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
안규수
아침 신문에 ‘갓생’ 새로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주로 MZ세대가 커뮤니티 등에서 사용하는 신조어다. 젊음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언어다. 갓생이란 신을 뜻하는 영어 ‘갓God’과 ‘인생’을 합친 말로, 현실에 집중하면서 성실한 생활을 하고, 생산적으로 계획을 실천해나가는 이른바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을 의미한다. 이번 일은 열심히 하지 않았거나 성과가 없었지만, 다음번엔 목표와 계획을 갖고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갓생은 미래의 불안감을 떨쳐내려는 일종의 다짐으로, 큰 성공이나 부를 꿈꾸는 대신 매일 조금씩 발전 성장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두는 MZ세대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다. 2020년부터 이어진 코로나19로 불확실성과 좌절감이 커졌지만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일상에서 나만의 성공을 만들어 가겠다는 것이다. 갓생 살기 실천법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좋은 습관 들이기, 계획표 짜기 등 평범하지만 일상의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다.
인터넷 검색창에 갓생을 입력하자 이에 관한 글이 쏟아졌다. 하루 동안 해야 할 일을 종이에 빼곡히 적어 놓고 실천할 때마다 표를 남긴 뒤 ‘나, 이만큼 바지런히 살았어요’ 하고 인증을 하며 자랑하는 식이었다. 그들이 세운 계획에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기’ ‘출근 전에 운동하기’ ‘전화 영어 예습하기’처럼 그럴싸한 일도 있었다.
요즘 나의 바깥 활동은 주로 운동과 여행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행은 반드시 몸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상상 속에서도 알지 못하는 대상을 쫓아갈 수 있다. 희망만으로도 도래하지 않은 미래로 달려갈 수 있다. 이처럼 ‘갓생’이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보기로 했다. 우선 새벽 4시에 일어나 간단한 아침 운동을 하고 독서와 글쓰기에 정진한다. 오후에 한 시간 정도 웰빙 숲길을 걷고, 30분 정도 낮잠을 즐긴 뒤 친구를 만나는 둥 일상을 즐긴다. 대충 이런 식으로 계획을 세우고 다음 날 실천에 들어갔다.
작심 3일이라 했던가. 딱 하루 실천하고 다음 날 엉뚱한 집안일이 생겨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갓생’이 생각보다는 어렵다는 걸 알았다. 나처럼 늙은이들에게 ‘갓생’은 애당초부터 생리에 맞지 않은 꿈 같은 일이었다.
오래전 본 영화 '빠삐용'에서 살인죄라는 누명을 쓰고 악명 높은 수용소에 갇힌 빠삐용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참혹하고 무서운 감옥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누명을 밝히고자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탈옥은 쉽지 않았고 연이어 실패해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징벌방에서 어느 날, 그는 꿈을 꾼다. 그는 꿈속에서 법정에 선다. 재판관은 빠삐용을 '죄인'이라 공격했고,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지 죄가 없다며 항변한다. 그때, 재판관은 말한다.
“당신이 주장하는 사건이 무죄라고 하더라도 당신의 인생을 허비한 것은 유죄다.”
누군가 나더러 그 나이 먹도록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느냐며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나는 인생을 허비한 건 유죄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 유죄가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싶다.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병환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절망감으로 군에 입대하여 월남전에 뛰어들어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혈기에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그 모험이 내 인생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으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을 건너오는 기억들은 다 향기롭다. 무척 힘들었던 시간조차 세월의 거름망에서 다 걸러지는지 그리움이란 진액과 아쉬움이라는 향기만 건너온다. 한겨울 땅 밑에서 뿌리가 겪어냈을 어둠과 추위는 다 걸러 내고 향기만 올리는 민들레처럼 척박한 땅에서 싹을 틔우고 지금이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스럽다. 꿀처럼 달콤하기도 하고 담즙처럼 쓴 그런 시간 속에서 삶을 낭비한다는 무슨 뜻일까? 애면글면하는 사랑도, 전전긍긍하는 삶도 다 마찬가지이다. 이루는 건 한평생, 허무는 건 한나절. 그러나 영원의 시간대에선 한평생이나 한나절이나 별 차이가 없는 한바탕 꿈인 것을.
시간은 흘러 여름이 오겠지. 그 여름이 갈 때쯤이면 매미가 처량하게 울 것이다. 매미는 땅속에서 7년여를 굼벵이로 살다가 우화 한 뒤 보름쯤 나무에서 울다가 죽는다. 매미가 나무에 달라붙어 맴맴 울어대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은 없다. 그때가 오면 나도 매미처럼 울지 모르겠다.
봄비에 젖은 오후가 나를 적신다. 벚꽃 향기로, 그 나뭇가지에 저공으로 날아와 앉는 참새의 날갯짓으로 나의 하루를 가득 채운다. 시간의 그물을 건너오는 동안 고통의 기억은 모두 증발해 버렸는가. 시간이 마법 같다. 그 마법의 힘으로 이렇게 고요하고 향기로운 봄날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베트남산 핸드드립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몸이 따뜻해진다.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의 아름다운 선율이 방 안에 가득하다. 연주가 끝났을 때 누군가에게서 진심을 담은 선물을 받은 듯 기분이 상쾌했다.
나의 봄은 벚나무로부터 시작된다. 화려한 꽃망울이 봄을 무르익게 한다. 그 비밀스러운 손짓에 매번 경탄한다. 언 땅 어디에다 저 깊은 향기를 감춰 두었다가 내놓는 것인지. 좋은 향기는 코끝만 스치지 않는다. 후각의 신경을 통해 온몸을 휘젓고 다니면서 기억 창고 속 먼 시간을 불러오고 거기 어른거리는 삶의 그림자도 함께 데려온다.
벚꽃 향기에 취해 나는 다시 혼자 놀이에 빠져들어야겠다. 어딘가 침잠해 있는 나의 어휘들을 찾아서. 내 글을 읽어 주는 독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길이 힘들어도 결코 쉬거나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도 할 말이 있다. 나, ‘갓생’ 산다.
첫댓글 기존 내용을 많이 수정해 다시 올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