭입하여(入我我入)하여 일체가 되는 것을 극치로 하고, 수법에 있어서도 본존의 가피력과 행자의 공덕의 힘이 일체가 되는 경지에서 행하는 가지를 본존가지, 도량관을 하는 가운데 본존을 관하는 것을 본존관이라고 한다. 시호역의 진실섭경 1에 ‘제불의 영상을 관함에 마땅히 자성성취의 대명으로써 하라’한 것처럼 본존의 상호를 관하는 법이다. 본존은 행자가 선택하는데 따라 수시로 변할 수 있는데 여래의 상호를 관하는 데에 대하여서는 십팔계인에서 32상 80종호를 눈앞에 보듯 분명히 관하라고 한다. 수법 중 도량관의 중간에 행하며 보문만다라에 대해서 별존을 수행할 때는 대일의 심월륜에 직접 그 본존을 관한다. 또한 단상에 본존을 안치하여 행하는 데에 다섯 가지의 방법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① 종삼존(종자, 삼매야형, 존형의 줄임말)의 전성(轉成)을 관한다. ② 아자가 전해서 월륜으로 되고, 월륜 가운데에 본존의 종삼존을 관한다. ③ 대단(大壇)위에 사리를 두고, 사리가 전(轉)해서 보주(寶珠)로 되고, 보주가 전해서 본존으로 된다. ④ 보리심, 월륜, 본존으로 전성(轉成)한다. ⑤ 보리심, 즉 자기가 자심을 직접 본존이라고 관한다.

(7) 종삼존관(種三尊觀)


   본존(本尊)의 종자(種子)와 삼매야형(三昧耶形)과 존형(尊形)을 차례로 관(觀)하는 것을 일컫는다. 종자삼매야형존형관(種子三昧耶形尊形觀)․종삼존연기관(種三尊緣起觀)이라고도 한다. 밀교(密敎)의 관법(觀法)의 하나로 구체적인 사물(事物)에 관해서 사물(事物) 그대로가 진리임을 아는 방법. 만다라(曼茶羅)의 제불(諸佛)․제보살(諸菩薩)은 각각의 덕성(德性)이나 활용(活用)을 종자(諸尊의 각각의 고유한 梵字), 삼매야형(諸尊의 持物과 手指의 형상 곧 印契), 존형(圖像에 나타난 모습)이 상징적이므로 그 가운데 어느 한 분을 觀하여도 제존 모두를 관하는 것으로 되는데, 이제 어느 1尊을 선택하여 그에 대해서 종자․삼매야형․존형을 생략된 내용으로부터 널리 차제(次第)로 관법을 진행하여, 드디어 본존으로 선택한 그 1존과 같은 깨달음에 들어가서 자기(自己) 즉 진불(眞佛)의 즉신성불(卽身成佛)에 이르는 관법인 것이다.


(8) 월륜관(月輪觀)


   월륜관은 나의 마음이 바로 월륜(月輪), 즉 보름달과 같다고 관하는 관법으로, 정보리심관(淨菩提心觀)이라고도 한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보름달과 같이 청정하여 모든 번뇌의 때와 망상 등을 떠나 있으나, 번뇌에 가리워져서 보리심을 깨닫지 못하므로, 깨끗한 보름달을 관하여 염염히 관조하는 가운데 능히 지혜가 밝게 드러나 보리심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보리심론에 “수행자는 마음 가운데에서 달의 모습을 관하라. 이 관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본심을 관조함에, 맑고 청정함은 마치 보름달의 빛이 허공을 두루 밝힘과 같게 하라”고 하며, 또 “스스로의 마음을 봄에 그 모습은 달과 같다. 어찌한 까닭에 달로써 비유를 삼는가. 이른바 보름달은 둥글고 밝은 형상으로서 이는 곧 보리심의 모습이다”라고 하는 것이 모두 이 뜻이다. 금강계염송법에서도 오상성신관 가운데 수보리심관은 바로 심월륜을 관하는 것으로서 광금강과 염금강에 있어서 달 위에 있는 연꽃을 관함에 따라 자재를 얻어 자신이 곧 청정한 연화계로 되어서 부처의 몸을 원만히 이루게 된다. 관하는 방법으로는 행자의 눈앞 1미터 쯤으로 눈높이 되는 곳에 지름이 30cm정도 크기의 보름달을 놓아 두고 삼밀행에 의해 자기와 보름달과의 일체관을 얻고자 노력한다. 즉 본존의 마음의 달과 내 마음의 달과 중생의 마음의 달이 평등하여 둘이 아닌 한 몸이라고 관하다. 그리하여 눈을 떠서 본존을 관하고 다시 눈을 감고 마음 가운데에 관한다. 이와 같이 열고 닫는 관을 몇 번 한 다음에 이 보름달이 차차 넓어지고 점차 커져서 삼천대천세계 내지 법계에 두루하다고 관하며, 본존과 자신의 마음을 잊고 무분별 속에 머문다. 한참만에 다시 두루한 보름달을 차츰 말아 줄여서 내 마음 가운데에 안치하여 모신다고 관하고 이 때에 몸과 마음을 잊어버리고 다만 무분별에 머문다. 그후 피곤하게 되거든 곧 정심(定心)을 그치고 염주를 비벼 기도한 다음에 도량을 나온다. 행이 숙달되면 행자의 잡념이 사라지고, 행자의 마음 그대로가 청정한 보름달이 된다. 행자가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청정한 보리심이 그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월륜관을 수행하는 공덕에 대하여는 심지관경에, ‘만일 범부가 이 관을 닦으면 오역, 사중, 십악죄 및 일천제와 같은 무거운 죄라도 모두 다 소멸한다’고 한다.


(9) 관불(觀佛)


   불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보는 것. 부처의 모습.거룩한 자태를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관하는 것을 색신관(色身觀), 부처의 공덕을 생각하는 것을 법신관(法身觀), 마음 속의 부처야말로 이 세상의 참 도리라고 관하는 것을 실상관(實相觀) 또는 진신관(眞身觀)이라 한다.

(10) 구경차제(究竟次第)


   후기밀교의 독특한 수법으로서 행자가 법신에 귀의하는 과정을 관법차제로서 구성한 것. utpanna-krama, sampanna-krama. 무상유가탄트라의 수습차제(修習次第)의 하나로서 생기차제(生起次第, utpattikrama)에 대한다. 보통의 무상유가탄트라는 반드시 이 두 차제를 구비해야 한다. 모탄트라의 기본적인 입장을 밟으면서 행자가 법신에 귀입(歸入)하는 차제를 관법차제로서 구성한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비밀집회(Guhyasamāja)계 성자류(聖者流,Ḥphaga lugs)의 오차제(五次第, Pañcakrama)와 즈냐나파다(Jñānapāda)류의 해탈명점(解脫明点)이 있다. 생기차제와는 크게 다르며 구경차제에는 낙(樂)과 공(空)의 불가분이 강조되고 그를 위해 호흡의 제어를 동반하는 생리적행법, 혹은 성적 수습이 많이 사용된다. 실로 성속일치의 환희억양감은 성적인 황홀감과 상사하다. 단계적으로는 생기차제보다도 상위라고 생각되고 생기차제를 수습하고서 구경차제로 옮기는 것이 통례이다. 생기차제가 법신에서 화신으로의 전개를 관상하는 수행법임에 비해, 구경차제는 법신으로의 융합, 낙공(樂空) 불가분의 지혜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남녀 2존의 성적 유가의 실천을 통해 실증하려고 한다. 〈판차크라마 ; 오차제〉에서는 구경차제의 관법을 5단계로 나누어 설하고 있다. 〈오차제〉에서 설하는 구경차제의 순서는 금강염송차제(金剛念誦次第, vajrajāpa-krama), 심청정차제(心淸淨次第, cittaviśuddhi-krama), 자가지차제(自加持次第,svādhiṣṭtāna-krama),낙현각차제(樂現覺次第, sukhābhisambodhi-krama), 쌍입차제(雙入次第, yuganaddha-krama) 등이다. 행자는 이러한 순서로 관법을 닦아 개인적인 요소를 버리고 보편적인 법신에 귀입하려고 하는 것이다. 제1의 금강염송차제와 제2의 심청정차제는 현실의 개체에 관한 수습이다. 금강염송은 말의 적정을 얻는 수습이고, 심청정은 마음의 적정을 얻는 수습이다. 그 전에 몸의 적정을 얻는 수행이 있는데, 이것을 적정신차제라 하며, 구경차제의 준비단계라 할 수 있다. 신구의의 적정을 닦아 자기의 출생의 본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중유의 상태를 염상한다. 이것이 제3의 자가지차제이다. 중유를 염상한다는 것은 자기가 바람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환신(幻身)이라고 가지하는 것이다. 이 가지에 의해 자기가 일체불과 일체의 상이 같다고 관상하여 환신을 획득하고 이것을 보신이라고 염상한다. 다음에 중유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죽음에 이른다. 이 상태를 청정광명으로 염상하는 것이 제4의 낙현각차제이다. 청정광명은 자성청정심을 말한다. 죽음을 통해 유정은 자성청정심으로 귀입하는데, 자성청정심은 불성이며 불 자체이다. 낙현각은 대락을 본성으로 하는 현등각을 증득하는 단계이다. 이 현등각은 청정광명을 깨닫는 것이지만, 동시에 낙공무별(樂空無別)의 공을 증득하는 것이라고 한다. 석가의 보리수 밑의 깨달음의 경지를 체험하는 단계이다. 이것은 법신과의 합일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제5는 쌍입차제로서 제4단계에서 현등각한 유가행자가 극희금강(極喜金剛)의 몸이 되어 자리·이타의 행을 실천하는 단계이다. 쌍입은 무상유가승에만 있는 불이의 경지라고 한다. 이것은 무차별을 본성으로 하는 광명구생(俱生)의 대락의 지혜에 의해 이원(二元)의 본질이 무차별해진 상태라고 한다. 이것은 법신의 활동을 의미한다고 한다. 구경차제의 실수(實修)에서는 처음에 신구의의 적정을 닦는데, 이때에는 맥관(nāḍi)이나 윤(輪, 차크라로서 배꼽·심장·목·머리의 4군데에 있음), 신체 내에서 활동하는 바람 등의 생리학적인 지식이 수법에 응용되고 있다. 다음에 아사리로부터 갖가지 관정을 받는다.


(11) 성자관(聲字觀)


   행자가 몸 앞에 본존을 관하며 진언의 글자가 본존의 입으로부터 나와서 행자의 정수리로 들어가며, 행자의 입으로 나와서 본존의 배꼽으로 들어가 그 글자가 중간에 끊어짐 없이 둥근 바퀴 모양, 또는 둥글게 이은 염주처럼 된다고 관하는 것이다. 이 관을 행하게 되면 행자가 무시이래 행해왔던 온갖 죄장이 소멸되어 몸과 마음이 크게 안락하게 된다고 한다.


(12) 삼삼평등관(三三平等觀)


   부처의 삼밀과 중생의 삼밀이 상응하여 중생과 부처가 평등의 이치에 들어가는 관법으로 육신 이대로 불이 되는 즉신성불에 나아가는 관법. 모든 법이 한결같이 평등한 것으로 관하는 관법으로 밀교의 독특한 교리관법이다.


(13) 삼밀관(三密觀)


   삼업을 깨끗이 하는 관법이란 뜻으로 삼금강관(三金剛觀), 삼금관(三金觀), 삼훔관(三吽觀)이라고도 한다. 『금강정유가중약출염송경』 권제1에


마땅히 정(定)에 들고자 하거든 이와 같이 사유해야 한다. 모든 부처님은 허공에 두루하며 그 신체를 거룩하게 장엄하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바로 삼마야 등의 인을 맺으며, 곧 자신의 혀 위와 가슴과 손 가운데에 훔자를 관상하고, 그 글자가 변하여 금강으로 됨을 관하라.


   라고 이르고 있는 것처럼 금강의 종자이며 자재하여 능히 악을 깨뜨리는 힘을 상징하는 실담(悉曇) 훔(吽)자를 신구의(身口意)를 나타내는 신체의 세 곳에 관하는 밀교의 관법이다. 관하는 방법으로는 먼저 연화합장(蓮華合掌)을 하고, 손 안, 혀 위, 가슴 안에 달모양을 관한다. 달 위에 여덟 잎의 연꽃이 있고 그 위에 금강의 종자인 훔자를 두어 이 훔자가 변하여 이것이 대일여래의 오지(五智)를 상징하는 다섯 갈래의 금강저로 됨을 관한다. 이것을 횡으로 관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과 입으로 지은 번뇌와 부정한 행위를 끊어버리고 삼부(三部)의 여러 부처님을 향한다고 염하고, 훔자를 세 번 염송한다. 또한 몸과 마음과 입의 열 가지 악업을 참회하기 위해서는 열번 염송해야 한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 금강저가 대광명을 발하게 되면 무시이래로 우리 인간이 쌓아온 삼업의 죄업장이 깨끗이 사라지고 본래 갖추어진 삼밀이 드러난다고 하는 관법이다. 이상과 같은 삼밀관은 대일여래의 가지력에 수행자의 삼업의 행위가 일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므로, 수행의 형식으로는 입으로 진언을 염송하고, 손으로 인계를 맺으며, 마음에 관을 행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 그래서 이 신구의의 삼밀이 상응하면 이 셋이 마음의 직관으로써 합일하여 삼매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 삼밀은 수행자의 행위라는 점에서 삼업이다. 이러한 삼업이 삼밀이라고 할 때는 대일여래의 가지력이 더하여졌을 때를 말하며, 삼마지에 들어 초발심이 일어나야 비로소 지혜의 실현이 종교의 이상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대일여래의 가지력에 상응하여 정보리심으로 돌아가 본성을 개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불에 이르는 것은 일체여래의 가지력에 의하는 것이다. 수행자의 신구의, 즉 전체적인 삶의 형태라는 삼밀을 통하여 자연히 자심 속에 내장된 불성이 드러나게 된다. 나아가 일상생활 속에서 이와 같은 불성개발로 생활함에 따라 일체가 삼밀이 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삼밀관을 행함에 따라 일체의 행위가 삼밀 아닌 것으로 이르게 되었을 때 그러한 삶은 진실한 삶의 영위이며, 부처로서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4) 삼밀관행(三密觀行)


   신구의 삼밀을 온전히 동원하는 관행의 뜻. 진각종의 수행법은 종조님이 손수 체험으로 증득하고 전수한 삼밀관행법(三密觀行法)인 육자관법(六字觀法)이다. 첫째, 신밀(身密)은 법신불의 지권인(智拳印)을 결하고, 둘째, 구밀(口密)은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고, 셋째, 의밀(意密)은 육자관행(六字觀行)으로 자신의 몸이 불신(佛身)과 일여평등함을 관하는 것이다. 이 삼밀관행으로 자신의 삼밀이 상응하게 되면, 법신의 삼밀과 중생의 삼밀이 서로 평등하게 되어, 내 마음을 깨쳐 이 몸으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내면적으로는 법신불의 진실인 심인(心印)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행위는 이 심인을 밝히고 실현하여 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삼밀의 밀은 비밀이라는 뜻이며, 본래 법신불의 진실의 활동인 우주생명의 활동은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비밀스럽게 보이는데서 법신불의 활동을 삼비밀, 삼밀이라 불렀으나 우리들의 행위도 근본적인 면에서는 법신불의 활동과 다르지 않다는 면에서 삼밀이라 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입장에서 중생의 행위가 아직 부처의 행위는 아니므로 부처의 행위를 실현하기 위하여 특수한 수행을 해야 하는데 이를 삼밀관행이라 한다. 따라서 삼밀관행은 중생인 우리들을 통해서 법신불의 진실을 실현하는 실천 수행법이며, 중생의 자기향상, 자기실현의 수행법이다.


(15) 육자관행법(六字觀行法)


   ① 구경해탈(究竟解脫)하기 위해 육자관행(六字觀行)하는 자(者)는 몸과 입만 깨끗하게 가작(假作)으로 하지 말고 어느 때나 그 마음을 다라니(陀羅尼)에 전일(專一)하여 오불(五佛)에게 귀명(歸命)하며 지심(至心)으로 참회(懺悔)하고 반가(半跏)로써 그 마음이 편안하게 정좌(定座)하여 일체 망상(妄想) 모두 끊고 다만 오직 관(觀)하기를 육도중생(六道衆生) 무시이래(無始以來) 생사해중(生死海中) 윤회(輪廻)함을 원(願)하건데 이제 모두 보리심(菩提心)을 발(發)케하고 보살행(菩薩行)을 행(行)하여서 벗어남을 얻어지다.

   ② 이 뜻으로 주송(呪誦)하되 급(急)하게도 하지 말며 더디게도 하지 말고 고성(高聲)으로 하지 말며 염송(念誦)하는 글자마다 분명(分明)하게 소리내어 자기(自己) 귀에 듣기도록 관념(觀念)하는 그 본존(本尊)과 자기 몸의 그 글자와 염송기수(念誦記數) 펼지니라.


   밀교의 관법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은 없다. 물론 밀교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 전체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이러한 작업들이 체계적이고 심도있게, 누군가의 손에 정리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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