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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오늘은 2013년 공식적인 첫 성지순례와 트레킹이 있는 날 이었습니다.
모임장소는 2호선 전철역 신림역 3번출구로서 약속시간에 거의 모든 형제, 자매님들께서 오셨습니다. 오랜만에 참석하신 강지양글라라 자매님 모습, 반가웠습니다. 서울지구형제회 양성업무로 무척 바쁘심에도 참석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또한 박기상 안토니오형제님께서 잠시 쉬셨었는데 오늘 참석해 주셨으며 두 자매님께서 처음 또는 오랜만에 참석해 주셨나 봅니다.
모두 반가웠습니다. 언제나 주님의 은총과 우리들의 영원한사부 성프란치스코의 영성적 삶으로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시기를 빌면서 순례일정에 대하여 적어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순례일정에 키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셨으며 제2대 주교님으로 조선에 파견되신 앵베르 주교님과 모방, 샤스탕 신부님, 세명의 성인들께서 입국 후, 사목활동과 순교에 대한 기도와 묵상, 그리고 이곳에 성지가 설치된 연유와 성지로서 개발을 위하여 조사를 거듭하다 발견한 경위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연 어떤 반영이 되었는가를 살펴 보는 것이 오늘의 성지순례 키워드가 아닌가합니다. 평신도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오던 조선에서는 사제의 필요성에 대하여 절감하여 2회에 걸쳐 교황청에 사제파견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교황청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에 사제들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므로서 모방신부님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려고 하신 제1대 주교께서는 병사하시므로서 앵베르주교께서 부임하게 되십니다. 앵베르주교님의 일생과 모방, 샤스탕신부님의 일생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Laurent-Joseph-Marius Imbert, 1796년 3월 23일~1839년 9월 21일 한국이름 범세형(范世亨)〕주교는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이다. 프랑스 마리냔(Marignane)의 가난한 농촌 가정서 태어났으며, 그는 1818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1819년 12월 18일 사제 서품을 받은 앵베르는 1820년 선교사로 중국에 갔다. 중국에 도착하기 전, 그는 영국령 말레이시아 페낭의 칼리지 제너럴(College General)에서 1821년 4월에서 1822년 1월까지 강의를 맡았다.
1821년 시암(타이)대목구장이었던 에스프리 마리 조제프 플로랑(Esprit-Marie-Joseph Florens) 주교가 싱가포르로 가줄 것을 요청했다. 플로랑 주교는 싱가포르에 천주교회의 선교 거점을 열려고 계획했다. 그는 싱가포르 섬을 둘러싼 위험이나 환경에 대해 확실히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젊은 선교사인 앵베르는 1821년 12월 11일에 싱가포르에 머물면서 싱가포르의 정황을 조사하였다. 1주일간 머물러 앵베르 신부는 싱가포르에서 천주교 미사를 올린, 싱가포르 교회사 최초의 천주교회 신부가 되었다.
1822년 그는 마카오를 향해 항해했으나 직접 그곳에 도착할 수 없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통킹에서 2년간 머물렀다. 그는 중국에 도착하여 12년간 쓰촨성에서 지내면서 신학교를 설립했다.
천주교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이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앞두고 갑자기 선종하자, 1836년 4월 26일 앵베르는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과 카프사(Capsa)의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837년 5월 14일 그는 만주를 통해 천주교 박해가 행해지던 조선으로 잠입했다.
몰래 천주교의 전도 활동과 교세 확장에 힘쓰던 앵베르 주교는 1839년 8월 10일 밀고를 당했다. 체포당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시간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미사를 올린 뒤 그를 기다리던 관리들에게 가서 자현했다. 그는 한양으로 보내져 해외 선교의 거처를 알기 위해 고문을 당했다. 모든 해외 선교사들이 행방을 드러내면 개종한 신자들이 용서받을 것이라 생각한 그는 동료 천주교 신부인 피에르 모방 신부와 자크오노레 샤스탕 신부에게 조선 관가로 가서 자수 할 것을 권고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좋은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라고 썼다.
세 성직자는 함께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그들이 개종시킨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과 행방에 대해 3일 동안 심문을 받았다. 계속된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은 그들은 다른 감옥에 수감된 뒤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참수당했다.
그의 유해는 길에 방치되어 있었다가, 약 20일이 지나서야 박순집에 의하여 노고산에 묻혔다. 그러다가 왜고개에 이장되었다가 다시 1843년에 박순집의 아버지 박바오로의 선산 삼성 산으로 이장되었으며, 1901년 지금의 명동 대성당 지하실에 모시게 되었다.
1925년 79명의 조선 순교자들을 시복할 때 이 세명의 순교자들이 함께 시복 되었고, 1986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에서 103명의 순교자들을 시성할 때 함께 시성 되었다.
그는 당시 신도의 전기 편찬을 계획하였는데, 그 전기인 <기해일기>가 1858년 파리에서 간행되었다. 성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 주교님의 축일은 9월 20일이다.
또한 앵베르 주교님은 조선교구의 주보성인으로서 성모님을 모시게 해달라는 요청을1838년하여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주보성인으로 모실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또한 험난하고 어려운 여정을 거져 무사히 조선에 입국할 수 있게 도와 주신 성모님의 은총에 보답하기 위하여 프랑스 남서부 가돌릭 성지 루르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 성당 신축시 성모 마리아 감사비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앵베르 주교님의 노력으로 조선교구는 수호성인으로 성모 마리아를 모시게 된 것입니다.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프랑스어: Pierre Philibert Maubant, 한자: 羅伯多祿, 1803년 5월 13일 ~ 1839년 9월 21일(음력 8월 14일)) 신부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회원이며, 한국교회사 최초의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로 여겨진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1829년 5월 13일에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가 되었고, 1831년(순조 31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이듬해 중국 사천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천주교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 조선의 선교사가 되기로 자원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조선에의 입국을 기도하였으나 국경의 감시가 심하여 만주에 머물렀다.
그 후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으로 선종하자, 그는 혼자 삿갓에 상복 차림을 하고 1836년 1월 12일(1835년 음력 11월 24일) 조신철, 정하상 등의 인도로 압록강을 건너 입국하였다.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와서 조선어를 공부하며 경기도와 충청도 교우촌을 방문하여 200여 명에게 영세를 주었다. 전국에 걸쳐 6,000명의 신도를 9,000명으로 증가시켰으며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소년을 뽑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학생으로 마카오의 신학교로 보내는 등 교세 확장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1839년 앵베르 주교의 권면으로 9월 6일 홍주 근처에서 대기 중인 포졸들에게 자수한 다음, 9월 21일(음력 8월 14일) 새남터에서 앵베르 주교·샤스탕 신부와 함께 군문효수로 순교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피에르 모방이 한국교회사 최초의 서양인 천주교회 신부인지는 반론이 있다. 왜냐하면 이미 임진왜란 때 서양인 천주교회 신부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 일본군 군종사제로 입국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파리 외방전교회의 회원으로서는 최초이다.
중국과 조선에서 활동한 프랑스의 샤스탕 신부는 1803년 태어나 1839년 순교하였다.1827년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신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피낭 신학교의 교수로 있다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브뤼기에르 신부를 돕기 위해 1833년 마카오로 갔다. 그후 푸젠 성[福建省], 강남성(江南省), 산둥 성[山東省], 만주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1837년(헌종 3) 모방 신부의 뒤를 이어 조선에 들어와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했다. 1839년 이조판서 조만영(趙萬永), 형조판서 조병현(趙秉鉉) 등이 앞장서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한 기해사옥이 일어나자, 7월에 홍주목(洪州牧)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후, 모방·앵베르 신부 및 200여 명의 천주교인들과 함께 8월 14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죽음을 당했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다.
조선교구의 초석을 세우셨으며 평신도들의 소중한 생명을 지켜주기 위하여 자진하여 순교의 길을 택하신 거룩한 세성인의 순교정신을 기리는 것이 오늘 성지순례의 목적이었습니다. 신림역을 출발한 야고바 트레커들은 우선 삼성산 성당에 들러 전대사 미사에 참석하였습니다. 이철학 바오로 주임신부님의 집전으로 시작된 전대사 미사 참례는 성지를 참배하기 전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성물판매소, 카폐 운영 등등에서 얻어지는 수익금 전액을 어려운 교우학생들 장학금으로 전달하고 종로에 나오시는 어렵고 힘든 노인들에게 한끼의 식사를 제공하는 등 어려운 이웃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목의 중심에 서 있는 본당이
바로 삼성산 성당입니다.
삼성산 성당에서 도보로 성지입구까지 도착하였습니다. 이곳 힁단보도를 건너가면 성지입구가 나옵니다.
성지입구에서 조금 언덕을 오르면 만나게되는 성령수녀회 피정의 집입니다. 서울대입구에서 식사 매식이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 피정의 집 책임수녀님과 만나 식당 사용과 관련한 조언을 받아 식당을 사용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도착해 보니 식당 한쪽으로 이미 칸막이 커텐을 설치해 놓아 주셨습니다.
수녀님의 배려로 야고바 트레커들은 따뜻한 실내에서 태이블에 앉아 편안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각자 싸오신 반찬을 나누며 형제적 친교안에서 점심을 함께할 수 있는 은혜를 경험하게 된 첫 트레킹이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도와 주신 수녀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수녀님 고맙습니다. 언제나 평화를 빕니다.
점심식사 후 피정의 집 위에 있는 삼성산 성지를 찾았습니다.
성지순례의 기도와 순례자들을 위한 기도와 개인적인 기도를 드리며 성지참배를 하였습니다.
성지참배를 끝낸 트레커들은 서울 둘레길 관악산 구역 1,2 둘레 길을 역순으로 트레킹을 시작하였습니다. 2구간을 역으로 2구간 시작점인 서울대 입구를 향해 걸었습니다. 얕으막한 구릉지를 넘으며 걷는 길은 잔설이 곳곳에 있는 가운데 트레커들에게 봄기운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지독한 엄동을 주셨던 해에는 다른해 보다 봄을 일찍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의 섭리시죠. 혹독한 시련과 어려움 끝에 기쁨을 주시는 은혜처럼 절기에도 그러한 사랑의 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풍성한 잔설의 주는 설경과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걷는 새해 첫 성지트레킹 길에 신춘의 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 성지를 중심으로 설치된 둘레 길은 길 높낮이가 순탄합니다. 서울대입구까지 편안하게 트레킹을 끝낸 후 다시 관악산기슭에 설치된 관악1구간 둘레길을 역순으로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산의 이름처럼 관악산(冠岳山)은 갓을 쓰고 있는 형태라 관악산이란 이름을 부여 받았으며 그 형상이 불꽃같다하여 화산(火山)이라하여 한양도읍시 불을 경계하는 산으로 대접을 받게됩니다. 남대문의 현판을 다른 도성의 현판과 다르게 세운 이유는 화마는 불로 막아야 한다는 풍수지리에 의한 결과 였습니다. 대부분 산 이름을 부를 때 악자가 가운데 붙으면 그 산은 산세가 험하고 크고 깊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관악산 또한 그 범주에 속하는 악산입니다.
삼성산 트레킹 코스를 넘어선 후 다시 시작되는 관악산 기슭의 트레킹 길은 약간의 오름과 내림이 반복되는 구간이 있습니다.
무당골을 지난 후 작은 오름과 다시 관음사로 넘어가는 오름이 있습니다. 이 오름을 끝으로 오늘 둘레 길을 끝이 납니다.
관음사 오름 앞에서 그동안 걸으며 뒤에서 들려오는 트레커들의 말에서 조금 지치셨다는 판단이 서 의견을 종합한 결과 관음사 오름을 넘지 않고 바로 남현동으로 내려서서 사당역으로 가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삼성산 본당에서 성지까지 걸은 것을 감안한다면 오늘 걸은 총길이는 약 9 km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걸으셨던 여러 컨디션은 향 후 트레킹에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첫 성지순례 트레킹에 있어 이런저런 불편함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트레킹후에 들렀던 첫식당에서 경험한 불쾌함, 생각의 기준을 식당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겸손함을 갖는다면 적절하게 참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혹시 트레킹중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서슴없이 댓글로 달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공동체의 기준은 함께 더불어 한다는 의지와 실행이 있어야 합니다. 사소함도 묻어 둔다면 나중에는 오히려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겨울산길이 지니고 있는 미끄러움 속에서도 무탈하게 진행되고 마무리된 첫성지순례 트레킹에 대하여 주님과 우리들의 사부 성프란치스코에게 감사드리며 더불어 야고바 트레커님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언제나 평화를 나누겠습니다.
삼성산 성지 - 헬기장 / 1.1km + 헬기장 - 서울대입구 / 1.89 km + 서울대입구 - 낙성대 1.62km = 4.61km ....(A)
낙성대공원 - 무당골 / 2.6km + 무당골 - 사당동역 / 2.45km = 5.05 km ....... (B)
A+B = 9.66KM. (트레킹 거리) + 삼성산 성당 - 피정의 집 0.7KM...(C) = A+B+C = 10.36 KM(총거리)
함께해 주신 2013년 첫 성지순례, 고맙습니다. 한해에도 은총과 평화로 행복한 일상으로 거듭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2월 수리산 성지참례에 있어 시간 조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오전8시 안양역 모임이 빠르다는 의견이 있어 조정할까합니다
원래 계획은 이른시간에 맞나 7부능선을 수평으로 트레킹 후 11시 성지미사 참례를 한 후 점심식사를 끝내고 성지를 돌아보고
이른 시간에 나오려고 하였으나 시간을 조정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