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美國, United States of America] 북아메리카 대륙의 캐나다와 멕시코 사이에 있는 나라이다. 1607년 영국이 제임스강(江) 연안에 식민지를 조성한 이후 영국의 식민 상태였다가 1775년 미국독립혁명 후 1776년 독립을 선언하고 1783년 파리조약에서 독립이 승인되었다.
미국 지도 : 벨기에의 제도가, 지리학자인 오르텔리우스가 그린 1587년 미국
미국의 지도
미국의 역대 대통령
미국의 영토확장
미국 국기
'성조기(Stars and Stripes)'라고 하며, 미국의 국가(國歌) 또한 같은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특징은 미합중국을 구성하는 주(州)의 수만큼 별이 있어서, 주가 증가할 때마다 별의 수가 증가된다는 점이다. 주의 증가가 결정되면 성급하게 새 국기의 디자인을 발표하는 시민도 있지만, 정식으로는 대통령이 임명한 국기위원회에서 디자인을 심의 결정하고 다음해 독립기념일(7월 4일)에 공식 발표한다.
1777년 처음 제정하였는데, 독립선언 당시의 13주를 기념하기 위하여 13개의 줄과 13개의 별이 그려진 기였다. 당시는 별의 배열에 대해 아무 규정도 없었기 때문에 원형(圓形)으로 배열한 것, 수열(數列)로 늘어놓은 것 등 그 종류도 다양하였으나, 1795년 버몬트·켄터키의 2주가 증가되면서 15개의 줄과 15개의 별이 그려진 국기로 변형되었으며, 그 후로는 주가 증가해도 줄은 13개로 고정(독립선언 당시의 13주를 의미)하고 별만 더하기로 결정하였다. 성조기는 현재까지 26번 변경되었으며, 최신의 변경은 1960년 하와이주(州)가 승격하였을 때로서 현재 별의 수는 50개이다. 미국의 역사 미국의 식민지시대 이전 유럽인이 이주하기 이전의 미국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피테칸트로푸스(원인)·시난트로푸스(북경원인)·네안데르탈(구인류)와 같은 원시적 인간이 존재하였던 흔적은 없고, 현존 인류인 인디언의 인골과 거의 다름없는 인골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인디언은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파상적으로 이주, 이곳의 선주민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처음에 동부에서도 많이 살고 있었으나 유럽인에게 쫓겨 일부는 남부와 북부로 흩어지고, 대부분은 중서부에서 남서부에 걸쳐 정주하게 되어 지금도 그 문화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남서부 지역이 낳은 문화를 아나사지(Anasazi) 문화라고 하며 여러 시기로 나누어진다. 가장 오랜 몇 개의 시기는 ‘바스켓 메이커 ’라고 일컫는 시기인데, 그 명칭의 유래는 이 시기에 바구니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이것을 계승한 것이 푸에블로(Pueblo) 문화이다. 전자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이동성의 수렵민이며 후자를 대표하는 푸에블로는 정주민이었다.
이 두 시대를 통하여 투창기·토기의 제작, 활의 사용, 옥수수의 재배, 초기 촌락 등이 점차로 확대되었다. 건축도 수혈식(竪穴式) 오두막에서 진흙과 긴 막대기로 지은 집인 어도비나 돌로 만든 커다란 집으로 진화하였다. 다음 시대를 고전기라고 하며 대략 11세기 초부터 13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커다란 암굴 밑을 이용하는 주거가 만들어졌으며, 개중에는 500개 이상의 주거가 하나의 암굴 밑에 늘어선 것도 있었고 무명천도 정교하게 짜여졌다. 이렇게 진보된 문화를 가졌던 푸에블로도 마침내 다른 유목민인 인디언(shoshoni 등)의 압박으로 차츰 퇴세를 거듭, 점거지역도 좁아져 1300년경에는 리오그란데 강과 리틀콜로라도 강 연변에 새로운 촌락을 이루었다. 이 무렵부터 토기가 없어지고 다채로운 색상으로 장식된 도자기가 많이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다음 16세기에 들어서자 에스파냐인이 침입하였으나 그들은 이 지역 고유의 문화를 소멸시키지는 못하였으며 지금도 옛 문화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어 인디언의 보고가 되어 있다. 미국의 식민지건설시대 에스파냐 인은 16세기 전반에 위의 지역만이 아니고 지금의 미국 남동부에도 식민지를 걸설하거나 탐험을 시도하였으나(이때 이미 소수의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데리고 있었다) 그들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한편 영국은 1492년 신대륙발견 직후인 15세기 말, 동해안에 탐험대를 파견하여 식민지 건설의 발판을 찾기 시작하여 1세기가 지난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에 본격적인 입식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후 17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항구적인 영국 최초의 식민지 버지니아가 건설되었따. 즉 1606년 영국 국왕의 칙허장에 의하여 건설된 런던회사(후에 버지니아 회사)가 1607년에 제임스 강 연안에 일달의 식민자를 정착시킴으로써 이곳이 제임스타운으로 명명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이어 20년에는 영국의 종교박해를 피하여 네덜란드에 가 있던 청교도 일파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 이플라워 호를 타고 지금의 메사추세스 주에 상륙하여 플리머스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 때부터 1733년까지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13개의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들 식민지는 각각 그 식민의동기, 종교, 시기 등을 달리하고 있어 결코 단일체라 할 수 없었다. 이들은 17세기 부터 18세기에 걸쳐 발전한 프랑스 식민지와 거기에 인디언까지 끼여든 3파의 항전을 계속하다가 결국 영국의 승리로 끝난 결과 식민지 사이의 연결이 가능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영국 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건국 미국의 독립혁명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쟁인 동시에 식민지 내부에서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한 혁명이었다. 독립혁명에 의하여 각지의 식민지는 주(州)가 되고 이들이 연합하여 합중국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현재 미국의 주는 한국의 시·도와 같은 행정상의 지역이 아니고 대폭적인 자치권을 보유하는 스테이트(state)이다. 그러나 이들 식민지는 모두 영국의 전통을 존중하고 그 사상과 정치제도를 본뜨고 있었다. 영국으로부터 이어받은 여러 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의제(代議制)의 의회제도이다.
버지니아 식민지를 건설한 사람들은 영국 성공회를 신봉하였으며 1619년 제임스타운에 아메리카대륙 최초의 의회를 만들어 자치(自治)를 시작하였고, 이와 동시에 미국 최초의 흑인매매도 행하여졌다. 즉 대의제 의회의 탄생이라는 민주주의적인 것의 시초와 흑인노예라는 비민주주의적인 것의 시초가 병행하여 동시에 이루어진 셈이다. 이 대의제 의회와 흑인노예 제도는 그 후에 건설된 각 식민지에서도 똑같이 채택되었으며, 식민지 거주인이 본국인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자치를 행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국왕의 직접통치하에 있었던 에스파냐와 프량스 등의 식민지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독립혁명 1775년에 시작된 미국의 독립혁명은 약 1세기 반에 걸쳐 식민지인들이 확립한 자치에 대하여 본국 정부가 이것을 침범하려고 시도한 데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영국 의회에서 정한, 식민지 백성에 대한 과세(課稅)와 서방영토로의 진출 저지였다. 따라서 독립혁명 때는 본국인 중에도 많은 동조조가 있었고, 17세기 이래 영국과 항쟁하고 있던 프랑스도 식민지를 도왔으므로 마침내 식민지는 승리를 획득하였다. 1776년에 독립을 선언하였고, 1783년에는 파리조약에 의하여 독립이 승인되었으며, 또 프랑스령(領)이었던 미시시피 강 동쪽의 영토를 공식적으로 획득하였다. 1781년에 최초의 헌법으로서 연합규약(聯合規約)이 만들어져 13주는 하나의 연방국가가 되었으나, 중앙정부의 권한이 너무도 약했기 때문에 사회불안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또 외국에서도 미국을 독립국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완전한 연방을 만들기 위하여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헌법회의를 열고 연방헌법을 제정하였다. 미국의 프런티어 미국은 독립 후에도 프랑스·에스파냐·멕시코 등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여 1848년에는 거의 현재와 같은 대륙국가로 발전하였다. 새로 편입된 영토는 억세고 씩씩한 개척자들에 의하여 개척되었다. 미국에서 프런티어라고 부를 때는 반드시 선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그 선에 접하는 지대를 뜻한다. 새롭게 개척된 지대인 프런티어에서 사회를 이루고 사는 주민들에게는 전통·혈통·가문은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였으며 실력 있는 자만이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프런티어 사회는 유럽이나 동부 사회에 비하여 보다 민주적이었다.
프런티어는 반드시 미국에서 서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개척정신이 깃들어 있는 지대 및 사회를 의미한다. 프런티어 사회에서는 비교적 용이하게 토지를 획득할 수 있었고 자작농이 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동부의 노동자도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할 때는 서부를 비롯해 미개척지로 가서 새로운 개척을 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기술을 가진 노동자는 고용주로부터 우대를 받아 그 사회적 지위도 유럽에 비하여 월등히 높아졌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골드러시 선풍이 일기 시작하자 새로운 프런티어가 서부에서 동부를 향하여 이동하게 되었고, 이들은 서부로 진출하는 프런티어와 대개 로키산맥 지대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1890년에는 프런티어 사회도 소멸하기에 이르렀다. 남북전쟁
죽음의 들판(남북전쟁 최대 격전지)
북부에서는 이 이상 노예주(州)가 증가하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남부에서는 새로 만들어지는 서부의 주에도 노예제도를 확장하려 하였다. 1820년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미주리주가 새로 합중국의 주가 되려고 하였을 때, 노예제도는 비로소 정치문제로 등장하였다.
결국 미주리주를 노예주로서 인정하고 가입시키는 동시에 북부에는 새로운 자유주로서 메인주의 가입을 인정함으로써 남북의 균형을 유지하였고 이후의 주(州) 편입에 대하여는 미주리주의 남쪽 경계 북위 36°30' 이북에는 노예주의 신설을 인정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것을 미주리협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1848년 멕시코전쟁의 결과 캘리포니아·뉴멕시코 지방이 새로 합중국 영토가 되자 이 지역에 노예제를 인정할 것이냐의 여부가 문제로 되었다.
1850년 남·북은 재차 다음과 같이 타협하였다. ① 캘리포니아주를 자유주로 한다. ② 워싱턴에서는 노예매매를 금지한다. ③ 새로운 영토에 대하여는 노예제도의 존폐를 결정하지 않고 준주(准州)로 한다. ④ 도망노예법을 강화한다는 등 일련의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 타협은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이 제정되어, 미주리협정에 의하면, 자유주가 되어야 할 캔자스 주가 주민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파기되고 말았다. 노예반대론자들은 공화당을 조직하여 남부와 대항하였다. 링컨도 공화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링컨의 입장은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궁극적으로는 노예제도에 반대한다는 것이었으며, 그 본질은 연방헌법을 수호하고 미국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남부에서는 주(州)는 국가보다 먼저 이루어졌고 연방헌법은 주와 주 사이의 계약에 불과하므로 합중국의 어떤 주든지 불만이 있으면 합중국에서 탈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링컨을 비롯한 북부의 공화당은 연방헌법은 그 전문(前文)에 “우리들 합중국의 인민은… 이 헌법을 제정하고 확립한다”고 되어 있어 헌법은 인민상호간의 계약이므로 주가 탈퇴한다는 것은 위법이라는 해석을 내렸다.
남북전쟁은 이러한 의미에서 근원적으로는 서로 헌법상의 해석을 달리함으로써 비롯된 싸움이었으며 이 싸움이 북부, 즉 합중국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종래 남부가 주장하여온 주권론(州權論)을 굴복시키고 헌법이 지니는 미국 민주주의를 수호하였다. 수정헌법 제13조에 의한 노예해방(1865), 제14조에 의한 시민권보장(1867), 제15조에 의한 투표권부여(1870) 등으로, 비로소 모든 흑인노예도 법적으로는 노예신분에서 해방되었다.
미국의 재건과 좌절 남북전쟁 이후 북부 산업 부르주아지의 대변자인 공화당의 군사적 독재에 의한 정치상·사회상의 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으나 남부경제의 중심과제인 토지문제를 혁명적으로 처리하려다가 남부의 농장주와 여기에 예속된 백인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게 되었다. 그들의 재건정책에 대한 반항은 주법(州法) 또는 지방조례로서 흑인을 사실상 차별하는가 하면 비합법적 비밀결사인 이른바 KKK단 등에 의한 흑인 살해, 협박 등 갖은 박해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결과 북군의 남부철수와 전후하여 남부의 여러 주는 흑인의 선거권 행사를 실질적으로 빼앗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인두세, 교육·취직·임금 등 일상생활에서 흑인을 차별하기 위한 법의 제정이나 행정조치 등 합법적 수단은 물론, 비합법적인 차별수단을 차례로 고정화하였다. 남북전쟁 중 남부 출신 의원들이 워싱턴에서 떠났으므로 종래 남부에서 반대하던 여러 법안이 모두 의회를 통과하였다. 그중에는 산업자본주의를 조장·육성하는 국립은행법, 모릴관세법, 서부의 급속한 발전을 기대하는 자영농지법 등이 있었다.
남북전쟁 후 공화당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기간에 걸쳐 장악한 일은 그후 미국사회를 공업화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도시는 발달하고 교통기관도 확장되었다. 그러나 패전 후의 재건에 고심하는 남부는 여전히 농업사회로 남게 되었고 대(大)플랜테이션은 분할되었다. 해방된 흑인은 자본의 결여, 기술의 결여, 낮은 교육 수준 등으로 자립하거나 기간산업의 임금노동자가 될 수 없어 태반은 영세소작인이 되었다. 남부에 공업이 발달하여 흑인들이 공업 노동자가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이다.
미국의 자본주의 발전 노예해방은 전쟁이 북부의 공업발전을 자극한 것과 같이 산업자본주의를 크게 발전시킨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는 국내자원의 개발과 교통기관의 발달에 힘입어 새로운 산업인 석유업·철강업을 비롯하여 다수의 거대한 산업이 급속히 발전하여 독점화의 경향이 강하여졌다. 물론 북부 산업자본의 발전을 방조하는 공화당이 전후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하면서 산업자본에 간섭하지 않았던 것도 산업자본이 거대해진 이유의 하나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한 독점에 대항하여 새로이 두 세력이 대두하였다. 하나는 서부를 중심으로 하는 농민의 조직이며 또 하나는 대도시에서 발달한 노동조합이었다. 1869년에 최초의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자 광부나 목축업자에 이어 많은 농민이 서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철도는 동부의 자본으로 건설되어 그 시장을 서부로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농민은 차별적인 운임 등으로 손해를 보았다.
농민 공제조합인 그레인지(Grange)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에 의하여 각 주정부에 철도운임을 규제하는 주법을 제정하게 하였고, 이것은 마침내 1887년 주간통상법(州間通商法)으로 발전하여 연방정부가 민간기업에 처음으로 통제를 가하게 되었다. 한편 노동자도 미국 노동총맹을 조직하여 숙련노동자의 생활수준 향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도모하였다. 1891년에는 농민에 의하여 인민당이라는 제 3당이 결성되어 이듬해부터의 선거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내걸고 세 번이나 싸웠다. 그들이 주장한 철도·전신·전화의 공영, 비밀투표제의 채택, 누진소득세의 부과, 우편 저금 및 소포제도, 상원의원의 직접선거, 여성참정권 등은 20세기에 들어와 점차 실현되었다. 건국 초기에 농업이 중심이었던 미국사회는 공업의 발달과 함께 점차 변하여갔다. 그 사이에 노동력은 항상 부족하였다. 외국 이민이 갑자기 늘기 시작한 것은 1840년대부터인데, 이것은 아일랜드, 독일 등에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이민의 태반은 주로 대서양 연안의 대도시에 정착하여 미숙련 노동자가 되었으며, 1840년대 말부터 들어온 많은 독일이민은 중서부로 들어가 농민이 되었다. 그들은 독일혁명에 패배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자 그때까지의 서·북유럽으로부터의 이민보다도 남·동유럽의 이민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이민과는 달리 주로 경제적 이유에 의한 이민으로, 정치적으로는 전제군주국에서 왔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었다. 더구나 종교도 프로테스탄트가 아니었으므로 종래의 이민에 비하여 동화력이 없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하였다. 그 때문에 1920년대에는 할당이민법의 재정을 보게 되었다. 테오도르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01년부터 대통령 윌슨의 제1기말, 즉 1919년까지의 시기는 독점 반대의 사회개혁이 행하여진 시기였으며, 이것을 혁신주의시대라고 한다. 공공의 복지를 해롭게 하는 독점은 정부에 의하여 고발되고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해산되었다. 윌슨 시대에는 독점적인 지주회사를 금지하는 반(反)트러스트법이 제정되었다. 루스벨트는 노동쟁의도 정부가 직접 조정한다는 선례를 만들었으며, 또 상무부 노동성이 신설되었다. 또한 철도의 통제에 대하여도 주간통상법을 강화하는 여러 법률이 제정되어 국토자원의 보존이 행하여졌다. 태프트 시대에는 우편저금 및 소포제도가 만들어지고, 또 누진적 소득세를 규정하는 수정헌법 제16조 및 상원의원의 직접선거를 정한 제17조가 1913년에 제정되었다. 윌슨 시대에는 관세인하와 은행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참전과 뉴딜정책 1914년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엄정중립을 선언하였으나 1917년에는 결국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독일의 잠수함전에 반대하는 국내 여론과 중립기간 중에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된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베르사유 평화회의에는 대통령인 윌슨 자신이 출석하여 11개 조항의 원칙을 실현하게 하려 하였으나 결국 국제연맹안을 평화조약안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하였을 뿐이다. 더구나 국제연맹안은 국내의 반대가 강력하여 끝내 상원의 비준을 얻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1920년대의 미국은 공화당의 시대로 바뀌어 외교적으로는 고립주의, 국내적으로는 또다시 자유방임주의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1920년대에 라디오, 자동차, 영화, 인견공업(人絹工業) 등 새로운 산업이 출현하여 미국은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 반면, 농업·석탄·면공업은 쇠퇴하였다. 공화당은 또다시 고관세 보호정책을 취하였으므로 국제무역은 침체되고 기업활동과 독점은 더욱 촉진되었다. 호경기는 1925년에 그 절정을 맞이하여 주식투자가 성행하고 과대투기가 유행하였다. 이것은 번영이라 하지만 균형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 1929년 10월 뉴욕주식시장의 주가폭락을 계기로 대공황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즉시 유럽에 파급되어 세계공황으로 번졌다.
공급에 비해 실질적인 수요가 줄어들었는데, 국민의 구매력은 떨어지고, 예금은 고갈되고, 국민총생산은 3/4으로 떨어지고, 노동자의 1/3은 실직상태에 빠졌다.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여, 뉴딜정책을 시행하였다. 뉴딜은 1단계로 대공황에 대한 대응책이었으나 더 나아가서는 재차 이러한 대공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하여 자본주의를 수정하려는 것이었다. 독점기업은 정부 권력이 개입, 동종 산업 간에 규약을 만들게 함으로써 어느 정도 통제되었고 농산물 과잉상태는 정부의 통제에 의한 경작 면적의 삭감으로 개선되었다. 전력과 같은 공공사업에 대하여는 TVA(테네시계곡 개발공사) 같은 공공 법인체를 만들어 민간기업과 경쟁하는 일도 인정하였다.
1935년에 제정된 바그너법에 의하여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계약권이 인정된 결과 조직노동자의 수는 대폭으로 증가하여, 숙련공 중심으로 직능별 조합주의인 미국노동총동맹(AFL)에 대하여, 산업별 조합주의인 미국산업별조직회의(CIO)도 새로 결성되었다(1955년에는 양자가 합병하여 AFL-CIO가 되었다). 사회보장도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처음으로 연방정부에 의하여 행하여지게 되었고, 1938년의 공정노동기준법에 의하여 최저임금 및 최고노동시간제가 정해졌다. 이들 새로운 정책을 통하여 연방정부의 권한은 대폭적으로 확대되고 종래의 자본주의의 폐단은 크게 시정되어 자본주의 체제 안에 사회복지적인 여러 정책이 채택되었다. 이 경향은 그 후에도 변하지 않아 정권이 민주당이건 공화당이건 상관 없이 확고한 항구적 제도가 되었다. 트루먼이 내건 페어딜도, 아이젠하워의 뉴리퍼블리커니즘도, 존슨의 ‘위대한 사회’도 모두 원칙적으로는 뉴딜의 선을 더욱 확대시키려는 데 불과하다. 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 제1차 세계대전이후 미국은 유럽의 분쟁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1935년 중립법을 제정하고 고립주의를 취하였다. 그러나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파시스트 국가로 등장하면서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 초기에 미국은 참전 지지세력과 반전세력간의 갈등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하였다. 1940년 루즈벨트의 대통령 당선으로 연합국에 대한 원조와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은 세계대전에 결정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전쟁중 미국은 연합국의 군수물자 공급을 담당하게 되었고, 민간기업은 전쟁을 위한 군수산업으로 전환되어 급속한 생산의 증가가 이루어지고 경제는 대규모로 팽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날 즈음, 미국은 1945년 50개 연합국 대표들을 샌프란시스코에 초청하여 국제연합헌장에 서명하도록 함으로써 국제정치, 경제에서의 주축을 담당하는 국제주의의 길로 나아가면서 세계질서를 주도하게 되었다.
종전으로 전시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되었지만, 국내적으로는 다시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이 증가하고 노동자의 파업이 발생하는 등 잠재되어있던 국내문제들이 다시 표출되었으며, 국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로 나타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팽창이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의 트루먼 행정부는 동유럽, 아시아, 아프리라에 있어서의 소련과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하여 “포위정책”을 폈으며, 전세계적으로 공산화의 위험을 안고 있는 나라들에게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냉전시대가 열렸다. 즉 미국은 군사적으로는 서방국가들의 군사동맹을 위하여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창설하여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화의 위협에 대항하고, “마셜 플랜”이라는 유럽부흥법을 통해 유럽에 경제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공산화를 사전에 방지하고 국제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은 중국의 공산화로 아시아로 확대되었으며, 그 결과 1950년에는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미국내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 단체들의 등록을 의무화하도록 한 국가보안법 일명 메카란법이 제정되는 등 미국내 공산주의자에 대해 철저하게 통제하는 반공운동이 일어났으며, 미국내 극단적인 반공주의인 메카시즘은 공포정치를 불러오기도 했다. 풍요의 시대와 미국 내외의 도전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40년대말 트루먼은 루즈벨트의 뉴딜자유주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개혁 정책들을 재시도하였다. 그 후 몇 차례의 위기가 왔으나 한국전쟁으로 미국의 경제적 성장이 지속되었다.
미국내 메카시즘의 출현으로 절정에 이르렀던 냉전과 반공의 혼란이 어느정도 정리가 되고,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면서 행정부의 권한 축소와 주정부 활동의 장려를 통한 분권화와 기업가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친기업적인 공화주의가 등장하였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조성된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더 중요시하는 자유주의로의 방향전한을 의미하는 것이다. 1950년대의 아이젠하워 시기의 미국은 역사상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소득의 재분배가 실현되고 사회복지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짐으로써 이른바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다. 임금노동자들의 수입이 상승함으로써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간의 격차가 줄어들고 1960년대에 이르면 노동력의 절반이상이 전문직, 사무직, 판매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은 항상 잠재된 사회적 불안 요소였다. 이로 인해 1950년대부터 시작된 흑인의 지위향상을 위한 민권운동은 여전히 상존하였던 인종차별에 대한 격렬한 저항운동으로 커져갔다. 민권운동의 결과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졌지만, 대다수의 미국 남부의 주들은 이러한 흑백차별의 철폐에 반대하였다. 흑인목사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흑인들의 저항운동은 비폭력의 원칙하에 평등과 정의를 부르짓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저항적 민권운동의 결과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할 많은 관련법들이 만들어짐으로써 흑인들의 권리가 법적으로는 조금씩 신장되어갔다.
한편 1950년대 말에는 인간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현실적 바탕위에서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즉 인간의 개인의 이익의 자유로운 추구를 인정하되 공익을 중시하자는 신자유주의 정치철학이 등장함으로서 1960년대의 사회개혁의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국외적으로는 미국사회를 크게 변화시킨 두가지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나는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호를 쏘아올린 것이다. 이는 그동안 미국이 세계제일이라는 자부심에 엄청난 충격을 준 것으로 미국이 과학연구, 고등교육을 비롯한 교육전반에 막대한 투자를 하게되는 배경을 제공해주었다. 다른 한 가지는 1958년의 쿠바의 공산혁명이었다. 카스트로가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초기에는 미국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1960년대로 가면서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미국의 이익이 침해됨으로써 점점 관계가 멀어지고 이후에는 완전히 친소로 기울어짐으로써 또 다른 극단적인 냉전관계가 형성되었다. 반항과 질서의 시대 1960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43세의 젊은 카톨릭교도인 케네디가 극적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그동안 미국사회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자유주의와 이상주의를 하는 ‘뉴프론티어’를 제시하였으며, 빈곤의 타파와 흑인을 중심으로 하는 민권의 신장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인종차별적인 남부의 백인들은 여전히 인종차별적이며 관습을 법으로 폐지할 수 없었다. 케네디는 대외정책에서도 미국적 국제질서를 강요하기보다 약소민족의 민족주의 운동에 긍정적이었으며, 신생국의 빈곤을 없애기 위해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함으로써 공산화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케네디는 뉴프런티어를 우주에까지 확장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움으로써 우주경쟁에서 앞서가고 있던 소련을 조금씩 따라잡고 있었다. 그러나 케네디 행정부는 1961년에 쿠바침공계획을 세우다가 실패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1962년에는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는 시도로 냉전시대 최대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위기를 겪었다. 이 쿠바미사일 위기 사태는 미국이 터키의 기지를 철수하고 소련은 쿠바의 기지를 철수한다는 소련과의 협상이 성사되어 가까스로 해결되었다.
케네디가 암살로 갑자기 사망하였지만 그의 뒤를 이은 존슨은 케네디의 정책을 계승하여 빈곤의 퇴치, 시회보장제도, 교육진흥 등 ‘위대한 사회’라고 부르는 그의 정책을 일관성있게 추진하였다. 케네디에서 존슨에 이르는 미주당 정부의 자유주의적 개혁정책은 미국사회의 평등과 자유를 보다 높은 수준에서 실현하였다. 그렇지만 1960년대는 자유와 인권에 대한 의식이 상승하면서 항의와 폭력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주요도시에서의 흑인의 폭동, 킹목사의 피살, 케네디의 암살 등과 같은 폭력적인 요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기성세대와 기존체제에 대한 반항은 대학가의 중심적 잇슈였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개혁과 발전은 국제문제에 있어서 베트남전쟁(1960-1980)이라는 수렁에 빠져들면서 점점 약화되었으며, 미국의 서방세계 주도권도 타격을 입기 시작하였다. 1965년 그동안 미국이 지원하던 월남정부가 패배하는 기미가 보이자, 미군은 지상군을 파견하면서 월맹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월남전에 대한 개입이 크지면서 징집거부, 납세거부 등을 통해 정치적 행동화하거나, 기존사회의 변혁보다 회피하려는 히피들이 등장과 함께 반문화운동이 나타나는 등 극단으로 치달아 반전과 반항이 극에 달하였다. 그리고 남성우월주의에 대항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여성해방운동과 함께, 흑인 외에 인디언,히스패닉 등 미국 내에서의 소외된 소수집답의 권익을 회복하려는 운동도 나타났다.
이러한 반항과 저항의 시대는 1970년대에 들어와 사회문제를 법과 질서에 의해 해결하면서 서서히 끝을 맺었다. 이와 함께 1970년대 들어선 닉슨정부는 이른바 데탕트 외교를 통해 동서진영간의 긴장을 완화시키면서 냉전시대에서 화해의 시대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1975년의 월남전에서의 패배는 미국의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를 크게 떨어뜨렸다. 그리고 1979년의 이란혁명은 미국의 대외적인 영향력은 최악의 상태로 떨어졌다. 보수주의로의 회귀 1970년대를 마감하면서 미국의 국력이 국내외에서 모두 의심받으면서 미국은 강력한 지도력과 부국강병을 요구하는 보수주의의 물결이 강해졌으며, 1980년대에는 강력한 미국을 주장하는 강경한 보수주의자인 레이건을 비롯하여 보수주의 대통령과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을 압도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복지비를 감축하고 국방비의 지출을 늘리는 등 경제에서는 자유방임주의를 정치에서는 보수주의로 회귀하게 되었다.
미국의 보수주의 정권은 소련의 핵무기 발사시 우주 및 지상에서의 파괴를 위한 전략방위구상 등에 막대한 국방비 지출하면서 핵무기 경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그리고 이란과 이라크 전쟁, 아프카니스탄 등지에서 미국과 소련은 여러 가지 대리전을 치르면서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 소간의 군비경쟁과 긴장은 소련 고르바쵸프의 개방화정책으로 급속히 약화되었으며, 소련의 아프칸 철군 등에 이은 1989년 미,소간 냉전종식 선언 등으로 긴장완화가 이루어졌다.
1991년 구소련의 갑작스런 붕괴와 이어지는 독일 통일 등으로 국제정세는 냉전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상대적으로 더 강력한 세계 주도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세계체제가 급속하게 변화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1980년대에 산업화시대에 이어 탈산업화시대에 돌입하면서 3,4,5차 산업중심의 산업구조의 개편과 함께 첨단하이텍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고도산업화와 선진화에 성공하였다.
미국은 냉전시대에 소련에 대한 경계에 사용하던 막대한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려, 보다 강력해진 군사적,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동지역문제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중동은 전략자원인 석유를 둘러싼 강대국의 이권의 개입, 지역내 패권에 대한 갈등, 동,서양 문화충돌로 세계의 화약고인 셈이다.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와 석유분쟁을 벌이던 중 이란-이라크 전쟁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이 이라크는 항복시키고 쿠웨이트를 복구시키면서 아랍지역에서의 석유자원에 대한 교두보를 지켰다. 1990-1991년의 이라크-쿠웨이트 전쟁의 연속선상에서, 미국주도의 다국적군은 핵무기사찰에 응하지 않는 이라크를 1998년에 다국적군을 동원하여 집중적으로 공습하였다.
이러한 미국주도 다국적군의 공습은 아랍의 회교권국가들은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가져왔고, 그 결과 이슬람 테러조직에 의해 2001년 9.11 테러사건이 발생하여 뉴욕의 무역센터가 파괴되고 수천명이 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의 대통령 부시는 테러조직과 대량 살상무기를 제공하는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2003년 세계평화와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량살상무기사찰에 응하지 않는 이라크에 선전포고를 하여 영국, 호주 등 연합군과 함께 전면적인 전쟁을 개시하였다. 전쟁발발 26일만에 이라크 전쟁은 미국주도의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으며, 이라크재건인도지원처(ORHA)를 설치하여 전후 복구작업을 진행하고 과도정부를 거쳐 이라크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 미국-영국전쟁 [美國英國戰爭, War of 1812] 1812년 6월 프랑스혁명 뒤 영국-프랑스 항쟁에 휘말린 미국과 영국의 전쟁. 미국측은 해상권도 영국에 빼앗겼으나 격렬한 반격을 벌여 영국군을 캐나다로 몰아냄 베를린칙령(勅令) 뒤 영국 ·프랑스 봉쇄작전이 강화되면서 미국 선박 ·선원이 영국 해군에 나포되는 일이 자주 생기자, 대영감정(對英感情)이 악화 1812년전쟁이라고도 하며, 나폴레옹전쟁 때 미국은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베를린칙령(勅令) 뒤 영국 ·프랑스 봉쇄작전이 강화되면서 미국 선박 ·선원이 영국 해군에 나포되는 일이 자주 생기자, 대영감정(對英感情)이 악화되었다. 영국은 미국 북서부 인디언들에게 무기를 주어 미국의 프런티어발전을 막으려는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영국과의 전쟁을 벌이자는 여론이 강경해졌다.
영국과의 무역으로 이익을 본 뉴잉글랜드는 전쟁을 반대하였고, 대통령 T.제퍼슨도 처음부터 평화정책을 고수해왔으나, 의회에서 주전론자(主戰論者)가 우세해져 1812년 6월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황은 훈련 ·장비면에서 모두 뒤진 미국측에 불리하여, 캐나다에의 침공작전이 실패하고 해상권도 영국에 빼앗겼다. 그러나 미국군은 격렬한 반격을 벌여 영국군을 캐나다로 몰아냈다.
나폴레옹전쟁이 영국측에 유리하게 전개됨에 따라 영국은 많은 병력을 대미전(對美戰)에 투입, 워싱턴을 함락하고 뉴욕 진격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나폴레옹전쟁의 종결로 화평기운이 일어나, 14년 12월 24일 벨기에에서 강(Ghnt)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미국-스페인전쟁 [美國-戰爭, Spanish-American War] 쿠바섬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 미·서(美西)전쟁이라고도 하며, 1895년 쿠바인의 스페인 본국에 대한 반란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반란은 스페인 본국의 쿠바인에 대한 압정(壓政)과, 설탕에 대한 관세에 따른 경제적 불황이 그 직접 원인이었다. 이와 같은 쿠바인의 대(對)스페인 반란은 1868년과 1878년에도 있었으나, 그 당시는 미국이 쿠바인을 후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자 정세는 크게 변화하였다. 첫째, 미국인의 쿠바에 대한 경제적 관심이 현저하게 높아져서 쿠바의 설탕 생산에 타격을 주는 일은 많은 미국의 투자가에게 손실이었다.
둘째, 미국 내에는 1840년대에 일어났던 ‘명백한 천명(天命)’이라는 생각이 다시 일어나 미개발지역에 미국인이 만든 문화를 나누어 준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미국인에게 주어진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고 생각하여, 스페인의 압정에 시달리는 쿠바인을 도와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게 미국인 사이에 퍼졌다. 셋째, 언론의 발전에 수반하여 퓰리처의 《뉴욕 월드》와 허스트의 《뉴욕 저널》 등 신문이 발행부수를 늘리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여, 사실을 과장해서 보도하거나 군국주의(軍國主義)를 구가하기도 해서 점차 전국적으로 해외진출의 기운을 조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1895년에 일어난 쿠바의 반란에 즈음해서는, 미국은 처음부터 문제의 와중(渦中)에 휩쓸렸다. 많은 의용병이 쿠바인을 돕기 위해 쿠바로 향하였고, 또한 뉴욕에 본거지를 둔 쿠바인의 혁명단체가 발매(發賣)한 공채도 잘 팔렸다. 해외진출에 반대한 미국인들조차 쿠바의 해방 자체에는 찬성하였으며, 쿠바에 재산을 둔 미국인은 물론 그 보호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독점자본은 모처럼 찾아든 호경기(好景氣)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미국의 쿠바 간섭에 반대하였다. 스페인과 미국 사이에는 직접 전쟁을 유발할만한 중요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으나, 스페인의 쿠바인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학대라든지, 압정이라는 식으로 신문에 보도되어, 미국인으로 하여금 스페인에 악감정을 가지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의회가 결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불간섭 방침을 견지하였으나, 매킨리는 1896년에 실시되는 대통령선거의 공약으로서 쿠바의 독립을 내세웠다. 1898년 2월 스페인 공사(公使) 데 로메가 매킨리를 비난하는 사신(私信)이 허스트계(系)의 신문에 폭로된 일과 쿠바에 있는 미국인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군함 메인호가 아바나항(港)에서 격침된 사건으로 해서 여론은 급격히 전쟁으로 기울어졌다. 이에 따라 4월 11일 대통령은 대(對)스페인 개전요청(開戰要請) 교서를 의회에 보내고, 20일 의회가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양국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미국군은 마닐라만(灣) ·산티아고등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어 전쟁은 불과 수개월 만에 끝났다. 전쟁결과 12월 10일에는 파리조약이 체결되어 쿠바는 독립하고,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 미국 영토가 되었다. 마닐라전쟁 -> 미국-스페인전쟁의 결과로 인한 1898년 파리조약으로 필리핀이 미국에 영도되었다.
1...미국의 독립혁명 :
1775년에 시작된 미국의 독립혁명은 약 1세기 반에 걸쳐 식민지인들이 확립한 자치에 대하여 본국 정부가 이것을 침범하려고 시도한 데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영국 의회에서 정한, 식민지 백성에 대한 과세(課稅)와 서방영토로의 진출 저지였다. 따라서 독립혁명 때는 본국인 중에도 많은 동조자가 있었고, 17세기 이래 영국과 항쟁하고 있던 프랑스도 식민지를 도왔으므로 마침내 식민지는 승리를 획득하였다. 1776년에 독립을 선언하였고, 1783년에는 파리조약에 의하여 독립이 승인되었으며, 또 프랑스령(領)이었던 미시시피강(江) 동쪽의 영토를 공식적으로 획득하였다. 1781년에 최초의 헌법으로서 연합규약(聯合規約)이 만들어져 13주는 하나의 연방국가가 되었으나, 중앙정부의 권한이 너무도 약했기 때문에 사회불안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또 외국에서도 미국을 독립국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완전한 연방을 만들기 위하여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헌법회의를 열고 연방헌법을 제정하였다.
미국의 역사에 관하여
1492년, 콜럼버스는 지구는 둥글다는 신년을 가지고 에스파냐에서 인도를 찾아 항해를 시작했다. 이 때 도착한 곳은 아메리카 대륙이었으나,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이곳을 인도라고 믿었다. 영국의 식민지 건설로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776년 7월 4일, 독립 선언을 통해 아메리카 합중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독립 선언 이후 빠르게 발전하던 미국에서는 노예제도를 둘러싸고 남북 전쟁(1861년~1865년)이 일어났다. 이는 노예들의 인권을 위한 전쟁이라기보다 목화 농업으로 노예가 필요했던 남쪽과 공업화로 인력이 필요했던 북쪽의 경제인 대립으로 인한 것이었다. 경국 링컨 대통령이 이끈 북군이 승리하여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때 고립주의를 외치며 중립을 지키던 미국은 결국 참전하여 독일을 무너뜨리고 자본주의의 선두 주자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심각한 빈부 견차와 늘어나는 실업자로 인해, 물건이 많아도 살 사람은 줄어들어 경기가 침체되었다. 이것을 경제 공화이라고 하며, 이로 인해 자유방임주의를 지켜오던 정부는 대규모 공공사업으로 일자리를 만드는 뉴딜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 때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침공으로 다시 전쟁에 기입해 연합군의 승리를 도왔다. 미국은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막대한 물자와 인력 소비로 경제 공황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정부의 경제 개입도 정책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과 자유주의 국가인 미국 사이에 이념의 갈등으로 인한 냉전이 찾아왔다.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영향권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갈들을 빚기도 했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더 이상의 경쟁자가 없는 세계 최강국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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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e wife of the Lamb(어린 양의 아내) 원문보기 글쓴이: 선한 사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