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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에 봄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사는 여럿 있지만 김치 중에서는 나박김치가 대표적인 봄김치가 아닐까 싶다. 고춧가루로 빨갛게 물들인 김칫국에 얇고 네모지게 썬 무와 미나리, 실고추를 넣어 담근 나박김치는 봄철 입맛 돋우는 데 안성맞춤이다.
나박김치는 또 훌륭한 소화제였다. 예전 할머니들은 소화를 시키지 못해 속이 더부룩할 때면 나박김치 국물을 한 사발 들이켰다. 그러면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떡을 먹을 때면 나박김치를 함께 내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 역시 떡 먹은 후 체하지 말고 잘 소화시키라는 옛 어른들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였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박김치가 심지어 전염병 예방 및 치료제로도 쓰였다. 16세기 중종 때 평안도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1524년에 평안도 용천에 역병이 돌아 죽은 사람만 670명에 이르고 이로 인해 평안감사가 문책까지 당했다고 한다.
이때 전염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쓰인 약이 바로 나박김치다. 한 차례 전염병이 돌고 난 후인 이듬해 1525년에 중종은 지난해 나돈 전염병이 다시 퍼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의관인 김순몽과 박세거 등을 시켜 《간이벽온방》이라는 의학서를 펴낸다. 여기에 중종이 전염병을 방지하기 위해 순무로 담근 나박김치 국물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한 사발씩 마시도록 하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얼핏 전염병을 막는다며 나박김치 국물을 마시라고 한 것을 옛날 사람들의 근거 없는 민간요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의식동원(醫食同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무가 채소 중에서 가장 이로운 채소고 소변을 다스려 허한 기를 보충하는 데 좋다고 했으니 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에서 환자의 기력을 보충해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됐을 수도 있다.
참고로 전염병 치료제로 이용된 나박김치가 지금의 나박김치와 동일한지는 확신할 수 없다. 사실 나박김치는 중종 때 《간이벽온방》이라는 의학서에 처음 보이는데 한자로는 나복저(蘿蔔菹)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나복(蘿蔔)은 무를 뜻하고 저(菹)는 김치로 절였다는 뜻이니까 나복저가 지금 먹는 나박김치의 원형인지 아니면 무로 담근 김치를 통틀어 나박김치라고 한 것인지도 분명치 않다.
어쨌건 나박김치가 무를 재료로 담근 국물이 있는 김치인 것은 분명한데, 따지고 보면 옛날에는 지금처럼 나박김치와 동치미를 확실하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홍만선은 《산림경제》에서 나박김치는 동치미의 일종이라고 했으니까 두 김치가 지금처럼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8세기 《증보산림경제》에 지금의 나박김치처럼 보이는 김치가 나오는데 바로 무순김치[蘿葍黃芽菹]다. 정월에 땅에 묻어 저장해둔 무를 꺼내어 무순을 자르고 얇게 썰어 무, 파와 함께 버무려 김치를 만들어 먹으면 사람이 갑자기 봄기운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미나리김치가 나박김치의 원형일 수도 있다. 미나리와 연한 배추를 봄 무와 함께 버무려 김치를 담그면 맛이 좋다고 했는데 반드시 실파를 넣는다고 했으니 지금의 나박김치와 한층 가깝다.
따지고 보면 무김치라는 것이 18세기 무렵부터 다양하게 진화한 것일 수도 있다. 장아찌 형태의 무김치가 이후 소금물에 무를 절인 김치로 발전하면서 동치미가 되었고, 이어 무를 소금물에 절인 후 오이, 호박, 부추, 미나리 등과 함께 고춧가루를 풀면서 동치미와는 또 다른 맛이 나는 나박김치로 발전했을 수도 있다.
이런 형태의 나박김치는 임진왜란 후에 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고추가 임진왜란 무렵 우리나라에 전래됐기 때문이다. 고추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김치의 색깔을 낼 때 주로 맨드라미꽃을 사용했다고 한다. 음식도 현대의 기술이 발전하고 진화한 것만큼이나 다양하게 진화해온 것이다.
#음식#역사일반
#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