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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2 사랑의 말씀 -
반드시 때는 온다.
낙심하지 말라.
기대를 하는 성도가 되라.
<갈6: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름에 거두리라"
스코틀랜드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오로지 배고픔을 면하려고
14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 온
소년이 있었다.
초등학교도 4년 밖에 다니지 못한 소년은
박봉을 받으며 방문 판매 일을 했지만,
당시 미국 경기가 좋지 않았기에
온 종일 마을을 돌아 다녀도
물건을 한 개도 팔지 못할 때도 종종 있었다.
어느 날, 마음이 지쳐 꺾일 때쯤
소년은 한 노인의 집 거실에서 잠시 차를 마시며 쉴 수 있었다.
그 집 거실 한 옆 벽에는 낡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소년는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썰물 때에, 해변에 나룻배 한 척이 놓여 있었고,
날씨도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이 구름이 끼어 있었다.
그 그림의 아래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밀물일 때는 반드시 찾아온다. 그때에 나는 바다로 나갈 것이다'
소년은 노인에게 그 그림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고,
노인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유산으로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소년이 28세가 되던 해,
노인은 정말로 그림을 남겨주었다.
청년은 이후, 자신의 사업을 꾸리며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노인이 남겨준 그림을 보며 '지금은 썰물 때이다. 반드시 밀물은 온다' 는 희망을 품었다.
주님은 결코 휴거 성도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역전의 명수가 되시는 주님의 때는
반드시 이루어 주시고,
반드시 휴거시켜 데려 가신다' 는 것을 믿고
주님이 주신
예수님의 메시지 말씀을 의지하며
깨어 기도하며,
찬양으로 휴거의 영을 충만하게 받아서
하늘 천국 아름다운 도성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길 바란다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시어
천국의 복된 삶을 주시길 원하시는 주님이심을 믿고 감사하길 바란다.
기도와 말씀과 찬양이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올바른 소망을 품고 이루어내는 성도는
민들레 홀씨처럼
수많은 작은 희망을
세상에 흩뿌린다.
주님이
휴거 성도 마음에 주시는 소망을
끝까지 품고 실망하지 말며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말고,
그 환경을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
육체의 장애는
장애가 아니다.
마음의 장애로 인하여 휴거의 탈락자가 되지 말기 바란다.
휴거 성도들은 영혼의 곡간에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알 것이다.
모른다면, 휴거자로서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전도서 12장 1절>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사람은 누구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 고 하였다.
현실보다도 추억이 강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만큼 현실이 녹록지 않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인물들은
과거의 추억에 잠기기보다는
오히려
그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야곱은 자신의 지나온 삶이 험악하였다고 하였다.
나의 선지자도
지나온 삶이 험악하였다.
그러나 험악하였던 삶이 본격적인
큰 대로의 길이 되었고,
삶과 아픔이 변하여
감사 찬송이 된 것이다.
천국에 가면,
그의 인생 역전이
어떤 영생 복락으로 바뀌었는지 알게 된다.
성경에 보면,
너무나도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솔로몬은 인생이 헛되고 헛되다고 말했다.
<전도서 1장>
16.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줄을 깨달았도다
"솔로몬은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위대하고 지혜로우며, 많은 지혜와 지식을 쌓았다" 라고 자부했지만,
지혜와 미치는 것과 어리석음에 대해서 알고자 정신을 다 쏟았으나
이것도 역시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왜 솔로몬은 자신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바람처럼 헛된 것이라고 말할까
그 반면에,
사람들은 과거의 추억을 붙잡고 살려고 하는 것인가.
솔로몬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고,
많은 사람들의 인생은
나름 성공한 인생이기에 추억의 창고가
든든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 반대라는 것은
휴거 성도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솔로몬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고,
많은 사람들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 착각하는 것이다.
성경에 주는 교훈은
과거는 약속이고,
미래는 소망이라는 것이다.
야곱 자신이
인생이 험악하고
솔로몬의 인생이
바람과 같다고 한 것은
남보다 못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인
언약을 붙잡지 않고,
자신의 욕심대로 정욕대로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를 하는 것이다.
그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대로,
탐욕대로 인생을 살고서는,
미래의 소망도 사라진 상황에서
결국 돌아볼 것은 과거의 추억밖에 없는 것이다.
그마저도 그 추억은
수많은 기억 중에서,
유리한 감정만을 골라서 저장해 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괴로울 때마다 가슴 한켠에 저장해 둔 추억의 창고로 도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의 희망은 기쁨을 거두지만,
악인의 희망은 끊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다.
<전10:28절>이다.
왜인가.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롬15:13절>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신다" 고 하셨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과거의 추억과 향수에 젖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바울이 말한 것처럼,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현실이 어렵고 힘들다 하여도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휴거 성도들은 추억을 되씹는 자가 아니라,
큰 휴거로 큰 소망을 주신다고 하신 약속을 받았으니,
그 약속을 붙잡고 현실을 살아가는 휴거 신부의 자격을 갖추면 된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내가 하다가
파랑새의 꿈이 안개같이 사라진다는 것이고,
비참하고 참혹함의 죽음과 고통 속에서 울부짓는 것이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였다.
그는 많은 장비와 식수를 준비했다.
그러나 길을 떠난 지 하루 만에 식수가 바닥이 났다.
그는 기진하여 쓰러졌고, 마침내 실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참 후에
그는 눈을 떠보니
눈앞에 야자수가 보였고,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는 이제 죽을까, 그때가 되어 환각이 보이는구나 하고 애써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귓가에 물소리와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자 그는 아 이제 정말 내가 죽게되는구나 또다시 소리에 귀를 닫았다.
그 이튿날 아침, 사막의 배두인 한 사람이 어린 아들과 함께 오아시스의 물을 기르러 왔다.
물가에서 입술이 타 들어가 죽은 청년을 발견하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이상했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이 사람은 왜 물가에서 목말라 죽었을까요.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하였다.
'얘야, 여기 죽어 있는 젊은이가 바로 현대인이란다'
지금 현대인들의 생활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쫓아 살다가 비참함을 당한다는 것이 현대인의 현실이 된다.
파랑새는 애써 잡으면
곧 죽어버리거나
날아가 버린다는 사실을 통해
파랑새는 즉 행복을,
행복은 혓바닥의 단꿀 같으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휴거 성도 주변에
사소한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야 한다.
가롯 유다가 은 30냥에 파랑새처럼 눈에 보여 예수님을 팔아넘겼지만,
그 돈을 바리새인에게 던져주고,
창자가 터져 죽음을 맞이하고,
지옥의 그 고통을 받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옥에서 후회한들 돌이킬 수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예수님의 금고를 착복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현대판 가롯 유다도 그리하지 말아야 했을 것이다.
이제는 다시 건너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것이
그의 삶에 파랑새의 죽음과 처절함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휴거 성도들은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행복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행복과
믿음의 형제 간의 사랑을 받은 행복 등과 같이
일상의 평범한 것들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에서
삶을 누리며 산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왜 현대인들은 파랑새의 본질을 통해 행복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인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는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지고,
또한 누리고 살고 있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 많이 가지고 싶어,
더 많이 누리고 싶기 때문에
현대판 가롯 유다들이 득세를 하는 것이
현실이고 사실이다.
자신이 먹다 버린
피자 한 조각이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식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것마저도 먹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바로 가까운 이웃 북한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깨닫는다.
노인들은 나이가 들어
병상에 죽거나 죽음에 이르면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가
누군가에는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늘 이 시대를 바라보면
교회 안에서도,
목회자들 안에서도
욕심과 권력과 세습에 눈이 멀어
파랑새의 가증한 것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전 가난했던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의 추억을 쌓아온 세대들이
이미 세상과 작별되어 떠나갔지만,
현대판 세대들의 교회들은 지는 해가 되어버렸다.
파랑 새를 쫓아 장차 망할 도성을 향해 내달리는 교회들을 바라보며 탄식하길 바란다.
오늘날 기독교의 영성은
부모가 지어놓은 밥도 찾아 먹지 못하고,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어리석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기 바란다.
큰 구원 휴거와 심판이
눈앞에 와 있어도 좋은 밥을 먹지 못해
쫄쫄 굶고 있는 어린 아이의 교회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 현실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첫째는, 눈에 보이는 대로,
즉 정욕과 욕심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9절>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말미암아 너를 심판할 줄 알라" 이다.
자신이 기뻐하고 욕심대로 사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곤고한 날, 즉 인생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며 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가 왔다,
곧 어둠이 세상을 덮고,
큰 질병의 바이러스의 인간들의 울부짖음이 있다는 것이고,
먹을 것이 없어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생을 즐기는 자에게는 좋은 추억이 남는 것이 아니라,
인생 무상이라는 황폐한 곡간만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인생을 기억하면서
추억의 창고에 영원 행복으로 담는 창조주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라는 것이다.
지금의 인생을 즐기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 기쁨은 잠시이며,
잠깐 오면 사라질 안개와 같다.
실제적인 행복은 오감을 통해서는 현제적이지만 일시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억하는 삶을
믿음의 인내를 지키며
승리할 때 느끼는 작은 만족들에서 나온다.
영의 생명은
오직 주 안에서만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것에 만족한다면 하늘의 창고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자가
하나님 말씀을 잘 읽고 듣는 자다.
행동으로 옮긴다.
행동을 보면 그 성도의 믿음을 잘 안다.
세상에 취하면 갈증이 난다.
하늘빛 성소에서 파랑새의 두 주인공을 보았을 것이다.
속이 비어 있으니, 욕심으로 채우려 한다.
욕심을 버리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으로 채워진다.
휴거 성도들은 자신의 영혼 곡간에
감사로, 아멘으로 채우길 바란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영혼 곡간을 채워야 한다.
휴거 성도들은 욕심을 버리면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의 영성이
자신의 영혼 곡간을 채우게 된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이 채워진다.
마음 밭을 비워두면
마귀가 그 지배의 주인이 된다.
악인이 추구하는 세상의 부와 명예를
바라보지 말고
주님만 의지하여야 한다.
이 세상 것은
잠시 잠깐 누리는
착시일 뿐이다.
아멘
24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