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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민론(豪民論), 깨어있는 자들(豪民), 역사상 숱한 사회변혁의 주역들> 고영화(高永和)
우리에게 <홍길동전>의 저자로 잘 알려진 조선중기의 유학자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이 쓴 <호민론(豪民論)>에서 그는,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뿐이다’라면서, 백성을 항민(恒民)·원민(怨民)·호민(豪民)의 세 부류로 나눴다. 먼저 항민(恒民)은 윗사람들이 하는 일에 그저 따르기만 하는 사람이다. 둘째 원민(怨民)은 지배계급에 대한 원망을 품지만 행동에 나서지는 않는 사람이다. 셋째 호민(豪民)은 자기가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의 부조리에 도전하는 사람이다. 대저 호민이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자신이 나라의 주권자임을 자각하고 주권자로서 행동하고 책임을 지는 시민(市民, 인민)이 바로 호민(豪民)이다.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은 백성의 위대한 힘을 일깨우고 있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당시 왕조사회에서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혁명적인 내용이다. 특히나 소설에서 설정한 주인공 홍길동의 캐릭터는 호민(豪民)의 그것과 너무나 닮았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가정에서의 신분적 제약과 사회에 등용되지 못하는 사회적 모순에 부닥쳤지만 이를 극복해 나가는 호민의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저자 허균(許筠)은 왕조시대 내내 ‘막된 인간’ 또는 ‘괴물’로 취급 받았지만 사실은 너무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이었다. 그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한 세기에 날까 말까 한 천재적 시인이요, 문사이자, 최초로 국문소설을 쓴 작가였으며, 또한 유불선(儒佛仙)에 두루 통달한 학자였고 불 같은 의지를 지니고 현실을 뜯어 고치려던 개혁혁명가였다.
○ 지난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회 부조리에 항거하며 사회개혁을 외치는 호민(豪民)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유가 있었다. 특히 수천년 동안 오직 농상(農桑), 즉 농사와 누에 치는 일에만 백성을 가두어 놓고(장려하고), 상공(商工) 즉 상공업을 천시한 것은, 상공업으로 부유하게 된 백성들의 의식이 깨어나는 것 자체를 차단해야만 권력을 유지하고 백성을 쉽게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교나 불교를 내세운 것도,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사회철학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 허균은 <호민론(豪民論)>에서 호민(豪民)의 예로 궁예(후고구려 건국자), 견훤(후백제 건국자)을 언급했다. 허균 그 자신도 서얼 철폐라는 부당한 대우에 맞서 서자들과 함께 칠서의 난을 일으켰다. 그리고 철저한 신분사회,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특정 지배계층만이 정치에 참여해 피지배층을 지배했다. 신분의 이름은 조금씩 달랐지만 권력을 가졌고 견제할 호민(시민)들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도 호민(豪民)들은 잘못된 정치에 항거하여 호민의 역할을 다하였다. 1862년(철종 13)의 임술농민항쟁, 진주농민항쟁, 구한말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 독립협회의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 그리고 100년 전의 3·1운동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그러하다. 해방 후에는, 미국에 의해서 민주주의가 저절로 전파되었고 민주주의 사회는 호민(豪民)들이 만들어 갔다. 현대 우리 역사에서 4.19혁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10 민주화 운동 등은 모두 우리 국민들 스스로가 호민(豪民)이 되어,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운 역사적 사건들이다. 최근의 호민(豪民)은 사회개혁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시민(市民)들이다.
◉ 덧붙여, 옛날 고려가 멸망해 갈 때 당시 백성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다. 그런데 조선을 개국하며 정도전이 ‘민본과 민생’을 기치로 내걸고 미래비전를 제시하였다. 유교 국가에서 왕이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은 민본, 민생임을 거듭 설파해 나갔다. 그로 인해 정몽주를 비롯한 일부 상류층의 학자나 지식인만 고려에 대한 지조와 절개를 지켰을 뿐, 대부분의 민중들은 고려 왕씨가 만여명이나 학살을 당하는 것을 목격해도 그저 침묵했다. 조선이 멸망해 갈 때도 마찬가지다. 예전 나의 조부님께 직접 전해 들은 바로는, 1910년 한일합방 당시 백성들은 나라를 빼앗긴 것에는 안타까워했지만 조선이 사라지는 것에는 슬퍼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사실 오늘의 우리가 받아들이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직시해야 되는 실제 우리 민중의 역사였다. 시대 말기의 우리나라 백성들은 생지옥이었고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조선말기 정치기강은 극도로 문란했으며, 특히 인사행정의 문란으로 지배계층의 농민층에 대한 수탈은 더욱 강화되었다. 텅 빈 나라의 곳간과 거듭되는 농민항쟁에도 불구하고 문제의식도, 지배층의 각성도 없었다. 게다가 고종과 민비, 대원군 모두 세상 물정 모르는 무능한 지도자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회개혁은 거의 불가능했다.
○ 조선말 1866년 천주교 박해 당시 효수형을 당했던 프랑스인 다블뤼(Daveiuy) 주교의 보고서에 의하면, “조선에는 정직한 관리를 찾기 어렵고 가난한 백성은 그저 가여울 뿐이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세금을 내야 할 뿐만 아니라, 관리, 밀수꾼, 경찰, 군인, 출몰하는 도적떼까지 돈을 바쳐야했다. 또 조선 사람들은 사유재산권이 불안하기 때문에 열심히 살지 못하고 인생을 자포자기로 살고 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일을 해서 식량을 모으면 모두가 와서 빼앗아 가니, 아무도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좁고 더러운 골목길에서 병이라도 걸리면 권력자나 부자가 아닌 이상, 그냥 방치되어 죽어 갔다”고 덧붙여 놓았다. 이런 사회를 개혁하지 않았으니 조선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었다. 이러한 암담한 나라에서 하층 민중들에게 애국정신(독립투쟁)을 바란다면 아마도 미친 자일 것이다.
◉ 다음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한양 도성의 역사 기록이다. 1592년 4월, 여러 곳에서 전투의 패배가 국왕에게 보고되자, 4월 30일 국왕 선조마저 피난길에 오르며 서울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흥분한 한양 백성들은 궁궐과 관청을 약탈하고 장예원(掌隸院)과 형조에 보관 중이던 노비 문서를 불살랐다. 이로 인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소실됐고, 춘추관의 역대 실록, 다른 창고에 보관했던 고려사의 사초,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역대의 전적, 보물이 모조리 불타거나 도난당했다. 이기(李墍 1522~1600)가 쓴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쳐서 한 달이 넘도록 계속해서 불탔다. 그들의 마음이 흉적의 칼날보다 더 참혹하다”고 했다. 그러다가 5월 3일 새벽 무렵,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군 2만2280명이 흥인지문을 통해 입성했다. 가토 군대는 처음에는 성문이 활짝 열렸고 성안도 텅 비어 매복이 있다고 여겨 쉽게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의 우리가 믿지 못하겠지만, 임진왜란 당시 적어도 왜군은 서울 점령초기에는 무법행위를 금지하였다. 그래서인지 도망갔던 백성들이 도성으로 돌아오고 시장도 활발히 열렸다. 적 치하의 한양에는 평소처럼 시장도 열리고 상거래도 활발했으며 왜군에 협조하는 부역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저항세력을 밀고까지 했다고 전한다. 물론 일본은 조선을 명나라 침략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한양 백성들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왜장 고니시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전 시가지에 자신의 깃발을 세우고 무법행위를 금지했다.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조선 임금의 실정을 부각시키며 자신들이 점령군이 아니라 선정의 시혜자임을 강조했다. 굶주림과 피난 생활에 지친 도성민들은 일본군의 회유에 점차 서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통행증을 휴대하면 도성 출입도 제한하지 않았다. <송와잡설>에는 “삼의사(의료기관 3곳)와 각 관청의 서리, 전복(典僕·노복) 및 잡색(雜色·천역) 무리도 모두 왜적에게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시장을 벌이고 물자를 교역하기를 평시와 다름없이 하였다. 날마다 왜적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서로 방문하고 도박도 하였다”고 했다. 하층민들에게는 조선의 지배층이나 왜놈들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 왜놈들의 본심이 드러나 납치 강간 등의 폭행과 대량학살이 자행되자, 서서히 저항세력이 늘어나긴 했지만.... 여튼 노비 등을 포함한 최하층의 백성에겐 조선이나 왜국이나 지배층은 모두 탐학을 일삼는 똑같은 탐관오리 가렴주구들이었다.
●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허균의 민중 지향적 사상이 대표적으로 함축된 <호민론(豪民論)>은 한문 문체로는 논(論)이다. 논은 사리를 판단하여 시비를 밝히는 산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창작되었으며, 내용적으로는 학문을 논한 것, 정치를 논한 것, 도덕을 논한 것, 역사를 논한 것, 인물을 논한 것 등 다양한 주제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글에서 조선이 국가체계가 문란해지고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는데도 위정자들이 전혀 백성을 두려워 않고 사리사욕만 챙기며 가렴주구에 골몰하는 탓을 허균은 호민이 없는 것에서 찾았다. 허균은 "우리나라는 백성이 착해 협기가 없다"며 "홍수·화재·호환보다 백성을 더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백성을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 먹는 까닭은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백성들이 내는 세금이 5푼(分)이라면 공가(公家 관청)로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1푼(分)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스러운 사인(私人)에게 어지럽게 흩어져 버리니 누가 애써 일하겠는가? 그러니 호민(豪民)이야말로 불합리함에 저항하여 자유의지로 개혁을 주도할 수 있다고 설파하면서 호민의 수가 많을수록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 왕조시대에는 백성들의 의식이 깨어날까 봐, 서책의 자유로운 유통이나 진보적인 문체(文體)를 금지하기도 했다. 이는 호민(豪民)의 증가를 막기 위한 방편이었다. 우리가 아는 영정조시대 문예부흥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영조는 진취적인 책을 읽은 자는 물론 유통시킨 자들을 전원 색출해서 유배를 보내거나 수군에 충군 시켰다. 결국 책을 파는 ‘책쾌 금령’을 이어 발표했다. 또한 정조는 다채로운 표현양식과 진보적이고 독특한 특징을 구사하는 문체(문장의 형태)를 금지한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발표해 진보적인 문인(文人)들을 탄압했다. 권력의 유지를 위해 백성을 통치하는 방법에는 암군(暗君)과 성군(聖君)이 따로 없었다.
서점이 없는 나라에다 백성이 무서운 줄 모르는 나라, 그럼에도 지배층에 있는 사람들은 태평스러운 듯 두려워할 줄을 모르는 것은, 바로 호민(豪民)이 없기 때문이다. 왜? 호민이 없었는가? 조선 정부가 호민이 될 여지를 없앴기 때문이다. '천지간에 흘겨볼' 여유를 없애버리고 농사나 짓고 교미나 하게 조성하고, 충성과 효도를 다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쉽고 효율적인 문자(한글)를 가진 나라 백성은 그렇게 살아왔다. 게다가 한술 더 떠, ‘조선의 지배층은 오직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중국의 역사나 문장, 그리고 하늘의 뜬구름 같은 중국철학이나 읊으면서, 망국의 길로 스스로 들어갔다.’
*<호민론(豪民論) 원문>* 허균(許筠 1569~1618), 논(論)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 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①대저 이루어진 것만을 함께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란 항민(恒民)이다. 항민이란 두렵지 않다. ②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란 원민(怨民)이다. 원민도 결코 두렵지 않다. ③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天地間)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란 호민(豪民)이다. 대저 호민이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호민은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세가 편승할 만한가를 노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밭두렁 위에서 한 차례 소리 지르면, 저들 원민이란 자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도 함께 외쳐대기 마련이다. 저들 항민이란 자들도 역시 살아갈 길을 찾느라 호미ㆍ고무래ㆍ창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놈들을 쳐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秦) 나라의 멸망은 진승(陳勝)ㆍ오광(吳廣) 때문이었고, 한(漢) 나라가 어지러워진 것도 역시 황건적(黃巾賊)이 원인이었다. 당(唐) 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가 틈을 타고 일어섰는데, 마침내 그것 때문에 인민과 나라가 멸망하고야 말았다. 이런 것은 모두 백성을 괴롭혀서 자기 배만 채우던 죄과이며, 호민들이 그러한 틈을 편승할 수 있어서였다.
대저 하늘이 사목(司牧 임금)을 세운 것은 양민(養民, 백성을 돌보기)하기 위함이고,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 메워도 차지 않는 구렁 같은 욕심을 채우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저들 진(秦)ㆍ한(漢) 이래의 화란(禍亂, 재앙과 난리)은 당연한 결과이지 불행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땅이 좁고 험준하여 인민도 적고, 백성은 또 나약하고 좀 착하여 기절(奇節, 뛰어난 절조)이나 협기(俠氣, 호협한 기상)가 없다. 그런 까닭에 평상시에도 큰 인물이나 뛰어나게 재능 있는 사람이 나와서 세상에 쓰여지는 수도 없었지만, 난리를 당해도 호민ㆍ한졸(悍卒, 사나운 장졸)들이 창란(倡亂, 소요를 주동)하여, 앞장서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게 하던 자들도 역시 없었으니 그런 것은 다행이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시대는 고려 때와는 같지 않다. 고려 시대는 백성에게 부세(賦稅, 세금을 부과함)하는 것이 한정되어 있었고, 산림(山林)과 천택(川澤, 내와 못)에서 나오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가졌다. 상업은 자유롭게 통행되었고, 공인(工人)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 또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나라에는 여분을 저축해 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큰 병화(兵禍, 전쟁의 재앙)와 상사(喪事)가 있더라도 그 부세(賦稅)를 증가하지 않았었다. 고려는 말기에 와서까지도 삼공(三空, 지극한 가난)을 오히려 걱정해 주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 변변치 못한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써 귀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범절만은 중국과 동등하게 하고 있다. 백성들이 내는 세금이 5푼(分)이라면 공가(公家 관청)로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1푼(分)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스러운 사인(私人)에게 어지럽게 흩어져 버린다. 또 고을의 관청에는 남은 저축이 없어 일만 있으면 1년에 더러는 두 번 부과하고, 수령(守令)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마구 거두어 들임은 또한 극도에 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엽보다 훨씬 심하다. 그러나 위에 있는 사람은 태평스러운 듯 두려워할 줄을 모르니 우리나라에는 호민(豪民)이 없기 때문이다. 불행스럽게 견훤(甄萱)ㆍ궁예(弓裔)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며, 기주(蘄州)ㆍ양주(梁州)ㆍ6합(合)의 변란은 발을 제겨 딛고서 기다릴 수 있으리라. 백성 다스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두려워할 만한 형세를 명확히 알아서 전철(前轍)을 고친다면 그런 대로 유지할 수 있으리라.
[天下之所可畏者 唯民而已 民之可畏 有甚於水火虎豹 在上者方且狎馴而虐使之 抑獨何哉 夫可與樂成而拘於所常見者 循循然奉法役於上者 恒民也 恒民不足畏也 厲取之而剝膚椎髓 竭其廬入地出 以供无窮之求 愁嘆咄嗟 咎其上者 怨民也 怨民不必畏也 潛蹤屠販之中 陰蓄異心 僻倪天地間 幸時之有故 欲售其願者 豪民也 夫豪民者 大可畏也 豪民 伺國之釁 覘事機之可乘 奮臂一呼於壟畝之上 則彼怨民者聞聲而集 不謀而同唱 彼恒民者 亦求其所以生 不得不鋤耰棘矜往從之 以誅无道也 秦之亡也 以勝 廣 而漢氏之亂 亦因黃巾 唐之衰而王仙芝 黃巢乘之 卒以此亡人國而後已 是皆厲民自養之咎 而豪民得以乘其隙也 夫天之立司牧 爲養民也 非欲使一人恣睢於上 以逞溪壑之慾矣 彼秦漢以下之禍 宜矣 非不幸也 今我國不然 地陿阨而人少 民且呰寙齷齪 无奇節俠氣 故平居雖无鉅人雋才出爲世用 而臨亂亦无有豪民悍卒 倡亂首爲國患者 其亦幸也 雖然 今之時與王氏時不同也 前朝賦於民有限 而山澤之利 與民共之 通商而惠工 又能量入爲出 使國有餘儲 卒有大兵大表 不加其賦 及其季也 猶患其三空焉 我則不然 以區區之民 其事神奉上之節 與中國等 而民之出賦五分 則利歸公家者纔一分 其餘狼戾於姦私焉 且府無餘儲 有事則一年或再賦 而守宰之憑以箕斂 亦罔有紀極 故民之愁怨 有甚王氏之季 上之人恬不知畏 以我國無豪民也 不幸而如甄萱 弓裔者出 奮其白挺 則愁怨之民 安保其不往從而蘄 梁 六合之變 可跼足須也 爲民牧者 灼知可畏之形 與更其弦轍 則猶可及已]
[주1] 논(論) : 사리를 판단하여 시비를 밝히는 한문 문체이다. 논의 내용은 정치를 논한 것, 도덕을 논한 것, 경을 해석한 것, 역사를 논한 것, 이기(理氣)와 성명(性命)을 논한 것,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감상적으로 말한 것이 있다.
[주2]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 : 한유(韓愈)가 사용했던 말이다. 살을 깎고 골수를 부순다.[剝膚椎髓]는 의미로, 가혹한 수탈 정책을 상징하는 말이다.
[주3] 진승(陳勝)ㆍ오광(吳廣) : 진승은 진(秦) 나라 양성인(陽成人), 자(字)는 섭(涉), 진 나라 2세 때 오광과 함께 어양(漁陽)에서 군인으로 근무하다가 진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스스로 초왕(楚王)이 되어 세력을 확장했으나 마침내 패망하였다. 그러나 진승의 반진(反秦) 봉기는 진이 망하고 한(漢) 나라가 일어난 계기가 되었다. 오광은 진 나라 양하인(陽夏人), 자(字)는 숙(叔), 진승과 함께 진 나라에 반기를 들고 항거하여 가왕(假王)이 되었다가 뒤에 피살되었다.
[주4]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 : 왕선지는 당(唐)의 복주인(濮州人). 희종(僖宗) 초에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 뒤에 황소(黃巢)가 호응해 주어 크게 세력을 떨쳤으나 진압된 후 죽었다. 황소는 당(唐)의 조주인(曹州人). 대대로 소금장사였다. 많은 재산을 모아 망명객들을 부양하였고, 무예에 뛰어나 왕선지가 난을 일으키자 호응했다. 왕선지가 죽은 뒤 왕으로 추대되고 충천대장군(衝天大將軍)이 되었다. 10년 동안 여러 지역을 점령하여 큰 세력을 떨쳤으나 뒤에 패망하여 자결했다.
[주5] 삼공(三空) : 세 가지가 빔. 조정에 인재가 없는 것(朝廷空), 창고가 빈 것(倉廩空), 전야가 황폐한 것(田野空)을 이른다. 또 흉년이 들어 제사를 궐하고, 서당에 학도들이 오지 않고, 뜰에 개가 없음을 비유한 가난을 상징하는 말임.
[주6] 견훤(甄萱)ㆍ궁예(弓裔) : 견훤은 후백제의 왕으로 신라 말엽 신라에 반기를 들고 후백제를 세움. 궁예는 신라 말엽 후고구려의 왕으로 뒤에 태봉국을 세워 왕이 됨.
[주7] 기주(蘄州)ㆍ양주(梁州)ㆍ6합(合)의 변란 : 중국 기주와 양주(梁州)를 거점으로 했던 황소(黃巢)의 난을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