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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부른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태복음 5;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누가복음 5;1)
가까워지는 방법
먼 곳에서부터 가까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에게로
관계없던 일들이 피부에 와 닿도록
멀어지는 방법
개인적인 관계에서 회중 안으로
가까이 있다가 점점 멀어지는 것으로
피부에 와 닿던 일들이 옷이 두꺼워져서 감각이 없어진다.
예수님은 가까이 오고 있는데
무리가 몰려와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한 배에 오르시니 시몬의 배
반면 베드로는
당신의 장모를 고친 사건이 바라 앞전에 있었다.
모르는 사람의 배에 올랐을까?
결정적으로 시몬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의 이름을 바꾸어
준다.
왜 외면했을까?
열심히 나의 일을 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예수님의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에 대해 답한
베드로의 말이다.
맞습니다. 그는 밤이 세도록 일을 했습니다.
자신의 일에 열중해서 그 분의 모습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부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다고 누가 밥 먹여줘?
일을 해야 밥을 먹는 것이지? 등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무리에 머무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마음
아닐까요?
예)왕의 혼인 잔치의 비유
빼앗지 않고 스스로 내어 놓게 하신다.
더 좋은 것을 보지 못한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내 시선이 바라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고 갇혀있기 때문이다.
내 자유를 빼앗지 말아 주세요.
나는 오늘이 너무 좋아요
나를 구속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어부 입니다.
천성이 어부에 맞습니다. 나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지 마세요.
나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신앙심이 깊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제자처럼 대하시려고 하십니까?
장모님의 일은 고맙지만 그 일과 내 인생과는 별개입니다.
예수님의 처방은 무엇인가요?
그래 그렇게 하라. 풍어를 바란다.
속된 말로 대박을 원한다.
그래서 주님은 이야기 하신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이다.
어부의 일을 계속해라
그러나 네가 해 보지 않은 일을 보라.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
그물질이 어렵다.
고기가 잡힐 확률도 적다.
그래서 잘 하지 않는 일이다.
노동력의 강도에 비해 효과가 적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존중한다.
그런데 좀 더 넓은 곳을 보기를 원하시는 시야를 가지게 하신다.
우리의 눈은 한정되어 있다.
익숙한 것만 본다.
그래서 지나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
자유롭게 하신다.
자유로움은 무슨 의미일까?
자유는 보통 두 가지 뜻을 함축하는데,
이는 정치적/사회적 자유와 형이상학적 자유로 구분된다.
여기서는 정치적/사회적 자유를 먼저 서술하고, 형이상학적
자유를 그다음 서술하였다.
한국에서는 "Liberal", "Libertarian", "Freedom", "Liberty" 모두
자유라고 번역되기 때문에 한국어나 한국 정치에서 "자유"라는
용어가 들어가면 맥락마다 각기 매우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어
서로 혼동이 생길 여지가 있다.
가령 누군가는 케인스주의 정책을 지지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자유'인, '자유주의'자로 정의한다면,
누군가는 자유(free) 시장경제를 지지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자유'롭다거나 '자유주의'자로 정의한다.
특히 프리덤과 리버티의 개념이 동양으로 접목되면서 둘 다
'자유'라고 번역되었기 때문에 혼동을 주는 요지가 있는데
프리덤이 '자연적인 자유'를 뜻한다고 한다면
리베르타스는 법적인 의무가 수반되는 권리를 보장하는 뜻의
'자유권'으로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즉 자유로움은 권리와 의무를 수반하는 것이다.
흔히 종교를 거부하고
특히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이런 특징이 있지 않은가?
권리는 주장하고 누리고 싶은나
의무는 감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의무를 과도하게 감당하는 것으로 자신을 포장하여
저항한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 내가 과도한 힘을 써야 하는가?
예수님을 아는 척하지 않은 베드로의 항변이다.
예수님은 이 저항에 대해 결과로 이야기해 주신다.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하여서 마지막 저항을 한다.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정말 자신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원인에 자신의 한계조정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자신의 속의 모습이 드러났다.
두 가지 반응을 한다.
부인하는 것이다.
긍정하고 무릎을 꿇는 것이다.
회개하는 이에게 주시는 축복은
새로운 일을 부여받는 것이다.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새 비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름을 바꾸어 주심
오랫동안 믿음으로 살아온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좋아하는 성경 구절 하나가 있었다.
디모데후서1:12절 말씀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노인은 이 말씀을 자신의 말씀으로 여기고 여러번 읽고 읽어 암송했다.
몸이 아프고 연약해져도 이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노인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점점 늙어가면서 기억력도 사라지면서 이 말씀을 온전히 암송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노인은 마지막 구절만 암송했다.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그러다가 임종을 앞둔 마지막 두 주 동안에는 몸과 정신이 모두 쇠약해졌다.
노인의 기억에는 암송했던 말씀은 다 잊어 버리고 딱 단어 하나만 남았다.
“그가”였다.
그리고 노인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 몇 시간 전부터 그 단어만 거듭해서 중얼거렸다.
“그가, 그가, 그가, 그가,”.
그리고 그는 숨을 거두었다.
+
신앙인에게는 삶을 이끌어주는 '그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있으십니까?
문화 인류학자가 남태평양의 섬에 서식하는 원숭이들이 어떻게 새로운 정보의 수용과 유통경로를 관찰하였다.
모래에 섞인 열매를 하나하나 가려먹는 원숭이들 앞에서 열매가
포함된 한 웅큼의 모래를 손으로 떠서 물에 모래를 가라앉혀
보다 손쉽고 효율적으로 열매를 골라 낼 수 있는 방법을
시범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기술 정보가 원숭이들 사이에서 어떤 경로로
전파되는 지를 관찰하였다.
가장 먼저 신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젊은 암컷 원숭이였다.
그리고 그 원숭이의 친구 젊은 수컷 원숭이,
이것을 보고 있던 엄마 원숭이의 순서로 신기술이 보급되어
갔다.
하지만 끝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재래식
방법으로 열매를 골라 먹는 원숭이가 있었는데 바로 늙은 수컷
원숭이들이었다.
그런데 다른 실험에 의하면 고구마를 씻어 먹는 원숭이가
100마리라는 임계점에 도달하자 섬 안에 있는 모든 원숭이가
고구마를 씻어 먹었다.
동식물학자인 라이얼 왓슨(Lyall Watson)은 이러한 행동을
‘100번째 원숭이 효과(The Hundredth Monkey Phenomenon)’
라고 명명했다.
이후 이 용어는 어떤 행위를 하는 개체의 수가 일정 수준
이르면 그 행동이 특정 집단에만 국한 되지 않고 공간을 넘어
확산된다는 불가사의한 현상에 쓰이고 있다.
+
어떤 조직이라도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나이 먹은 수컷
원숭이’ 세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린 원숭이들은 빠른 속도로 새로운 행태나 문화를 받아들이고
주도하지만
나이든 원숭이들은 자녀들을 모방한 암컷 원숭이들만이 이러한
사회적 진보를 학습했을 뿐, 그렇지 않은 늙은 수컷 원숭이들은
여전히 새로운 문화 현상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 사회를 보는 듯합니다.
늙은 수컷 원숭이와 같은 꼰대들이 사회의 변화에 귀를 막고
거부할 뿐 아니라 저항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늙은 수컷원숭이 같은 꼰대들은 사회에서 사라져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가 계속 양산되듯 꼰대들도 계속 양산됩니다.
꼰대는 결코 사라지지도 사라질 수도 없습니다.
꼰대의 역할이 있습니다.
캐나다의 원로 동물학자 앤 이니스 대그가 지은
<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이라는 책에 보면 늙은 개코
원숭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개코 원숭이 무리들이 그날의 일정을 시작할 준비가 되면
젊고 활기찬 수컷 한 마리가 한 방향으로 행진을 주도합니다.
그 때 늙은 수컷 개코 원숭이는 뒤에서 무리를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늙은 수컷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지도자’는 방향을
바꾸고 이 방향이 늙은 수컷이 염두에 둔 방향인지 확인합니다.
둘은 눈빛만 교환할 뿐 결코 대놓고 다투지 않습니다.
젊은 수컷은 암컷과 새끼를 많이 거느린 반면 깡마른 늙은 수컷
에게는 아무것도 없더라도 여전히 늙은 수컷이 행렬의 맨
뒤에서 방향을 정합니다.
꼰대는 방향을 정하고 디테일한 것은 젊은 세대에게 맡겨야
합니다.
꼰대가 디데일한 것에 관심을 두고 간섭하기 시작할 때
잔소리가 됩니다.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의 기가 있어야 한다.
눈에는 총기가 있어야 한다.
얼굴에는 화기가 있어야 한다.
마음에는 열기가 있어야 한다.
몸에는 향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려울 때는 끈기가 있어야 한다.
이 다섯 가지의 기를 오기라고 한다.
1988년에 46세의 폴란드의 철도회사 직원인 얀 그르제부스키는 작업을 하다가 그만 머리를 다쳐 코마 상태에 빠졌다. 침대에 누운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다. 의사들로부터 잘해야 2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아내인 게르트루다는 의식을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헌신적인 간호를 했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19년이 지난 65세에 의식을 회복하게 됐다. 얀 그르제부스키가 눈을 떠보니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의식을 잃기 전 폴란드는 공산당이 지배하던 보이체흐 야루젤스키 대통령 체제였는데 19년이 지났을 때는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유의 세상이 되어있었다. 그가 혼수상태에 빠진 이래 자녀들은 모두 장성하여 결혼을 했고 현재 손자-손녀만도 11명에 달하고 있었다.
얀 그르제부스키는 말했다. “내가 19년 전에는 상점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생필품 몇 가지와 홍차뿐이었습니다. 고기는 명절에 국가가 조금씩 배급해 줬고, 석유를 사려면 긴 줄로 늘어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공중전화박스도 긴 줄을 서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백화점에는 지금까지 보지도 못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고 자유롭게 통화하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환상적인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이 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변해 있었습니다.”
+
시간이 갈수록 문명이 발전하며 행동반경은 넓어지고 사는 것은 편리해지고 있는 데 사람들은 더 이기적이고 자기 밖에 모르는 나르시시스트로 바뀌고 있습니다.
나르시시스트(narcissist)란 과하게 높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해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심리학자 스티븐 존슨(Stephen Johnson)은 나르시시스트들을
‘어릴적 입은 상처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숨기고 굉장히 발달한
가짜 자아를 앞 새우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을 우상화한 사람들입니다.
의견을 물어보고 무슨 조언을 받지만 결국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고집불통인 사람입니다.
이런 나르시스트의 증상을 심리학자들이 10가지로 정리했다.
1. 주목받고 싶어 한다. 늘 자신이 주인공 이어야합니다.
2. 충고하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3. 기다리기 힘들어 한다.
자신이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과대망상에 빠집니다. 자신은 특출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5. 특정 집단과 어울린다. 급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6. 경쟁심이 심하다.
사회는 승자와 패자 오직 두 가지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늘 승자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7. 작은 비난에도 견디지 못한다.
자신은 완벽한데 비난을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늘 복수합니다.
8.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비난의 방향을 다른 사람에게
돌립니다.
9. 사람을 이용한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여 모든 상황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10.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다.
그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이 최고의 자리에 있다는 감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분명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르시시즘적 성향은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성찰을 통해 나르시시즘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개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