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국보인 칠지도의 명문(銘文)과 근초고왕의 요서(遼西) 진출에 괸한 문헌(文獻)입니다.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칠지도(七支刀)
1874년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대공사를 하고 있던 감마사도모에 의해 발견 보고되었다.
앞면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生辟百兵宜供侯王○○○作
해석 1.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 정양에 백 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는데 모든 병해를 물리칠 수 있으며 편안히 후왕(侯王)으로 나아가는 게 마땅하다.������
해석 2.
������태화 4년 9월 16일 병오 정양일에 백련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많은 적병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므로 많은 제후국의 왕들에게 나누어줌이 마땅하다.������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해석 1.
������선세 이래로 이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 치세에 (이 칼이) 귀하게 생겨남이 있으므로 성상(聖上)의 말씀으로 짐짓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 .������
해석 2.
������선세 이래로 아직 이 칼이 없었던 바 백제의 왕세자 (王世子)기생성음(奇生聖音)이 왜왕지(倭王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라.������
泰和(太和) 4년 (서기369년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에 만들어서
신공왕후(神功王后) 52년(서기 372년)에 왜왕에게 하사(下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위(北魏) 태화(太和 泰和) 4年 5月 11日은 서기 480년 5월 16일로 병오(丙午)와 일치(一致)하며 ������후왕제도������도 5세기 중반 이후에야 채택된 제도로 보기도 한다.
송서(宋書) 백제전(百濟傳)
「백제(百濟)는 본래 고구려(高句麗)와 함께 요동(遼東)의 동쪽 천여 리에 있다. 그 뒤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경략(經略)하여 차지하자 백제(百濟)는 요서(遼西)를 경략(經略)하여 차지하고,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하였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양(梁) 원제 소역이 그린 사신도(使臣圖)
「백제는 옛날 동이의 마한 속방(屬方)에서 비록되었다. 진(晉)나라 말기(末期)에 고구려(高句麗)가 요동을 경략하여 가지니 낙랑 역시 요서 진평현을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百濟國 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麗略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出典 宋書 券九十七 列傳第五十七 夷蠻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 辰韓 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後漸强大 兼諸小國 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 晉世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 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出典 梁書 券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 辰韓 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後漸强大 兼諸小國 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 晉世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 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出典 南史 券七十九 列傳第六十九 夷貊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