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자 이형옥
수상작품 생타드레스의 무지개 외 4편
본심 복효근 이형권 윤의섭
예심 전비담 성금숙 정성원 김금비
수상작
생타드레스의 무지개 외 4편
햇살이 베어 문 살굿빛 수평선
하나의 선이 보드란 살점으로 부풀어
입안 가득 채우는 여름날의 생타드레스
프레야의 손끝으로 걸러낸 풍요의 바람이
시원(始原)의 빛과 함께 흩어져 내리는 곳
아픈 꽃은 먼저 핀다
어둠이 스민 숨구멍 속 웅크린 상처 입은 짐승
등줄기 한복판 몽글 돋아난 꽃잎 한 점,
손톱 끝 흰 여울이 통증의 조각으로 발아해 버린 날
포르테시모의 바람 소리도 삼켜버린
천진한 색들로 바다 위를 달리는 라울 뒤피,
허무를 이긴 붓끝은 생의 우듬지를 만들고
그곳에 올라선 나는 거칠 것 없는 바람을 품고
분절된 삶의 프레이즈를 잇는 색의 이음줄
생타드레스의 무지개를 입는다
*생타드레스의 무지개 : 프랑스의 야수파를 대표하는 라울 뒤피의 그림
Lost Breathing
1
제논, 보호복을 뚫고 밀려들던 열기, 살이 물러지던 광구의 온도가 절실한 날이 있다니 놀랍지?
땀으로 흐물어진 피부, 욕망이 식은 땀구멍은 모공만이 선명하지. 배양 중인 신인류들이 가지런히 누운 거대한 냉장고, 달로 가는 수송선 Luna 29호 안에서 나는 홀로 깨어나 버렸어.
2
헤이 디거*, 내핵의 광구는 안전한가? 리치*들의 감시 속에서 목이 굽어버린 질주의 시간들, 어둠이 베어 문 백색의 눈동자에 하늘을 담고 싶었어. 고요의 바다* 위로 번지는 태양 빛이 내게 닿는 상상을 수없이 했지. 달이 몰고 온 어둠은 어디가 끝일까? 경계를 보고 싶었어.
3
적요의 바다에 피어나는 달맞이꽃, 모계로 이어지는 손목 문양이 눈앞에서 빛나고 있어. 달의 시간 변경선을 볼 수 있는 건 경이로워. 우주의 답변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심장이 가라앉고 있어. 어디쯤일까, 소비늄*이 묻힌 곳은?
제단에 바쳐진 제물이 되어 달을 향해 가고 있는 기분이야. 자색의 태양에 가린 채 또렷하게 피어날 우리들의 누이, 어머니의 내일을 위한 신성한 제물. 디거, 달이 가까워질수록 너와 함께한 내 세상은 지워지고 있어.
4
목이 말라, 나의 벗들은 전원이 꺼진 적이 없을 마크툼 4세대 로봇들. 온몸을 스캔하고 기록하지만 필요한 어떤 것도 주질 않아.
정직하고 미련한 내 몸이 내놓는 배설물조차 숨어서 해결할 곳이 없지. 수면캡슐 속 랭그리의 얼굴 아래에서 눈을 붙이고, 덱트의 캡슐 아래에 생존 보고를 하지. 잠든 저들의 눈꺼풀이 떨리는 걸 볼 때마다 부러움은 폭발해.
신은 무슨 이유로 나를 깨웠을까, 제논?
5
Luna 26의 엔진소리, 149명의 숨소리, 마크툼 B34906의 바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갱도 비상구 안에서 모든 절망의 무게로 바닥으로 쓰러지던 날, 그날의 적막이 나를 파고들어.
지옥 불의 유황 연기를 맡으며 갱도를 걷는 나는 L4의 디거, 내핵을 뚫고 들어가 헬륨3을 건져 올리는 용사였지만 아르고스의 살아있는 미라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지.
고요의 바다 돌조각을 네게 주지 못해도 나를 맞아줄래? 너의 미래를 다시 볼 수 있을까?
6
승선일지
D- 27 기내 이상 징후 발생.
D- 26 생명체 반응, 무단이탈 감지.
D- 22 수면캡슐 보관문 강제 개방 시도, 무력 진압.
D- 18 본부 지시사항 전달받음, 수송선 내 비상식량 전무.
D- 15 액체류로 뒤덮인 생명체 발견. 바이탈 사인 전무
D- 7 선내 이상 무.
D- 0
달 착륙장 도착. 탑승자 150명 중 149명 입국 수속 시작.
입국 수속 누락자 즉시 확인 바람.
7
검시보고서
- 수면 캡슐 이상 작동으로 인해 깨어난 한 명의 탑승자 발생. 탑승선 운행 중 일어난 이상 각성 현상에 대처할 매뉴얼 마련 시급. 선내 비상식량과 약품 탑재 요망. 시신 소각.
*리치 : 지구 내핵과 외핵 사이 생겨난 새로운 도시에서 사람들을 관리하는 직책
*디거 : 내핵으로 들어가 광물을 캐오는 직업군
*고요의 바다 : 달의 크레이터(운석구덩이)에 붙여진 이름
*소비늄 : 헬륨3과 함께 지구 에너지 대체자원으로 사용되는 가상의 광물
마마
나는 투명한 詩語가 될래요
들숨처럼 잦아드는 흐려진 음절이 아닌
온전한 노래가 되고 싶어요
마마, 지지 않는 태양이 먼저일까요
뜨지 않는 달이 우로보로스의 꼬리를 물었어요
어제의 내가 베어 문 꼬리가 입속에서 삭아가요
들큼한 침샘에 잠겨 연니(軟泥)가 되어가죠
매일을 살아내는 나는 어떤 궤도에 갇힌 걸까요
아득히 먼 데서 반짝이다 자취를 감춘
문명의 흔적으로 지워지고 싶었어요
온전한 소멸만이 새로운 지상의 답일지 몰라요
마마, 슬픔은 도처에 가득하죠
숨죽인 한숨이 흩어낸 홀씨들이 볼에 닿았어요
누군가의 사라진 하루가 나를 삼키는 것만 같아요
산다는 건 시곗바늘이 이어가는 흔적일까요
공간을 숨겨둔 귀에 속삭여요
시간을 읽어내는 눈이 감겨있으니까요
그림자가 지워가는 기억의 영토 너머
우리의 좌표를 찾을 수 있을까요?
마마, 선택의 시간이 왔어요
숨을 참아요
산도를 거치며 지워진 아가미는
등가교환의 법칙이 있어요
코끝의 숨을 내쉬어야 달숨이 허락되죠
사티의 저울이 무너지는 동안
발끝 그림자로도 뒤돌아보지 말아요
마지막 숨을 확인한 나의 안도는,
미약한 죄의식 따위는 골분(骨粉) 사이
숨겨 둘래요
마마, 그곳이 비좁다 하지 말아요. 부디
손톱달의 세상
슬픔을 삼킨 수선화를 닮은 고흐의 압생트
식도를 타고넘는 불길이 노란색으로 번지고
손톱 끝 반달은 각층이 일지 않은 여린 살,
끝을 누르면 그믐의 밀밭을 덮은 고흐의 밤이 된다
하나를 주고 열을 버려도 채울 수 없던 色
만월이 그의 그림자를 삼킨 밤에야 비로소 채워졌을까
둥근 것들이 품은 세상에 닿지 못한 영혼이여
당신만 어두운 게 아니었어
이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면 다시 붓을 잡았으려나,
나의 고흐
경계 밖에 놓인 몸짓은 부서지기 직전이라 비어있지
발끝이 딛고 선 땅은 바람이 남긴 지문 같아서
눈을 뜨면 길을 찾을 수 없던 당신의 아침을 생각해
두려운 날에는 아무도 모르게 손톱 끝을 눌렀을지도
경계 밖 손톱달의 영역은 우리들의 사북자리
둥근 것들의 언어는 닿을 수 없게
당신이 그리다 만 노란 달이 부서져 내리는
어느 날의 기억
지하철에 오르는 당신을 봅니다
두 손을 모은 뒤 긴 다리를 포개고
의자 사이 몸을 묻더군요
아름다운 관을 가진 사슴이 보입니다
청남의 수조 속으로 잠기는 가문비나무를
성큼 안아버린 2월의 노을
뿔 위로 내려앉아 흐르던 빛의 물결이
당신 앞에 선 제 볼을 물들입니다
바람이 흩어낸 성긴 머리칼에
백야의 크레바스가 새겨져 있네요
결 사이 깊은 골을 더듬으면
아무도 본 적 없는 시간의 지층을 찾을 것 같아
손이 당신에게 뻗어 갑니다
허락 없이 무릎이 닿는다면
당신의 눈은 어떤 색으로 일렁일까요
덜컹거리는 리듬을 핑계로 닿고 싶어요
잇닿은 날들을 상상해 봅니다
당신은 불길을 견디는 숯을 달구며
달을 품은 항아리를 만들다가
머리에 이고 온 소담한 도시락에
땀을 훔치던 숲의 사내였을지도
당신이 잊은 날들을 떠올리며
내려다보고 서 있는 나는 누구일까요
덜컥 당신에게 안기고 싶습니다
당신의 목에 나도 고개를 묻고
놀란 숨으로 커지는 눈동자가 마주한다면
눈부처로 일렁이는 숲의 날들이 깨어날까요?
이국의 언어는 내릴 곳을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어떤 곳을 떠날 때
우리의 일부를 남기죠*
떠나더라도 머무는 영원의 조각처럼
당신이 깨어버린 도자기 파편은
제 손을 찌르고 있죠
감은 눈을 내려다보다
모서리 접은 시집을 두고 내립니다
당신이 잊은 언어로 쓰인 노래들을
느리게 읽어갈 손끝이
오래전 나를 빚던 날로 돌아가는 기억을
어루만지길 바라면서요
*리스본행 야간열차 속 대사를 인용
수상소감
땅이 녹기 시작한 3월부터 오르기 시작한 산에서 눈여겨보지 않았던 존재들의 노래를 듣습니다. 소란한 시간을 걸러내기 위해 시작한 산책에서 매일 새로운 노래를 마음에 담아옵니다. 니체가 말한 사고가 멈추어 버린 순종적인 낙타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천진한 미소로 살아갈 수 있는 일상을 꿈꾸며 좁고 긴 산길을 묵묵히 걷고 또 걸었습니다.
여리고 순한 초록빛의 애벌레가 둥글게 몸을 굽혀가며 지나는 길을 따라 오릅니다. 산속 들짐승들의 먹이들을 가만히 놓아두고 가는 사람들의 인심에 미소 지으며 누군가의 온기가 주는 따뜻함에 제 마음의 온도도 같이 올려봅니다. 그러다 중턱 어디쯤 앉아 쉴 때면 올라오는 내내 들었던 다양한 노래들이 마치 교향악단의 연주처럼 아름다운 소리들로 합쳐집니다.
그 속에서 저도 저만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기사 한 도막에서 메모해 둔 이름 모를 누군가의 이야기부터, 제가 속한 세상과 저의 연결고리들을 하나씩 꺼내봅니다. 무뎌진 마음밭을 정결한 생각의 끌로 깨우며 새로운 단어들로 오래 곰곰 하며 쓰고 지우고, 다시 씁니다. 다른 존재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건 마음을 여는 일이고, 마음을 열어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소리들이 글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던지요.
세상 밖으로 꺼낸 제 노래들을 들어주시고, 귀한 상으로 더 열심히 노래할 이유를 선물해 주신 『시산맥』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평소 존경하는 시인분들이 많이 계시는 시산맥의 다양한 시들을 보며, 함께할 수 있기를 꿈꾸며 동경했습니다. 이곳에서 제가 함께 노래할 수 있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심사위원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0월, 햇살에 바삭하게 구워진 잎들이 사각사각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가을날의 지리산을 꿈꿉니다. 산울림의 “그대는 이미 나”를 들으며 둘레길을 걸어보는 상상도 해봅니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지는걸요.
앞으로 『시산맥』이라는 넓고 부요로운 시의 영토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무럭무럭 자라는 자작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마음 다해 감사를 드립니다.
이형옥 약력
1979년 출생, 현재 충남 보령 거주.
2002년 원광대 졸업.
비바플루트앙상블 사무국장.
빛을 찾는 사람들 사진협회 회원.
현 고등수학 강사 & 입시 컨설턴트.
제19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
이메일 frogswin@naver.com
심사평
아주 젊은 응모자를 비롯하여 130여 명 응모자의 작품이 전비담, 성금숙, 정성원, 김금비 예심위원의 손으로 넘겨졌다. 예심위원들은 한 편 한 편 공들여 읽은 후 총 6명의 본심작을 추천하였다.
이형옥 「생타드레스의 무지개」 외 5편
오형선 「터널」 외 4편
박니은 「어느 수요일 밤」 외 5편
김윤아 「수유」 외 4편
김성윤 「나는 마른 잎사귀처럼 몸을 말고 한 곳에 오래 앉아 있었다」 외 4편
본심 위원들은 세밀하게 작품을 검토하면서 신인으로서의 패기와 새로운 상상력 그리고 감각적인 낯섦에 집중하였다. 최종으로 남은 이형옥의 작품과 오형선의 작품 중 숙고 끝에 이형옥의 작품이 최종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이번 본선에 오른 작품들은 녹록지 않은 삶을 신선한 시로 구성해내는 기량과 섬세한 감수성이 돋보인다고 평했다.
신인들의 작품을 읽는 일은 항상 마음 설레는 일이다. 아직 관습화되지 않은 새로운 시 세계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인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새로움에 대한 강박증이 크다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할 때 시적 새로움보다는 엉뚱한 상상과 표현, 비유의 과잉과 중첩으로 인하여 어색한 작품이 되고 만다. 수상자로 뽑힌 시인의 작품 또한 신화적인 시어가 돌출하여 독자의 상상을 신화적 공간으로 끌고 가기도 하지만 이것은 결국 현실을 우회하여 환유하는 장치로 보인다. 결국 고통과 고독으로 요약할 수 있는 타인과 스스로의 삶에 대하여 연민하고 위로하며 공감하려 하는 메시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형옥의 「생타드레스의 무지개」 외 4편 작품들도 그러한 어색함을 일정 수준 극복하고 유의미한 새로움을 확보하고 있다. 주제의식과 표현 방식이 엇나가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도 장점이다. 「Lost Breathing」은 마치 SF를 시로 구현하여 놓은 듯하여 그 독특함에 눈길이 간다. 이처럼 기존의 예술작품을 매개로 한 메타적 상상이나 현대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적 상상도 시적 다양성의 차원에서 흥미롭게 읽었다. 또한, 독창적인 상상의 세계를 다각적인 면에서 밀도 있는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기량은 시를 꾸준히 써오면서 자신만의 시적 지향점을 모색해온 결과일 것이다.”라고 심사위원들은 선정 사유를 밝혔다.
수상자는 앞으로 시단에서 새로운 시의 발자취를 남기기를 바라며, 아쉽게 낙선한 분들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표한다.
심사위원 복효근(글) 이형권 윤의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