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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열린 공동체 새길교회
새길교회는 1987년 3월 7일, 사회개혁과 교회개혁을 열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창립한 평신도 공동체다. 그동안 교파와 교회당, 전임 교역자 없이도 생동하는 신자의 모임을 실현해왔고, 최근 사단법인〈새길기독사회문화원〉과〈도서출판 새길〉을 설립해 새 길을 찾고 만드는 ‘예수 따르미’의 세미한 소리를 내고 있다.
정신의 탐구
새길교회는 내가 일하는〈새길기독사회문화원〉의 모체가 되는 공동체다. 그러니 이 글을 쓰는 나의 위치는 외부자라기보다는 내부자인 셈이다. 안에서 이야기하기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글을 쓰겠다고 나선 것은 지난 몇 년간 함께하며 느낀 것들을 정리해 보고 싶어서였다. 예상했던 대로 공동체의 삶을 글로 옮기는 일은 힘겨운 작업이었다. 그것은 새길교회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외적 제도의 설명이 아니라 정신의 탐구가 필요하다는 내부자로서의 자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할 말이 많으면서도 말문이 터지지 않아 한동안 애태우던 나는, 새길의 말씀증거 모음집들을 며칠동안 읽은 후에 공동체 깊은 곳으로 안내하는 지도 한 장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가끔 새길교회의 다른 점이 정말 무엇이냐, 무엇이 새길이냐고 묻곤 합니다. 그것은 평신도 교회라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예수의 새로운 발견에 있습니다.”-길희성 형제
새길의 새로움은 외적 제도나 전통이 아니라 새길 사람들이 고백하고 다짐하는 ‘예수 따르미’의 내적 신앙과 삶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적으로 공명하며 정신의 탐구를 시작했다.
예수 따름-기억과 기념, 그리고 실천
“예수의 말씀 모두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그것을 실천해 내는 것이 예수 따르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한완상 형제
공동체 창립멤버 중 한 명인 한완상 형제의 간단명료한 설명에는 그리스도교가 역사의 예수(historical Jesus)에 대한 ‘기억’과 ‘실천’의 차원을 망각하고 천상의 그리스도(heavenly Christ)를 ‘기념’하는 데만 몰두했다는 비판적 통찰이 담겨 있다.
그동안 새길공동체는 그리스도의 기념에 비해 상대적으로 희미해진 역사의 예수를 기억해내기 위해, 20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재개된 역사의 예수 연구 성과들을 수용하면서 오늘날 예수를 어떻게 발견하고 따를 것인지를 진지하게 탐구해왔다. 지난 1999년에 한완상 형제가 인도한 10주간의 “역사의 예수” 세미나와 2003년 박태식 박사의 “신약성서의 이해” 강좌 등은 역사의 예수 이해를 심화시키는 신학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예수의 비유를 해석하는 토론-2002년 수련회
역사의 예수 탐구는 새길공동체에서는 이제 일상적이라 해도 좋을 듯싶다. 매주 말씀증거에는 역사의 예수가 보여준 삶과 신앙, 비전이 스미어 있고, 공동체 자치모임들에서의 나눔도 풍성하다. 지난해부터 마커스 보그, 존 도미닉 크로싼 등〈예수 세미나〉학자들의 책을 읽고 공부하는 구역도 있고, 또 청년들의 독서토론 모임에서도 진보적 예수 연구자들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찾고 만나는 역사의 예수는 누구일까?
“우상화되고 형이상학화된 예수, 힘 있는 자들과 부자들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믿기 쉽도록 만들어 놓은 관념적 예수가 아니라 인간의 허위의식을 용납하지 않고 비인간화된 종교를 인간화하려다가 처형당한 인간 예수입니다.”-길희성 형제
“역사의 예수요? 저는 그를 참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스퐁 감독은 예수는 ‘무진장한 사랑을 가진 이’라고 이야기하던데, 정말 그런 분이었으니 사람들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게 아닐까요?”-박용환 형제
참인간 예수를 알아갈수록 그의 인격과 영성은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오고, 다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인간성의 미래로 예시된다. 예수의 기억에는 이미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예수를 따르는 실천의 요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예수를 앎과 따름이 둘이 아님을 자각한 새길 사람들은 교회생활 이전에 각자의 일상에서 먼저 예수 따르미로 살아가려고 애쓴다.
“공동체를 끌어가는 힘은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실할 때 더 커진다고 생각됩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 나오는 것으로 어떻게 힘이 나오겠습니까? 각자 삶의 현장에서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겠지요.”-주선경 자매
예수 따르미들의 모임인 공동체 역시 교회 울타리를 넘어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봉사부를 중심으로 실직, 노숙자 단체, 빈민지역 공부방, 장애인 공동체, 무의탁 노인, 소년소녀 가장 등을 지원하고 있고, 선교부와〈새길기독사회문화원〉을 중심으로는 정의, 평화, 통일, 환경보전, 종교간 대화와 이해를 위해 일하는 단체들을 지원하며 연대하고 있다. 지난 2000년부터는 독자적인〈새길의료봉사단〉을 만들어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의료봉사도 하고 있다.
인천지역 이주노동자 의료봉사 - 새길의료봉사단
이렇듯 개인과 공동체 두 차원에서 예수의 기억과 실천을 노력하고 있지만, 새길 사람들은 자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신앙과 삶에 배어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의 문화
본래는 유대교 평신도 개혁운동이었던 바리사이 운동이 이웃을 정죄하는 일상적 종교권력으로 변했던 것은 자신들의 종교적, 도덕적 정당성을 과신한 때문이었다. 종교적이든 사회적이든 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이 무엇보다도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태도를 경계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새길 사람들은 자기 자랑에 인색하다. ‘예수 믿으미’로 안주하는 기성교회의 신앙관행에서 벗어나 새 길을 간다는 자부심은 있지만, 신과 나누는 사랑의 신비를 종교적 거래로 전락시키는 공적주의는 더욱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결단과 실천을 강조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자칫하면 도덕적 승리주의나 영적 교만으로 들리기 쉽습니다. 자칫하면 우리 안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뿌리 뽑기 어려운 죄악의 힘을 간과한 값싼 낙관주의나 천박한 행동주의가 되기 쉽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갈 데 없는 죄인임을 자백하는 자기성찰과 겸손이 필요합니다.”-길희성 형제
예수를 기억하고 따르려 할수록 예수처럼 살고 있지 못한 삶을 발견하게 되는 때문일까. 성찰적 부끄러움은 새길에서는 집합적 감정에 가깝다. 특히 예수 따름이 공동체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다가올 때-진보적 성향을 가진 중산층 중심의 공동체가 예수 따름의 민중적 차원과 대면할 때- 부끄러움은 더욱 깊어진다.
“과연 우리가 억울한 고통을 당하는 비인간화된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는 될 수 있지만 그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가를 정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즉, 새길공동체가 절망한 인간들을 위한 교회(church for the hopeless)는 될 수 있지만, 그들의 교회(church of the hopeless)가 될 수 있는지를 진지하고 정직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한완상 형제
새길은 누구나 찾아와 편히 어울릴 수 있는 공동체였는가에 대한 자기비판의 목소리는 따끔하다 못해 쓰라리다.
“왜 우리 교회는 노인들, 특히 여성 노인들이 오시기를 꺼려하는지, 왜 우리 교회는 소위 민중이 얼씬거리지도 못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교만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권진관 형제
답은 아직 찾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향과 현실 사이에서 생겨난 부끄러움은 새길의 한계뿐만 아니라 희망도 담고 있다. 그것이 바깥으로부터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더 치열하게 나오고 있기에.
서로를 살피며 돌보는 사람들
부끄러움의 습지에도 삶은 피어난다. 새길 사람들은 서로를 살피고 돌보며 겸손히 공동체를 일궈왔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전문 목회자가 교인의 내밀한 영역까지 개입해 책임져주는 듯한 일반교회와 달리, 새길공동체는 관계적 갈등의 조정이나 어려움에 처한 동료의 돌봄까지 모두 평신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지난 겨울 공동체 한 멤버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쓰러져 생사의 기로에 섰다. 공동체를 위해 열심히 헌신해 오던 이였기에 충격도 컸다. 그때 교인들은 누가 조직하지 않았어도 자발적으로 기도 시간을 정해 기도했고, 매일 병원을 방문해 그의 소생을 떨리는 심정으로 지켜봤다. 그 사랑의 기운 때문일까. 마침내 기적적으로 회생한 그는 새로운 삶을 조심스럽게 다시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발적 배려와 돌봄에도 한계는 있었다.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아니어서-실제로 교인들의 삶터는 수도권 전역으로 분산되어 있다.- 주일예배와 교제 외에 일상적 생활 나눔이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절박한 지경에 놓인 동료의 삶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마저 생겼다.
그래서 지난해부터는 한 달에 한 번씩 지역별 구역 모임을 다시 시작했다. 공동체의 일곱 개 구역은 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신앙과 삶을 나누고 있다. 정부 지원의 사각지대에 있는 장애인 시설을 찾아 봉사하는 구역도 있고, 작은 음악감상회나 가벼운 나들이를 하는 구역도 있다. 또 어떤 구역은 줄기차게 역사의 예수 세미나를 한다. 창발적 나눔 방식은 다른 구역으로 전파되어 새롭게 발전하기도 한다.
사진 소모임 [빛으로 나누는 대화]
이 외에도 지금은 발전적으로 해체한 중장년층의〈한모임〉, 65세 이상 교우들의 친목 모임인〈일소회(一笑會)〉, 혼성 중창모임〈새길 앙상블〉등 자율적 소모임들로 공동체적 삶을 나눠왔고, 최근엔 교인의 다양한 관심과 기대에 따른 새로운 소모임들도 생겨나고 있다.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한〈영구역〉은 새길의 새로움을 더하는 자치모임으로 활동 중이고,〈새길기독사회문화원〉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소모임 활성화 사업의 하나인 사진 소모임〈빛으로 나누는 대화〉도 진행 중이다. 그리고 현대신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평신도 신학 포럼도 기획중이다. 이처럼 새로운 조직 방식과 활동을 만드는 데 주저함이 없는 새길의 계절은 아직 봄이다.
평등한 우애의 공동체
“우리가 새길교회를 평신도교회로 만들고 좋아하는 이유는 이 공동체가 서로를 억압하거나 서로의 힘을 빼앗지 않고, 서로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려 하기 때문입니다.”-조혜자 자매
새길에서는 평신도들이 설교(말씀증거)를 한다. 하나님 앞에 모든 신자가 평등한 사제라는 새길 정신의 한 표현이다. 이처럼 교회 내 위계질서의 기초인 성직자의 선포와 평신도의 경청이라는 차별성부터 허물고 나섰으니, 성과 세대의 위계질서는 더욱 존립할 수 없었다.
새길교회 예배 참석 교인의 성비는 거의 50대 50의 균형을 이룬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더 많이 출석하는 일반교회와 비교해 다소 독특한 현상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수에 상관없이 남성들의 목소리가 크지 않다는 사실이다. 소수 남성 리더들이 좌지우지하는 가부장적 교회들과 달리 새길은 여러 면에서 양성평등을 실현하고 있다.
물론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리더쉽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성차별적 기득권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와 능력에 기초한다. 21세기 첫해와 이듬해 운영위원장을 맡은 이는 조혜자 자매였고, 현〈새길기독사회문화원〉원장도 최만자 자매다. 성가대도 배명자 자매가 맡아 지휘하고 있다. 새길에서 여성들의 지도력은 보조적 장식 같은 것이 아니라 새길을 새길답게 하는 실제적 힘이다.
“새길공동체의 새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여성들의 믿음과 헌신, 관용과 사랑에 크게 힘입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종교의 독선 항아리는 비워버리고, 사랑과 관용의 항아리는 항상 넉넉하게 채워주려고 애쓰는 우리 새길 여성들에게 감사드립니다.”-한완상 형제
새길의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는 젊은이들과 나이 지긋한 이들이 자연스럽게 담소하는 모습이다. 한동안 남선교회의〈수요기도회〉에선 이십대 청년으로부터 오십대 장년 교우들이 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었다. 교회든 사회든 세대간 반목의 벽이 더욱 높아가는 세태에서 흔한 경험은 아니다.
[등나무 카페]에서의 대화
한편 ‘지식인 교회’라는 별명처럼 비율로는 대학 교수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에 와서까지 소위 ‘교수 노릇’ 하려는 이들은 없다. 학교에선 원로급 대우를 받는 이들도 소매를 걷어붙인 채 식탁을 치우고, 음식 쓰레기를 내다 버리고, 대걸레질을 한다. 젊은 사람이 맘 편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지만, 이들은 청년세대에게 뭘 하라고 시키기보다는 스스로 궂은 일을 먼저 해버린다.
“세대간에 어색한 면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껏 교회에서 어른들을 만나면서 권위주의 같은 건 느끼지 못했어요. 교회라서 그런가? (“하지만 권위주의적 교회들도 많잖아요.”) 그렇죠. ... 그래서 여긴 다른 교회 아닌가요?”-홍관석 형제
권위주의의 해체가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의 공격으로 이루어질 때는 어떤 형태로든 상처가 남는다. 하지만 남성이면서 연장자인 이들이 스스로 탈권위주의를 선택할 때 생겨나는 건 관계적 평등의 우애다.
“인간은 관계의 존재입니다. 혼자서는 아무런 존재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일방적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또 일방적으로 고통을 부담스럽게 안겨주는 것이 아닌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관계입니다.”-최만자 자매
성차별과 세대갈등의 벽이 허물어진 평등의 자리, 새길 사람들은 서로에게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자매요 형제다.
열린 다양성의 숲
새길교회가 주일마다 강당을 빌려 예배드리고 있는 강남청소년회관 옆에는 아담한 숲이 하나 있다. 주일이면 교인들이 삼삼오오 거닐며 대화하는 청담공원이다. 그런데 그 숲에는 똑같이 생긴 나무가 하나도 없다. 그렇게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서 있지만 다툼이 없다. 새길이 기대하는 공동체의 이상도 그런 것일까?
새길의 신앙과 신학은 특정한 ‘-ism’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생태신학, 종교다원주의 등 라디칼한 신학적 사유들이 자유롭게 펼쳐지지만, 특정한 신학적 지평에 정주하지 않는다. 더욱이 공동체 안에는 복음주의적 신앙을 지닌 이들도 많고, 반대로 탈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가진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 다름을 이유로 서로를 배제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힘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새길 공동체는 그리스도인 되기 위한 충분조건으로서〈새길 신앙고백〉만을 요구합니다. 새길의 최소적 신앙고백은 많은 것을 함축합니다. 공동체 내 성원들의 다원성을 허용합니다. 신앙생활의 여러 가지 전통이 있고 방식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새길의 신앙고백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최소주의는 다름을 존중하는 것입니다.”-정대현 형제
‘최소적 신앙고백’에 기초한 다원적 문화에서 가르침과 배움은 일방적일 수 없다. 새길은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를 가르치는 구도자들의 열린 도량이기 때문이다.〈여선교회〉금요성서공부는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매주 정해진 성서본문을 읽고, 그것을 각자의 삶에 적용하여 해석한 것을 나눈다. 생활에 방점을 찍기에 저마다 입장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남에게 고집하지 않는다. 있을 수 있는 갈등도 공존을 위한 이해의 과정일 뿐 배제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 이는 여성들만의 특별한 문화가 아니다. 청소년 모임인〈새길 넥스트〉는 자유토론식 예배를 드리면서 일찌감치 다름을 존중하는 공존의 문화를 경험하고 있고, 교인들의 일상적 관계 방식도 자기 색을 잃지 않으면서 유기적 전체를 이루는 조각보를 닮아 있다.
여선교회 금요성서공부
이웃종교를 존중하는 태도는 이런 열린 정신의 값진 열매다.〈새길기독사회문화원〉은 2002년에 이웃종교인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생각을 경청하는 심포지엄 “이웃종교에서 보는 한국 기독교”를 개최했고, 2003년에는 이웃종교인들과 함께 “종교권력과 사회개혁”이라는 세미나도 개최했다. 또 2004년 봄에는 길희성 형제의 “불교와 그리스도교” 강좌가 있었는데, ‘열반과 하나님나라’, ‘공(空)과 하나님’, ‘보살 예수’ 등 파격적 주제의 강의로 언론과 종교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이번 가을에는 이슬람 이해를 위한 강좌도 개최할 예정이다. 손가락에서 눈을 돌려 달을 보는 용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제도가 아닌 '길'
“새길교회는 종교의 종살이가 지겹고 제도화된 종교에 실망해서 종교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마저 포기할 수는 없는 이들이 모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최소한의 교회생활, 종교생활, 최대한의 신앙생활을 하려고 모인 교회입니다.”-길희성 형제
새길교회는 교파와 교회당, 전임교역자가 없다 하여 흔히 ‘삼무(三無)교회’라고 불린다. 이 삼무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예수 따름이 제도에 고착될 수 없는 도상적 과정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제도화는 편의와 효율성을 위해 이루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을 거부하는 건 고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 열매는 쓰지 않다.
“아쉬운 문제들이 있지만, 열린 교회와 평신도 교회의 정체성을 지켜오면서 함께 체험해 온 흐뭇함이 있습니다. 조직적 질서, 안정, 소속감의 방패는 없으나, 질서와 안정이 주는 것보다 더 소중한 열린 공동체의 자유로움이 있습니다.”-한완상 형제
물론 새길공동체도 무정형의 모임은 아니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같은 교회 직제는 없지만, 운영위원회와 각 부서, 그리고 특별한 목적의 한시적 위원회들이 있다. 기성교회의 교역과 직제가 지닌 효율성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유기적 관계성과 자율적 책임성으로 별 탈 없이 잘 운영되고 있다.
운영위원회 정기회의
교회 내 교육구조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부는 지난해까지 담당 전도사가 책임지고 운영했지만, 올해부터는 평신도 교사들의 힘만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어린이를 위한 설교와 프로그램을 돌아가면서 맡고 있고, 총무, 회계 등 기능적 역할도 자율적으로 분담했다.
“그래도 전임 교역자 없이 꾸려가려면 힘들지 않아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평신도교회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요? 물론 처음엔 부담이 커서 전도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젠 알아서들 잘 해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책임지고 해야 하니까 더 공부하게 되고 또 적극적이게 되요.”-진상현 형제
그러나 공동체 역사가 17년을 넘기면서 생기는 어려움도 있다. 특히 공동체를 창립한 1세대 리더들이 자발적으로 물러나기 시작한 지금, 공동체를 새롭게 지탱해 갈 정신적 지도력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는 새길 사람들에게 심각한 고민거리다.
“교회의 조직적 운영이라든지 서로의 생활을 챙기는 건 어떻게든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길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체계적이고 오랜 신학적 훈련을 거치지 않은 평신도들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이상화 형제
그 고민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새길은 최소한의 제도화를 수용할 수도 있겠지만, 삶의 방식은 제도적이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이들이 기억해 낸 예수는 아빠 하나님 앞의 단순한 삶이 수백 가지 제도보다 풍요로운 길임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작은, 그러나 멀리서도 보이는...
“여기, 호주인데요... 우리도 몇 사람이 모여 새길교회 같은 평신도 공동체를 시작했어요.”
언론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새길의 이야기는 지구적 소통의 차원까지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파당적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수만 명을 단 번에 동원해내는 대형교회들의 파워에 비하면 새길은 아직도 겨우겨우 제 빛을 내고 있는 작은 촛불 같은 공동체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빛을 아주 멀리서도 보고 있다. 어둠이 더욱 짙어진 탓이다.
이제 새길 사람들은 공동체 창립 20주년을 앞두고 조직, 신학, 삶의 차원-내부적 공동체성의 심화와 외부적 사회참여의 강화-을 쇄신할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자율적 평신도들이 ‘깊은 신앙 넓은 신학’으로 창조해 갈 공동체의 미래 역시 쉽고 편한 길은 아닐 것이다.
“편안한 예수의 길을 따르려고 나선 것이 새길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한국교회 전체를 향하여 높은 목소리를 낼 경우도 생길지 모릅니다. 때로는 우리가 ‘아니오’를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최만자 자매
‘아니오!’를 말하면서도 부끄러움을 잃지 않는 사람들, 그들이 새 길이다.
우리는 섬김 받는 교회에서 섬기는 교회로, 직업화된 교역자 중심의 교회에서 공동체적 평신도 중심 교회로, 제도와 율법주의에 매인 교회에서 은총과 자유의 교회로, 닫힌 교회에서 열린 교회로,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쌓아 올리는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교회로 발돋움하려 합니다.-〈새길교회 창립취지문〉중에서
새길교회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서울 강남구 대치동 889-5 샹제리제센터 A동 808호
첫댓글 새길교회도 또하나의 교파이고 보통사람은 들어 갈 수 없는 ,,,,,환완상 유상태정도는 돼야 들어 갈수 있는 특권층의 교회같다...누가 감히 설교 할 수 있을 것인가..그러고도 평신도 열린공동체라 할 수 있는가...교회에서 불만을 품은 자들의 갈 곳없는 자들의 둥지 인것 같다..제 잘난 맛에 사는 거만한 사람들의 모임
왜 비꼬시나요? 그래도 기존 보수교회보다 휠씬 낫네요... 이런 교회공동체가 많이 만들어져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