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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9. 23.
현대자동차가 최근 경형 SUV ‘캐스퍼’를 공개했습니다. 2002년 아토스 단종 이후 19년 만에 다시 경차 시장에 돌아왔습니다.
가격은 당초 예상보다 높은 1385만(기본형)~2057만원(풀옵션)입니다. 풀옵션 기준으로 2000만원을 넘는 국내 최초의 경차가 됐습니다.
캐스퍼는 3개 선택지 밖에 없는 국내 경차 시장에 무려 5년 만에 처음 나온 신차입니다. 선택지가 늘었다는건 무척 환영할 일입니다만, 가격이 다소 비싸다는 평가는 있습니다. 제조·유통 비용은 최소화해 놓고 차값을 낮추기는커녕 오히려 올렸다는 의견도 있죠. 캐스퍼는 현대차 임금의 반값이라는 외부 수탁제조업체에서 만들어지는데다 판매도 현대차의 오프라인 판매망을 쓰지 않고 전용 온라인으로만 이뤄져 관련 비용을 크게 줄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현대자동차가 최근 공개한 경형 SUV ‘캐스퍼’. 2002년 아토스 단종 이후 19년 만에 현대가 다시 내놓은 경차다. / 현대자동차
◇ 현대가 19년 만에 다시 내놓은 경차 ‘캐스퍼’, 편의·안전 장비는 탁월하지만 연비가 12.3km~14.3km/L로 낮은게 아쉬워
차량 가치가 크게 올랐다면 차값 인상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도 있을텐데요. 캐스퍼의 경우 성능 향상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의견이 크게 갈립니다.
안전·편의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차값 인상이 어느정도는 이해될만큼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에어백 7개, 전방 충돌방지 보조, 차로 이탈방지 보조, 차로 유지 보조 등의 안전 사양을 모든 트림에 기본 적용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또 3가지 트림의 중간인 ‘모던(1590만원)’을 선택하면, 앞좌석 열선시트, 운전석 통풍시트, 열선내장 가죽스티어링휠, 버튼시동 스마트키, 스마트키 원격시동 등이 기본입니다. 운전석 한정이긴 하지만, 통풍시트까지 들어갈만큼 편의 사양이 호화롭습니다.
또 ‘모던’ 트림에서 ‘스마트센스1′ 옵션을 선택하면, 전방 충돌방지 보조, 후측방·후방 충돌방지 보조 등 충돌 위험을 적극적으로 줄여주는 첨단 안전기능 패키지도 넣을 수 있죠. 편의·안전장비 만큼은 경차 딱지를 떼고 보아도 차고 넘칠 정도입니다. 차값이 많이 오른게 다소 불만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선 제조사가 차량 가치를 높이기 위해 많은 고민과 노력을 했음을 인정할 만합니다.
하지만 경차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작은 소비’ ‘에너지 절약’ ‘환경 보호’ 등과 직결된 성능, 즉 연비 향상에서는, 탄소배출 감축이 화두인 2021년에 나온 차라고 믿어지지 않을만큼 발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연비 향상에 필수라 할 수 있는 무단변속기(CVT) 대신, 이전부터 바꿔야 한다고 지적됐지만 기존 경·소형차에 남아있던 ‘4단 자동변속기’를 그대로 달았습니다. 기존에 있던 4단 자동변속기를 계속 쓰는 것이 개발비와 원가를 아끼는 데는 큰 도움이 되겠지만, 연비 향상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연비를 단 몇 퍼센트라도 개선할 수 있는 ‘아이들 스톱 (정차중 자동 엔진 꺼짐)’ 같은 기능도 장착되지 않았습니다. 연비 향상과 직결된 엔진·변속기의 개선은 거의 이뤄지지 않은 셈이죠. 차량 개발에서 가장 많은 비용이 필요한 파워트레인의 개선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차값은 경차 수준을 이미 넘어선 셈입니다.
캐스퍼에는 배기량 1L(리터)의 3기통 가솔린 엔진(최고출력 76마력)과 가솔린 터보엔진(최고출력 100마력)이 장착되는데요. 공인연비가 가솔린 모델은 14.3km/L, 가솔린 터보 모델은 12.3~12.8km/L입니다. 경차이지만 연료 소모는 소형·준중형 가솔린 모델과도 별 차이 없고요.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장착한 준대형차, 예를 들면 그랜저 하이브리드(공인연비 15.2~16.2km/L)보다도 연비가 훨씬 나쁜 수준입니다.
▲ 현대 캐스퍼와 마찬가지로 ‘경형 SUV’인 스즈키 ‘허슬러’. 전 모델에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기본 탑재했다. 지난 8월에 7300대가 팔려 같은 기간 일본 경차 판매 5위, 전체 7위를 기록했다. / 스즈키
◇ 탄소저감 중요한 2021년에 나온 신차인데도, 일본 경차보다 연비 30~40% 떨어져... ‘에너지 절약’ ‘작은 소비’ 취지에 잘 안맞아
그럼 같은 경차끼리 연비를 비교하면 어떨까요? 한국과 마찬가지로 경차 제도를 운용하고 있는 일본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선택지가 너무 좁고 라이벌이 모두 구형인 국내 경차 시장에서만 비교해서는 캐스퍼의 공인연비(12.3km~14.3km/L)가 아쉽다는 것이 크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캐스퍼와 마찬가지로 ‘경형 SUV’인 스즈키 ‘허슬러’를 한번 살펴보죠. 지난 8월에만 7300대가 팔려 같은 기간 일본 경차 판매 5위, 전체 7위를 기록한 베스트셀러입니다.
허슬러 전륜(前輪)구동 모델의 일본 기준 연비는 가솔린 하이브리드가 25km/L, 가솔린 하이브리드 터보가 22.6km/L입니다.
이것은 일본 공인연비인 ‘WLTC’ 기준인데요. ‘뻥연비’ 논란이 있었던 기존의 ‘JC08 모드’보다 기준을 크게 강화한 것으로, 국제적으로도 통용됩니다. 한국 공인연비는 WLTC와 측정방법이 약간 다르기 때문에 동등 비교가 곤란하지만, 같은 일본 차량이 한국에서 판매되는 사례를 통해 WLTC 와 한국 연비의 상관관계를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해보면, WLTC 연비를 한국 공인연비로 환산할 때에 일반 가솔린 차량은 10% 정도, 하이브리드 차량은 20% 정도 연비가 깎입니다.
정확한 연비 비교는 해당 일본 차량이 국내 기관 인증을 거치거나 한·일 양국의 연비측정 기준이 통일돼야만 가능하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불가능하죠. 따라서 일본 차량이 WLTC 대비 한국 공인연비 기준에서 수치가 깎이는 평균값을 적용해 비교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스즈키 허슬러의 연비를 한국 공인연비로 추정해보면, 18.1~20.0km/L입니다. 캐스퍼보다 40% 가량 연비가 좋다는 것, 즉 같은 거리를 달릴 때 휘발유를 40% 정도 덜 소모한다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허슬러 연비가 좋은 가장 큰 이유는 연비 향상에 초점을 맞춘 최신 고효율 엔진과 무단변속기(CVT)를 얹었을 뿐 아니라, 배터리·모터가 엔진 구동을 지원하는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전 모델에 기본 탑재했기 때문입니다. 하이브리드를 탑재했기 때문에 ‘아이들링 스톱’ 등 연비 향상에 도움을 주는 기능도 당연히 기본입니다.
그럼 허슬러의 가격은 어느 정도일까요? 값비싼 하이브리드 시스템까지 기본 탑재했지만, 차값은 캐스퍼와 비슷합니다.
기본 모델은 128만400엔(약 1383만원)이고요. 가장 비싼 풀옵션이 184만1400엔(약 1989만원)입니다. 운전석·동승석·사이드·커튼 에어백 등은 전 모델에 기본 장착되고요. 오발진 억제, 차선이탈 경보·억제, 어댑티브 크루즈콘트롤, 표지판 자동인식 등 첨단 안전장비를 묶은 ‘스즈키 세이프티 서포트’는 136만5100엔(약 1475만원)짜리 모델부터 기본 장착됩니다.
정리하면, 편의장비에선 캐스퍼가 낫고, 안전장비는 대동소이하며, 연비는 허슬러가 낫습니다. 특히 허슬러는 마진이 박한 경차인데도 불구하고, 연비향상 효과는 뛰어나지만 원가가 높은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전 모델에 일괄 적용했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물론 캐스퍼와 허슬러를 완전히 동등 비교하긴 어렵습니다. 캐스퍼는 한국 경차 기준에 맞춘 크기(길이·너비·높이 3595X1595X1575mm)에 공차 중량이 985~1030kg입니다. 반면 허슬러는 일본 경차 기준에 맞춘 크기(길이·너비·높이 3395X1475X1680mm)이고 공차 중량은 810~880kg입니다.
캐스퍼가 허슬러보다 200mm 길고 120mm 넓은 반면, 허슬러가 캐스퍼보다 105mm 더 높습니다. 공차중량은 캐스퍼가 허슬러보다 150~175kg이나 무겁습니다.
하지만 길이·너비·높이를 모두 곱한 단순 부피로 비교하면, 캐스퍼가 허슬러보다 7% 가량 클 뿐입니다. 허슬러의 차고가 높기 때문이죠. 따라서 전체적인 덩치는 두 차량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엔진 배기량은 캐스퍼가 1L, 허슬러가 0.66L, 엔진 최고출력은 캐스퍼 76~100마력, 허슬러 49~64마력으로, 캐스퍼 엔진이 더 크고 힘이 셉니다. 다만 허슬러는 모든 트림에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장착돼 있기 때문에, 모터 지원을 통해 필요할 때 더 큰 힘을 내고, 상대적으로 더 많은 힘을 발휘하면서도 휘발유 소비를 아낄 수 있지요. 따라서 허슬러가 실질적인 힘이나 주행 질감은 캐스퍼와 큰 차이가 없으면서도 연료를 훨씬 아낄 수 있는 차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허슬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캐스퍼와 마찬가지로 전륜구동이 기본이지만 ‘4륜구동’을 모든 트림에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전륜구동 트림에서 13만4200엔(약 145만원)을 추가하면 됩니다. 아웃도어 라이프를 즐기거나 약간 험한 길도 달리고 싶은 소비자에게 선택 폭을 넓혀주고 있습니다. 일본 경차는 대부분 4륜구동 옵션을 제공하고 있지만, 한국은 경형 SUV를 표방한 신차인 캐스퍼를 포함해 어떤 경차도 4륜구동 옵션을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 혼다 N-박스. 기아 레이와 비슷한 경형 박스카로, 좌·우 슬라이딩 도어가 전동으로 열린다. 일본어 자막으로 '가벼운 힘으로도 슬라이딩 도어의 잠김을 해제하고 열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지난 8월에만 1만3229대가 팔려 일본 경차 판매 1위, 전체 2위를 기록했다. / 혼다
허슬러의 경우는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얹어 연비를 향상시켰지만, 하이브리드 시스템 없이 가솔린 엔진만 장착하고도 연비를 크게 향상시킨 일본 경차도 많습니다.
혼다 N-박스는 기아 레이와 형태가 비슷한 경형 박스카인데요. 지난 8월에 1만3229대가 팔려 일본 경차 판매 1위, 전차종 2위를 기록한 수퍼 베스트셀러입니다. 이 차의 연비는 WLTC 기준으로 배기량 0.66L 가솔린 모델이 21.2km/L, 같은 배기량의 가솔린 터보 모델이 20.2km/L입니다. 한국 공인연비로 추정하면 18.2~19.1km/L 정도입니다. 가솔린 엔진의 효율을 높이고 무단변속기(CVT)와 조합하는 등 각종 연비향상 기술을 구사해 하이브리드 경차에 버금가는 연비를 달성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캐스퍼보다 연비가 30% 이상 좋은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N-박스의 가격은 기본형이 142만8900엔(약 1543만원), 가장 비싼 모델이 201만9600엔(약 2182만원)입니다. 차값은 싸지 않지만, 높은 연비 뿐 아니라 실내공간이나 안전·편의 장비가 뛰어나기 때문에 일본에서 줄곧 경차 판매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N-박스의 길이·너비는 3395X1475mm로, 한국보다 작은 일본 경차 규격대로이지만, 차고가 1790mm로 성인 남성 평균 키보다도 높습니다. 경차 치고는 차고가 높다는 캐스퍼(1575mm)보다도 215mm나 더 높습니다. N-박스는 키가 워낙 높아서인지, 길이·너비·높이를 모두 곱한 단순 부피로 비교하면, 캐스퍼와 덩치가 거의 비슷합니다. 공차 중량은 캐스퍼(985~1030kg)가 N-박스(890~980kg)보다 5~10% 더 무겁습니다.
N-박스는 박스카 형태라서 원래도 공간이 넉넉한데, 차고마저 높다보니 한국보다 규격이 작은 일본 경차임에도 실내 공간이 무척 넓지요. 게다가 기본형 바로 위인 L 트림(155만9800엔·1685만원)부터, 즉 기본형을 뺀 대부분 트림의 2열 좌·우 슬라이딩 도어가 전동으로 여닫힙니다.
첨단 안전장비 패키지 ‘혼다센싱’은 모든 트림 기본입니다. 충돌경감 브레이크, 오발진 억제, 보행자사고 저감 스티어링, 차선이탈 억제, 어댑티브 크루즈컨트롤, 차선유지, 선행차량 출발 안내, 표지판 자동인식, 후방 오발진 억제 등의 첨단 안전기능을 한꺼번에 묶은 것입니다.
현대가 19년 만에 다시 내놓은 경차 캐스퍼가 선택지가 적은 국내 경차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은 분명합니다. 이전의 경차 선택지는 3종 뿐이었고, 그마저도 지난 5년간 신차(완전변경 모델)가 전혀 나오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차급을 넘어선 넓은 실내공간으로 사랑받았던 국내 유일의 박스형 경차, 기아 레이는 2011년 11월 출시 이래(2017년 12월 부분변경 모델 출시) 10년째 풀모델체인지(완전변경)가 없는 상태입니다. 현대·기아 이외의 유일한 경쟁모델인 쉐보레 스파크도 2015년 7월 출시 이후 6년 넘게 신차 출시 없이 버티고 있습니다.
국내 시장에 더 저렴하고 연비 좋은, 즉 경차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신모델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국내 경차 시장의 주도권이 소비자보다는 생산자 쪽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미 국내 완성차 시장은 전체의 80%를 현대·기아차가 점유하고 있고, 수입차는 한국 특수 규격에 맞춰야 하는 경차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익성이 낮아도 경차시장을 적극 공략하지 않으면 전체 파이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 따라서 경차 시장에 신차를 계속 투입해 점유율을 방어한다’는 식의 절박한 동인(動因)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자동차 회사들이 채산성 높은 차, 즉 고급·대형차 쪽으로 소비자 선택을 유도하는게 가능하고, 또 그것이 잘 통하는 시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현대가 캐스퍼의 파워트레인·연비를 크게 개선하지 않은 것은 그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닐 겁니다. 필요가 없었겠지요. 국내 시장에 경형 SUV는 딱히 경쟁자도 없습니다. 굳이 현대가 캐스퍼 가격을 100만~200만원 낮추거나, 같은 값에 스즈키 허슬러처럼 전 모델에 하이브리드를 기본 장착해 연비를 대폭 향상시켰다고 쳐보죠.
그러면 현대의 다른 크고 값비싼 차를 사줄 소비자들이 캐스퍼로 몰릴 지 모릅니다. 현대 입장에선 크고 비싼 차를 많이 팔아야 이익을 많이 남기겠죠. 굳이 경차로 소비자를 유인해 판매의 전체 이익을 낮추는 행위를 스스로 할 리 없습니다.
그러니 캐스퍼의 외관을 예쁘게 만들고 편의·안전장비를 높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을지 모릅니다. 캐스퍼 디자인을 매력적으로 만들고 편의장비를 고급차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가득 탑재하는 것도 물론 가치가 있고, 제조사의 많은 수고와 고민이 들어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 해도 연비 향상이 함께 이뤄지지 않는다면, 경차 보급의 취지가 크게 퇴색될 수도 있을 겁니다.
◇ 경차를 왜 타야하는지, 왜 보급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부·제조사·소비자 모두 ‘생각의 전환’과 ‘원점에서의 재검토’ 필요할 수도
일본에서 경차의 연비 향상이 크게 이뤄지는 이유는 경쟁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밀려나기 때문입니다. 연간 200만대가 팔리는 ‘경차 대국’이지만, 그만큼 업체간 경쟁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난 8월 일본 자동차 판매 순위를 보면, 톱 10 가운데 6개 차종이 경차였습니다. 8개 회사가 50여종의 경차를 구비하고, 매년 신모델을 선보이며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즈키 같은 경차·소형차 전문회사는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기본 장착한 경차를 기존 경차와 비슷한 값에 내놓지 않으면 안되는 겁니다. 또 혼다 N-박스처럼 일반 가솔린 경차라 할지라도, 연비 향상 기술을 쏟아부어 하이브리드카에 근접한 연비를 내야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한국 경차시장도 다수의 플레이어가 경쟁하는 구조였다면 경차의 연비 향상이 자연스럽게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런 경쟁 구조는 만들어지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럼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경차 혜택을 추가하는 대신, 일정 기준 이상의 연비를 달성해야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큰 차, 편의장비만 가득한 차 대신, 편의장비가 좀 적고 크기가 작더라도 에너지 소모를 줄여 탄소배출을 줄이고 환경을 보호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제조사에만 모든 책임을 묻기도 어렵습니다. 제조사로선 최소비용·최대이익을 추구하는게 당연할 수도 있으니까요. 제조사·정부·소비자 모두에게 생각의 변화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리하면, 경차 보급의 취지는 작은 차를 타서 도심 정체를 줄이고 운전 편의성을 높이는 동시에, 더 적은 물자를 사용해 차를 만들어 환경을 보호하고, 좋은 연비를 달성해 에너지를 아끼는 것입니다. 정부나 사회·소비자도 운송 분야에서 환경보호와 탄소배출 감축의 목표를 이룰 때에, 최적의 시간표와 최소 비용 최대 효과를 내는 방법론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기차·수소연료전지차 보급에는 대당 최대 수천만원의 세금 지원이 필요한 실정입니다. 그렇게 해서 탄소배출 제로 차량을 보급하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연비가 아주 뛰어난 가솔린 경차를 많이 보급시키는 것이, 당장엔 더 효과적인 환경보호·탄소저감 대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탄소배출 제로 차량 1대를 보급하는 것보다, 경차를 10대 보급하고 또 그 경차 연비를 20~30% 개선하는 것이 실은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겁니다.
즉, 탄소배출 0%인 차량 1대를 보급하는 것보다 탄소배출을 20~30% 줄인 경차 10대를 보급하는 것이 배출 총량을 줄이는데는 더 낫습니다. 경차는 제조 과정에서 물자를 덜 소모하니 ‘전과정 평가(LCA)’ 측면에서 더 친환경적이기도 하고요. 소중한 정부 재원 즉 세금을 조금만 쓰고도 탄소배출을 더 줄인다면, 그렇게 아낀 정부 재원을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다른 곳에 활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값도 비싸고 에너지 절약도 안된다면 굳이 경차를 타야 할 이유, 경차를 보급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일본 경차를 지나치게 갈라파고스화된 차라고 무시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연비 향상에서 만큼은 한국 경차보다 오히려 국제적 콘센서스에 부합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2000만원짜리 경차라면 그 가격에 합당한 연비 성능도 필요합니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앞으로는 경차에 걸맞는 연비 성능 향상이 따라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소비자가 경차를 타는 것, 정부가 경차라는 특수한 제도까지 만들어 작은 차를 보급하는 것엔, 반드시 합당한 이유와 명분이 필요할 테니까요.
최원석 / 국제경제전문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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