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복음 9,36-10,8 |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6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가엾은 마음을 뜻하는 그리스 말은 ‘스플랑크논’인데 원래 이 말은 ‘창자’를 뜻했다.
유다인들은 창자에 동정심이라든지 가엾게 여기는 마음 등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으며 창자는 감정을 가진 기관으로 여겼던 것이다. 우리말 속담에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에서 배가 아픈 곳은 뱃가죽이나 배의 지방층이 아니라 뱃속에서 아픔, 통증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말을 좀 더 설명하면, ‘내부의 창자로부터 동정심이 흘러나와 마음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이 말은 격한 동정심에 대한 강조 표현인 것이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의 자비심과 동정심이 예수님 깊은 곳에서 나온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주 목자로 비유되어졌다(에제키엘 34 장).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여겨졌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거짓 목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눈에는 이들이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양 떼로 보였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목자였던 왕과 대사제는 로마 제국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권력과 욕망을 채우고 있었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신심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종교 의식이나 교리 등으로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일반 백성들을 죄인 취급하면서 멸시했고, 귀족들과 상류층은 백성들을 착취했다.
백성들은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종교적으로 멸시당하면서 먹고사는 일에 지쳐 있었고 어디서도 위안을 얻을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가엾은 백성들을 보살펴 주는 목자이신 분이다.
백성들의 이런 상태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달리다’라는 말의 원어는 ‘에크레뤼메노이’인데 이 말의 원 뜻은 ‘가죽을 벗기다’, 칼로 ‘썰다’로서 극심한 고통이나 걱정, 약탈 또는 탈진한 상태를 가리킨다.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원래 뜻은 술에 만취하거나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곤두박질한 상황을 표현할 때 사용된 언어이다. 복음사가는 그 당시 일반 백성들의 삶이 회복 불가능한 정도의 절망적 상태임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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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추수’, ‘수확’이라는 말은 종말론적 표현으로 종말의 심판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수확’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뜻한다. 또한 복음과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영혼들이 많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추수’는 영혼 구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꾼’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선교사들이다. 이스라엘 사회에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곁에서 방관하는 사람들이었지 직접 나서서 추수하는 일꾼들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는 참 목자가 아니라 백성에게 무거운 짐만 지우고 그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 거짓 목자였기 때문에 일꾼이 부족했던 것이다.
‘밭의 주인’은 하느님이다. 백성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많은데 협력자가 적은 것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비슷한 상황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께 일꾼을 청하라.’라고 하신다. 그런데 예수님 친히 사도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을 교육하셨으면서도 왜 제자들에게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라고 하셨을까? 예수님이 직접 일꾼들을 뽑으시면 될 것을 왜 하느님께 청하라고 하셨을까?
주인이 밭에 일꾼들을 보냈을 때, 해야 할 일에 비해 일꾼이 적다면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일차적으로 일꾼들 자신들일 것이다. 그래서 주인에게 더 많은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는 것도 일꾼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다. 만일에 일꾼들이 자기 품삯만 받고 자기 할 일만 하고 가버린다면즉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면서 주인에게 일꾼을 청하지 않고 그냥 가버린다면, 수확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성실한 일꾼이라면 주인의 입장에서 전체 일을 판단할 것이고, 주인의 입장에서 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지시는 하느님 나라의 일을 하느님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로 생각하고 일하라는 뜻이다. 일꾼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는 고용된 일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하느님의 일은 당연히 우리의 일이다. 또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지만 제자들은 사실상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의 일꾼들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직접 하느님께 더 많은 일꾼을 청하라고 하신 것이다. 또 하느님께서 어디 다른 곳에 다른 일꾼들을 데리고 계신 것은 아니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꾼이 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청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일꾼은 세상 종말 때까지 계속 필요하고, 그래서 일꾼을 보내 달라는 기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초대 교회부터 지금까지 항상 일꾼을 모자랐다. 교회가 할 일은 많지만 일꾼은 늘 부족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각자 하느님의 일꾼으로 나서야 하고, 또 더 많은 일꾼을 보내 달라는 기도도 계속해야 한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윗 절 참조.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 친밀한 간청을 드리라는 뜻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께 일꾼을 보내달라고 친밀하게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일꾼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보내 주십사고’ 이 말은 강제력이 동원된 상태로 보내 달라는 의미이고, 결국 급박한 상태에서의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청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 간절히 필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늘 하느님 나라의 일꾼은 부족한 상태이다. 또 하느님 나라의 일꾼은 하느님의 선택에 의해 파견이 되어야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일꾼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스스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선택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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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마태오는 열두 제자의 선발 과정을 언급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권한을 주신 일과 제자들의 명단만을 기록했는데 열두 제자는 이미 산상설교 이전에 선발되었을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임명하신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몇몇 예비적 단계들(4,18-22, 요한 1,35-51)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더욱이 마르코와 루카의 기록에 의하면 산상설교 이전, 예수님께서 밤새껏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선택하셨고(마르 3,13-18, 루카 6,12-16) 또한 그들에게 얼마 동안의 제자 훈련을 행한 후에(마르 6,7-13, 루카 9,1-6) 비로소 제자들을 선교지로 파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열두 제자들의 임명은 성령 강림 후 제자들의 선교 활동을 위한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상징하며,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의 12 지파가 구약의 이스라엘을 대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12 명의 제자들이 새 이스라엘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들의 직무는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다.
12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동안에는 ‘제자들’이었고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사도’가 된다. ‘사도’는 그리스어로는 ‘아뽀스톨로스’, 히브리어로는 ‘살루하’인데 이 말은 ‘파견된 자, 권리를 가진 자, 사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열두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같이 학문적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또한 다른 능력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고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이 보고 들은 대로만 전달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가까이 부르시고’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목적하신 것을 위해서 불렀다는 뜻이다. 즉 제자들에게 어떤 임무를 주시기 위해서 불렀다는 뜻이다. 예수님에게는 열두 제자 말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이 많이 있었다. 열두 제자들은 많은 제자들 가운데 뽑힌 특별한 제자들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구원 사업에 대한 임무를 주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다.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라는 말은 열두 제자의 임무와 권한을 나타낸다.
‘권한’이란 ‘권위와 능력’ 또는 ‘ 권위와 통치권’이란 의미로서 어떤 지역을 정복한 정복자들이 그 지역에서 갖는 권한, 힘을 의미하는 단어로 하느님께서 세상에 대해 가지고 계시는 권한과 통치권 그리고 힘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하느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셨고 그들에게 그 일을 하기에 합당한 권위와 힘을 부여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권능에는 먼저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여기서 ‘더러운 영’은 ‘악한 영’이라는 뜻으로서 하느님께 대적하고, 인간을 죄에 빠지게 하며, 인간을 윤리적으로 더러운 즉 죄가 되는 일을 하도록 유혹하는 영적 존재이고 인간의 정신과 도덕과 육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영 들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같은 더러운 영들을 쫓는 능력을 병 고치는 능력과 구별하여 주신 것은 그 일이 병을 고치는 일보다 탁월하게 하느님 나라의 능력을 실행하는 것이고, 사탄의 세력을 허물어뜨리는 직접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어떤 다른 권능을 행하는 것보다 소명 받은 제자들의 사도적 권위를 확증하는데 유효한 표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악한 영을 내쫓고, 물리치는 일은 대제사장적 메시아의 권능으로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일은 메시아와 그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표징인 것이다. 이렇게 악령이나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해주고, 해방시키는 것이 열두 제자의 첫 번째 임무였다. 또 예수님 부활 후에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임무가 추가되었다. (28, 19-20)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는 권한은 원래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로서 이제 당신의 권위와 권한을 제자들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특수한 권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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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 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사도’의 그리스어는 ‘아포스톨로스’이고 ‘내가 보내다’라는 뜻의 동사 ‘아포스텔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냄을 받은 자, 선교사, 대리자,’ 등의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복음 전파를 위해 파견된 특사, 또는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인 교회의 확장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할 예수님의 증인들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사도직에 대한 이해는 사도행전 1, 21- 22 절에 규정되어 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1.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님의 승천까지 예수님과 동행한 자들, 2. 예수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자, 3.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 증언할 자들이다.
그러나 ‘사도’라는 용어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좀 더 광의적 의미로 사용되어 단지 12 제자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수많은 선교사들(1 고린 9,1-5, 15,7, 갈라 1,17), 바오로나 바르나바(사도행전 14,4, 14, 갈라티아 1,1), 안드로니코스와 유니아(로마 16,7), 실바누스와 티모테오(1 테살 1,1, 6), 예수님의 형제들(갈라 1, 19) 등에게도 사용되었다.
이 구절에서 사도는 협의적 의미의 ‘사도’로써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12 제자들을 의미하며 나중에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이 제외되고 그 자리에 마티아가 채워진다(사도행전 1,26). 그리고 바오로는 넓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될 수 있으나 1 고린토 15,8-10 절에 의하면 바오로는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이방인의 사도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좁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할 수 있다.
‘베드로라고하는 시몬’은 히브리어로 ‘듣다’는 뜻인 ‘시몬’은 ‘시므온’의 단축형으로 베드로의 본명이다.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아는 갈릴래아 벳사이다 출신으로(요한 1, 44) 요한의 아들들이자(요한 1, 42) 어부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것 같다(요한 1,35-42).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아람어로 ‘케파’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가 된다. 나중에 ‘베드로’라는 이름은 사도로서의 공적 지위를 암시하는 이름으로 대부분 사용되었다.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 제일 먼저 신앙고백을 하였고, 성령 강림 후 교회의 시작의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예수님의 선택 등의 이유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 중 수위권을 가지고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신앙에 충실한 예수님의 증인으로써 초대 교회의 기둥으로써 활동을 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하다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 그의 무덤 위에 바티칸 대성전이 지어졌다.
안드레아라는 이름의 뜻은 ‘용감한 자, 남자다운’라는 뜻으로 베드로의 형제이고 어부였으며 안드레아가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한 인물로 나온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서부 스키티아 그리고 그리스와 소아시아 등지에서 선교하다가 70 년경 파트라이에서 X 형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야고보는 창세기 25 장 26 절의 ‘발꿈치를 잡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요한은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야고보가 형이고 요한이 동생이다. 야고보 사도는 44 년경 사도들 중에 최초로 순교하였으며,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천둥의 아들들’이라고 불렸는데 그 이유는 이 형제가 성격이 매우 급하고 흥분을 잘했기 때문이다.루카 9,54; 마르 10,35-41 참조. 요한 사도는 베드로와 함께 활동하다가 (사도 3 장),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을 전했고, 에페소에서 선종하였다. |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필립보는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필립보도 세례자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랐으며 베드로와 같은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필립보는 주로 그리스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한(요한 12,20-22)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에 정통한 것으로 보인다. 필립보는 2 세기 경 히에라폴리스에서 순교했다.
바르톨로메오는 ‘톨로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인 ‘나타나엘’과 동일시되는 인물이다.
그 이유는 요한 복음 1,43-51, 21장 2 절을 보면 나타나엘은 12제자와 관련 있는 인물로 나타난다.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사도들의 명단에서 필립보와 바로톨로메오가 항상 연결되고 있다. 물론 이런 근거로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동일 인물이라고 추정을 한다면 갈릴래아 카나 출신(요한 21, 2)이며 메소포타미아, 이란을 거쳐 인도까지 복음을 전한 사도이며 아르메니아에서 선교를 하다가 순교를 하였으며 전승에 의하면 산 채로 살갗을 벗기는 고통을 당한 후 참수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바티칸의 시스티나 경당에 ‘최후의 심판’ 그림에서 자신의 살가죽을 두 팔로 봉헌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토마스는 아람어로 ‘쌍둥이’라는 뜻이고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와 더불어 용기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인도에 가서 선교를 하였으며 72 년경 힌두교 사제들에게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세리 마태오의 본명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이다.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생각되는 인물이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로 알려진 인물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된다. 그는 예수님의 형제로 알려져 있고 예루살렘의 첫 주교인 야고보로 추정된다.
타대오는 ‘도량이 큰 사람’이란 의미를 가졌고 루카복음 6 장 16 절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되어 있다. ‘유다’는 할례를 받을 때 지은 유대식 이름이었을 것이다. ‘타대오’는 그리스식 이름이다. 시리아, 알마니아 등지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4 열혈 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열혈당은 로마제국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하던 단체이다.
열혈당은 유대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국수주의적인 정치 단체였다. 이들은 칼을 가지고 다니면서 요인들을 암살을 하기도 했으며 기원전 6 년 헤롯왕 때 출현해 73 년 사해 인근의 마사다 요새에서 전멸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이스카리옷에 대한 여러 학설이 있다. 1) 카리옷 사람이라는 뜻 2) 그리스어 ‘시카리오스’의 음역으로 ‘시카리리오스’는 자객으로 번역되며 로마 제국의 통치에 맞서 무력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무리를 지칭한다. 자객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바로 열혈 당원이다. 3) 거짓, 배신을 뜻하는 아람어의 음역이라는 설이 있고 4) 그의 직업이 염색공이었다는 설이 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다. 유다는 12 제자 중 돈을 맡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으나 욕심으로 인해서 정직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스승인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의 손에 넘겨주는 배신자가 되었다. |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다른 민족’이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뜻한다. 그래서 이방인에게 가지 말라는 뜻은 민족적 편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가 아직 아님을 뜻한다.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에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선택을 받았고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에 복음이 우선 먼저 이스라엘에 선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마리아는 가나안 정복 당시 에프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에게 분할되었던 지역으로 예루살렘과 갈릴래아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이곳은 솔로몬 통치 이후 여로보암 때부터 시작하여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북부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정복자 아시리아의 왕 샬마네세르는 피지배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북부 이스라엘인을 포로로 끌고 갔고, 한편 이민족을 이곳에 이주시켜 나머지 북부 이스라엘안과 혼인하게 함으로써 민족을 혼혈화 시켰다. 그 결과 사마리아는 혈통과 문화와 종교에서까지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더 이상 히브리민족에 속하지 못하였으며 포로기 이후 산발랏과 므나셋를 중심으로 그리짐산에 성전을 건축하였다.느헤미야 13,28.이 성전은 기원전 109 년 힐카누스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들은 그곳을 성지로 삼아 모세 오경을 근간으로 종교생활을 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합 민족이라고 경멸하였고 그들과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였기 때문에 갈릴래아와 예루살렘 사이의 직통 거리인 이 지역을 거치지 않고 우회하여 왕래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는 이스라엘에 복음을 먼저 전하라고 명령하셨지만, 부활하신 다음에는 이방인들에도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 명령대로 사도들은 스테파노가 순교한 뒤에 각지로 흩어져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이스라엘 집안’은 유대 백성들을 뜻하고, ‘길 잃은 양’은 ‘목자 없는 양들’이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무리에게 선교하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며 영원한 생명과 진리를 찾지 못하고 다른 길로 가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셨다. 유대인들은 구약시대에 시나이 계약을 통해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 되었고 또 오랫동안 메시아를 갈망하여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 역시 ‘첫째는 유대인에게(로마 1,16; 2,9)라는 선교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즉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확장시키라는 뜻이다.
7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세례자 요한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고, 예수님도 처음부터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다. 4,17 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는 것이 곧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잃어버린 양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그 순간마다 그들에게 예수님과 그분을 통한 구원을 전해야 한다.
‘선포하여라’라는 그리스 말은 ‘케뤼쏘’인데 ‘널리 전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으로 전쟁이 일어났음을 알리는 소식과 같이 긴박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선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선포의 내용은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다. 제자들이 선포해야 할 내용은 세례자 요한이 전파한 것이기도 하며, 또한 예수님께서 친히 전하신 말씀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하느님 나라를 준비해야 하는 민족들이었다. |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실증적으로 확인시키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능력에 해당된다.
이 4 가지 기적을 구분해 보면
1) 신체적 치유. 2) 존재론적 치유(죽은 자). 3) 종교, 의식적 치유(나병환자). 4) 영적, 정신적 치유(마귀 들린 자).로 나눌 수 있다. 이는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권한은 결함이 전혀 없는 전인격적이고도 완전한 능력이다.
한편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라는 명령은 대부분의 주요 사본들(시나이, 바티칸, 베자, 에프라임)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나 레기우스 사본에는 이 내용이 누락되어 있다. 어쨌든 복음서에는 마르코 복음 6,12-13 절에 제자들이 회개하라고 선포하면서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죽은 자를 살린 일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사도행전 9,40; 20,10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에 사도들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기적을 행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사도들은 예수님에게서 놀라운 권능을 받았고 그것을 체험하였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의 원 뜻은 ‘선물로 받았으니 값을 받지 말고 사랑의 마음으로 주어라’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대단히 중요한 원칙이다. 복음 전파자들은 받은 복음과 권위는 모두 하느님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받은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재산을 모으거나 큰돈을 벌기 위해 복음을 전파해서는 안 되며 또한 하느님의 일을 위해 타인에게 봉사한 후에 그 대가를 요구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복음의 전파자들이 굶주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일꾼이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이 구절의 뜻은 복음을 통해서 사리사욕을 채우지 말고 은총으로 받은 것은 은총으로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