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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군 생활했던 우리 군종 형제가 SNS에 올린 이야기들입니다. 좀 추려서 정리를 하면 장편 소설 대지로 193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벅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중국에서 아버지를 따라 오랫동안 한 40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대한 사랑이 아주 대단한 사람으로 이렇게 알려져 있어요. 그녀가 자신의 작품 살아있는 갈대에서 한국을 이렇게 예찬했습니다. 한국은 고상한 민족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다. 그리고 이 여인이 이렇게 유서를 남겼는데 유서에도 한국이 거론이 됐어요.
내가 가장 사랑한 나라는 미국이며 다음으로 사랑한 나라는 한국이다.
이렇게 그의 유서에 쓰여져 있었습니다. 왜 한국에 대한 이렇게 특별한 애착을 가졌을까요? 중국에 더 많이 더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거주하는 기간이 지금보다 훨씬 더 짧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한국을 사랑했을까요?
한국에 대한 특별한 경험이 이 여인에게 이 작가에게 있었습니다. 한 번은 길을 가다가 이게 감나무에 따지 않는 감이 이렇게 달려 있는 거예요. 우리가 까치밥이라 그러죠. 그래서 사람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 감은 다 따지 않고 남겨두셨습니까? 혹시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따기가 힘들어서 남기신 겁니까
라고 물었어요. 우리는 이유를 알죠. 겨울에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까치들을 배려해서 이 감을 남겨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까치밥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 작가가 폴백이라는 작가가 너무 감동을 받은 거예요.
이 외에도 몇 가지 물론 한국에 와서 안 좋은 경험을 하고 힘든 경험한 사람도 있지만 펄벅이라는 이 작가는 한국에서 너무 좋은 경험을 한 거예요. 그래서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더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홍보대사처럼 그의 소설에나 그의 연설, 그의 어떤 인터뷰나 또 그의 유서에 한국에 대해서 다 언급해 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인 거예요. 더 짧은 시간 한국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큰 감동이 있었어요. 감동을 받고 이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인들에 있는 동물을 배려하는 사랑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감동을 받으면 사랑하게 돼요. 그리고 감동을 받으면 자랑하게 되고 감동을 받으면 존경하게 되고 따르게 됩니다. 내가 가지지 못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사랑하게 되고 귀하게 여기게 되는 거예요.
펄벅 여사의 이야기에 전도의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보통 우리가 교회에서 전도하자고 하면 무척 힘이 들어요. 왜냐하면 나 혼자 교회 다니는 것도 힘든데 사람들을 우리 교회 오자고 하는 거 더 힘들고 또 따지고 보면 교회에 대해서 이미지가 다 좋은 것도 아니잖아요. 한 교회 한 30년 40년 다니면 몇 번 부딪힌 사람도 있고 담임 목회자하고도 좋지 않은 관계도 있고 어떻든 여러 불편한 관계들이 있었을 게 뻔하기 때문에 그리고 전도 축제를 1년에 한 번 아니면 두 번 수십 년을 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매년 전도 축제를 하자고 하면 마음이 되게 답답해요. 내가 도대체 누구에게 전도를 해야 될까 내 영혼도 잘 간수하지 못하는데 내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까 이런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펄벅 여사의 이야기에 답이 담겨져 있어요. 우리에게 다른 사랑이 있는 것, 나에게 다른 가치관이 있는 걸 보여주면 세상은 나에게 감동하고 또 우리 교회에 감동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게 하고 사랑하게 되고 자꾸 자랑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안에는 이미 이 남다른 사랑이 있어요. 여러분 이 말을 들으면서 내 안에 그런 건 없는데 내 내 누구에게 감동을 시킬 만한 사랑은 나에게 없는데라고 하지만, 아니 이미 여러분과 저는 이 사랑이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세상이 모방할 수 없는 사랑이 우리 안에 있고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사랑이 교회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 위대한 사랑을 가진 공동체가 교회이자 그리고 사람들이 성도들인 거예요. 이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사실을 가지는 것은 이 사랑을 가지는 건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제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어떤 사랑일까요? 이미 우리가 받고 우리가 경험한 사랑, 그러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한 사람이라면 이 사랑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까요? 이 교회를 수십 년 다니다 보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인생의 최소한 한두 번 정도는 아니면 수십 번 여러 번 동안 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내가 여기에 있고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있을 수밖에 없다는 있어야 하는 그런 경험을 한 분들이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제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어떤 사랑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이런 위대한 사랑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사랑만 잘 나타내고 드러내 보여줘도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고 존경하게 되고 교회를 오게 되는 거예요.
첫 번째 우리가 가진 사랑은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인간의 형체를 입고 육체로 태어나게 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영원한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거냐면 아들의 목숨을 주고 우리를 구원한 사랑인 거예요. 아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아들의 목숨을 주되 재물로 줬어요. 희생 제물로 아들을 사용하셔서 여러분과 저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거예요.
원래 우리는 태어날 때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 된 자로 태어났던 거예요. 근데 하나님이 아들을 재물 삼아서 우리를 우리와 화해하시고 여러분과 저를 용서하시고 화해하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거예요. 이 놀라운 사랑이 여러분과 저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을 우리가 잘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이 사랑을 이 땅에서 예를 찾는다면 손양원 목사님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삼아서 아들에게 부어줄 사랑을, 그 아들을 살인한 양자 삼은 아들에게 그 사랑을 부어줬어요. 여러분 그러니까 용서가 쉬운 일인가요? 쉽지 않아요. 목사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고 그리고 아들로 삼을 수 있었어요.
여러분 용서는 평생 걸리는 사람도 있어요. 한꺼번에 용서가 안 돼서 평생 용서하다가 결국 용서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하는 사랑이에요. 평생 걸려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게 하는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이 순영은 목사님에게 있었고, 이 목사님은 그 아들 대신 살인자를 양자 삼아서 평생 아들 대신해서 키웠습니다.
여러분 아닌 것 같지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마음에 의심이 있지만 우리가 가진 사랑이 이런 사랑이에요.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돼요. 교회는 아주 위대한 사랑,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 있는 공동체이고, 여러분에게는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교회는 이 놀라운 사랑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이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교회를 회복하는 것이고, 성도의 삶을 회복하는 길이에요. 많은 성도들이 이 사랑을 잊어버렸거나 이 사랑이 있는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비록 여러분과 제가 형편이 어떠한지 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여러분과 저에게는 이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돼요. 그래야 세상도 사랑할 수 있고, 교회도 사랑할 수 있고, 그리고 나와 대립관계에 있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이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면 사람들은 감동을 받게 되고, 그리고 교회를 방문하게 되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랑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첫 번째 사랑은 아들을 제물로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면, 여러분과 제가 가지고 있는 두 번째 사랑은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 없는 분이 죄인이 되셨고, 우리 대신 죄를 지으셔서 우리를 영원한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당해야 될 영원한 고통을 예수님이 다 당하셨어요.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사 여러분과 저에게 영원한 삶까지, 영원한 생명까지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고 곧 교회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어디에서나 어디에서 볼 수 없는 만날 수 없는 사랑이에요. 이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남에게 있는 좋은 것을 아는 인생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내게 있는 좋은 것을 아는 인생이 돼야 돼요.
대부분의 성도들은 남의 있는 거, 남이 가지고 있는 걸 부러워하며 살아가요. 나에게 어떤 장점이 있는지, 나에게 어떤 훌륭한 모습이 있는지는 잘 몰라요. 그래서 열등감에 빠지거나 아니면 자기를 비관하거나 그래서 더 힘든 삶을 살아가요. 나의 삶의 회복 나 자신의 회복은 나에게 어떤 것이 있는 자를 아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교회가 어떤 사랑을 가졌는지를 아는 것, 교회의 회복이고 성도가 어떤 사랑을 가졌는지를 아는 것. 이것이 곧 성도의 회복인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목숨을 담보로 선교하고 있는 많은 선교사분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들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그 나라에 전파됐고 그 민족과 그 부족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목숨을 줄 수 있는 사랑이 교회가 가진 사랑이고 성도가 가진 사랑이에요.
대한민국의 복음이 전해진 것도 수많은 선교사들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 위에 교회가 서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 교회는 그냥 이 땅에 송정동 땅에 서 있는 게 아니에요.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내준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선교사들의 죽음 위에 이 교회가 서 있는 거예요. 그 사랑을 그 자신을 죽음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세우는 그 사랑을 우리가 가지고 있던는 것입니다.
짐 엘리엇이라는 미국 침례교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에콰도르 원주민들에게 선교하려다가 순교를 당했어요. 미국의 명문대인 휘튼대를 졸업하고 그리고 선교 훈련을 받고 아우카족이라는 원주민을에게 복음 전하려고 하다가 성경 한 권도 전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도 전하지 못하고 함께 갔던 5명이 전원 다 사망했어요. 이 부족은 원래 선교사들을 그리고 외지인들을 죽이기로 악명 높은 부적이었어요. 이 이전에도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하여튼 그 지역을 그 지대를 침입한 외지인들은 소규모의 외지인이겠죠. 군사가 몇백 명 가면 어쩔 수 없겠지만 소규모의 외지인들을 다 죽인 부족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이 선교사들에게 총이 있었어요. 얼마든지 총을 꺼내서 그들을 향해 쌀 수 있었는데 총을 사용하지 않고 그들의 창과 칼에 죽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5명이 헬기를 타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족에 접근했어요. 예수 한마디 하지 못하고 성경 한 권 전하지 못하고 순교했습니다. 과연 이 선교가 가치가 있을까요? 그런데 2년 후에 이 짐 엘리엇이 죽은 2년 후에 1958년 이 엘리엇의 아내가 엘리자베스예요. 딸의 이름이 밸러리인데, 이 엘리자베스와 이 벨러리가 남편과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아우카족을 또 찾아갔어요.
여러분 치가 떨리지 않을까요? 남편을 죽인 사람을 보는 것은 치가 떨리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남편을 죽인 부족을 또 찾아갔어요.
그런데 이 부족에게 특이한 습관이 있었어요. 바로 여자는 죽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자는 남자는 다 죽이지만 근데 보통 증거를 탐험하고 또 선교하기 위해서 선두에 선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잖아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접근한 모든 남자들은 다 죽었어요. 근데 이번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갔는데 이 사실을 알고 간 게 아니에요. 여자가 갔는데 이 부족에겐 여자는 죽이지 않는 관습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 엘리자베스가 딸 벨러리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이 민족이 다 이 부적이 다 예수 믿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어요.
여러분 이 부족의 인원이 몇 명인지 아세요? 남자가 8명, 여자가 50명, 이 몇 명 되지 않는 부족에게 복음 전하기 위해서 5명이 순교했고, 그리고 그 아내와 딸은 다시 남편과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그들에게 복음 전하기 위해서 그 땅을 밟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진 사랑이 이런 사랑이에요. 이 사랑이 교회가 가졌고 이 사랑이 성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인 겁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려면 교회가 세상에서 위대해지려면 우리가 가진 것을 알아야 돼요. 교회에서 없는 것만 찾지 마세요. 성도들 중에 보면 교회에 없는 거 찾아요. 우리 교회는 뭐가 없고 뭐가 없고 아니 없는 게 있을 수 있죠. 교회는 얼마든지 없는 게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있는 걸 보면 되잖아요. 교회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사랑이 우리 재단에 우리 교회에 그리고 예배한 여러분에게 있다는 거예요.
있는 것으로 사랑하면 돼요. 없는 걸 찾지 말고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복음 전한 이 짐 엘리엇을 죽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은 목사가 되어서 그 부적의 교회의 지도자가 됐고, 그리고 함께 살인에 동참했던 두 명도 다 회심하고 그 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그래서 그 남편이 죽은 그 강에서 딸 벨로리도 세례를 받고 그 부족들도 함께 세례받아서 다 예수 믿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위대한 사랑이 있어요. 이 사실을 아셔야 돼요. 이제는 없는 거 찾지 마시고 교회에 있는 것 나에게 있는 거 찾으십시오. 성도에게 교회에게 이 위대한 사랑이 있어요. 숨겨져서 좀 작아서 잘 안 보일 수 있지만 이 위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됩니다.
16절을 표준 새번역으로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 함께 읽습니다. 시작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고 이 사랑이 있는 자 안에 하나님이 함께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위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것은 성도가 서로 사랑하면 이 위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행복하고 교회가 좋아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이 위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거예요. 서로 사랑하는 성도들은 이 하나님의 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이 있는 사람인 거죠. 이 위대한 사랑은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는 사랑이고, 이 위대한 사랑은 우리의 가정을 온전케 하는 사랑이고, 이 위대한 사랑은 좌절과 절망에 빠진 영혼들을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살리는 사랑이고, 이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사랑이에요. 이 위대한 사랑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좀 간추려도 두 가지로 정리하면 첫 번째로는 이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고 고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사랑이에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한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죽은 영혼을 살리는 작업인 거예요. 영혼을 살리는 긴급 호흡을 압박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심장이 멈춰지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가슴에 압박을 하잖아요. 흉부 악밥을 하는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죽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흉부 악밥과 소생술과 같은 거예요.
여러분과 저는 주변에 많은 죽은 영혼들에게 영혼 소생술을 해야 되는 사람인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영혼을 살리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 사랑을 전하는 것 그러면 죽은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죽은 영혼이 살아나게 하는 사역이 전도 사역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사랑입니다. 전도는 한 인생의 영혼을 회복시키는 영혼을 고치는 사랑인 거예요. 전도는 한 영혼을 마귀에게서 빼온 것이 전도인 겁니다. 우리는 마귀의 자녀로 태어났어요. 마귀의 자녀로 태어난 자녀들을 하나님 자녀 되게 하는 것이 곧 전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영혼을 회복시키는 것, 죽은 영혼을 살리는 거예요.
우리보다 더 좋은 육체를 가지고 더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육은 살아있어도 영은 죽어 있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건 그 사람의 육의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에요. 죽어 있는 영혼에게 복음 전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부자라고 복음이 필요 없는 게 아니에요. 왜 그 사람들 영혼은 죽었으니까 이쁘고 잘생겼다고 힘이 좋다고 해서 전도가 필요하지 않은 거예요. 왜 그의 영혼은 죽었으니까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잘 나가는 인생을 위해서 해서 복원이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그의 영혼은 죽었으니까 본질적으로 전도는 영혼을 구원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전도는 인생의 방향을 조금 바꾸는 게 아니에요. 인생의 마음을 약간 고쳐 먹도록 하는 게 전도가 아니에요.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게 전도예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조금 삶의 방향이 바뀌어지면 조금 인생이 바뀌어지면 좋겠다. 아니요. 물론 바뀌어지긴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이 전도라는 거예요.
마음을 조금 바꾸고 생각을 조금 바꿔서 세상을 살게 하는 게 아니라 영혼을 살려서 하나님 자녀로 살게 하는 영혼 심폐소생술을 하는 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길가에 죽어 있는 사람들을 호흡이 멈춰 있는 사람들을 방치하면 방조죄죠. 일종의 회장이 우리를 법원에 감옥에 가두지는 않지만 우리의 양심은 양심은 죄책감을 가져요. 내가 심폐소생술을 배웠으면 저 사람을 살렸을 텐데 내가 병원이나 이런 데 근무했으면 내가 저 사람을 살려 이런 마음도 안 가져보나요? 우리는 길을 걸어다니는 우리 집에 있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마음을 가져야 돼요. 이게 정상적인 여러분과 저의 영혼의 상태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20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야고보서 5장 20절 시작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라.
전도는 뭐예요? 영혼을 구원하는 사망에서 건지는 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영원히 위로받는 거예요. 우리가 세상에 살 때 우리의 마음과 육체는 위로받았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혼은 위로받지 못했어요.
왜요? 진정한 영혼의 위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만드신 분에게로부터 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도는 육체를 위로받는 걸 넘어서서 여러분 교회에 오면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육체의 위로를 받아요.
근데 전도는 육체의 위로를 넘어서 마음의 위로를 받게 하고, 마음의 위로를 넘어서 영혼의 위로를 받게 하는 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참 평안을 전해주는 이웃에게 참 평안을 전해주는 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여러분 만드신 내게 돌아가는 것 얼마나 위로가 될까요? 내가 만드신 내가 누군지 몰랐어요. 누가 복음을 전해서 내가 만든 이에게 돌아갔어요. 얼마나 위로가 될까요? 여러분 하나님 없는 잠시의 세상을 상상해 보셨나요? 만약에 여러분과 제 인생에 10분만 하나님이 없어졌어요. 우리가 어떤 삶이 될까요? 우리는 지금 교회 다니니까 지금 우리 예수를 믿으니까 지금 우리는 기도를 하고 있으니까, 지금 우리가 예배하고 있으니까 이 위로의 힘을 잘 몰라요. 교회를 떠나보면 하나님을 부인해보면, 하나님을 안 믿어보면 영혼이 얼마나 황폐해지는지 알게 됩니다.
여러분 온전한 영의 위로는, 영혼의 위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가장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비뚤려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위로라는 단어는 가까이 부르다는 단어예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가까이 불러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권면하시고 위안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까이 가면 어떤 위로가 올까요? 여러분 하나님 가까이 가보셨어요? 정말 하나님 가까이 가보셨어요? 기도 중에, 예배 중에 정말 하나님이 가까이 가보셨어요? 상상할 수 없는 세상, 위로할 수 없는 위로가 하늘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까이 있는 것 위로가 돼요. 사람도 가까이 있으면 친밀한 사람 위로가 돼요. 친구들 가까이 있으면 위로가 되는데 만드신 이가 우리 가까이 있을 때 우리가 얼마나 위로가 되고 평안을 누리게 될 거야 거야 될까요?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 되는 거예요. 세상이 위로할 수 없는 인생들이 위로받게 되고, 세상에 위로받을 수 없는 인생들이 위로받게 되는 것이 전도이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사랑은 희망 없는 우리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는 사랑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희망을 빼앗아가여. 이 땅의 나라들이 정치가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희망을 빼앗아가잖아요. 세상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처럼 보여요. 직장이 사업장이 여러분과 저에게 희망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희망을 빼앗아갑니다.
젊을 때는 세상이 여러분과 저에게 희망을 주는 것처럼 하다가 늙게 되면 다 희망을 빼앗아가요. 늙어서 세상의 희망을 다 빼앗아가지 않던가요?
늙은 너는 필요 없어. 병든 너는 필요 없어. 이제 기억력 없는 너는 필요 없어. 이쁘지 않은 눈은 필요 없어. 잘 생기지 않는 힘이 없는 노인은 필요 없어.
이게 세상이 나이 든 우리에게 하는 말이잖아요. 세상은 젊었을 때 잠깐 희망을 주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에게 절망을 주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반대로 믿음으로 살면 살면 살수록 희망이 생겨요. 나이가 들어도 희망이 생겨요. 죽기 직전에도 희망이 생겨요.
여러분 죽기 직전에 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어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기 직전에 희망이 없어요.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죽기 직전에 희망이 있어요. 천국 간다는 희망, 하나님을 뵙는다는 희망이 있어요.
한두 번 말씀드렸지만 교수님 친구가 한 20여 일 넘게 의식이 없이 있었어요. 전국의 교회들이 기도했고 기적적으로 친구가 살아났어요. 지난주에도 만났어요.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좀 이지적인 친구예요. 그래서 학교에서도 약간 반골 기질이 있어요. 이 친구 입에서 내가 천국을 봤다. 할렐루야 내가 천국에 있던 걸 봤다. 일출아 천국이 있어.
여러분 우리는 죽기 직전에도 희망이 있는 사람이에요. 얼마나 멋진 삶을 가진 사람일까요? 이 사랑을 이 삶을 세상에 알려줘야 돼요. 죽기 전에 인생은 희망이 없어요. 오직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만 희망이 있는 거예요.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20대가 가나안 성도가 가장 많다는 거예요. 교회 안 나가는 성도 이걸 가난한 성도라고 해요. 그다음에는 30~40대 20대 기독교인 가운데 루저 20대 중에 크리찬이라고 쓴 사람들 중에 자기 종교를 안에 중에 45%가 교회를 안 나간대요. 그러니까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은 가지고 있지만 나는 크리스찬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는 20대가 45%, 30대가 35%, 40대가 36%.
그럼 언제 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까요? 20대 때 대부분 대학을 진학하면서 교회를 떠난답니다. 31%가 대학 시절에 하나님을 떠나고 21%가 24%가 학창 시절에 교회를 떠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청년들이 우리의 자녀들이 왜 교회를 떠날까요?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지만 5가지로 추려보면 목회자 목회자의 잘못을 보고 두 번째로는 개인 신앙 자기가 자기 신앙을 관리하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고 자꾸 믿음에서 멀어져서 떠나게 되고, 세 번째는 공동체 공동체가 너무 자기를 힘들게 해요. 네 번째로는 교회 문화 다중에 교회도 이미 기득권의 세력이 되었으니까 젊은 세대들에겐 이런 말씀을 드리면 죄송하지만 저나 여러분이 꼰대처럼 보일 수 있어요.
이 교회 문화 그리고 다섯 번째로는 헌신 강요. 그래서 청년들이 20대에 교회를 떠난답니다. 이 모든 원인을 다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요. 더 나은 가치를 담은 모습이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다. 세상보다 더 나은 가치를 담은 교회의 모습이 교회도 적고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청년들이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했다면 떠나지 않았을 거예요. 목회자가 정말 믿음의 삶을 영적인 삶을 살면 떠나지 않았을 거예요.
교회 여러분들이 청년들을 품고 이들의 절망을 이해해 주고 함께 기도해 줬다면 이렇게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았을까요?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고 사랑스러웠다면 교회를 떠나지 않았을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는 거예요. 교회가 담아야 될 이 멋진 가치관을 담지 못해서 교회를 떠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국내에 가장 큰 교단이 가나안 교단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교회를 떠난 사람이 많다는 거예요. 5월 26일 행복 축제가 있습니다. 가장 귀한 복음을 나로부터 다 함께 열심히 전도해야 되지만 우리 마음에 이런 걸 좀 가졌으면 좋겠어요. 다시 청년들과 또 이웃들과 내 친구들이 감동하는 사랑을 우리가 가졌으면 좋겠어요. 예수를 전하는 것보다 내가 이 사랑을 가진 자가 가진 걸 알고 이 사랑으로 살면 사람들은 나에게 감동받아서 내가 믿는 하나님을 찾게 돼요.
야 니가 믿는 하나님 나도 믿고 싶어. 너는 그렇게 힘든데 어떻게 마음이 평안하니 너에게 평안을 주는 그 하나님을 나도 믿고 싶어. 너희 집에 그렇게 문제가 많은데 너가 어떻게 이렇게 희망을 갖고 늘 기쁨으로 살아가니 니가만 있는 그 하나님을 내가 믿고 싶어
라고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 보여주면 세상은 우리의 사랑을 보고 우리의 사랑을 찾아오게 되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이 사랑으로 힘들고 괴로워하는 세상 사람들을 환대해야 돼요. 교회에는 환대의 문화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이 오래 떠났던 사람들을 마치 아버지가 탕자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줬던 것처럼 교회에는 환대의 문화가 있어야 돼요. 좀 실수하고 실패하고 돌아와도 좀 안아주는 문화가 있어야 돼요. 그 사람들은 서정과 더 나은 교회를 보고, 세정과 더 나은 교회 다니는 어른들을 보고 성과 더 한 교회 지도자를 보고 결국 다시 하나님께로 그 사랑이 그리워서 돌아오게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가 한 석 달 동안 준비하고 기도할 건데 열심히 전도도 하지만 이 사랑을 다시 회복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청년부를 품을 수 있는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3040 세대 교회를 가장 많이 떠난 세대예요. 감사하게 최근에 우리 교회는 3040세대가 좀 와요. 잘 모르시죠? 그분들한테 따뜻하게 인사해줘야 돼요. 품어도 주고 이해도 해주고 그래야 이 사람들이 세상에 알려요.
야 우리 교회 가면 우리를 환영해줘, 우리 교회를 가면 우리를 환대해줘
라고 우리에게 소식을 알리고 그들이 우리 교회로 돌아오게 될 거예요. 우리 교회가 이 사랑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실은 우리 교회는 304종 고수 세대에 대한 대책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가장 죄송하고 요즘은 일단 엄청나게 고민을 한 건 맞아요. 그리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이제 환경적인 부분도 3040 세대들이 좀 좋아할 만한 환경들을 조금씩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이제 본당이 끝나서 유아실도 좀 고치고 어쨌든 이들이 남아서 교제하고 쉴 수 있는 공간들도 만들고 또 아동센터에 도서관이 기가 막히거든 이것도 개방해서 거기에서 아이들과 함께 오후에 쉴 수 있도록 하고 하여튼 여러 방법들을 찾으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환대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