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희
나에게 <해산 바가지>는 낯선 단어다. 서울에서 살아온 나는 초가지붕 위에 얹힌 박은 달력에서만 보았다. 박이 영글면 반으로 갈라 바가지를 만들어 사용하는 줄 알았다. 박완서 작가의 <해산 바가지>를 읽었다.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며 탐스러운 박을 구해 선반에 올려놓고 기다리는 시어머니의 정성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세월이 흘러 요즈음은 딸이 더 좋다고 하나 1980년 전에는 아들 선호 사상이 대세였다. 아이를 잉태한 뒤 딸이면 지우던 때도 있었다. 딸은 시집을 가면 그만이라며 아들,아들 했다. 소설 속의 그녀는 홀시어머니의 외아들에게 시집을 갔으니 대를 이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컸으리라. 그녀는 첫 딸을 낳고 해산 준비를 하던 시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며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딸을 낳은 그녀를 위해 선반의 박을 꺼내 미역과 쌀을 씻어 정성껏 차린 밥상을 들고 오는 시어머니는 밝고 온화한 표정이었다. 딸을 넷 낳고 아들을 낳은 그녀. 아들을 낳았을 때도 그녀는 똑같은 대접을 받으며 시어머니에 대한 감사로 살아갔다.
70대 후반에 들어 시어머니는 치매로 빈 그릇이 되어갔다. 간병하느라 힘든 시간을 신경 안정제를 먹고 효부인 듯 포장하며 망가지는 며느리. 몸도 마음도 지친 그녀에게 가족들은 요양기관에 맡기자는 얘기가 나온다. 일요일마다 어머니를 맡길 기도원을 찾아다니며 지치는 남편은 마음이 무너졌다. 다녀온 곳이 어떠냐고 묻는 아내에게 궁금하면 함께 가보자고 한다. 둘이 기도원이 아닌 암자를 찾아가는 길이다. 마을 입구에 작은 구멍가게가 있고 지친 남편은 털썩 주저앉아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신다.
그녀가 주인을 찾아 뒷마당을 들어서니 초가지붕 위에 방금 떠오른 보름달같은 둥근 박이 열려있는 것이 보인다. “아! 해산 바가지 하면 좋겠다” 순간 기억이 되돌아간다. 첫 아이를 가졌을 때 해산 박을 준비하던 엄숙하고 경건한 시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분은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는 분이었다. 그녀는 해산 후 자신을 대하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남편에게 돌아가자는 말을 하고 앞서간다. 비록 빈 그릇이 되어버린 어머니도 인간으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집에서 모시기로 다짐한다.
시어머니의 목욕을 도우며 힘들면 등 짝도 때리는 등 효부인 척 위선을 떨지 않고 못된 며느리 노릇을 하니 그녀에게는 신경 안정제가 필요 없어졌다. 힘들면 소리도 지르고 심한 듯 하여 미안하면 달래주며 3년을 더 섬겼다. 그녀는 글에서 이 세상 살며 만나는 온당한 인연과 온당치 못한 인연이 훗날 무엇이 되어 돌아오는가 하는 암시를 내게 주고 있다.
우리 집은 딸 다섯에 아들 둘이다. 아들은 넷째와 막내다. 내 생각에 엄마도 딸을 낳으며 미역국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 같다. 아버지는 술 한 잔 하고 들어온 날에는 잠든 나를 보며 “네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중얼거리셨다. 아들을 기다렸던 엄마는 무엇이든 아들 먼저 챙긴다. 나는“ 엄마는 아들밖에 몰라”라고 말한다.
남동생이 결혼하고 올케에게 아이가 생겼다. 엄마는 은근히 아들이기를 바랐다. 기대와 달리 딸을 낳은 올케는 죄인인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둘째도 딸을 낳은 올케를 보러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갔을 때다.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리는 올케에게 내가 말했다. “수고했어. 예쁜 아기에게 미안하게 왜 울어? 울 엄마는 딸을 다섯이나 낳았는데 괜찮아” 옆에서 엄마가 눈을 흘긴다. 내가 먼저 엄마에게 선수를 쳤다. 대가 끊기게 생겼다고 화가 난 엄마의 표정과 입을 막았다. 병원을 나와 엄마는 나를 보고 말했다“ 너는 누구 편이니?”
마음이 여린 동생은 예비군 훈련에 가서 슬그머니 정관 수술을 하고 왔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올케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결심을 한 거였다. 뒤늦게 안 올케도 엄마도 화를 냈으나 동생은 단호했다. 딸 둘만 잘 키우겠다고. 이젠 막내 동생만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다.
막내 동생이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니 엄마의 기대는 커갔다.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면서도 아들을 기다린다. 막내 올케도 딸 둘을 낳았다. 둘째가 딸이라는 소식에 나도 모르게 또 딸야? 하며 실망한 것을 보면 나도 시누이였다. 속상해하던 엄마는 손녀들을 키우며 손자에 대해 포기했다.
나는 첫 딸을 낳고 아들을 낳았다. 첫 아이를 갖은 나는 출출한 저녁이면 퇴근하여 지쳐있는 남편에게 먹고 싶은 것을 얘기하며 사달라고 했다. 피곤하니 내일 사 오겠다고 하면 당당하게 말했다. “뱃속의 당신 아들이 지금 먹고 싶대” 그때는 아들인지 딸인지 몰랐다. 오랜 진통 끝에 나온 아기는 딸이었다. 나는 서운함도 없이 나에게 찾아온 생명이 신비하고 고맙기만 했다. 아들을 기다렸을 시어머니에게 죄송한 생각도 안 했다.
둘째는 아들이었다. 남편은 간호원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고 했다. 엄마도 언니도 큰 소리로 “아들 낳았다며, 잘했다” 외치며 들어섰다. 나는 힘들게 낳은 뒤라 아들에 대한 다른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아들보다 딸을 더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는 두 아이 똑같이 대했는데 아들밖에 모르는 엄마 눈에는 이상하게 보인 것이다. 내가 아니라고 해도 너는 딸만 안다며 아들 좀 챙기라고 엄마는 늘 말했다.
며느리를 위해 엄숙하게 해산 박을 준비하던 시어머니도 아들밖에 모르던 울 엄마도 세월따라 가버리셨다. 지금도 아들을 원하는 시어머니들이 많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새 생명은 귀하다. 나는 손주를 간절히 기다리지만 만나지 못하고 있다. 초가지붕 위의 둥글고 탐스런 박을 따다 해산 바가지를 만들어 고이 간직하고 기다리면 아이들에게도 새 생명이 찾아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