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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우리 나라 역대 문인들의 글 중에서 가족에 관련된 시 편지 제문 등을 <가족에 대한 글> 난을 통해 수록 중에 있는데 중국관련 논문을 보다가 중국어문학 52집(2008 12) 95쪽~134 쪽에서 발췌 한 아래 논문이 좋아서 수록한다. 낙민
唐代 夫婦 愛情詩 試論 -李杜⋅元白⋅李商隱 시를 중심으로-
權 赫 錫*
Ⅰ. 글을 시작하며
애정은 인류의 원초적인 정감이다. 인류를 존속시키는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그 무엇보다도 가장 강렬한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는 강한 감정의 자연적인 발로라고 하였을진대, 애정은 시가의 가장 주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이라는 시공간적 특수 상황은 현대의 애정시 배경과는 상황이 다르다. 크게는 남존여비의 관념, 가문 중심의 혼인제도, 유가의 예교 등에 의해 문인들의 애정시는 애정 본연을 다루지 못하고 우물거리나 끝내 애정 외의 것에 대해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본고에서는 예교의 대상에서 비교적 자유로왔던 민간의 노래는 논외로 둔다. 중고 시기의 애정시가 그렇듯 당대의 애정시 역시 작가의 남녀를 막론하고 대부분은 여성들의 시점에서 지어져 애정대상인 남성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비록 남성 시점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하지만 아내가 아닌 혼외의 여성이거나 막연한 대상을 노래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본고에서 고찰 대상으로 삼은 작품은 전당시에 수록된 2만여 수의 작품 중 부부의 애정을 노래한 작품들 중에서도 비교적 수량이 많거나 전형성을 띤 유명 문인들의 작품을 위주로 하였다. 시대순으로 언급하면 李白, 杜甫, 白居易, 元稹, 李商隱 등 5명이다. 이들 작가의 공통점은 모두 아내의 시점에서 지어진 작품이 없다는 점으로, 이는 중고시기 일부 문인부부의 애정시와는 또 다른 특징이자 아쉬운 점이라고 하겠다. 부부는 가정의 중심이며,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이다. 국가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크고 작은 규모의 사회의 건전한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가정의 중심인 부부 간의 좋은 금슬은 화목한 가정의 토대가 되며, 이는 다시 안정된 사회와 튼튼한 국가의 기틀이 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IMF시기 이후 급격한 이혼률의 증가가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다. 이혼은 가정의 해체를 의미하며 나아가 사회의 불안정을 야기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회안전망의 구축이란 측면에서도 부부 관계의 화목함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옛날을 돌아보며 현재를 반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본고의 목적이다. 남녀관에서 볼 때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고대 역사는 남존여비, 부존처비 사상의 강화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周易≫의 음양 개념에서 비롯된 남녀관은 제자백가를 거쳐 漢代 董仲舒에 이르러 마침내 三綱의 윤리로 확립되었으며, 이후 남존여비 관념은 더욱 강화되어 나간다. 이처럼 불평등한 부부관계가 윤리로 작용하던 고대 사회에서 부부애라는 애정은 존재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으니, 부부애를 시가에 담아내기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Ⅱ. 당대 부부 애정시의 유형
1. 아내에게 부치는 편지-寄內詩
“기내시”란 일반적으로 아내와 떨어져 있는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시를 말한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 “증내시”가 있는데, 이는 주로 공간적인 거리를 감안하지 않은 채 아내에게 주는 시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실재 일반적인 용법과는 달리 두 용어가 서로 뒤섞여 쓰이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두 용어의 차이를 따지지 않고 다만 아내에게 주는 시란 의미만 취해 증내시까지 포함시켰다.
1) 李白 이백(701∼762)은 자가 太白, 호는 靑蓮居士이다. 원적은 隴西 成紀(甘肅省 天水縣)이며, 錦州(四川省에 속함)에서 생장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협의를 좋아하였고 세상을 다스릴 큰 꿈을 가지고 유가와 도가 등을 섭렵하였다. 42세 때 翰林學士가 되었으나, 관직에서 쫓겨난 이후 전국을 유랑하다 永王의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사면되어 金陵(南京)⋅宣城(安徽省 宣城縣) 등지를 떠돌다 當塗(安徽省 當塗縣)에서 현령이던 친척 李陽氷에게 의지하여 살다가 병사하였다. 낭만적인 그의 성격처럼 문학 창작에 있어서도 구애받는 것이 거의 없었는데, 이는 기내시 창작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이백 이전 한산하던 기내시 문단에 대량의 기내시를 창작하여 기내시 창작의 길을 텄다. 이백의 결혼 상황에 대해서는 친구 魏顥가 쓴 <李翰林集序>의 내용에 근거하면 최초의 許氏 부인으로부터 차례대로 모두 네 명의 부인을 두었다고 한다. 학계의 비교적 일치된 관점은 許氏와 최후의 宗氏만이 정식 결혼을 통해 맞은 부인이라는 것인데, 그의 기내시의 대상 또한 이 두 여인이 된다. 이백은 개원 15년(727)에 호북의 安陸에서 재상을 역임했던 許圉師의 손녀와 결혼하여 대략 10년 정도 그곳에서 가정을 꾸린다. 그렇지만 출사를 위해 전국을 떠도는 일은 계속되니 집안에 남아있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시로 나타나게 된다. 개원 19년을 전후하여 장안⋅낙양⋅南陽 등지를 여행하게 되는데 이 때 <寄遠>(멀리 있는 아내에게) 12수를 썼다. 그 첫째 작품을 보기로 하겠다.
三鳥別王母,세 마리 파랑새 서왕모와 작별하고 銜書來見過.편지 물고 와 나를 찾네 腸斷若剪弦,애간장 끊어짐이 거문고줄 끊어지듯 其如愁思何.이런 근심과 그리움을 어찌 하면 좋을까 遙知玉窗裏,비록 멀리 있지만 아름다운 창가에서 纖手弄雲和.섬섬옥수로 거문고 퉁기는 줄 잘 알고 있다네 奏曲有深意,연주하는 곡조에는 깊은 의미 담겨 있는데 靑松交女蘿.푸른 소나무에 뒤엉켜 오르는 송라 넝쿨 寫水山井中,산 속 샘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은 同泉豈殊波.같은 샘에서 나오니 어찌 다른 물일까 秦心與楚恨,진나라와 초나라처럼 떨어져 있는 이 그리움과 한 皎皎爲誰多?휘영청 밝은 저 달 누굴 위해 저리도 밝은가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고 답장으로 쓴 시이다. 본래 부부란 일심동체로 살아야 하건만 마치 秦나라와 楚나라 사람처럼 멀리 떨어져 서로 그리워하며 한스럽게 사는데, 떨어져 있는 부부에게는 밝은 달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이 12수의 연작시 중에는 도처에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스며있는데, 예를 들면 “봄바람은 다시는 감정이 없는 듯, 나에게 불어오니 꿈길도 끊어놓네.”(春風復無情, 吹我夢魂斷.)(5), “그리움엔 밤낮이 따로 없네, 하염없는 그리움이 흐르는 물결 같네.”(相思無日夜, 浩蕩若流波.)(6), “천만 리 그리움으로, 편지 한 통에 천 금이라네.”(相思千萬里, 一書値千金.)(10) 등이 그렇다. 다음으로 <贈內>시를 보기로 하자.
三百六十日,일 년 삼백육십 일 日日醉如泥.매일같이 술독에 빠져 있으니 雖爲李白婦,이백의 아내라고 하더라도 何異太常妻어찌 태상의 아내와 다르랴
後漢 周澤이 太常이었을 때 소임인 종묘 모시는 일을 경건히 한다는 구실로, 항상 재계하는 방에서 부인과 떨어져 와병하듯 지냈다. 이를 본 그의 아내가 노환으로 몸이 상할까 안타까와 문안을 갔는데, 周澤이 크게 화를 내며 아내를 감옥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며 “세상에 나서 가장 불우한 것은 태상의 아내가 되는 것, 일 년 삼백육십 일 동안 삼백오십구 일을 재계하며 지낸다네.”라고 했다 한다. 이 시는 바로 이런 전고를 사용하여 매일같이 술에 빠져 지내면서 남편 구실을 제대로 못한 자신의 미안함을 전하고 있다. 許氏 부인은 대략 開元 28년(740)에 죽었으며, 이후 그는 50세를 전후하여 최후의 부인인 宗氏와 梁園에서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는 재상을 역임했던 宗楚客의 손녀이다. 이백은 아내 종씨와도 사이가 좋았는데, 정치적 이상을 이루기 위해 전국을 떠도는 동안에도 자주 아내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다음은 天寶 14년(755)에 秋浦에 거주할 때 아내에게 보낸 시다.
<秋浦寄内>추포에서 아내에게
我今浔阳去,나는 지금 심양을 떠나 辞家千里餘.집과는 천 리 멀리 떨어져 있다네
…… 红颜愁落尽,붉은 얼굴 수심으로 시들고 白发不能除.백발도 어쩔 수 없겠지 有客自梁苑,양원에서 손님 한 분 오셨는데 手携五色鱼.손에 오색 물고기 편지함을 들고 있네 开鱼得锦字,편지함 열어서 비단 편지 읽어보니 归问我何如?언제 오느냐고 내게 묻네 江山虽道阻,산과 강으로 길은 막혀 있지만 意合不为殊.그리운 마음이야 다르지 않다네
梁苑은 지금의 河南省 開封에 있던 정원 이름인데, 여기에서는 아내가 살고 있는 곳을 가리킨다. 아내가 인편에 편지를 보내 언제 돌아올 지에 대해 묻자 이렇게 시를 적어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비록 구체적으로 언제쯤 돌아갈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마음만은 늘 아내와 함께 한다고 위로하고 있다. 천보 14년(755) 11월에 안사의 난이 발발하자 이백은 宣城의 북쪽으로부터 宋州 梁園으로 가 아내를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廬山에 은거하고 있던 중 至德 원년(756) 마침 장강 동쪽에 주둔하고 있던 永王 李璘이 보낸 사자 衛子春이 여산으로 그를 찾아와 다시금 아내와 이별하게 된다. 이 때 역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당시 상황을 그리고 있다.
<别内赴征>其一아내와 작별하고 길을 나서다 1
王命三徵去未還,세 차례의 왕명에도 미처 대답을 않다가 明朝離別出吳關.내일 아침 이별하여 오나라 관문으로 나선다네 白玉高樓看不見,높은 누각의 백옥 같은 당신 얼굴 뵈지 않을 테고 相思須上望夫山.그리움으로 오로지 망부산에 오르겠지
“王命三徵”은 永王이 이백을 자신의 막부로 끌어들이기 위해 세 차례 사신을 보낸 일을 말한다. 이제 헤어지면 아내는 자신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매일 높은 산에 오를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은 그 두 번째 작품이다.
出门妻子强牵衣,대문을 나서려니 아내가 옷자락에 매달려 问我西行幾日归.이번 서쪽 출행엔 언제 집에 돌아오시느냐고 묻네 归时倘佩黄金印,돌아왔을 때 황금 인장을 내 허리춤에 차고 있다면 莫学苏秦不下機.베틀 내려오지 않던 소진의 아낼랑 본받지 마시게
이 시는 전국시대 蘇秦이 공명을 이루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베를 짜던 아내가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자신이 훗날 집에 돌아왔을 때 박대하지 말기를 바라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공명을 이루고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공명의 실현 여부와 관계없이 실재로는 아내에게 박대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드러내고 있다. 앞 두 구를 통해 공명을 위해 떠나는 남편과의 이별을 원하지 않는 아내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아내와의 이별을 감수한 어려운 결정으로 이루어진 출세의 길, 그러나 공명을 이루고자 하는 그의 바램은 뜻대로 이루어지 않았다. 肅宗 李亨은 永王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이 두려워 蜀으로 불러들였으나, 永王이 이를 듣지 않자 이에 진압을 모의하게 되고, 그러던 중 永王의 부하가 반란을 일으켜 永王이 피살되었다. 이백은 도망하다가 彭澤에서 자수하고 반역죄로 체포되어 潯陽(지금의 九江)에서 투옥된다. 당시 豫章(지금의 南昌)에 있던 종씨 부인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서 동분서주하며 남편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면서 남편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在潯陽非所寄內>심양의 감옥에서 아내에게
聞難知慟哭,변란을 당했단 소문에 통곡하다가 行啼入府中.울며불며 막부 안을 찾아다니네 多君同蔡琰,당신은 옛날 채염과 같으니 流淚請曹公.눈물 흘리며 조조에게 간청했었다 하네 ……
자신의 아내를 옛날 남편을 구제하기 위해 曹操에게 간청하던 蔡文姬에 비유하였다. 蔡文姬는 漢나라에 귀국한 뒤 董祀와 재혼하였는데 후에 남편이 죄를 지어 曹操에게 죽임을 당하려 할 때 남편의 구명을 위해 曹操 앞에서 봉두난발로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빌었는데, 曹操가 마침내 그 정성에 감동하여 董祀를 사면하였다. 유배길 도중에서도 그는 배 안에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南流夜郎寄內>남쪽 야랑으로 귀양 가면서 아내에게
夜郎天外怨離居,야랑 땅은 하늘 밖이라 이별이 원망스럽고 明月樓中音信疏.밝은 달 누각 속 당신에겐 소식도 없다네 北雁春歸看欲盡,북쪽으론 봄이 되어 날아간 기러기 눈에 띄지 않고 南來不得豫章書.남쪽으로는 예장의 편지 오지 않네
夜郞은 지금의 貴州 서북, 雲南 동북, 四川 남부 지역에 해당하는 이백의 유배지며, 豫章은 지금의 江西省 南昌으로 당시 종씨 부인은 이곳에 살고 있었다. 가족과 격리되어 절해고도 이역으로 귀양가는 자신의 신세가 얼마나 처량했을 것이며, 또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 역시 그만큼 간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乾元 2년(759) 봄에 이백이 夔州의 奉節(지금의 四川省 奉節)에 이르렀을 때 사면령을 받고 즉각 뱃머리를 돌려 동진하는데, 그는 豫章에 도착해 아내와 재회하여 얼마 간 함께 지내게 된다. 上元 2년(761)에는 아내가 廬山으로 도를 배우러 갔는데, 시를 지어서 전송하였다. 이백은 부인 종씨와 공통의 취미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두 도교를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그가 61세 때 쓴 것으로 기내시로는 최후의 작품이다.
<送內尋廬山女道士李騰空>其一 여산의 여도사 이등공을 찾아가는 아내를 전송하며 1
君尋騰空子,당신이 등공자를 찾아갔으니 應到碧山家.지금쯤 푸른 산의 암자에 도착했겠지 水舂雲母碓,물 절구에 구름 방아 風埽石楠花.바람으로 석남화를 쓴다네 若愛幽居好,그곳 은거생활이 좋다면 相邀弄紫霞.나도 불러서 함께 보랏빛 놀을 가지고 놀았으면
“騰空子”는 바로 재상 李林甫의 딸 李騰空을 가리킨다. 아버지와는 달리 명리에 초탈해 일찍이 蔡尋眞과 함께 廬山에 들어가 도교에 심취했다. 종씨 부인은 그녀를 따라가 도교를 배우고자 했으니, 이백 역시 기꺼이 찬동했다. 그래서 오래 머물게 되면 자신도 불러달라고 하고 있다. 평생 전국을 방랑하던 나그네 이백에게 있어 아내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었으며, 부조리한 주변 현실에 대한 울분과 슬픔 때문에 늘 술에 취해 있던 그에게 아내는 그만이 비밀스럽게 간직한 소중하디 소중한 위로였다.
2) 白居易 白居易(772∼846)는 자가 樂天이며, 호는 香山居士이다. 원적은 太原인데 후세에 下邽(陝西省 渭南縣)로 이사했다. 大曆 7년(772)에 몰락해가는 하급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환관과 번진 세력이 득세하여 나라가 기울어져 가던 중당시기를 살았다. 어린 시절 西夏의 병란으로 강남으로 피난하여 蘇州⋅杭州 일대를 떠돌아 다녔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를 통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에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했으며, 15∼6세 때 청운의 꿈을 안고 장안에 입성하여 명사들에게 자신을 알렸다. 그러나 장안의 분위기가 냉정하고 혼탁하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여 떠났다. 20세에 秀才에 올랐으며, 貞元 10년(794), 23세 때 부친 季庚이 임지인 襄陽에서 죽었다. 부친이 죽은 후 그의 가족들은 생계가 매우 궁핍해졌다. 29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첫 번째 뜻을 이룬다. 곧이어 32세 때인 貞元 19년(803)에 元稹과 함께 書判拔萃科에 급제하여 秘書省 校書郞 벼슬을 받았다. 다시 元和 원년(806)에는 才識兼茂明於體用科에 응시하여 4등으로 합격, 盩厔縣尉가 되었다. 元和 3년에는 左拾遺 벼슬을 받았으며, 강직한 간언 때문에 조정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당시 나이 37세에 비로소 楊虞卿의 從妹인 楊氏와 결혼하여 딸 넷을 낳는다. 결혼 전에 이미 湘靈이라는 여인과 연애를 하며 결혼을 약속하기도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40세 元和 6년(811)에는 의지처였던 어머니가 죽자 벼슬에서 물러나 下邽에서 복상하였다. 元和 9년(814) 43세 때 탈상하고 입조하여 太子左贊善大夫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적들에 의해 江州司馬로 폄적되었으며, 여러 차례 벼슬이 바뀌면서 마침내 武宗 會昌 6년(846)에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작품 중 아내를 언급한 작품으로 시가 53수, 산문 4편이 있다. 이들 작품을 통해 白居易 부부의 혼인생활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신혼의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장편의 시를 지어 아내로서의 도리를 잘 지키며 자신과 백년해로하기를 바라는 심정을 전달했다.
<贈內>아내에게
生爲同室親,살아서는 한 집에서 사랑하고 死爲同穴塵.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히는 부부 他人尙相勉,남들도 서로 권면하거늘 而況我與君.나와 그대는 더하겠지요 黔婁固窮士,검루는 가난한 선비였지만 妻賢忘其貧.현숙한 그 아내는 가난을 몰랐지요 冀缺一農夫,기결은 일개 농부였지만 妻敬儼如賓.그 아내는 귀빈 모시듯 공경했지요 陶潛不營生,도연명은 생계를 꾸리지 못했지만 翟氏自爨薪.부인 적씨는 살림을 잘 꾸려나갔지요 梁鴻不肯仕,양홍은 벼슬을 하려 하지 않았지만 孟光甘布裙.부인 맹광은 삼베 치마도 좋다고 입었지요
…… 君家有貽訓,당신 친정에서 지켜내려온 가훈에 淸白遺子孫.청렴결백을 자손에게 물려주라고 했다지요 我亦貞苦士,나 또한 지조 굳은 청빈한 선비로서 與君新結婚.당신과 이제 부부가 되었지요 庶保貧與素,바라건대 가난과 소박함을 지키면서 偕老同欣欣.함께 즐겁게 백년해로하시지요
신혼에 아내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피력한 것으로, 노파심이 지나쳐 엄한 가르침처럼 보이며, 지나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감수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자신이 어릴 때부터 가난 속에서 공부하면서 터득한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내 또한 자신과 같은 삶의 태도를 가지기를 강력하게 바랐던 것이다. 元和 10년(815) 44세의 나이에 정적들의 모함에 의해 마침내 江州司馬로 좌천되게 된다. 다음 작품은 江州로 가는 도중 배 안에서 아내에게 준 시다.
<舟夜贈內>밤배 안에서 아내에게
三聲猿後垂鄕淚,세 번의 원숭이 울음에 고향 생각 나 눈물 흘리며 一葉舟中載病身.일엽편주 안에다 병든 몸 실었네 莫憑水窗南北望,물가 창에 기대어 남북으로 바라보지 마시게 月明月暗總愁人.달은 밝아도 어두워도 늘 근심에 젖게 하니까
벽지로 좌천되어 가는 자신의 신세 때문에 상심하는 아내를 위로하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원화 13년(818)에는 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자신의 가난한 살림을 잘 꾸려나가는 아내를 동정하고 있다.
<贈內子>아내에게
白髮長興嘆,흰 머리카락 때문에 길게 탄식소리 내는데 靑娥亦伴愁.검은 눈썹도 따라서 근심하네 寒衣補燈下,등잔불 아래에서 겨울옷 꿰매는데 小女戱床頭.어린 딸이 침상 맡에서 장난하네 暗澹屛幃故,어두어둑한 옛날 병풍과 휘장들 凄涼枕席秋.처량하기 그지없는 가을날의 베개와 자리 貧中有等級,가난에도 등급이 있으니 猶勝嫁黔婁.차라리 검루에게 시집가는 게 나았을 것 같네
궁색한 살림은 피지도 못했는데 벌써 흰 머리카락이 성성하니 절로 탄식이 나온다. 그런 남편의 형편에 대해 아내 또한 따라서 근심해준다. 가을밤 겨울옷을 장만하는 아내, 곁에서 어린 딸이 장난을 치고 있는데, 가구와 이부자리들조차 가난 때문에 애초의 광택을 잃은 듯 보인다. 차라리 이렇게 무능하면서도 가난한 선비보다 벼슬자리를 주어도 나아가지 않았던 청렴했던 齊나라 선비 黔婁의 아내가 되는 편이 더 낫겠다고 하였다.
<三年除夜>개성 3년의 제야
…… 以我年最長,내 나이가 가장 많으며 次第來稱觴.순서대로 축배를 든다네 七十期漸近,일흔이라 백 살이 점점 가까와지니 萬緣心已忘.수만 가닥 인연들 마음은 이미 잊었네 不唯少歡樂단지 즐거움이 적을 뿐만 아니라 兼亦無悲傷.슬픔도 아픔도 없네 素屛應居士,흰 병풍으로 처사처럼 살았고 靑衣侍孟光.푸른 옷 입고 맹광처럼 모셨다네 夫妻老相對,우리 부부 늙어서 서로 마주하며 各坐一繩床.각자 하나의 줄의자에 앉아 있다네
이 작품은 文宗 開成 3년(838), 65세 되던 해 제야에 쓴 시다. 앞에서 결혼 초기에 부인에게 준 <贈內>시에서 처음 부인을 맞았을 때의 백년해로의 부부애의 희망이 그대로 지켜졌음을 말하고 있다. 이후 白居易가 武宗 會昌 6년(846)에 죽었을 때 부인은 아직 생존해 있었다고 했으니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부부해로의 경우로 볼 수 있다. 白居易의 부부관은 한마디로 부부평등이었다. 남편이 먼저 죽은 미망인은 재가할 경우 정절을 잃었다고 하지만 아내가 먼저 죽은 남편의 재가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봉건시대의 모순된 부부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婦人苦>여인의 고통
…… 人言夫婦親,사람들은 부부 사이는 친애함이 있으며 義合如一身.의리가 합쳐짐이 한몸 같다 말하는데 及至死生際,죽고 사는 것에 이르면 何曾苦樂均?어찌 고통과 즐거움이 같을 수 있겠는가 婦人一喪夫,여자는 일단 남편을 여의면 終身守孤孑.평생 독수공방 신세 有如林中竹,숲속의 대나무 같아 忽被風吹折.갑자기 바람에 꺾이는데 一折不重生,한 번 꺾이면 다시는 살지 못하고 枯死猶抱節.말라죽을 때까지 절개를 지킨다네 男兒若喪婦,사내들은 아내를 여의면 能不暫傷情.잠시도 마음 아파하지 않을 수 있으니 應似門前柳,흡사 대문 앞 버들 같아 逢春易發容.봄이 되면 쉽게 모습을 피운다네 風吹一枝折,바람에 한 가지가 꺾여도 還有一枝生.다시 한 가지가 자란다네 ……
그가 비록 첩이나 가기를 둔 적이 있지만 그것은 당시 사대부들의 일반적인 정황이었다고 본다면 부부애와 대립된 것으로 논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여성관은 결국 아내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이어지며, 나아가 기내시를 낳게 한 근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2. 아내와 가정을 위한 독백-家族詩
○ 杜甫 杜甫(712∼770)는 자가 子美이며, 원적은 襄陽(지금의 호북성 襄樊)이나 후에 河南 鞏縣으로 이사했다. 天寶 원년(742)에 진사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고, 장안을 떠나 여러 지역을 8-9년 유랑하는 동안 李白⋅高適 등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후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숙종을 알현하여 左拾遺 벼슬을 얻었으며, 그 후 成都에서 嚴武의 후원 아래 생활하기도 하였으며, 嚴武가 죽자 다시 장강 일대를 유랑하다가 병사하였다. 결혼에 관해서는 元稹이 쓴 <唐檢校工部員外郞杜君墓系銘>에 의하면 “부인은 弘農 楊氏의 딸로서, 그 아버지는 司農少卿 楊怡이며, 49세에 죽었다.”(夫人弘農楊氏女, 父曰司農少卿怡, 四十九年而終.)라고 하였다.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두보와 양씨는 대략 개원 29년(741)에 결혼하였는데, 당시 두보는 30세, 아내는 19세였으며, 두보가 대력 5년(770)에 죽었으며, 아내 또한 오래지 않아 49세의 나이로 죽었으니, 이로 본다면 두보 부부는 대략 30년 정도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756년 6월, 안록산 군대가 潼關을 공격하자 玄宗은 蜀으로 도망가고, 7월에 태자 李亨(肅宗)이 靈武에서 즉위하는데, 이 때 두보는 우선 가족을 長安 북쪽의 鄜州의 羌村으로 피난시켜 놓은 후 자신은 長安 서북쪽의 靈武에 있는 肅宗을 찾으러 갔다가 반군에게 잡혀 長安으로 압송되어 1년여 동안 억류된다. 이 때 쓴 작품들이 <春望>⋅<月夜>⋅<一百五日夜對月>⋅<遣興> 등이다. 장안에 억류된 그는 그해 8월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月夜>달밤에
今夜鄜州月,오늘밤 부주의 달은 閨中只獨看. 아내 혼자만 보겠구나 遙憐小兒女, 멀리 불쌍한 어린 자식들은 未解憶長安. 장안의 애비를 생각할 줄도 모르겠지 香霧雲鬟濕, 향기로운 안개로 구름 같은 쪽 촉촉하겠고 淸輝玉臂寒. 맑은 달빛에 옥 같은 팔이 차갑겠네 何時倚虛幌, 언제 다시 얇은 휘장에 기대어 雙照淚痕乾? 나란히 달빛 받으며 눈물 자국 말리리
비록 자신을 그리는 아내를 묘사하고 있지만 이는 실재 아내와 가족을 그리는 자신의 심정을 더욱 부각시키고자 하는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 이듬해 장안에 다시 봄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억류되어 있었다. 장안성의 봄 풍경을 보고 다시금 나라와 가족을 생각한다. <春望>이란 작품에는 난리통에 생사도 모르는 가족들과 떨어져 적에게 억류되어 있는 작가의 가족애가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과 함께 잘 나타나 있다. 비록 아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말은 없지만 집에서 편지를 보낼 사람은 아내밖에 없으니 당연히 아내를 그리워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봉건시대 사대부가 아내를 언급하는 것은 대장부의 체통을 손상시키는 일, 그래서 아내의 그리움도 나라에 대한 걱정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두보의 경우 양자는 항상 절충을 거쳐 완곡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앞의 작품 정도로 표현하기까지의 그의 마음 속 아내와 가족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遣興> 흥을 풀다
…… 世亂憐渠小, 세상이 혼란하니 어린 자식 불쌍한데 家貧仰母慈. 집이 가난하니 어미의 사랑만 쳐다보네 鹿門攜不遂, 녹문산으로 처자식을 데리고 가지도 못하고 雁足系難期. 기러기발에 편지를 맨다한들 돌아갈 날 기약이 어렵네 天地軍麾滿, 세상은 온통 군기들로 가득하고 山河戰角悲. 산천은 온통 전쟁 나팔로 슬픈데 倘歸免相失, 만약 돌아갈 수만 있다면 부자의 정 잃는 것 면할 수 있으니 見日敢辭遲. 어찌 만날 날이 더디다고 말하겠는가
장안에 억류된 채 鄜州에 있는 자식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데, 그의 가족을 읊은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여지없이 아내가 등장한다. 남편 없이 아이들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아내의 노고에 대해 역시 우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살아서 다시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날짜 더딘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전란이 극심한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757년 1월에 안록산이 아들 安慶緖에게 피살되고, 2월에는 숙종이 彭原에서 鳳翔으로 갔는데, 장안에 억류된 두보는 기회를 틈타 탈출해 봉상에 가니, 임금에게 그 공을 인정 받아 左拾遺 벼슬을 얻게 되며, 이 때 다시금 고향의 아내를 그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述懷>감회를 적다
去年潼關破, 작년 동관이 함락된 이래 妻子隔絶久. 가족과 떨어진 지 오래 되었네 今夏草木長, 올 여름 초목 무성할 제 脫身得西走. 장안을 빠져 나와 서쪽으로 도망하여 麻鞋見天子, 삼신 신은 채 임금을 알현하는데 衣袖露兩肘. 소매가 떨어져 양 팔꿈치가 내보이네 朝廷慜生還, 조정에서 나의 생환을 가여워 하고 親故傷老醜. 친구들은 늙고 추한 이 몸을 불쌍히 여겨 涕淚授拾遺, 눈물로 좌습유 벼슬을 받으니 流離主恩厚. 유랑하는 나에게 황은이 두텁네 柴門雖得去, 사립문 내 집으로 달려갈 수 있으나 未忍卽開口. 차마 곧바로 입을 열지 못하겠네 寄書問三川, 편지를 보내어 부주의 삼천 일대를 알아봐도 不知家在否? 가족들이 어떠한지 알 수가 없네 比聞同罹禍, 들리는 소문에 전란에 휩쓸렸다고도 하고 殺戮到雞狗. 닭과 개마저도 모조리 죽었다고도 하네 山中漏茅屋, 산 속의 비 새는 초가집에 誰復依戶牖. 누가 아직 창가에 기대고 있을까 摧頹蒼松根, 죽어 푸른 소나무 밑에 묻혔다면 地冷骨未朽. 땅이 차니 뼈는 아직 썩지 않았겠지
……
시에서는 나라에 대한 충성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서로 병립되어 갈등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 작품으로만 보면 당시 작가에겐 가정보다 나라가 우선이었다. 그러나 어렵게 얻은 벼슬을 금새 그만 두고 고향으로 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얼마 후 房琯을 구제하려는 일로 죄를 입어 벼슬에서 쫓겨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때 쓴 작품이 바로 <羌村>三首이다. 그 중 비교적 아내에 대한 정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되는 첫째 작품을 보기로 한다.
崢嶸赤雲西, 험상궂은 붉은 구름 서편 하늘에 덮여 있고 日脚下平地. 햇발은 평평한 땅 위로 내리며 柴門鳥雀噪, 사립문에는 참새소리 시끄러운데 歸客千里至. 돌아온 나그네 천 리 먼 곳에서 왔다네 妻孥怪我在, 아내와 자식들은 내가 살아있는 게 의심쩍은 듯 驚定還拭淚. 놀라움 진정되자 눈물을 훔치네
……
전쟁의 와중에 용케 살아서 집에 돌아오니 집에 있던 가족들도 무사하다. 자신이 가족들의 삶을 의심했듯 가족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살아서 서로 만나는 것 아무리 생각해봐도 꿈을 꾸고 있는 듯 하다. 두보는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강했지만 가난과 세파로 인해 가정을 잘 돌보지 못했으며, 아내에게 가계를 맡겨 둔 것에 대해 깊은 자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北征>북쪽을 향해
…… 况我墮胡塵, 하물며 나는 오랑캐에게 잡혔다가 及歸盡華髮. 온통 백발이 되어 돌아왔다네 經年至茅屋, 일 년만에 내 초가집에 돌아오니 妻子衣百結. 처자식들은 누더기옷을 입고 있네 慟哭松聲迴, 통곡 소리 솔바람을 맴돌고 悲泉共幽咽. 샘물도 슬픈 듯 소리 죽여 우네 平生所嬌兒, 평소 개구쟁이 아들은 顔色白勝雪. 얼굴이 백설보다 더 창백하네 見耶背面啼, 애비를 보고 뒤돌아서 우는데 垢膩脚不襪. 때에 절은 발에는 버선도 없으며 床前兩小女, 침대 맡의 두 어린 딸 補綴才過膝. 꿰맨 천으로 겨우 무릎을 가렸네 海圖拆波濤, 바다 무늬 옷은 파도 부분이 떨어져 나갔고 舊繡移曲折. 낡은 수는 무늬가 뒤틀려 있네 天吳及紫鳳, 천오신 그림과 수놓은 봉황새가 顚倒在短褐. 조각 댄 조끼에 거꾸로 달려 있네 老夫情懷惡, 늙은 이 몸 마음이 언짢으니 數日臥嘔洩. 구토와 설사로 며칠째 누워있네 那無囊中帛, 어찌 행낭 속에 비단 없겠는가 救汝寒凜栗? 추위에 떠는 그대들 감싸 준다네 粉黛亦解苞, 다시 보따리 풀어 분과 눈썹먹들을 꺼내어 衾裯稍羅列. 이부자리 위에 차례대로 늘어놓으니 瘦妻面復光, 야윈 아내 얼굴에 빛이 다시 돌고 癡女頭自櫛. 철부지 딸들도 덩달아 머리 빗네
……
이 작품은 至德 2년(757) 장안 서쪽의 鳳翔에서 장안 북쪽의 鄜州에 있는 가족에게로 돌아와서 지은 것이다. 제목은 여정의 방향이 북쪽이기 때문에 말미암은 것이다. 총 140구의 장편으로 생략된 부분 작품 후반에서는 역시 나라에 대한 걱정을 담고 있다. 761년 그는 가난의 고통을 함께 해 온 아내에 대한 동정을 다음의 시로 나타내었다.
<百憂集行>온갖 걱정이 다 이네
…… 卽今倏忽已五十, 이제 어느덧 쉰이 넘은 나이 坐臥只多少行立. 앉았다 누웠다 하며 일어나 다니는 일 별로 없네 强將笑語供主人, 억지로 웃으면서 이웃집 주인과 이야기하니 悲見生涯百憂集. 슬픈 인생살이에 온갖 걱정 다 모이네 入門依舊四壁空, 대문에 들어오니 예전 그대로 사방이 휑하고 老妻睹我顔色同. 내 꼴 보는 늙은 아내도 나처럼 초췌한데 癡兒不知父子禮, 철부지 아들은 부자간의 예의도 모른 채 叫怒索飯啼門東. 밥 달라고 소리치며 부엌 앞에서 울어대네
건장한 젊은 시절이 지나 만년에 접어든 병약한 몸, 가족을 굶기지 않기 위해 억지로 몸을 추슬러 이웃집에 양식을 구하러 간다. 나오지 않는 웃음 억지로 웃어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니 철없는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울어 재끼고, 이런 무능한 남편을 둔 아내의 몰골 초췌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부끄럽고 미안하고 비통한 것이다. 두보는 일생을 통해 유랑자 같은 생활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 成都에서 살 때가 비교적 안정된 시절이었다. 浣花溪 곁에 초당을 지어놓고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다. 760년에 지어진 <江村>에는 앞의 시와는 달리 당시의 한가로운 삶이 잘 나타나 있다.
淸江一曲抱村流, 맑은 강 한 줄기 마을을 감싸고 흐르고 長夏江村事事幽. 긴 여름 강마을은 만사가 한가롭네 自去自來梁上燕, 절로 왔다 절로 가는 들보 위의 제비 相親相近水中鷗. 서로 친하며 가까이 나는 물 위의 갈매기 老妻畫紙爲棋局, 늙은 아내는 종이에다 장기판을 그리고 稚子敲針作釣鉤. 어린 애들은 바늘 두드려 낚싯대를 만드네 多病所須唯藥物,병 많은 이 몸 필요한 건 약뿐이니 微軀此外更何求? 미천한 내게 이 밖에 또 무엇이 필요하리
작품 중에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가장 안정된 모습을 노래한 시다. 아름다운 자연, 한가로운 삶, 화목한 가족, 그렇게 바라던 행복한 생활을 만년이 되어서야 누릴 수 있었다. 다음 시 역시 761년 成都에 살 때 지은 시다.
<進艇>나룻배를 몰며
南京久客耕南畝, 남쪽 서울에서 오랜 나그네로 남쪽 밭이랑을 갈고 北望傷神坐北窗. 북쪽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며 북창 가에 앉아있네 晝引老妻乘小艇, 낮에 늙은 아내 손을 끌고 함께 작은 배를 타고서 晴看稚子浴淸江. 어린 자식들 맑은 강에서 멱 감는 것 구경하네 俱飛蛺蝶元相逐, 함께 나는 호랑나비 원래 서로 쫓아다니고 幷蒂芙蓉本自雙. 한 꼭지에 두 개 핀 병제련은 본래 한 쌍이라네 茗飮蔗漿攜所有, 찻물에 사탕수수즙 있는 대로 가져오니 瓷罌無謝玉爲缸. 질항아리 차통이라도 옥항아리에 손색없네
부부의 정을 의미하는 시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자신의 부부애에 대한 바람이 깊다는 표현일 것이다. “南京”은 杜甫가 살던 成都를 가리키는데, 756년 玄宗이 安祿山의 난을 피해 이곳에 왔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은 것이다. 이상의 杜甫의 부부애에 관한 작품들은 한결같이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은 것이 없다. 육조 시대 많은 문인들의 무병신음의 애정시와는 다르다고 하겠다. 특히 그는 평생 첩이나 기녀를 들이지 않는 등 이성에 대한 사랑은 오직 아내 한 사람에 국한했었는데, 남성위주의 봉건시대 사대부들에게는 극히 드문 것이었다. 그러나 인류애적 사랑은 무한하였으니, 아내에 대한, 가족에 대한 사랑은 가족 외의 사람에게도 전이되어 시대를 함께 하면서 불행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 남녀를 불문하고 사랑과 동정을 표현하였다. 그래서 그를 詩聖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애정을 구성하는 요소는 부부의 애정 자체만이 아니라, 종종 그와 관련없는 외부적인 요소 즉 재산, 권력, 지위 등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로 인해 애정은 자칫 깨어지기 쉬운 거울과도 같을 경우가 있다. 그러나 두보의 애정은 애정 외부의 요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진지한 감정 그대로였다.
3. 죽은 아내를 위한 망부가-悼亡詩
1) 元稹 元稹(779∼831)은 자가 微之이며,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 가서 외숙부에 의지해 어렵게 살았다. 15세에 明經科에 급제하였고, 貞元 19년(803)에 白居易와 함께 書判拔萃科에 급제하여 秘書省 校書郞 벼슬을 받았다. 얼마 뒤 太子少保 韋夏卿의 딸 韋叢과 결혼하였으며, 元和 원년(806)에는 憲宗의 책시에 일등으로 급제하여 左拾遺 벼슬을 받았으며, 河南縣尉로 나갔다. 元和 7년(807) 의지처였던 어머니 鄭氏가 長安 靖安里 집에서 죽고, 元和 3년(808) 12월에 3년의 복상을 끝내고, 元和 4년(809)에는 監察御使가 되어 지방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 해 7월 9일 부인이 27세의 나이로 長安의 집에서 병사하였다. 元和 5년(810)에 권귀와 환관들에게 죄를 입어 江陵으로 귀양을 가게 되는데, 이후 10년 동안은 그의 생애 중 가장 어려운 시기였으며, 41세부터는 벼슬길이 순탄하였다. 그의 문집 제9권에는 48수의 애도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아내의 죽음에 대한 도망시가 33편이나 된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다음의 <遣悲懷>(슬픔을 풀어보리)로서, 세 수의 칠언율시로, <三遣悲懷>라고도 한다. 세 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각각 과거에 대한 회상, 현실, 미래 등의 시간순으로 서술되고 있다.
1. 謝公最小偏憐女,사공께서 애지중지 편애하던 막내딸 自嫁黔婁百事乖.검루에게 시집온 후 만사가 뒤틀려버렸지 顧我無衣搜藎篋,변변한 옷 하나 없는 나를 보고는 온 상자를 다 뒤지고 泥他沽酒拔金釵.술 사 달라 조르면 금비녀를 뽑아서 사왔지 野蔬充膳甘長藿,들나물로 반찬 만들고 다 자란 쓴 콩잎도 달게 먹으며 落葉添薪仰古槐.낙엽으로 땔나무 보태기 위해 늙은 홰나무만 쳐다봤었지 今日俸錢過十萬,이제 내 봉급도 십만 냥이 넘게 되었지만 與君營奠復營齊.당신을 위해 제수를 장만해 제사나 지내는 수밖에
부인은 당시 太子少保였던 韋夏卿의 막내딸인데, 전고를 사용하여 東晋의 재상 謝安이 총애했던 질녀 謝道韞과도 같다고 했다. 부귀한 가문에서 나서 아쉬운 걸 모르면서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지만 자신 같이 빈한한 가정으로 시집오면서부터 고생길로 접어들게 되었다고 했다. 함련과 경련에서는 어려운 생활의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기에 감동력이 더욱 크다.
2. 昔日戱言身後意,예전에 농담으로 죽은 후의 이야기를 했었는데 今朝皆到眼前來.오늘 아침 모든 게 현실이 되었구려 衣裳已施行看盡,옷가지는 벌써 남들에게 줬기에 눈에 띄는 게 거의 없는데 針線猶存未忍開.상자 속 반짇고리 아직 남아있지만 차마 열지 못하겠구려 尙想舊情憐婢僕,당신과의 정을 생각하니 당신 부리던 하인들도 애처롭고 也曾因夢送錢財.또한 꿈에서나마 당신께 재물을 보내주고 싶구려 誠知此恨人人有,사실 이런 한이야 사람마다 다 있는 줄 알지만 貧賤夫妻百事哀.유독 가난한 부부에겐 모든 일이 다 슬픔이구려
아내를 저승으로 보낸 후 집안의 모습, 작가의 느낌 등이 작품을 통해 잘 드러나 있다. 부부의 백년해로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렇다면 부부 간의 사별이야 모두가 겪는 일일 테지만 자신 같이 가난했던 부부의 너무 이른 사별은 유난히 매사가 다 애통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인데 그만 죽었으니, 그만큼 아내를 고생만 시켰다는 한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3. 閑坐悲君亦自悲,한가히 앉아 당신 죽음 슬퍼하다 보니 내 신세 슬퍼지는데 百年都是及多時.인생살이 백 년인들 그 얼마나 되겠어요 鄧攸無子尋知命,자식 없던 등유도 운명인 줄 알겠고 潘岳悼亡猶費詞.반악의 도망시도 소용없는 글일 뿐 同穴窅冥何所望,한무덤에 묻히는 것 어찌 바라겠으며 他生緣會更難期.다른 생의 인연도 기약하기 어렵지요 唯將終夜長開眼,오직 이 밤 다하도록 오래오래 눈을 뜬 채 報答平生未展眉.평생 미간 찌푸리고 살았던 당신 은혜에 보답하려오
아내의 죽음 이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의 다짐을 나타낸 작품이다. 수련 두 구의 구성이 절묘하다.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끝내는 아내 없이 살아가야할 자신의 신세가 더 슬프게 생각되고,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내가 아내보다 살아봐야 백 년도 못되는 짧은 시간이니 결국은 일찍 죽은 아내나 나나 그다지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경련은 전고를 썼는데, “鄧攸”는 西晉 때 河東太守를 지낸 사람으로, 전란 중에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하다 여의치 못해 한 아이만 데리고 가야할 상황에 부닥치자 아들을 버리고 조카를 데리고 갔기 때문에 평생 아들이 없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는 것을 그냥 운명으로 알겠다는 자위의 말로 쓰였다. 다음으로 세 수의 도망시를 지어 죽은 아내를 애도한 西晉 때의 潘岳은 후대 도망시의 시조로 볼 수 있는데, 문장이 아무리 애처롭게 잘 지어졌다고 하지만 결국 죽은 아내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이 역시 자신이 지은 도망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자탄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그 무엇도 죽은 아내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거란 생각에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밤을 꼬박 새우며 눈 부릅뜨고 아내의 빈소를 지키면서 죽은 아내의 은혜를 추모하는 일이 가장 실질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상 세 수는 감정이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후인의 평을 듣기도 하지만 시대 풍속과 결부시켜 보면 당시 작가 부부의 생전 또는 사후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원화 6년에 쓴 <六年春遣懷> 8수 중 몇 수를 보기로 하겠다.
2. 檢得舊書三四紙,옛 서랍 정리하다 서너 장 당신 편지 찾았는데 高低闊狹粗成行.높았다 낮았다 넓었다 좁았다 하는 편지의 행간들 自言幷食尋常事,내용이야 함께 식사하는 등 일상적인 일이건만 唯念山深驛路長.오로지 날 염려하는 마음은 깊은 산 먼 길을 달리는 듯 하네
직접적인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한마디도 없다. 다만 우연히 발견한 아내의 편지를 보고, 아내의 필적, 자신을 염려하는 편지의 내용들이 다시금 울컥 아내 생각을 일게 한다고 했다.
5. 伴客銷愁長日飮,근심을 풀려고 손님과 함께 온종일 술 마신 자리 偶然乘興便醺醺.우연히 흥이 나니 술에 흠뻑 취했다네 怪來醒后傍人泣,이상하네 깨어보니 옆에 사람 울고 있는데 醉里時時錯問君.취중에 수시로 당신이 어딨는지 물었다고 하네
근심으로 늘 우울해하다가 모처럼 손님과 어울려 흠뻑 술에 취했다. 비몽사몽, 취생몽사의 시간이 지나고 정신이 드니 곁에 있던 손님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우는가. 취중에서는 아내가 죽은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내의 죽음 이후의 시간이 뇌에서 사라지고 안채를 향해 술과 안주를 더 가져다 달라고 아내를 불러댔던 모양이다. 평소에는 이성적으로 자제가 되던 아내 생각이 술이 취하니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저럴까라고 손님조차도 눈시울을 적신다.
<醉醒>취했다 깨어나니
積善坊中前度飮,적선방 주점에서 전에 술 마실 때는 謝家諸婢笑扶行.당신의 하녀들이 깔깔대며 부축해 오더니 今宵還似當時醉,오늘밤 돌아올 때도 그때처럼 취했건만 半夜覺來聞哭聲.밤중에 깨어나니 흐느끼는 울음소리뿐
아내 살아생전에는 작가가 술집에서 술이 취하면 아내의 몸종들이 부축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술에 취해 횡설수설, 비틀거리는 자신의 취한 모습을 우습다고 재잘대었었는데, 오늘 술에 취해 부축하고 돌아올 때는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술이 취했을 때는 웃었는지 울었는지 알 수 없었겠지만 밤중에 술이 깨어 정신을 차려보니 집안에 하인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죽은 아내에 대한 애도의 울음이요, 아내 없이 살아가는 작가에 대한 동정의 울음일 것이다. 유독 아내에 대한 애도의 정이 돈독한 것은 어쩌면 아내가 어릴 때부터 의지하던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였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내이자 어머니 같았던 인생의 의지처를 잃었기에 슬픔이 그렇게 남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2) 李商隱 李商隱(811∼859)은 자가 義山, 호가 玉溪生 또는 樊南生이다. 懷州 河內(지금의 河南省 沁陽縣) 사람으로, 일생 동안 대사를 겪지는 않았던 唐나라의 한 관리였으며, 그 직위는 낮았다. 그러나 문학적인 측면에서는 杜牧과 함께 “小李杜”, 溫庭筠과 함께 “溫李”, 段成式 등과 함께 “三十六體” 변문의 명수 등으로 불렸던 唐代 문인 중에서 손꼽히는 사람이었다. 唐 황족의 일파라고 하는 그의 조상은 고조부 李涉(美原縣令), 증조부 李叔恒(安陽縣尉), 조부 李俌(邢州錄事參軍)를 거쳐 부친 李嗣로 이어지는데, 李嗣는 殿中侍御史를 역임했었고,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獲嘉縣(河南省 獲嘉縣)의 縣令이었으며, 그가 10세 전후였을 때 죽었다. 이에 그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河南의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빈곤한 집안의 장자로서 책임감이 무거웠다. 이후부터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동분서주 힘든 출세길에 나서게 된다. 그는 만당의 정치 상황 중 “牛李당쟁”으로 불리는 정파간 정쟁의 피해자였다. 당쟁의 시작은 憲宗 元和 3년(808)의 과거 시험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재상 李吉甫는 자신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牛僧孺⋅李宗閔 등을 불합격 처리하였다. 이로 인해 양자 사이에 원한이 맺히게 되었으며, 그것은 李吉甫의 아들 李德裕에까지 이어졌으니, 牛僧孺와 李宗閔을 영수로 하는 “牛黨”과 李德裕를 영수로 하는 “李黨”이 만당 수십 년 동안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은은 처음에 牛黨에 속하는 令狐楚의 막부에 들어가 그의 도움으로 벼슬길에 들어서게 되며, 그의 아들 令狐綯와 교우하게 된다. 令狐楚가 죽은 뒤 그는 涇原節度使 王茂元의 막부에 들어가게 되며, 인정을 받아 그의 딸과 결혼까지 하게 되는데(838), 王茂元은 바로 李黨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이 때부터 원하지 않았던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불우한 일생과 바꾼 결혼, 그 아내의 죽음은 그로 하여금 애통해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의 문집 속에는 직간접적으로 도망시로 볼 수 있는 것이 대략 30편 이상이며, 명확히 도망시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작품이 대략 10여 편이 된다. 사랑을 위해서 순탄한 출세길을 포기한 것일까. 결혼 후 작가는 두 당인들로부터 모두 배척을 받는데, 그 중 집권당인 우당에겐 배은망덕한 자로 낙인이 찍혀 끝내 버림을 받는다. 그러던 중 宣宗 大中 5년(851)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아내가 갑자기 병으로 죽게 된다. 애통한 아내의 죽음 후 슬픔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인 그 해 겨울 梓州의 柳仲郢의 부름을 받고 蜀으로 가게 되는데, 도중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傷悼後赴東蜀辟至散關遇雪> 죽은 아내를 애도한 후 부름을 받고 동촉으로 가다가 산관에서 눈을 만나다
劍外從軍遠,검각 밖 멀리로 종군하는데 無家與寄衣.옷가지 부쳐줄 가족도 없네 散關三尺雪,산관에 내린 석 자의 눈 迴夢舊鴛機.옛날 당신이 앉던 베틀 꿈을 꾸었네
지금의 四川省인 蜀 지방으로 종군을 떠나다가 가는 도중 지금의 陝西省 서남부인 散關에서 폭설을 만났다. 석 자나 내렸다 하니 산천이 온통 은빛에다 추위 또한 대단했을 것인데, 이제는 자기에게 겨울옷 지어 보내줄 아내마저 죽고 없다는 생각에 아내의 죽음이 새삼 슬프게 느껴졌을 것이다. 험준하고 살벌한 변방, 그곳으로 떠나는 자신은 의지가지없는 혈혈단신의 외로운 신세란 생각이 문득 들었을 것이다. 그날 밤 꿈에 집에서 베틀에 앉아 눈처럼 희고 고운 베를 짜던 아내가 나타났던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어머니가 會昌 3년(843)에 죽었으니 집안의 가장 든든한 의지처요, 내조자이기도 했을 아내를 잃은 슬픔이 어떠하였겠는가. 다음은 그의 대표적인 도망시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房中曲>방안을 보니
…… 枕是龍宮石,용궁석으로 만든 베개에는 割得秋波色. 당신의 고운 눈길 남겨져 있는데 玉簟失柔膚, 옥으로 꾸민 자리엔 부드러운 피부 대신 但見蒙羅碧. 단지 비취빛 비단 이불만 덮여 있네 憶得前年春, 작년 봄에 당신 만났을 때를 떠올리니 未語含悲辛. 말은 하지 못한 채 쓰라린 슬픔만 가득했었다네 歸來已不見, 집에 돌아와 보니 이미 당신 모습 보이지 않고 錦瑟長於人. 금슬만이 사람 대신 오래 남아 있네 今日澗底松, 오늘은 계곡 아래 소나무요 明日山頭蘗. 내일은 산꼭대기의 황벽나무 같은 신세 愁到天地翻, 천지가 뒤바뀔 때까지 근심으로 지새다가 相看不相識.혹 만나더라도 알아볼 수나 있을지
이 작품은 아내가 죽은 해에 쓴 작품으로 보인다. 시의 내용을 보면 아내는 갑작스럽게 죽은 것이 아니라 이미 1년 전부터 병이 깊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에는 영별이 그렇게 빨리 닥칠 줄 몰랐었다. 그랬다면 좀더 따뜻하게 대했을 것인데. 그렇기에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이다. 방안의 보이는 모든 게 다 슬픔을 자아낸다.
<嫦娥>항아
雲母屛風燭影深,운모석 병풍에 촛불 그림자 가물가물 長河漸落曉星沉.은하수 차츰 사라지고 새벽별 흐릿하다 嫦娥應悔偸靈藥,항아는 불사약 훔친 것 후회하리라 碧海靑天夜夜心.푸른 바다 파란 하늘에서 밤마다 시름에 겨울 테니
이 작품 역시 구체적인 서술 대상이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도망시로 본다면 제목은 바로 죽은 아내를 가리킨다. 아내는 자신의 불사약을 훔쳐 달나라고 가 버리고, 안방엔 운모석으로 상감한 병풍에 촛불 그림자만 짙다. 밤이 깊어지다 엷어지는 시각, 은하수조차도 흐릿해지는 이 새벽까지 잠 못 들고 아내를 그린다. 아내는 죽지 않은 것이며 항아처럼 달로 날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아내 역시 밤마다 외로움에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
<王十二兄與畏之員外, 相訪見招小飮, 時余以悼亡日近, 不去, 因寄> 열두째 처남과 원외랑 한외지가 나를 찾아와 작은 술자리에 초대했었는데, 당시 나는 아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지 못하여 이에 시를 부친다.
謝傅門庭舊末行, 옛날엔 고귀한 사씨 집안의 막내 사위 今朝歌管屬檀郞. 오늘 아침 잔치자리에 반악을 초대하네 更無人處簾垂地, 다시는 당신 없는 곳에 발이 드리워져 있는데 欲拂塵時簟竟牀. 자리와 침상에 먼지를 털려고 한다네 嵆氏幼男猶可憫,혜씨의 어린 아들도 오히려 불쌍하고 左家嬌女豈能忘? 좌씨의 사랑스런 딸 어찌 잊을까 秋霖腹疾俱難遣, 가을 장마에 배까지 아프니 아픔을 풀기 어려운데 萬里西風夜正長.만 리 먼 곳에서 서풍 부는 밤은 정말 길기도 하네
이 시는 大中 5년(851) 아내가 죽던 해 가을에 처남과 동서가 작가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을 처가로 초대해 잔치를 베풀고자 했는데 죽은 아내 생각 때문에 가지 못하겠다는 뜻을 전하는 내용이다. 제목의 “王十二兄”은 왕씨 부인의 오라버니며, “畏之員外”는 자신의 동서인 韓瞻으로 자가 畏之이며 당시 尙書省 員外郞이었으며, 당말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韓偓의 아버지다. 본문 중의 “謝傅”는 본디 “謝太傅” 즉 晉나라 귀족 謝安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처가인 王氏 집안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다음 구의 “檀郞”은 도망시로 유명한 晋나라 潘岳을 가리키는 말로, 潘岳의 小字가 “檀奴”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는데, 여기에서는 潘岳과 같은 처지의 작가를 가리킨다. “嵆氏幼男”은 西晉 嵇康의 어린 아들 嵇紹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다음 구와 함께 자신의 아들과 딸을 의미한다. 잔치에 참여하는 대신에 빈소를 청소하고 어린 아들 딸을 돌보기로 한다. 아내의 죽음에 대한 슬픔, 그리움, 거기에 장마 때문에 배까지 아프니 밤을 견디기가 힘든데 가을밤은 또 왜 그리 긴지...
<正月崇讓宅>정월의 숭양택
密鎖重關掩綠苔, 빈틈없이 겹겹 닫힌 대문 안엔 푸른 이끼 덮여있고 廊深閣逈此徘徊. 깊은 회랑 멀리 누각 보이는 곳에서 이렇게 서성이네 先知風起月含暈, 우선은 바람 일고 하늘에 달무리 핀 것 알겠고 尙自露寒花未開. 게다가 찬 이슬 내리니 꽃도 피지 않았네 蝙拂簾旌終展轉, 박쥐가 주렴을 흔드니 끝내 잠 못 이루고 鼠翻窓網小驚猜. 쥐들이 창문의 거미줄을 건드리니 놀란 마음에 당신인가 하네 背燈獨共餘香語, 등잔불 등진 채 혼자인 듯 함께인 듯 향기로운 말소리 들리니 不覺猶歌起夜來.아직도 <기야래> 곡조 부르는 줄 모르겠네
이 시는 大中 11년(857) 봄에 지어졌는데, 부인이 죽은 지 6년의 시간이 지난 뒤이다. 崇讓宅은 작가의 장인 王茂元의 洛陽 고택인데, 작가가 洛陽에 왕래할 때 자주 이곳에서 묵었으며 아내와의 추억이 많이 남아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王茂元이 이미 죽은 후로, 우연히 다시 찾은 대궐 같았던 처갓집은 폐가처럼 변해버렸고, 그 안에서 감개에 젖어있는데 박쥐와 쥐들 때문에 혹시 부인의 혼령이 찾아왔는가 생각하였다.
<錦瑟>비단 비파 錦瑟無端五十弦,금슬은 왜 굳이 오십 줄인지 一絃一柱思華年.한 줄 한 기러기발마다 아름다운 때 생각나게 한다 莊生曉夢迷蝴蝶,장주는 새벽꿈에 자신이 나비인가 했다지 望帝春心托杜鵑.망제의 춘심은 두견새 울음이 되었다지 滄海月明珠有淚,창해에 달 밝을 때면 진주에는 눈물자국 남아 있고 藍田日暖玉生煙.남전에 날 따뜻할 때면 옥 연기 솟아난다 此情可待成追憶,이러한 정들이 어찌 추억이 될 수 있으리 只是當時已惘然.당시에 이미 망연하게 되었으니
이 작품의 주제에 대해서는 고래로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며 지금까지도 정설이 없지만 여기에서는 도망시로 보았다. 즉 제목으로 쓰인 비단 비파 “錦瑟”은 죽은 아내가 평소에 사용하던 악기로, 유품을 통해 죽은 아내를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자신보다 먼저 죽음에 대한 원망이 되어 죽은 아내를 대신하는 금슬에 투영된다. 한 줄 한 기러기발마다 아내와의 추억이 서려 있는 것이다. 함련 두 구는 생사의 구분이 없음을 말한 부분이다. 莊周처럼 아내는 지금 나비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니면 나에 대한 사랑을 품고 두견새가 되어 울고 있을 지도 모를 일.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슬픈 눈물이 되어 흐르며, 아내는 이제 아득히 옥 기운 가득 흐르는 藍田山 건너로 떠나버렸으니 어찌 하나. 이런 애도의 슬픈 감정들이 어찌 추억을 통해 일어나겠는가. 애통함은 아내가 죽은 당시에 이미 내 가슴을 찢어놓았었다. 아내가 죽은 후 그는 梓州 막부로 가게 되는데, 절도사 柳仲郢이 중년의 홀아비 처지를 동정하여 재모를 겸비한 張懿仙이란 젊은 歌妓를 하사한 적이 있는데, 그는 정중히 사양하고 종신토록 혼자 살았다. 이로 본다면 이상은의 도망시들이 다른 작가의 도망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구체적이며 덜 절실하다고 하더라도 죽은 아내를 사랑하는 그 마음만큼은 오히려 다른 작가들보다 더욱 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당대 부부 애정시의 특징
부존처비 관념이 강화되어 가던 봉건시기 중간에 처했던 당대에 이렇듯 소중한 부부 애정시들이 적잖게 남아있음은 문학사적으로 가치가 크다. 당대의 부부 애정시는 양적으로 볼 때 전대 중고시기에 비해 더욱 증가하였으며, 전대에 비해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훨씬 많아졌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유가의 쇠미와 도교, 불교의 흥기 등 사상적인 측면 및 민족융합과 광범위하고도 빈번한 국제적 교류 등에 의해 형성된 개방적 사조가 문학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여러 유형의 부부 애정시를 통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언급된 5명의 시인 모두 물질적으로 아내와 궁핍한 생활을 함께 했다. 李白은 천보 원년(742)부터 3년(744) 사이 극히 짧은 기간 동안 도사 吳筠을 따라 長安으로 들어와 夏知章 등의 추천으로 翰林學士로 있었던 게 관직의 전부였으니, 그 생활의 궁핍함은 굳이 시문을 살필 필요도 없을 것이다. 杜甫 역시 회재불우한 인재의 대명사로서, 짧은 기간 동안의 左拾遺와 檢校工部員外郞 등을 역임했지만 역시 평생에 걸쳐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白居易의 경우 23세 때 부친이 죽은(794) 후 생활이 궁핍해져 浮梁縣의 主簿로 있는 형 幼文의 도움으로 어렵게 생활했다. 이후 貞元 19년(803)에 校書郞이 되면서부터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江州司馬로 좌천되는 일을 겪기도 했지만 다른 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생 큰 난관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상당히 만혼으로 볼 수 있는 37세에 결혼하였으니 결혼 이후 부부 생활에는 물질적 부족함은 그다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 겪었던 가난이 평생 그의 사고와 가치관을 형성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래서 자신은 비록 관직생활을 하고 있지만 항상 齊나라의 黔婁에 비유할 정도로 가난한 선비라는 자세로 평생을 살았다. 다음으로 元稹 역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후부터 어머니와 외가에 의지하여 가난하게 살았으며, 관직에 진출한(806) 후에도 낮은 벼슬, 모친상(807) 등으로 인해 아내가 죽을 때(809)까지는 가난한 생활을 면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李商隱 역시 평생 중앙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지방의 막부를 전전하였는데, 그 역시 10세를 전후하여 아버지를 여읜 이후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해야할 가난한 집안의 장자로서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그의 불우한 인생이 부인과의 결혼으로 인해 연루된 당쟁 때문이라고 볼 때 그에게 있어서 아내와 가난은 필연적인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이와 같이 언급된 문인들은 가난한 생활 속에서 자칫 파괴되기 쉬운 부부의 인연을 오히려 더욱 굳건하게 유지하였으며, 나아가 그것을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둘째, 언급된 시인들 모두 가정과 국가를 동시에 중시했다. 이는 봉건시대 유가를 기본으로 하는 선비들의 공통된 이상이기도 하겠지만 이들에게선 부부의 애정시를 통해 이러한 겸중 태도가 유난히 두드러짐을 볼 수 있다. 셋째, 작품의 내용이 구체적이며 따라서 감동이 절실하다. 부부 애정시는 부부 사이의 또는 가정적인 내용을 다루다 보니, 비교적 일상생활 속의 구체적 제재를 취하기 마련이며, 아울러 양자 사이의 또는 상대를 염두에 둔 독백이기 때문에 대상이 분명하다. 창작의 대상이 분명하면서 양자 사이의 구체적인 상황을 내용으로 한 작품이기 때문에 작품의 감동력 또한 절실한 것이다. 문학 작품은 감동을 주는 힘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들 작품들의 문학적 가치 또한 높다고 하겠다. 넷째, 언급된 시인들의 여성관이 비교적 선진적이며 개방적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시인들이 자신의 아내를 시의 대상으로 삼은 것 자체가 이미 당시 남존여비 관념에 젖어있던 대부분 사대부 문인들에 비해 선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들은 아내에게 대한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 즉 부녀자의 불우한 신세와 고통스런 운명을 묘사한 작품을 통해 자신들의 사랑을 가정 바깥으로 확대시켰다. 예를 들면 李白은 漢나라 때 비운의 궁녀를 노래한 <王昭君>, 장사꾼 아내의 한 많은 삶을 그린 <長干行>, 이 밖에도 <長相思>⋅<怨別離> 같이 길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심정을 그린 많은 작품이 있다. 杜甫 역시 남편에게 버림받고 혼자 사는 여인의 신세를 동정하는 작품인 <佳人>과 신혼 부부의 이별을 그린 <新婚別>등을 지었는데, 그는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자신의 눈에 띄는 모든 불우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휴머니즘을 발휘하였다. 다음으로 白居易는 이 점에 있어서 다른 시인들에 비해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新樂府 운동을 통해 고통 받는 사람(남녀노소 신분 불문)은 모두 시가를 통해 그들의 고통을 세상에 알렸다. 여성의 경우를 보면 상인의 외로운 아내 신세를 노래한 <琵琶行>, 양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적 사랑을 노래한 <長恨歌>, 백발의 궁녀 신세를 노래한 <上陽白髮人>, 새부인을 맞은 남편에게 내쫓겨 자식과 이별하게 된 여인을 노래한 <母別子> 등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元稹 역시 백거이와 함께 부조리한 현실을 시가를 통해 고발하는 신악부 운동을 펼쳤던 사람으로, 양잠과 베짜는 노동에 고통 받는 여인을 노래한 <織婦詞>, 전쟁터에 끌려가 남편이 죽은 아내의 슬픔을 노래한 <夫遠征> 등의 작품이 있다. 마지막으로 李商隱은 작품이 대부분 자신의 뜻을 모호하게 기탁하여 구체적인 주제를 명확히 알 수 없으며, 다른 작가에 비해 아내 외의 여성에 대해 그 슬픈 운명을 노래한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굳이 관련 작품을 찾는다면 白居易의 <長恨歌>의 뜻을 따와 양귀비와 당 현종의 애정 비극을 노래한 <馬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李商隱은 사람을 노래하기보다는 사물에 대해 노래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대량의 영물시를 썼는데, 영물시의 소재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약소한 것을 즐겨 사용하였으니, 이는 남녀 관계의 사람으로 본다면 약소한 편의 여성과 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사람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면 역시 연약하며 고통 받는 여성을 노래했을 게 당연하다.
Ⅳ. 글을 끝내며
부부관계 역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다. 때문에 더할나위없이 친밀한 관계이지만 역시 사회성을 띄고 있다. 즉 부부는 ‘가장 친밀한 관계의 남’이기도 하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관계와 애정이 오래 지속되려면 우선적으로 대등한 관계에서의 상대방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기초로 삼아야 한다. 자기의 이익을 먼저 내세우기 전에 상대를 우선 배려하는 것, 자신을 위해 상대방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 도움을 받고자 하기보다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 이러한 공경과 배려의 마음을 부부 두 사람이 잊지 않는다면 본고에서 논한 시인들과 같은 부부의 애정이 가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진정한 애정은 두 사람에게 닥친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는 아내와의 각별한 애정을 시가로 나타내었던 당대 대시인들이 한결같이 가난한 결혼생활 속에서도 부부 사이의 애정에 변함이 없었다는 사실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이혼률의 급증 현상은 이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에 따른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잘못된 결혼 관계는 해체되는 게 당연하겠지만 애초부터 잘못된 결혼이 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이러한 인식을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이를 위해서는 결혼 전, 청소년기부터 건전한 애정관⋅결혼관⋅부부관이 형성되도록 제도적, 범국가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혼의 주된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보다 애정의 파괴가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한다. 2000∼2003의 이혼 사유 통계에 의하면 40% 이상이 ‘성격 차이’이며, ‘가족간 불화’(15% 내외), 경제적인 요인(12∼3% 내외)의 순을 보이고 있다. 부부 사이는 애정 외의 장애 요인이 닥칠 경우 오히려 그 관계가 더욱 강화될 수 있다. 그러나 부부 사이의 애정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결혼의 안정성은 그만큼 동요되기 쉬워 조그마한 외부의 요인에도 쉽게 깨어지고 만다. 때문에 부부 사이에 있어서 애정은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결혼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애정을 다시 한번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 정책상에 있어서도 이혼 후의 복지정책 수립보다 결혼 전의 진실한 애정관에 대한 교육의 우선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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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提要>
爱情是人类本能的感情。爱情是诗歌永恒的主题。如果说诗歌是强烈情感的自然流露,以爱情为主题的诗歌就是强烈情感对灵魂的震撼。但是在古代封建社会真正的爱情诗歌很少,尤其是以夫妻之间的爱情为主题的诗歌更少。 夫妻是家庭的中心,家庭又是构成社会的基本要素,所以为了国家健康的发展,其基础就是家庭的发展. 换句话说,夫妻琴瑟合鸣是家庭和睦的基础,进而成为社会安定和国家坚实的基础。 然而, 由于男尊女卑观念、以家族利益为目的的婚姻制度和儒家礼教等根深蒂固思想的影响,使人们对以直抒胸臆的方式表达爱情为耻。即使是这样,还是有一些文人歌颂了自己与伴侣间真挚的爱情,尤以唐代诗人为多。 本文以中国中古时期夫妻爱情诗歌为内容,对如何解决目前不安定的夫妻关系进行了讨论。唐代歌颂夫妻间爱情的诗歌按其内容主要分为叁类。 第一类是以给妻子寄的信为内容的寄内诗, 比如李白和白居易的诗, 第二类是对妻子和孩子的独白即家族诗, 比如杜甫的诗, 第叁类是为表达对亡妻的哀悼的即悼亡诗, 比如元稹和李商隐的诗。
주제어:唐代, 夫妇爱情诗, 夫尊妻卑, 寄内诗, 家族诗, 悼亡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