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4. 23
안양과 군포, 성남은 1990년대 대규모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도시가 쪼개진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평촌은 행정상으로 안양에 속하지만, “안양에 산다”고 하면 보통 ‘평촌을 제외한 안양’을 뜻한다. 평촌에 사는 사람들은 ‘안양 시민’이라고 부르면 싫어한다고 한다. 예전에 예비군훈련을 받을 때 한 강사가 한 말이다. 군포-산본, 성남-분당도 사정이 비슷할 것이다.'
달걀프라이로 치면 신도시는 노른자이고 구도시는 흰자다. 안양 시청은 진작 평촌으로 이전했고 수년 전 한 대형서점의 안양점도 평촌으로 옮겨갔다. 작년에는 학생 수 감소로 집 앞 여중학교가 문을 닫고 아래 남중학교가 남녀공학이 됐다. 지난달 안양(이하 평촌을 제외한 안양을 의미)의 하나뿐인 백화점도 “평촌점에서 만나요~”라는 문구를 남기도 문을 닫았다. 한마디로 안양은 쇠락의 징조가 뚜렷하다. 그래서인지 안양과 평촌은 집값도 두 배 차이가 난다.
안양의 터줏대감인 필자는 이런 변화를 지켜보면서도 사실 담담하다. 평촌에서 살라고 해도 별로 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2003년도의 믿기 어려운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 심정은 꽤 착잡했을 것이다.
도심 공장이 공원으로
▲ 천변 산책로에서 바라본 삼덕공원의 전경이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기념 타워(실물 1/3 크기인 굴뚝 조형물)만이 이곳이 한때 제지공장이었음을 상징하고 있다. / 강석기 제공
예전에는 안양에 녹지(빈터)가 좀 있었는데 하나둘 주거지(주로 아파트 단지)로 바뀌면서 2000년대 들어서는 정말 갑갑한 도시가 됐다. 게다가 도시 한복판에는 흉물스럽게 제지공장이 떡 버티고 서 있었는데, 높이 솟은 굴뚝에서는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곤 했다.
그런데 2003년 7월 11일 이 회사(삼덕제지)의 전재준 회장(당시 80세)이 안양 시청을 방문해 놀라운 발표를 했다. 안양공장 부지를 안양시에 기증할 테니 공원으로 만들어달라고 한 것이다. 전 회장은 “지난 40여 년 동안 종이 공장에서 나오는 먼지와 진동 때문에 고생한 안양 시민에게 감사드린다”며 “이제 공장을 닫으면서 시민 여러분께 이 땅을 드린다”고 말했다.
공장 부지는 당시 시가 300억 원대(현 시세로는 500억 원 이상)로 중소기업 오너가 이 정도 재산을 시민에게 기부한 건 국내에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다. 전 회장은 “그동안 시민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 가족들과 상의해 기증하기로 흔쾌히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전 회장은 물론이고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을 자녀들도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 뒤 우여곡절이 있어(기부 뒤 안양시가 약속을 어기고 공원 규모를 줄이고 대형주차장을 짓기로 해(시민들은 공원보다 주차장이 더 절실하다며) 노발대발한 전 회장이 법정소송을 벌였고 다행히 그 와중에 시장이 바뀌면서 기부자의 뜻대로 하기로 했다) 2007년에야 공사가 시작됐다.
이 무렵 복개천의 덮개를 뜯어 하천을 복원하는 사업도 진행됐다(청계천의 영향으로 보인다). 고향이 나날이 삭막해지는 것만 지켜봤던 필자는 나이 사십에 친환경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하는 움직임에 감격했다.
이런 변화가 생기고 10년이 흐른 지금 삼덕공원(삼덕제지를 기념해 붙인 이름이다)은 조경이 자리를 잡았고 천변 산책로도 잘 정비돼 많은 안양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필자 역시 아침저녁으로 식사 뒤 천변과 공원을 산책하는 게 일과다.
그런데 전 회장은 시민들에게 단지 휴식공간만을 제공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공원과 천변 산책로로 늘어난 도심 속 녹지는 사람들의 정신건강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을 것이다. 삼덕공원 덕분에 안양 시민의 정신질환 발생률이 낮아졌을 거라는 말이다.
어릴 때 녹지 많이 접해야
▲ 덴마크 사람들을 대상으로 열 살 때 살던 집의 녹지지수(NDVI. 1분위는 녹지 비율이 가장 낮고 10분위는 가장 높다)와 청소년 이후 정신질환 발생의 상대적 위험성(relative risk)을 거주지의 도시화 정도에 따라 분석한 자료다. 시골(rural)에 살면 어릴 때 녹지지수에 따른 위험성 차이가 적지만 읍(provincial town), 지방 도시(provincial city), 코펜하겐 외곽(capital suburb), 코펜하겐 중심(capital center)으로 갈수록 차이가 커지는 경향이 있다. 도심일수록 녹지 확보가 더 절실한 이유다. 검은색은 보정 전, 회색은 다른 요인들을 보정한 뒤의 값이다. / ‘미국립과학원회보’ 제공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 3월 12일자에는 어린 시절 집 주변의 녹지 비율이 청소년과 성인이 됐을 때 정신질환 발생률에 꽤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덴마크 오르후스대 연구자들은 9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주소와 고해상도 위성 데이터를 분석해 이들이 열 살 때까지 살았던 집 주변의 녹지 비율을 구해 10단계로 나눴다. 그리고 각 그룹의 사람들이 청소년이 됐을 때, 성인이 됐을 때 정신질환 발생률을 조사한 것이다.
그 결과 녹지 비율이 가장 낮은 환경에서 산 어린이는 가장 높은 환경에서 보낸 어린이에 비해 커서 정신질환 발생률이 최대 55%나 더 높았다. 발병 시기별로 나눠보면 청소년기에 발병할 위험성은 최대 60% 차이가 났고 성인기에 발병할 위험성은 최대 42% 차이가 났다.
정신질환의 유형에 따라 녹지가 미치는 영향이 달랐다. 예를 들어 지적장애는 녹지의 비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반면 기분장애, 우울증, 노이로제의 발병률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가족력, 부모 나이 등 다른 요인을 보정한 뒤에도 여전히 녹지 비율에 큰 영향을 받았다. 조현병(정신분열증)과 약물중독도 꽤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면 녹지 비율이 어떻게 정신질환 발생률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뜻밖에도 이에 대해서는 아직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몇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녹지가 많으면 아무래도 활동을 많이 하고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다 보니 심신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 또 녹지가 미세먼지를 비롯한 오염물질을 줄여주는 효과도 있다. 그리고 어릴 때 다양한 생물에 노출돼 면역계가 제대로 발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조현병을 비롯한 정신질환 발생에 면역계 오작동이 관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청소년 또는 성인이 됐을 때 어디에 사는가에 따라 열 살 이전에 살았던 환경이 정신질환 발생률에 미치는 영향이 다소 달랐다. 시골에 살면 어릴 때 녹지가 가장 적은 환경에서 살았더라도 가장 많은 환경에서 보낸 경우보다 정신질환 발생률이 20% 정도 높은 데 그쳤다. 반면 대도시 중심에서 살면 60%나 더 높았다. 녹지가 적은 환경에 살수록 어린 시절 어떤 환경에 살았느냐가 정신질환 발생률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연구자들은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녹지를 자주 접할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짜야 하고 부모들도 자녀들과 주변 공원이나 숲을 찾는 시간을 늘리도록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아울러 도시를 설계할 때부터 도심에 녹지 공간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도록 유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시는 정신건강에 해로운 환경
▲ 조현병은 과거 정신분열병으로 불렸다. 약물로 잘 낫는 병이지만 의심, 무기력 증상은 치료의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우울증이나 조현병 등 정신질환은 유전적 영향이 더 큰 것 아닐까. 예를 들어 지난달 미국의 과학자들이 조현병 관련 유전자 413개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헌팅턴병 등 일부 유전병을 제외하면 질병 관련 유전형을 지녔다는 건 해당 질병에 걸릴 위험성이 크다는, 즉 역치(threshold)가 낮다는 뜻일 뿐이다.
조현병 관련 유전형이 적어 역치가 10인 사람과 유전형이 많아 역치가 5인 사람이 스트레스가 7인 환경에 살면 후자만 발병할 것이다. 반면 역치가 10인 사람도 스트레스가 12인 조건에 오래 노출되면 발병할 수 있고 역치가 5인 사람도 스트레스 수준이 3이라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
게다가 유전자만 정신질환 발생 역치를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뇌의 회로가 형성되는 어린 시절 환경도 변수가 된다. 유전자 덕분에 역치가 10으로 태어나도 아동학대를 받아 뇌의 회로가 스트레스에 민감하게 바뀌면 5로 떨어질 수 있다. 어릴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역치가 낮아지면 커서 스트레스에 더 취약해진다. 위의 실험 결과는 어릴 때 녹지에 노출된 정도가 뇌의 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줬다.
대체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시골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정신질환 발생률이 높다. 인구가 조밀하고 번잡한 도시라는 환경이 스트레스를 더 많이 준다는 말이다. 그리고 도시와 시골의 뚜렷한 차이 가운데 하나가 녹지 비율이다.
지난해 마지막 날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세원 교수가 조현병 환자에게 피살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데 이어 지난주에는 진주에서 조현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이웃 주민 다섯 명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비극적인 사건을 보면서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생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번 연구도 그런 느낌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정신질환 발생률을 낮추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해야겠고 그 가운데 도심의 녹지를 확보하는 일도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2010년 가을 어느 날 볼일이 있어 삼덕공원(아직 자리가 안 잡힌 상태였다)을 가로질러 가던 필자는 한쪽에 천막이 설치돼 있는 걸 보고 상황을 예감하고 다가갔다. 전재준 회장이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분향소가 차려진 것이다. 향을 피우고 두 번 큰절을 한 뒤 고개를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만일 전 회장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서(안양시에 뒤통수를 맞아 화병(火病)이 나는 일이 없었다면 모를 일이다) 봄의 절정에 있는 공원을 한 바퀴 돌아봤다면 “그래, 내가 꿈꿨던 게 바로 이 모습이야”라며 기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