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선 2/ 그 시조를 다시 읽고 쓴다.
시조의 형식과 시적 미학
이우걸
1.
단시조는 시조의 기본형이다. 연시조는 현대시조가 부활하면서 복잡한 현대를 시조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대응의 형식으로 강조하게 된 것이다. 연시조 역시 각수 모두 시조로서 완벽한 완성 형태 를 갖추어야 한다. 독자들은 노래하는 시조가 아니라 읽는 시조로서의 현대시조에 대해 형식미와 아울러 시적 미학까지 요구하고 있다. 시조형식이 오히려 시적 미학을 구현하는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이러한 시조 창작을 위해 여러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노력들이 시적 미학에 지나치게 취중한 나머지 시조의 형식미를 침해하는 경우까지 나타나자 '시조다운 시조'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 또한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런 면에서 단시조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고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단시조를 뽑기도 한다. 형식에 관한 도남 조윤제의 시조론을 받아들인 김윤식은 '형식 미달'과 '형식 초과'라는 용어로 단시조의 위치를 강조했다. 가람 시학, 이호우 시학을 논하면서 이호우의 '개화'를 데뷔 작품 '달밤'보다 더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또 최근에 민병도 시인이 단시조문학상을 제정하여 제 1회 수상 자를 선정, 시상한 것은 시조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의 하나로 시의 적절한 결정이었다고 생각된다. 원로의 반열에 들어선 김영재 시인은 근래 여러 지면에서 주목할만한 단시조를 발표하고 있다.
선암사 대웅전 앞
나무 아래 쉬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뭇잎 송송 뚫렸다
벌레들
일용할 양식
아낌없이 준 것이다
- 김영재 「보시」 전문
저무는 하늘 저편
새들이 날아간다
날아간 새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날개로
행로를 지우며
어둠 속 가고 있다
- 김영재 「새들의 행로」 전문
첫 번째 작품은 본지 겨울호에 발표된 작품이고 두 번째 작품은 개화,32호에 실린 작품이다. 불과 3장으로 시조의 형식을 지키고 그 그 릇 안에서 시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보시」에서는 선경후정의 분위기를 만들면서 세태를 비판하는 메시지도 배면에 깔아놓고 있다. '벌레들 일용할 양식 아낌없이 준 것이다'라는 구절은 비판인 듯하면서 또 다르게는 성찰의 느낌이 들어서 독자에게 더 효과적인 울림을 주고 있다. 「새들의 행로」는 훨씬 더 암시적이다. 어둠의 풍경을 지나야 하는 것은 새들에게나 인간에게나 모두 고단한 일이다. 쓸쓸한 장면, 이별의 장면, 전망부재의 장면을 연출해 내고 있지만 날갯짓으로 어둠을 다 벗어나면 그 끝에는 더 나은 풍경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여기서 시가 더 길어져 좋을 것이 뭐란 말인가. 풍경의 묘사만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수없이 많다. 그래서 이 작품이 거느린 여운은 깊고 넓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눈을 떼지 않고 살아가는 시인의 시각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림자 아이」와 「산불 후」가 있다.
흰빛과 검은빛이 동시에 찾아왔죠
한 모금 젖을 찾아 입술을 내밀던 날
눈 한번 뜨지 못하고 어둠 속에 갇혔죠
팔딱이는 꽃심장이 급냉동되었어요
비닐 속 꽁꽁 묶인 동태와 함께지요
누구도 볼 수 없어요 그림자만 남아요
- 김덕남 「그림자 아이」 전문
잘 정제된 언어들이 그리는 오늘의 사생도寫生圖다. 삶은 가팔라도 욕망은 분출되는 틈 속에 인간이 인간이길 거부하는 필름이 현상되어 있다. 세상에 태어나 이름도 얻지 못하고 그 부모의 손에서 사라진 목숨. 이 처참한 현실이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자행되고 있다. 소재나 주제에 의해 얼마든지 적절한 목소리와 형태로 변주될 수 있는 것이 현대시조라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한 치도 못 벗어날 발 묶인 몸이 되어
안 된다 절규하며 화마의 밥이 된다
하늘도 서러웠는지 온종일을 울고 있다
- 진길자 「산불 후」 부분
속수무책인 화마의 현장, 몸부림치는 나무와 식물들의 모습을 사실 적으로 그리고 있다. 여운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단선적인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시조시인들의 시선이 지나치게 유미적이거나 지나간 대상을 미화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지면에 작품을 옮기지는 않지만 이제우 시인의 「친구 사이」 는 구수한 일상 언어로 숭늉 같은 우정을 맺힌 데 없이 그려서 누구나 실감할 만한 서사를 엮어내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2.
신작 몇 편의 작품 관찰만으로 거시적이거나 미시적인 시조의 오늘을 논하기는 어렵다. 다만 지난호를 일독한 뒤 단시조의 덕목을 일깨운다고 생각되는 작품과 연시조 몇 편을 눈여겨보았다. 그 안에서 비정하고 메마른 우리 삶의 숨은 그늘을 포착해서 우리 모두를 공감하게 하는 의미 있는 경고장을 읽었다. 한 시대의 고뇌를 응결시켜 문자로 조각하는 고행을 감수하는 시인들의 헌신에 고마움을 느낀다.
- 《시와함께》 2024.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