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성호의 대중화
십자성호는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부터 프로테스탄트교에서는 미신적인 행위로 간주하여 십자성호 긋기를 거부했지만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르틴 루터는 십자성호를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그가 쓴 “소 교리문답”의 가족기도에 관한 부록에서 오히려 성호 긋기를 권하고 있는 점에서 확인됩니다.
십자성호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사용되어 왔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신자들에게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에페 1,13) 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갈라 6,17) 란 말씀은 자신이 세례 때 십자성호로 인호가 새겨졌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3세기경 그리스도인은 에제키엘서 9장 4절과 요한묵시록 7장 3절. 9장 4절. 14장 1절의 내용과 행위를 관련시켜 이마에 작은 성호를 긋기 시작하고 사람과 물건을 축복할 때도 그 위에 십자성호를 긋기 시작했지만 이 행위는 훗날까지 일반적으로 대중화가 되지 못했습니다.
십자성호는 9세기에 동방교회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두 가지 성을 상징하여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안으로 접고 삼위일체를 상징하여 엄지와 나머지 두 손가락으로 크게 성호를 긋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의 성호 방법은 먼저 손을 이마에 대고 그 다음 가슴과 오른쪽 어깨와 왼쪽 어깨로 긋는 방법을 채택하였습니다.
십자성호가 서방교회에 채택된 것은 분명치 않지만 9세기 이후 동방교회의 성호 긋는 방법을 인용하여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긋는 방법을 채택하여 사용하다가 중세기 말부터 손을 펴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성호를 긋기 시작했던 베네딕도 수도회의 관행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대중화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하나의 관행이 만들어지고 고착되기까지 상호간의 의견충돌로 많은 시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단면적인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 믿음을 가지고 성스러움 앞에 경건한 마음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인간의 바람은 하느님 안에서 진리의 빛을 찾고 하느님 뜻을 따르는 삶이 되어 그분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성호는 이런 마음을 담아 하느님께로 가고자하는 이들에게 등불이 되고 길이 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내 가족에게부터 축복을 전하는 하느님의 사도가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글 : 손용익 그레고리오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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