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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와 채식에 대한 연구
이 재 수 *
• 목 차 •
Ⅰ. 서 론
Ⅱ. 불교의 생명관
1. 연기론적 생명관
2. 윤리적 생명관
Ⅲ. 대승불교의 육식관
1. 초기불교와 육식
2. 대승불교에서의 육식
Ⅳ. 자비의 실천으로서의 채식
1. 참다운 자비의 실천
2. 생태적 관점에서의 채식
Ⅴ. 결 론
․ 영문초록
Ⅰ. 서 론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은 먹는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먹거리는 각자의 기호와 경제적인 상황, 문화적인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 먹는 문제는 나와 세계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Maslow의 인간욕구 5단계에서 본다면 인간은 생리적인 욕구에서 출발해서 물질적 가치, 더 나아가 정신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먹기 위해서 사는 인간’이 아닌 ‘살기 위해서 먹는 인간’의 가치지향을 반증하는 것이다. 먹는 행위는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줄 뿐만 아니라 올바로 먹음으로써 우리를 영원한 평화인 해탈의 길로 향해 가는 힘을 준다. 먹는 것은 우리의 몸을 살찌우고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리의 길은 우리의 일상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는 육식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를 자처하는 한국에서 정작 이 문제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것은 단지 출가수행자들에 국한된 문제라고 보는 시각, 선불교의 자유로운 계율해석의 경향, 중생구제를 위한 창조적 방편수행인 無碍行에 대한 오해 등으로 보여진다. 더욱이 채식을 고집하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많은 제약이고, 극단적인 삶의 형태라고까지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본 논문은 대승불교에 나타난 채식주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단순히 먹는 문제가 아닌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삶을 지향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대승불교 실천의 본질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아울러 새로운 삶의 대안으로서의 채식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Ⅱ. 불교의 생명관
불교에서의 채식의 문제를 논하기 앞서 먼저 불교에서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삶은 다른 생명과 함께 하는 것이고, 우리 목숨을 유지하는 것 또한 다른 생명체와 관계를 맺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생명관에 대한 검토는 곧 삶의 형태를 규정짓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 연기론적 생명관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세계관인 緣起(pratītya-samutpāda)이다. 석존은 깨달음을 통해서 “연기를 보는 자는 法(dharma)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하였다. 연기법은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 관계를 가지며, 그 관계 속에서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의 참모습을 말한다. 아울러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생존방식과 그 원리를 밝힌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자기 혼자서만 살아가는 법 없이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연기의 핵심은 “모든 고통은 절대적 존재가 아니고, 연기되어 있으므로 그 조건과 원인을 파악하여 그것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이다. 현실의 고통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본질을 올바로 알고 살핀다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현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절대적인 불가항력에 갇혀서 결정되어 있거나, 절대자의 주재력에 의해 좌우되어서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현실에서 소외되어있지 않고, 상대적인 조건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현실은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인 業力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의 노력으로 세상은 바뀌어 진다는 가르침이다.
화엄경에 제석천의 因陀羅網(indra-jāla)이라는 그물이 있다. 그것은 각각의 그물코에 보배구슬이 달려있어 그 구슬에 서로의 모습이 투영되어 하나의 구슬에 무한히 많은 구슬의 모습이 겹쳐서 모든 구슬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에는 다른 모든 존재와 연관되어 그 모습이 함께 투영되어 있다. 우리 인간의 삶은 단지 인간만의 삶이 아닌 전지구적인 생명, 전우주적인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약육강식의 냉철한 생존의 법칙만이 지구상에 존재하며, 인간은 다른 종보다 훨씬 우월하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불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모든 생명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조화와 상생의 길을 모색해 나가야만 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다. 法句經에서는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몽둥이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를 자신의 몸에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라.”고 하고, 大般涅槃經에서는 “모든 생명은 칼과 몽둥이를 두려워하며 목숨에 애착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모든 생명은 공통적으로 폭력과 죽음을 거부하고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모든 존재가 보호받고 안전을 보장받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는 것처럼, 내 생명이 소중하고 내가 평화롭기를 바란다면, 남도 똑같이 평화롭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남 모두 한마음으로 생명을 지키고 평화를 갈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각각 생명의 가치의 차이는 얼마만큼이나 날까? 모든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과, 포유류나 그보다 낮은 조류의 생명의 소중함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더 나아가 내가 먹는 소고기, 닭고기 1인분의 생명의 무게는 나의 생명의 무게와 얼마만큼이나 차이가 나는지에 대한 해답을 살펴보자.
六度集經에서 잡아먹으려는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가 薩波達 왕의 품에 날아와 안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매가 곧 뒤쫓아 와 “만약 임금님께서 인자하신 마음으로 중생을 건지시려면 임금님의 살을 베어 비둘기 무게만큼 주십시오.”라고 하자, 왕은 “그러마.” 하고 스스로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비둘기 무게와 같게 하고자 하였으나 저울의 눈금이 자꾸만 비둘기에게 기울어졌다. 결국 저울의 눈금이 같게 하려고 왕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시켜 저울의 눈금이 똑같게 하고자 하였고, 결국 감동한 매의 마음을 되돌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무게는 똑같다는 것이다. 즉 모든 생명은 평등한 것으로 비둘기 한 마리의 생명과 왕의 생명의 무게는 같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적 생명관의 출발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모든 생명은 평등하며,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지켜야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의 식생활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가 고기를 먹는다면 동물의 목숨을 빼앗게 되고,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동물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다. 고기를 먹게 되면 반드시 다른 생명을 빼앗게 된다. 그런데 고기를 먹지만 직접 소나 돼지를 죽이지는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단지 백화점이나 정육점에서 포장된 상품화된 고기를 살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현대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속성상 소비하지 않는다면 그 상품은 도태되고 만다. 즉 수요가 없다면, 당연히 공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고기를 사서 먹지 않는다면, 그만큼의 동물은 생명을 건지게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연기론적인 생명관에서 본다면, 모든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도 결코 아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만큼 늘 공존과 조화를 모색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폭력과 죽임의 구조를 부정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상생과 살림을 향한 공동의 노력을 할 때 세상은 변화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이 고통을 벗어버리고 자유로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궁극적인 상태를 열반이라고 한다.
僧肇는 평화로운 열반의 길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묘한 (열반의) 도는 오묘한 깨달음에 있고, 오묘한 깨달음은 진실에 나아가는데 있다. 진실에 나아가면 곧 유․무를 평등하게 관찰하게 되고, 유무를 평등하게 관찰하면 너와 내가 둘이 없다. 그러므로 천지는 나와 더불어 같은 뿌리이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한 몸이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참다운 행복의 길인 열반으로 가기 위해서는 참다운 깨침을 얻어야 하며, 세상을 올바로 보는 눈을 떠야한다. 모든 존재는 연기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 의지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관계성을 상실해 인연이 다하면 그 존재는 소멸한다. 이러한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을 평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나와 남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 나와 남을 구별하는 상대적인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이 뿌리박고 살아가는 천지는 나와 더불어 생명의 그 뿌리를 함께 하고 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만물은 차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연기론적 관계 속에서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는 참다운 생명에 대한 눈뜸이 평화로운 열반의 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현재 인류가 직면해있는 환경파괴로 인한 전지구적인 위기는 지구상 모든 인종과 종교를 초월한 절대절명의 문제이다. 작게는 내 자신이라는 생명과 지구라는 공동체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과도한 소비가 부른 재앙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여기서 우리 인간과 지구가 하나의 운명과 하나의 공동체라는 연기론적 생명관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명화된 인류가 자행하고 있는 이윤과 편리성의 추구를 통한 지구에 대한 약탈로 인해 지구는 결국 파괴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결국 인간만을 중심에 놓고 살려고 하는 인류의 오만한 탐욕을 깨뜨리고 겸허하게 자연 앞에서 지구와 내가 하나가 되는 공동운명체임을 자각하는 참다운 생명관이 정립할 때만이 모든 생명체가 조화를 이루면서 살 수 있다.
2. 윤리적 생명관
불교적 삶의 출발점은 5계를 지키는 윤리적인 삶에 있다. 그래서 불교에 입문하려면 누구나 5계를 지켜야만 한다. 내 자신 스스로 삶에 대한 절제와 올바른 삶에 대한 맹세로 온갖 악행과 번뇌의 거센 물살을 편안하게 건너갈 수 있는 안전한 배가 바로 戒律인 것이다.
① 不殺生;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
② 不偸盜;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
③ 不邪婬;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
④ 不妄語;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
⑤ 不飮酒;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있는 것에 취하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 니다.
이처럼 5계의 첫 번째 조목은 不殺生戒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는 것은 불교가 지향하고 있는 윤리적인 가치를
가장 명쾌하게 나타내고 있다.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은 바로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다.
출가 수행자가 지켜야할 계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4波羅夷(pārājika)라고 한다. 바라이는 ‘斷頭’라고 번역하며 대단히 무거운 죄로서 이것을 어겨서 범하면 참회가 통하지 않고 수행자로서의 생명을 잃고 영원히 교단에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만 한다. 그 가운데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불살생계를 보자.
“어떤 비구가 일부러 제 손에 칼을 들고 남의 목숨을 끊거나, 남에게 칼을 주고 죽음을 찬탄하거나, 죽음을 권하면서 ‘딱하구나 남자여, 이렇게 나쁘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하거나, 이런 생각을 하여 갖가지 방편으로 죽음을 찬탄하고 죽음을 권장한다면 이 비구는 바라이죄이니, 함께 살지 못하느니라.”
이처럼 출가수행자는 절대로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 그 어떠한 방법이든지 살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 서있다.
수행자는 자신의 목숨을 잘 보존하고, 청정한 삶을 통해서 모든 생명을 올바른 삶의 길로 이끄는 인도자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승의 계율사상을 담고 있는 梵網經의 十重大戒 가운데 첫째가 不殺生戒이다.
“만일 스스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방편이나 찬탄으로 죽이거나, 그러한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으로 죽이는 것 등에 이르기까지, 죽이는 원인과 죽이는 조건, 죽이는 방법 및 죽이는 행위 등을 통해서 내지는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을 일부러 죽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보살은 마땅히 자비로운 마음과 효순하는 마음에 항상 머물러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을 구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기꺼이 살생하는 자는 보살의 바라이죄이다.”
이처럼 대승의 보살계에서도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해야할 것을 힘써 강조한다. 대승의 보살은 자비로운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正法念處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不殺生은 가장 위대한 업이고 정법의 씨앗이다. 생사에 헤맬 때에는 오직 불살생만이 귀의할 곳이 되고 구원이 되는 것이다. 생사의 어둠 속에 들어간다면 이 불살생을 등불로 삼아야 한다. 불살생을 慈悲라고 이름하니, 올바른 마음으로 불살생의 선을 생각한다면, 마음에 늘 기쁨이 생겨날 것이다.”
이처럼 불살생은 중생들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며, 생사윤회의 고통의 바다를 헤맬 때 불살생만이 우리의 삶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생명을 소중히 여겨 자비로운 마음으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참다운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法藏은 梵網經菩薩戒本疏에서 불살생계를 제일 첫 번째 계율로 제정한 뜻을 열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①생명을 끊은 業道가 무겁기 때문에 이 무거운 업을 짊어지고 불도를 감당해 들어갈 수가 없다. ②대비심을 어겨서 해치기 때문이며, ③(육도의 모든 중생이 모두 나의 부모인데) 길러준 은혜를 등지는 것이기 때문이고, ④수승한 인연[緣]을 어그러뜨리기 때문이며, ⑤일체중생은 불성이 있어서 모두 장래에 法器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⑥보살의 無畏施를 어겨서 잃게 하기 때문이며, ⑦四攝行을 어그러지게 하기 때문이고, ⑧(살생으로 인한) 허물로 손해를 끼치기 때문이며, ⑨은혜에 보답하기 위함이고, ⑩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니, 삼세제불의 家業의 법이 그러하니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모든 중생을 모두 내 부모로 여긴다는 것 등은 바로 연기론적 생명관의 입장에서 모든 존재를 여실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불살생은 자비의 표현이고 不害(ahiṃsā)의 실천이다. 이것은 연기론적 세계관의 인식 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중생들은 서로를 살생하여 자기의 목숨을 부지해 나갈 수밖에 없지만, 진정 생명은 소중한 것이기에 나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남의 생명도 소중히 보살펴야 한다. 모든 생명을 아끼고 죽이지 않는 것이 곧바로 대승적인 삶의 전환인 것이다. 대승의 계율정신의 근본은 바로 자비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교의 불살생의 자비정신이 우리나라에서 실현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 해답은 바로 백제의 29대 법왕은 즉위한 해(599) 12월에 살생을 금하는 명을 내리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 종류들을 놓아주게 했고, 고기잡고 사냥하는 도구를 불태우게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Ⅲ. 대승불교의 육식관
1. 초기불교와 육식
부처님 당시에 육식을 엄격하게 금했다는 문헌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전면적으로 육식을 허용했다는 것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은 부처님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에 따라서 교단은 걸식으로 식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이다. 출가수행자들의 삶의 방식을 頭陀(dhūta)라고 하는데, 이는 의식주에 대한 모든 탐욕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성스러운 길을 위해 수행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온몸과 마음으로 청정한 삶을 위해 매진했던 것이다.
당시 출가자는 직접 밥을 해먹지 않았다. 다만 재가신도들이 주는 음식 그대로를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밥을 빌어먹는 전통은 가장 낮은 자세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무소유의 실천이다. 출가자는 신도들에게 밥을 빌고, 대신 재가자들에게 공덕을 쌓도록 해주었으며, 아울러 재가신도들에게 진리를 베풀어주었다. 그래서 출가자들을 복을 심는 밭인 ‘福田(puṇya-kṣetra)’이라고 하는 것이다.
율장에서 보이는 먹거리[食, bhojanīya]는 다섯 종류가 있는데, 밥[飯, odhana], 죽[粥, kummāsa], 보리밥[麥, sattu], 물고기[魚, maccha], 고기[肉, maṃsa] 등을 들고 있다.이처럼 기본적인 먹거리에 물고기와 고기가 포함되어 있는 점을 보면 그 당시에는 고기가 당연한 음식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장에서는 출가자들이 일부러 고기를 청해서 먹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아울러 제한된 범위에서 출가자들의 육식이 허용되었다. 그것을 보통 3淨肉이라고 하는데, 3정육은 세 가지 점에서 淸淨한(trikoṭi-pariśuddha) 고기라는 뜻이다. 자기를 위해 죽이는 것을 직접 보지 않은 고기[不見]와 남으로부터 그런 사실을 전해 듣지 않은 것[不聞]과 자신을 위해 도살되었다고 의심할만한 이유가 없는 것[不疑]을 말한다.또한 5淨肉도 있는데, 이는 여기에 수명이 다해 자연사한 짐승의 고기[自然死]와 맹수나 맹금류가 먹다가 남은 고기[鳥殘]의 두 가지 더한 것이다.
더 나아가 9淨肉은 여기에 자신을 위해 죽이지 않은 고기[不爲己殺],
자연히 죽은 지 여러 날이 되어 말라붙은 고기[先乾], 미리 약속함이 없이 우연히 먹게된 고기[不期遇],
당시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인 고기[前己殺]를 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청정한 고기라 할 지라도 병중에 있는 수행자 이외에는 청해서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구니의 8波羅提提舍尼(prātimokṣa) 가운데 제7, 8은 몸에 병이 없으면 물고기나 고기를 얻어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 바라제제사니는 출가자가 지켜야할 계율로 이 계율을 범한 사람은 반드시 다른 한 비구에게 고백하고 참회하는 것으로
죄가 소멸되는 작은 계율이다. 이것들은 대부분이 식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율장에는 여러 가지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는 부분이 종종 보인다. 율장의 곳곳에 금지한 고기의 종류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 말, 코끼리, 뱀, 개, 사자, 호랑이, 표범, 곰, 하이에나 등이 있다.그 가운데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 있다. 四分律의 「藥犍度」에서는 비구들이 바라나국(波羅奈國, Vārāṇasī)에서 코끼리 고기, 말고기, 용고기, 개고기를 얻어먹자, 부처님은 코끼리와 말은 국왕의 군사에 속하므로 왕이 들으면 반드시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용은 한 나라를 태우거나 나라를 없앨 수 있는 힘이 있으므로 각각의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또한 비구들이 개고기를 얻어먹자 걸식을 다니는데 개들이 쫓아다니며 짖으므로 개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만일 먹으면 몸과 입으로 지은 나쁜 업인 突吉羅(duṣkṛta)를 범한다고 하셨다.
또한 사회적으로 禁忌示 되었던 고기들이나 최하층민들이 먹었던 개고기와 같은 고기를 승려들에게 먹지 말라고 한 부분도 보인다.이것은 부처님이 승단과 사회적 관계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였는지를 단적으로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승단은 당시 세간의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왕 즉, 국가 권력이나 용으로 대별되는 민간신앙 그리고 개로 대별되는 민중들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이들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대중들에게 걸식을 하면서 살아가는 길을 택한 승단의 존립기반이라는 점 이외에 승단이 대중들의 지지와 지원 나아가 존경을 받기 위해, 대중들이 싫어할 만한 일들을 금하게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제반관계 속에서 먹을 수 있는 고기의 종류를 제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승단의 극단적인 계율 옹호론자들 즉, 提婆達多(Devadatta)의 무리들은 육식을 금하자는 논쟁을 벌였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그것은 극단적인 보수주의로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또한, 보수적 불교에 있어서는 무덤 근처에서 수행하고 있는 승려[冢間坐, śmāśānika]의 경우처럼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무덤 주위를 배회하는 악귀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육식이 회피되었던 경우도 있었다.
재가 신자들을 위한 가르침에서도 구체적으로 식생활에서 육식을 언급한 내용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초기불교의 교단에서는 제한된 범위에서 육식을 묵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걸식위주의 승단의 생활방식으로 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석존의 식생활에 대한 입장은 각자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한 것으로 세세한 도덕적 강제보다는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존중했던 승단운영의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2. 대승불교에서의 육식
대승불교는 육식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다. 적어도 400년경의 대승경전,
특히 大乘涅槃經, 楞伽經, 央堀摩羅經(Aṅgulimālīyasūtra) 등에는 채식주의의 흐름이 있다.
이는 당시 인도의 일반적인 추세에 따르고 있었고, 브라만 집단의 참여나 주도에 의해 자극을 받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상당히 주목해 볼만하다.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에서 브라만들과 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다. 원래 브라만들은 소를 죽여서 제사를 지냈던 전통이 있었다. 그것을 부처님이 비판하는 내용이 초기불교의 문헌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승불교 시대 브라만들은 대부분 채식위주의 생활로 사회적인 분위기가 수행자들의 육식에 대해 부정적인 흐름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대승불교에서 육식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사상적 근원을 살펴보자.
1) 생명의 평등성
대승불교에서 육식을 반대하는 것은 대승불교의 생명관에 기인한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고,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에서 싹트게 되었고 본다. 그것은 모든 생명은 모두 佛性 즉, 如來藏이 있기 때문이라는 불성사상의 반영인 것이다.
앙굴마라경제4권에서는 부처님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한다. 또한 문수사리의 질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를
중생들이 여래장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고기를 드시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렇다. 모든 중생이 한없는 옛적부터 생사윤회를 세세생생 바퀴 돌 듯 하였으니, 부모․형제․자매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마치 재주부리는 이가 정해진 바 없이 모습을 바꾸는 것과 같아서 나의 고기와 남의 고기가 동일한 고기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 고기를 드시지 않았다.”
이처럼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여래의 씨앗인 如來藏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미래의 부처인 중생들의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은 겉으로 생김새와 살아가는 모습이 서로 다르지만 그 생명의 본질은 불성을 간직한 성불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평등하게 바라고 보는 것이다. 지금 모든 생명은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중하고 성스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아울러 생사윤회의 기나긴 여정에서 모든 중생들은 모두 나의 부모형제이기 때문에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한다. 이렇듯 내 고기와 다른 동물들의 고기가 같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楞伽經에서는 모든 중생과 헤아릴 수 없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게다가 “모든 중생은 본래부터 (생사의) 인연이 계속되어서 늘 六親이 되었다. 피붙이라는 생각[親想] 때문에라도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연기론적 입장에서 모든 생명을 바라본 것으로 모든 생명을 피붙이라고 생각하는 동체대비의 입장에서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2) 자비와 육식
대승불교에서 제시한 이상적인 인간형은 보살이다. 보살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한다. 그 깨달음은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고 이미 자신 안에 충만한 불성․여래장․자성청정심을 올바로 드러낸 이이다. 또한 보살은 지혜와 자비를 갖추어야 한다. 모든 존재는 불성을 지닌 존재이고, 자신 안의 불성을 깨달으면 부처라는 지혜와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자비를 함께 갖추는 것이다.
보살은 한량없는 대자비심으로 나와 중생이 차별이 없이 존재함을 여실하게 알고 이를 실천한다. 보살은 보시바라밀의 실천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보살은 단순히 베풀기만 하는 이가 아니며, 도와주는 것에 그쳐버리지 않는다. 보살은 중생의 아픔을 함께 하며, 그들의 편에서 그들의 아픔을 해결하고, 그들에게 드리워진 고통과 질곡의 사슬을 끊도록 도와 준다. 나아가 그들을 깨달음이라는 자유와 진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이끈다.
大般涅槃經제4권 「四相品」에서는 가섭의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부처님은 “고기를 먹는 것은 대자비의 씨앗을 끊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모든 중생들이 고기 냄새를 맡고는 모두 두려워하고 죽음을 생각하며, 물, 육지, 허공에 사는 중생들이 모두 달아나면서 ‘저 사람은 우리의 원수다’라고 하나니, 그러므로 보살은 고기를 먹지 않도록 해야 하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부러 고기를 먹기도 하나 보기에는 먹는 것 같지만 실상은 먹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보살은 깨끗한 음식도 먹지 않는데 하물며 고기를 먹겠는가.”
라고 한다. 중생을 구제하려는 대승의 제자들에게 모든 중생들이 고기 냄새를 맡고는 모두 두려워 벌벌 떨면서 달아나기 때문에, 중생구제를 내세운 보살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은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애주어야 하므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다.
또한 文殊舍利問經에서는 중생들은 자비의 힘이 없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는다고 한다. 때문에 무수한 죄과를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인연으로 고기를 먹지 말게 해야하며, 대자비심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면 아무런 잘못이 없게될 것이라고 한다.이처럼 자비심으로 선업을 닦을 수 있도록 교화하는 것은 중생들에게 고기를 먹지 않도록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육식하는 사람은 자비심이 없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대답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자비심은 자신의 내면에서 모든 중생과 나를 한몸으로 여기는 올바른 삶의 가치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육식의 여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음식은 문화적인 요인, 환경적인 요인과 함께 달라지기 때문이다. 농경사회에서는 곡식과 채소 등 다양한 먹거리 때문에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다. 그러나 유목사회에서 특히 티벳과 같은 고원지대에서 채식만을 강조하는 것은 삶을 지탱해 나가는 것 자체가 어렵게 된다. 더욱이 티벳에서 육식을 허용한다고 해서 티벳의 불교도들에게 자비심이 없다고 말할 수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음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의 생명을 살리는데 굳이 다른 생명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기 맛에 탐착해서 일부러 찾아서 고기를 먹는 것은 자비심에 명백하게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윤리적인 삶의 실천
대승불교의 실천 수행의 육바라밀 가운데 두 번째가 지계바라밀로 윤리적인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윤리적인 삶의 실천은 곧바로 올바른 삶, 완전한 삶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범망경의 제3 ‘不食肉戒’를 살펴보자. 여기서는 고기를 먹으면 청정행을 더럽히는 죄인 輕垢罪에 해당된다고 한다.
“불자들이여, 일부러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떤 중생의 고기라도 먹지 말아야 하며, (고기를 먹으면) 큰 자비 성품의 씨앗이 끊어져서 모든 중생들이 보고는 도망을 친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은 모든 중생의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 고기를 먹으면 헤아릴 수 없는 죄가 되니, 만일 일부러 먹으면 경구죄를 어기게 되느니라.”
특히 大乘入楞伽經 「斷食肉品」에는 부처님께서 출가 수행자들이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大慧여, 보살은 중생들의 신심을 보호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불법을 비방하지 못하게 하며,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와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대혜여, 만일 나의 제자가 고기를 먹으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모두 헐뜯고 비방하는 마음을 품고서, ‘어찌하여 사문의 청정한 행을 닦는 사람이 天人과 신선들이 먹는 음식을 버린 채 악독한 짐승처럼 고기를 배불리 먹고 세간에 나다녀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놀라고 두려운 마음을 품게 하며, 청정한 행을 깨뜨리고 사문의 도를 저버리는가?’
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출가수행자들이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서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비난과 중생을 자비로 대해야하는 출가수행자는 당연히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반열반경제27권 제23 「獅子喉菩薩品」에는 윤리적인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중생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16가지 나쁜 계율[惡律儀]을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①이익을 위하여 양이나 염소를 길러서 살찌워 파는 것,
②이익을 위하여 그런 것들을 사서 잡는 것,
③이익을 위하여 돼지 따위를 길러서 살찌워 파는 것,
④이익을 위하여 그런 것들을 사서 잡는 것,
⑤이익을 위하여 소를 살찌워서 파는 것,
⑥ 이익을 위하여 그런 것들을 사서 잡는 것,
⑦일곱은 이익을 위하여 닭이나 오리를 길러서 살찌워 파는 것,
⑧이익을 위하여 그런 것들을 사서 잡는 것,
⑨물고기를 낚는 것, ⑩사냥하는 것,
⑪겁탈하는 것,
⑫푸줏간을 경영하는 것,
⑬새를 잡는 것,
⑭이간질하는 말을 하는 것,
⑮감옥의 옥졸이요,
⑯용을 주문으로 길들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본다면, 이익을 위해서 짐승을 키우고 살찌워서 파는 것, 그 짐승을 사서 목숨을 빼앗는 것, 수렵, 어로를 나쁜 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생명존중의 사상이 우리의 삶에 그대로 관철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육식을 반대하는 사회적인 효과에 대해 강변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자.
入楞伽經제8권, 제16 「遮食肉品」에서는,
“대혜여, 만일 모든 사람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또한 사람들의 중생을 살해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고기를 먹기 때문에 만약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여러 곳에서 구하여 사오게 된다. 재물과 이익을 위하는 자는 죽여서 판매하는데, 사려는 자를 위하여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려는 자도 죽이는 자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러기에 고기를 먹는 것은 聖道를 장애할 수 있느니라.”
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고기를 먹는 자는 곧 동물을 죽이는 자와 똑같다는 말이다. 고기의 소비는 곧 동물의 살해에 대한 공동책임이 따르고 있음을 힘주어
말하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道宣은 四分律刪繁補闕行事鈔에서
“지금 어리석은 이들이 대부분 온갖 고기를 즐기는 것은 죄 가운데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때문에 짐승을 잡아죽여서 판매하는 것은 단지 고기를 먹는 사람을 위해서이니 반드시 고기를 먹는 이가 없다면 짐승을 잡아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 자는 짐승을 잡아죽이는 것을 업으로 하는 것과 같다.”
라고 하여 고기를 소비하는 이를 짐승을 잡아죽이는 이와 똑같이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소비자의 올바른 선택만이 살생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깨끗하게 포장된 고기를 사는 하얀 손은 곧 칼과 도끼로 짐승을 죽이는 피묻은 손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육식을 줄여서 고기의 소비를 점차로 줄여 가는 길은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는 결론이다.
대승불교의 보살은 모든 중생을 자기와 똑같이 여긴다. 그래서 “모든 중생이 병들었기 때문에 나도 병들었다.”는 말에서 보여준 중생을 나와 함께 여기고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대자비가 대승보살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을 불성을 가진 존재, 여래가 될 수 있는 씨앗을 지닌 평등한 생명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육식을 반대한다. 육식은 자비의 싹을 끊고 모든 생명이 목숨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육식을 하지 말라고 한다. 더욱이 대승보살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나와 똑같이 바라보기 때문에 고기를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세상은 인식의 전환만을 가지고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成就衆生․淨佛國土로 이야기되는 구체적인 실천행이 요구된다. 정토장엄을 위한 보살의 萬行은 사회적 실천으로 外化되기 때문이다.
Ⅳ. 자비의 실천으로서의 채식
1. 자비의 실천
불교에서는 모든 음식을 ‘供養(pūjanā)’이라고 한다. 이는 필요한 것을 바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공덕을 쌓아서 道果를 이루는데 필요한 것을 공급한다는 의미와 공덕을 키운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그것은 공덕을 쌓는 성스러운 길을 가는 자양분이라는 뜻이지, 맛을 탐한다거나 즐기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찰에서는 먹는 것도 수행이라고 해서 공양하는 예법이 있고, 그 예법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마음의 화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분노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출발점을 먹는 문제부터 잡고 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화가 잔뜩 들어 있어 쓸데없이 핏대를 세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대량으로 사육된 닭을 통해 엄청난 양의 ‘화’를 먹게 된다고 한다. 조그만 철창에서 자유롭게 걸어다닐 자유를 박탈당하고, 하루 온종일 조명에 노출돼 알만 낳아대는 닭. 스트레스와 극심한 좌절에 서로를 쪼아보지만 부리마저 잘라진 상태의 이런 닭들의 절망과 분노를 인간들이 소비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행복한 닭에서 난 계란, 순리대로 자란 암소에게서 짠 우유, 유기농법으로 기른 채소를 먹어야 한다. 값이 더 비싸다면, 적게 먹으면 된다. 적게 먹어야 제대로 먹을 수 있다. 먹을 때도 지성을 발휘해야 한다.”라는 조용하면서도 간절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음식을 지혜롭게 선택해야 한다.
이미 앞에서 대승불교에서 육식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과 육식은 자비의 씨앗을 끊는다는 점에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실천할 것인가?
그 해답으로 먼저 孟子의 「觳觫章」이라고 말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齊 宣王은 맹자에게 선왕의 일로 王道政治에 대해 질문을 한다.
이때 先王을 위한 제사에서 짐승의 피를 바르는 ‘釁鍾’이라는 의식을 위해 끌려가는
소 울음소리를 듣고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한다. 그
래서 적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라고 해서 인색하다는 비난에 마음 상해한다.
이 일을 맹자는,
“상관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仁의 실천입니다. 소는 보았어도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자가 짐승을 대함에 있어서 그 살아있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그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죽어 가는 비명소리를 듣고서는 그 고기를 차마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소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는 측은함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맹자는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으니,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죽음의 고통은 모두가 같이 느끼기에 공포에 벌벌 떠는 소리에 군자는 차마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는 소는 보고 양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흔히 애완견을 키우면서,
개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참으로 개를 사랑해서 개고기를 먹는 것을 혐오한다면,
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개의 본성을 망각하고 자신의 기호대로 인형처럼 개를 ‘좋아만 하’지는 않는지
살펴야할 것이다. 참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은 동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승보살인 유마힐거사는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나도 아프다’는 동체대비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보살에게는 중생이 바로 불국토이다. 교화해야할 중생을 따라 불국토를 건설하기 때문이라고 유마힐은 말한다.
즉 중생의 삶을 떠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곳에 불국토를 건설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보살의 실천과 수행은 늘 중생과 함께 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비의 실천행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고,
상대적 차별의 관점에서 만물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정법념처경에서는
모든 존재는 목숨으로 삶의 근본을 삼고 사람은 모두 제 목숨을 보호한다고 하면서, “불살생은 곧 그 목숨을 주는 것이며,
만약 목숨을 준다는 것은 모든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일 가는 보시는 목숨을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보상이며 제일 훌륭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올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는 것이 목숨을 주는 것이다.한 걸음 더 나아가,
범망경의 제20계 ‘放生戒’를 살펴보자.
“불자여,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방생을 행하라. 일체의 남자는 나의 아버지요,
일체의 여인은 나의 어머니이니 내가 세세생생 그들의 몸을 빌려서 생을 받지 않는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육도 중생이 모두 나의 부모이거늘 죽여서 먹는 자는 곧 나의 부모를 먹는 것이며
나의 옛 몸을 죽여서 먹는 것이니라. 모든 땅과 물은 나의 옛 몸이요,
모든 불과 바람은 나의 본체이기 때문에 항상 방생을 행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적극적이고 윤리적인 실천의 정점에 서있는 계율의 조목이다.
연기론적인 세계관이 바로 잡히면 모든 생명이 나의 부모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고기를 먹는 것은 불교적인 세계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을 밝혔다.
아울러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 해서 생명을 살려내는
방생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육식에서 채식으로 바꾼다면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생태적 관점에서의 채식
채식의 실천이 생태적인 관점에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자.
첫째, 채식은 많은 사람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육식으로 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다. 전체 지구에서 매일 5만의 어린이가 굶어 죽어간다.그러나 그 가운데 미국에서는 과도한 육류의 섭취로 전국민의 ⅓이 심각한 비만과 성인병으로 시달리며, 매년 5만5천 명이 결장암으로 죽는 것을 비롯해 50만 명이 암으로 죽어간다.또한 전세계적으로 매년 6천만 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쇠고기 250파운드(lb)(113.4㎏)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라면 4만lb(18,143.3㎏)의 감자를 생산할 수 있고, 그 비율은 대략 1인분 대 160인분이 된다고 한다.더욱이 2001년의 곡물수확량은 18억 4천 3백만t이며, 1인당 세계 곡물생산량은 299㎏으로, 최고 생산치를 보인 1984년 342㎏ 보다 오히려 감소하였다.그런데, 세계 육류 생산량은 2001년 최고 기록인 2억 3천 7백만t으로, 지난 1950년 이후 5배나 증가하였다. 지난 반세기 동안 1인당 육류 소비량은 17㎏에서 39㎏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게다가 우리가 먹는 소와 기타 가축들은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⅓을 소비하고 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70%이상이 가축의 먹이로 제공된다. 코넬대학의 데이비드 피멘틀 교수는 “미국에서 가축의 먹이를 완전히 풀로 바꾸면 1억3천만t의 곡물이 절약되어 4억 명의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라고 하였다. 제3세계 나라들의 토지 수백만ac가 유럽의 가축사료를 생산하는데 전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육류에 대한 과도한 탐욕을 조금씩만 줄인다면, 다시 말해 적어도 10%만 고기의 소비를 줄인다면, 굶어서 죽는 불쌍한 어린이는 없을 것이다.고기의 소비를 줄인다면, 고기를 얻기 위한 목초지는 식량을 얻기 위해 쓰여질 것이다. 그렇다면 식량부족으로 인한 기아는 줄일 수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둘째, 육식으로 지구와 내가 병들고 있다. 우리가 단순하게 먹는 약 113g짜리 햄버거 1개를 위해서 790g의 사료용 곡식과 795ℓ의 물을 소모하며, 분뇨 및 기타 오염물질이 5.44kg 배출된다. 더욱이 소가 먹을 풀을 키우는 목초지를 위해 약 1.5평의 열대우림이 파괴되는데, 이곳은 3~5년이면 사막화가 되며, 숲에 살던 조류 포유류 등 75kg의 생명체가 파괴된다.이처럼 간편하고 빨리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는 그야말로 지구의 환경과 열대우림을 이름 그대로 “빠르게 파괴하는 음식”인 것이다.
육식으로 인한 개인의 건강문제는 심각하다. 육식이 수많은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는 의학적 경고와, 채식의 이로움에 대한 합리적인 연구들도 이미 광범위하게 제기되어 있다. 한편, 한국인이 지난 1969년부터 1998년까지 30여년 간 섭취한 식품량의 변화 경향을 보면, 식물성 식품의 섭취 비율은 96.8%에서 82.1%로 감소한 반면, 동물성 식품 비율은 3.2%에서 17.9%로 증가했다.
이처럼 최근 급격한 경제성장에 따른 식생활의 풍요와 편리함은 에너지 과잉과 운동량 부족으로 인한 만성 퇴행성질환의 증가를 초래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사망원인이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채식인은 비채식인에 비해 심혈관 질환관련인자인 혈청 총 콜레스테롤, LDL-cholesterol, 동맥경화 지수, 혈당, 수축기 혈압이 현저하게 낮았다는 조사결과가 있다.또한 채식인 집단은 비채식인 집단에 비해 총 항산화기능이 눈에 띄게 높았으며, 채식으로 동맥경화 예방 및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셋째, 육류를 생산하는 산업은 막대한 경제적 비용과 환경적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이로 인한 쓰레기와 수질오염은 다른 모든 산업을 능가하고, 가축의 사료로 쓰이는 곡물량은 세계 인구의 상당부분이 소모하는 식량보다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낙관적으로 전망을 하는 입장도 있다. 과학과 기술문명의 발달, 핵가족화, 여성의 사회진출, 국민소득의 증가, 매스미디어의 발달 등 새로운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변화로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우리의 식생활 문화는 가공식품과 무공해식품, 건강식품 등의 형태로 변모해 갈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아울러 “새 천년에는 과도한 육류섭취로 인한 난치병의 증가와 대량 식용가축 사육의 환경적 해악으로 인해 육류소비가 급격히 감소할 것이며, 결국 곡채식과 콩을 주식으로 하는 옛 식습관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언론의 전망이 사실로 다가오길 바랄 뿐이다.
이처럼 육식의 폐해에 맞서서 환경과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채식을 실천하는 것은 개인의 건강증진을 넘어서 더 나아가 생명존중의 사상의 확립으로, 기아해결, 환경보호와 전지구적인 공동체의 복리증진을 위한 실천운동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게다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까지 전개된 약탈적 농업과 축산업을 반성하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지속가능한 생태계와 건강한 생명 보전을 위한 최선의 대안이 채식이라는 인식이 채식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겨지길 바란다.
자비와 지혜를 늘 가슴속에 아로새기고 있는 불교도라면 이 시점에서 참다운 자비의 실천의 길에 서야할 것이다. “참된 종교는 실천(paṭipatti)”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연기적인 삶의 실천은 내가 먹는 문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채식의 실천은 지혜와 자비를 간직한 불교적인 삶이고, 나아가 나와 지구를 살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Ⅴ. 결 론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은 지구상에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모든 생명체가 각자의 빛을 발하며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평등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존중받아야만 한다는 불교적 생명관은 불살생이라는 계율을 시작으로
윤리적인 삶의 실천을 강조한다. 이는 나와 남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원리이며, 생명의 조화를 실천하는 길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음식을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올바른 삶을 향한 일, 즉 수행을 하기 위한 약으로 바라본다.
아울러 음식을 공양이라고 통칭하는 것처럼 공덕을 쌓기 위해서 먹는 것이다. 음식의 맛을 탐하거나 즐기기 위해
음식을 먹지 않고 도과를 이루기 위한 수행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먹는 행위는 곧 나와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방식이 다른 함께 살아가는
생물들에게 가능한 한 최소한의 피해를 끼치는 것이며,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교적 삶의 방식이다.
초기불교에서 고기를 먹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았다. 그것은 걸식을 통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장의 단편에서 보면 제한적으로 세 가지 청정한 고기를 허용하는 것과, 사회적으로 물의를 빗거나 충돌을 일으키는 육식에 대해 기피해 왔다. 석존은 계율을 통해 출가수행자들의 삶을 강제하기보다는 자율적인 삶의 합의와 생활의 통합의 기능을 바탕으로 한 자율적인 실천을 중시한 것으로 보여진다.
대승불교의 본질은 모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여, 자신 안에 내재하는 환한 깨달음의 본질인 불성, 여래장청정심을 올바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길에서 주체적으로 실천을 하는 보살은 바로 자비와 지혜를 함께 실천해야한다. 모든 생명체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대자비를 품고, 모든 생명이 연기적인 관계를 맺고 상생과 조화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을 여실하게 아는 지혜를 간직하며 사는 것이 대승보살도의 요체라고 할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모든 생명에게 불성이 있고, 불성을 가진 존재로서 평등한 생명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연기론적인 삶의 성찰은 결국 모든 생명을 자신의 전생의 부모와 같이 생각하고 내 몸처럼 여기는 생명존중의 사상적 흐름이 정립되었다. 아울러 보살의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육식을 금하는 사상과 대승계율이 성립된다. 이는 대승불교의 사상적 특징에 기인한다고 본다.
고기를 소비하는 것은 짐승을 잡아죽이는 것과 같다. 현명한 소비의 선택만이 살생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이다. 고기의 소비를 점차로 줄여 가는 길은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는 결론이다. 채식문화의 확산은 불교적 세계관과 보살도를 실천하는 새로운 삶의 방향전환이며, 새로운 수행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채식만이 우월하고, 육식하는 이들은 미개하다는 이분법적인 논리는 채식의 큰 정신을 빛 바래게 하는 것이 된다. 채식의 실천은 자비심을 바탕으로 새로운 조화로운 삶의 길을 제시해,
육식자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이해시키고 함께 하는 것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식의 죽임과 폭력의 구조에서 채식의 공존과 살림의 물결로의 전환은 나와 남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同體大悲의 대자비심의 바탕 위에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래는 실천하는 이들의 몫이다. 나와 지구를 살리는 채식의 실천에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주제어 - 대승불교, 채식(주의), 육식, 자비, 생명관
Mahāyana Buddhism, Vegetarianism, meat-eating, compassion, viewpoint of life
ABSTRACT
A Study on Mahāyana Buddhism and Vegetarianism
Lee, Jae-so
(Researcher of Electronic Buddhist Text Institute,
Dongguk Univ.)
The Śākyamuni Buddha may have permitted monks to eat meat under very limited circumstances. There are three instances in which meat may be eaten: when it is not seen, not heard, and not suspected. The Buddha and monks got their food either by going on donations or by being invited to the houses of their supporters and in both cases they ate what he was given. In early Buddhism we should be remember that the First Precept prohibits killing. It also makes anyone who causes another to take a life equally culpable. Eating meat is the cause of killing animals and it is clearly a violation of the First Sila.
Why do Mahāyana Buddhism advocate vegetarianism? The main reason is maitrī-karuṇa(compassion), and because we cannot bear to eat the flesh of living beings.
The Mahā-parinirvāṇa Sūtratells us that if we eat the meat of living beings, we are destroying the seeds of compassion. And In the Laṅkāvatāra Sūtrasays, how can the Bodhisattva who desires to approach all living beings as if they were himself and to practice the Buddha-truths, eat the flesh of any living being that is of the same nature as himself?
At the conclusion of this study, I say that practice of compassion and mercy toward all beings in the world must necessary lean on Ahiṃsā(non-violence) and vegetarian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