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더 확실한 예언
Text 2Ptr 1,12-19
(12)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6)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9)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1. 설 명절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설날의 의미는 뭐니 뭐니 해도 달라지는 한 해의 삶을 결심하는 것에 있다 하겠습니다. 비록 작심삼일이라 해도 뭔가 달라지겠다는 각오를 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부디 좋은 각오가 좋은 결실로 나타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침 오늘은 또한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던 중에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을 들으며 몸은 물론이고 입은 옷까지 하얗게 빛이 나도록 변화한 것을 기념하는 산상변모주일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고난을 목전에 두신 주님께서 이 변화산에서 자신이 인류 구원을 위하여 하고자 하는 사역이 옳고 꼭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하게 확인을 받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고 그 길을 계속 가실 수 있으셨던 변화와 변모의 은혜가 설날을 지내는 우리 성도들의 심령과 삶에도 강하게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 12절에,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고 본 서신을 쓴다고 한 사도 베드로의 고백이 있습니다. 무엇을 항상 생각나게 하려고 합니까?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4&7절) 그리고 그렇게 생각나게 하려는 것은 사도께서 “이 장막에 있을 동안” 마땅히 해야 알 일(13절)이고, 사도께서 이 장막을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생각이 나게 하려는 것(15절)입니다. 더욱이 사도께서는 이때 자신이 죽을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더욱 강력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14절)
사도께서는 이 편지를 받을 사람들에 대하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이미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사도께서는 잊지 않고 항상 생각이 나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서 썩어질 것, 즉 단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만 유용한 것, 혹은 이 세상이 지나면 다 썩고 말 것, 그런 것을 피하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그 가치가 잘 드러나지 않는 신성한 성품을 가지려는 노력,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 보여드려서 칭찬받을 수 있는 열매를 많이 맺으려고 애쓰기를 계속하는 성도가 되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 편지를 쓴다는 뜻입니다.
사탄의 편에 서 있는 세상은 성도를 훼방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와 평강을 깨뜨리고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저버리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게 하여 열매 없는 자가 되게 하려고 훼방합니다. 옛 죄가 깨끗하게 된 은혜를 망각하고 눈앞의 욕심에 포로가 되게 하려 합니다. 이 시험과 훼방은 사람에 따라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하지만 쉴 새 없이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따라 다닙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주님으로부터 떨어뜨리려는 것 그것이 인생을 향한 사탄의 목적입니다.
서울 양화진에 있는 ‘100주년기념교회’에서 목회하다 은퇴하고 경남 거창에 내려와 사는 이재철 목사가 있습니다. 가수 이승윤의 아버지이기도 한 이 분의 성품이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분이 쓴 “인간의 일생”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루는 자신을 특별히 생각해 주는 어른 목사님이 멀리 교외에까지 데리고 나가 밥을 사 준 후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목사, 차가 흔들릴 때는 차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겨야 하네. 차가 흔들려 내 몸이 움직이는데,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더 피곤하기만 해. 근데 말이야, 인생도 똑같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세상이 흔들리는 대로 함께 흔들려야 인생살이가 편해져. 온 세상이 흔들리는데 혼자 꼿꼿하면 피곤해지는 법이야.” 그 목사님은 자신을 아끼는 마음으로 조언했다고 느꼈지만, 이 목사님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물론 알아듣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처럼 살다가 죽겠습니다. 나는 나의 일생이 다하도록 진짜 크리스천, 프로 크리스천으로 살다가 죽고 싶습니다.”
좋은 성품이 무엇입니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좋은 성품입니까? 원칙을 대쪽과 같이 지키고, 공의와 정의를 위해 악과 대립하는 것은 나쁜 성품입니까? 이러한 사람과도 어울리고 저러한 사람과도 어울리면서 적당하게 타협하고 웃으면서 지내는 것이 지혜로운 모습이고 좋은 모습입니까? 사도께서는 하신 오늘의 말씀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려는 노력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이러한 원칙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알고 있는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을 끝까지 지키게 하는 것이 당신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라는 말씀이 본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완성된 자인 것처럼 생각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안주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사도께서는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도록 이미 기도했으며, 지금도 그들이 더 많은 은혜를 받도록 힘쓰기를 바라서 그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극히 부지런하고 근면하게 노력하여 신앙의 진보를 꾀하는 성도가 되어야만 합니다. ‘힘써’ 근면하지 아니하고서는 거룩한 사업에서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아십시오. 신앙발달에서도 게으른 사람들은 아무런 성과를 올릴 수 없습니다. 힘써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노력하겠다는 은혜의 결심이 서시기를 기도합니다.(눅13,24)
3. 사도께서는 당신이 하는 신앙 권면이 결코 교묘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하늘로부터 난 것을 직접 들은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주님의 큰 위엄을 직접 보았고 거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존귀와 영광을 주님께 주시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는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6-18절입니다. “(16)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관한 이야기, 심판주로 재림하시리라는 이야기, 모든 율법과 예언서가 말하던 메시야로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증언하시어서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증거한 것 등,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그를 믿음으로 죄를 사함 받아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며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가장 탁월한 섭리에서 나온 것임을 사도는 본문을 통해 확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는 이 방법을 창안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친히 옆에서 본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앞에서 변형하셨을 때, 그의 얼굴이 해갈이 빛났고, 그의 옷이 빛과도 같이 그리고 눈과도 같이 하얗기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처럼 하얗게 만들 수 없을 만큼 빛나던 그런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고, 그 산 위에서의 황홀경에 빠진 나머지 거기에 나타났던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주님을 위한 초막 셋을 지어서 살자고까지 횡설수설하기도 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그 일의 목격자로서 그 사실을 증거할 수 있으며 또 증거할 사명도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근거는 나의 ‘느낌’이 아니라 ‘보고 들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고 이 복음을 따라 살기 위해 ‘올인’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성도가 복음을 믿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신령한 경험이나 자신들이 본 환상을 근거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이들의 ‘사실’만을 근거로 합니다. 그 사실을 기록한 성경만을 근거로 합니다. 신앙인은 사도들이 엄숙하게 증언한 이 사실을 믿습니다. 그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기반을 “사도들의 증언”에 기반하고자 합니다. 결국 사도들의 증언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가 사람을 신앙인과 비신앙인으로 나뉘게 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복음을 믿어서 변화된 사람입니다. 복음을 믿어서 신앙인이 된 사람이라면 당연히 복음이 강조하는 바를 철저하게 믿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믿고 저것은 못 믿겠다는 식의 선택적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은 이렇지만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융통성이 필요하다는 믿음은 거짓이요 사이비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사도께서는 벧후2,22에서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여러분, 복음이 성도의 삶에 대하여 말하는 명령은 단순한 강조가 아닙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조언도 아닙니다.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반드시 그대로 믿어야 하고, 또한 믿은 대로 살아야 하는 명령입니다. 복음의 명령 앞에서 다른 마음을 먹지 말고 주춤거리지도 말며, 날 구원하신 주님께서 하시는 명령이니만치 온전히 순종하고 충성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은혜가 새해의 모든 날 동안 내 삶의 방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4. 실수가 많았고 급기야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였습니다. 신앙고백과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을 분리하여 생각했던 베드로였지만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이 일어난 후 변화된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대대로 변화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를 당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변화산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기억한 베드로는 이 땅에서의 길에서 닥쳐오는 고난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베드로로부터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바를 사람들은 천로역정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생존했던 시대가 지나고 그들로부터 직접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의 세대까지 죽게 되었을 때부터는 생생한 목격자들보다 더 확실한 증언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9)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더 확실한 예언이 있는데 이 예언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과 같고 새벽하늘에 빛나는 샛별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더 확실한 예언’은 성경입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가장 확실한 예언은 성경입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는 말씀 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과 신앙생활의 기준은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닙니다. 시대의 흐름이나 경향도 아니고 국가의 시책도 아닙니다. 인생길에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답은 모두 성경에 있습니다. 복을 받고자 하는 것보다 성경대로 사는 사람에게 약속된 성경의 복이 무엇인지 찾아봐야 합니다.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것보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로 사는 사람의 복이 무엇인지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건강하게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대신 성경에서 건강하게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살았는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되게 살고 건강하게 살며 명예를 드놓이며 사는 것보다 성경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요, 가족이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성경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 구하는 모든 것을 복이 되게 다 주신다고 마6,33에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저런 다짐과 결심을 하는 설날에 우리 모두 ‘한 책의 사람’ ‘성경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매일 얼만큼씩 성경을 읽으며 살기로 결심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