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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3 장 성찬식
주님의 집의 상징들은 단순하고 똑똑히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상징들로 말미암아 표시된 진리들은 우리들에게 가장 깊은 의의가 있다. ― EV, 273.
그리스도께서는 두 제도와 그 의식에 따르는 두 큰 축제 사이의 전환점에서 계셨다. 흠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인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속죄물로 지금 막 바치려고 하였으며 이렇게 함으로 그분은 4천년 동안 당신의 죽음을 지적하여 온 예표와 의식의 제도를 끝내실 것이었다.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잡수실 때에 그분의 큰 희생에 대한 기념이 될 예식을 유월절 대신으로 세우셨다. 유대인들의 민족적 축제일은 영원히 끝나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예식은 각 시대를 통하여 모든 나라에서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 지켜야 할 예식이었다.
유월절은 애굽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기념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해마다 자손들이 이 의식의 뜻을 물을 때마다 그 역사를 되풀이해서 말해 주도록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다. 이렇게 함으로 경이로운 구원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롭게 간직될 것이었다. 성만찬 예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로 이루어진 큰 구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주신 바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능력과 영광으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의식은 기념되어야 한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그분의 위대한 사업은 우리 마음 속에 항상 새롭게 간직된다.
그리스도의 모본은 성찬 예식에 사람들을 제외시키는 것을 금하신다. 공개된 죄로 인해 죄지은 자가 제외되는 것은 사실이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가르치신다(고전 5:11). 그러나 이 이상은 아무도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이 경우에 참석시킬 것인가를 말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그 까닭은 누가 마음을 읽을 수 있겠는가? 누가 알곡에서 가라지를 골라 낼 수가 있겠는가?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그 까닭은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고전 11:28, 27, 29)기 때문이다.
합당치 못한 어떤 사람이 참석하였다는 이유로 아무라도 참석을 거부하지 말 것이다. 모든 제자들은 공개적으로 참석하므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증거하도록 요청을 받는다.
제자들과 함께 떡과 포도즙을 나누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구주가 되심을 서약하였다. 그분은 그들에게 새 언약을 선포하셨는데 이를 통하여 그분을 영접하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얻는다. 이 언약으로 금생과 내생을 위하여 내려 주실 수 있는 모든 축복은 그들의 것이 되었다. 이 언약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피로 비준(批准)될 것이었다. 그리고 성만찬의 집전은 타락한 전 인류의 한 부분으로서 개별적으로 저희 각개인을 위하여 희생하신 무한한 희생을 제자들 앞에 생각나게 할 것이었다.
종의 종
제자들이 다락방에 들어갔을 때에 그들의 마음은 적개심으로 가득 찼다. 유다는 왼편으로 그리스도의 다음 자리를 헤치고 들어갔으며 요한은 바른편으로 나아갔다. 만일 그 곳에 제일 높은 자리가 있다면 유다는 기어코 그것을 차지하려고 하였는데 그 자리는 그리스도의 옆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유다는 반역자였다.
또 다른 알력의 원인이 있었다. 잔치가 있을 때에는 종이 손님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으며 이 때는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 항아리와 대야와 수건이 그 곳에 있었으나 종이 없었으므로 제자들이 이 일을 해야만 하였다. 제자들은 모두 자존심이 상할 그 종의 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모든 제자들은 냉정한 무관심을 나타냈으며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듯 무감각하게 보였다. 그들은 잠잠히 앉아서 스스로 낮은데 처하여 겸손하기를 거절하였다.
서로 봉사하려고 움직이는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고 한동안 기다리셨다. 그 다음에 거룩한 교사이신 예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셨다.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는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제자들은 놀라움으로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조용히 기다렸다.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요 13:5)셨다. 이러한 동작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였다. 쓰라린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저희 마음에 가득 찼다. 그들은 무언의 책망을 이해하였으며 다 같이 새로운 빛 가운데서 자신들을 바라보았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들의 이기적 정신 때문에 그분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으나 그분은 그들의 갈등에 대하여 그들과 논쟁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분은 그들이 결코 잊지 못할 한 모본을 보여 주셨다. 제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쉽게 흩어지거나 꺼지지 않았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만물을 그의 손에 맡기셨고 당신은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분은 당신의 충만한 신성을 의식하셨지만 당신은 왕관과 왕복을 벗으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지상 생애에서 그분이 마지막으로 행하신 일들 중의 하나는 몸소 종과 같이 수건으로 허리를 두르시고 종의 일을 행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그분의 존엄성이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시키고자 하셨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무한히 높으신 분으로서 그분은 그 예식에 은혜와 의의를 부여하셨다. 그리스도처럼 높임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몸을 굽혀 가장 낮은 의무를 감당하셨다. 육적인 마음에 머무르며 자신을 섬김으로 굳어지는 그 이기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잘못 인도되지 않도록 하시고자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겸손의 모본을 보이셨다. 그분은 이 위대한 주제를 사람의 수중에 남겨 두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셔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분이 몸소 그의 제자들에게 종으로 행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가장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서로 다투고 있는 반면에 모든 사람이 그를 향하여 무릎을 꿇으며 영광의 천사들도 섬기기를 영광으로 생각하는 그분이 허리를 굽혀 자기를 주님이라 부르는 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그분은 당신을 팔 자의 발을 씻기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 가운데서 단지 친절한 행동만을 하라고 명하신 것은 아니었다. 여행에서 더러워진 먼지를 없애려고 손님들의 발을 씻기는 데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종교적 예식을 세우고 계셨다. 우리 주님의 그 행동으로 이 겸손 예식은 성별된 예식이 되었다. 예수님의 겸손과 봉사의 교훈을 항상 기억하기 위하여 제자들은 이 의식을 지켜야만 하였다.
준비하는 의식
이 예식은 성만찬 예식을 준비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교만과 알력과 높고자 하여 다투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예수께서 당신의 겸손을 기념하여 먼저 준수하도록 지정하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의식에 나올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생명과 영광이 되시는 주님의 아래와 같은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2-17). 인간에게는 그의 형제들 보다 자신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자아를 위해 일하며, 가장 높은 자리를 구하는 성벽(性癖)이 있어서 이것들은 때때로 악한 억측들과 정신적 괴로움의 결과를 초래한다. 성만찬 예식에 앞서 행하는 의식은 이 오해들을 제거하고 인간에서 이기심을 쫓아내며 자고의 버팀에서 내려와 그의 형제를 섬기도록 겸손한 마음으로 이끄는 의식이다.
거룩한 순찰자가 이 때에 하늘에서 내려와 이 의식이 심령을 살피는 의식, 죄를 뉘우치는 의식, 그리고 사죄의 복된 보증의 의식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참석하신다. 당신의 충만한 은혜를 가지고 그리스도께서는 이기심이라는 수로를 통하여 흘러내려온 사상의 조류를 변화시키시려고 그곳에 계신다. 거룩한 성령께서는 저희 주님의 본을 따르려는 감각을 활발하게 하신다.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구주의 겸손을 기억할 때에 사상과 사상은 연결되며 일련 (一連)의 추억들, 하나님의 크신 인자(仁慈)와 지상 친구들의 호의와 친절이 떠오른다. 축복을 잊어버리고 자비를 남용하고 친절을 등한히 여긴 일들이 마음에 떠오른다.
이 예식이 바르게 거행될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도우며 서로 축복하는 거룩한 교제에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저희 생애를 무아적 봉사 사업에 바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봉사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일터는 주님이 가지셨던 그것처럼 넓다. 세계는 우리의 봉사를 요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가난하고 무력하고 무식한 자들은 각처에 있다. 다락방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성만찬에 참여한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봉사하기 위하여 나아갈 것이다.
모든 존재들의 섬김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사람의 종이 되고자 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을 섬기셨으므로 모든 사람의 섬김과 영예를 받으실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속성에 참여하고 구속받은 영혼들을 바라보는 기쁨을 예수님과 나눌 자들은 그분의 무아의 봉사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기시키는 의식
그들이 식탁 주위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는 슬프게 들리는 어조로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 22:15-18)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만찬 예식은 슬픔의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이것은 그런 목적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의 제자들이 주의 성탁 주위에 모일 때에 그들은 그들의 결점을 기억하고 슬퍼하지 말 것이다. 그들은 향상되었든지 저하되었든지간에 그들의 과거의 종교적 경험에 얽매이지 말 것이다. 그들은 그 들과 저희 형제들과의 차이점을 생각해 내지 말 것이다. 준비의 예식에 이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반성, 죄의 자복, 의견 충돌에 대한 화해 등 이 모든 것이 다 끝났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오는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의 그늘 아래 설 것이 아니요, 구원의 빛 가운데 설 것이다. 그들은 의의 태양의 밝은 빛에 심령을 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장 귀중한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마음으로 비록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분의 임재하심을 충분히 인식하는 가운데 그들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찢어진 육체와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즙을 받을 때에 우리는 상상 가운데 다락방에서 거행된 성만찬에 참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 죄를 지신 분의 고민으로 성별된 동산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한 그 투쟁을 목격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들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루신 희생이 얼마나 크고 의미 심장한 것인지를 더욱 충분히 깨닫게 된다. 구속의 경륜은 우리 앞에서 영광스럽게 빛나고 갈바리의 사상은 우리 마음 속에 활력있고 신성한 감정을 일깨운다.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돌리는 찬양이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 있을 것이니 이는 갈바리의 장면들을 기억속에 생생하게 간직하는 영혼들에게는 교만과 자아숭배가 번성할 수 없는 까닭이다.
믿음으로 우리 주님의 큰 희생을 생각할 때에 그 영혼은 그리스도의 영적 생애와 같아지게 된다. 그 사람은 모든 성만찬 예식 때마다 영적 능력을 받을 것이다. 이 예식은 신자로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하는 산 연결을 이루고 그리하여 하나님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한다.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이것은 의존적인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연결을 이룬다.
성만찬 예식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이것은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 이 소망을 생생하게 간직하도록 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같이 모일 때는 언제나 어떻게 "예수께서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 26:27-29) 하신 것을 자세히 말하곤 하였다. 환난 가운데서도 그들은 주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희망으로 위안을 받았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는 생각은 그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귀중하였다.
이것들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강권하는 힘이 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의 기억에 새롭게 간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시고자 이 예식을 제정하셨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우리 영혼과의 연합이 있을 수 없다. 형제와 형제 사이의 연합과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굳게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만큼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효험있게 만드는 것이 없다. 우리가 즐거움으로 그분의 재림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분의 죽으심 때문이다.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의 소망의 중심이다. 그 위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고착시켜야 한다. ― 시대의 소망, 643-661(영문).
제 54 장 병자를 위한 기도
성경에 이르되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도의 필요를 느낄 때가 있다면 그 때는 곧 기운이 떨어지고 생명 자체가 사라지려는 것같이 보일 때일 것이다. 흔히 건강을 누리는 사람들은 나날이 또 해마다 계속되는 놀라운 축복을 잊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찬송을 돌리지 않는다. 그러나 병이 날 때에 하나님을 기억한다. 인간의 힘이 실패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겠다고 느낀다. 그리고 우리의 자비하신 하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심령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병이 들었을 때에도 건강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당신이 지상에서 봉사하시던 시대와 똑같은 자비하신 의사이시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질병을 고치는 유향(油香)이 있고 모든 병약한 자를 회복하게 하시는 능력이 있다. 오늘날도 그의 제자들은 옛날의 제자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병자들을 위하여 진실되게 기도할 것이다. 그리하면 그 결과 건강을 회복할 것이니 대개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병자를 구원할 것"인 까닭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요구할 수 있는 믿음의 확실한 보증 곧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8) 하신 주의 약속은 사도 시대나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확실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그 약속 중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을 붙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의 역사하시는 통로가 된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치유하시는 힘을 활용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할 일은 병자와 고통하는 자들을 우리의 믿음의 팔로 하나님 앞에 이끌어 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가르쳐 위대하신 구주를 믿게 할 것이다. 구주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병자와 낙망한 자와 고통하는 자들을 권하여 당신의 능력을 붙잡게 하기를 원하신다.
응답받는 기도의 조건들
그러나 우리는 다만 주의 말씀대로 생활할 때에만 주의 약속의 성취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말하되 "내가 내 마음에 죄를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로다"(시 66:18)고 하였다. 만일 우리가 부분적으로만 그에게 맡기고 전적으로 주께 복종하지 아니하면 주의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병자들의 행복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라는 지시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일은 일종의 가장 엄숙한 행위이다. 따라서 깊이 생각한 후에라야 이를 실행할 것이다. 흔히 병자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갖는 소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갖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은 함부로 행한 일의 결과로 병을 자청해 온다. 그들은 천연의 법칙 또는 엄격한 순결의 원칙에 의하여 생활하여 오지 않았다. 또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입고 일하는 습관에 있어서 건강의 법칙을 무시한다. 흔히 어떤 모양의 죄악이 정신과 육체의 허약한 원인이 된다. 만일 이러한 사람들이 건강의 축복을 얻게 된다면 그런 부류의 다수는 하나님의 천연의 법칙과 도덕적 법칙을 함부로 범하는 그와 같은 과정을 계속하여 행하면서 이론을 붙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과연 기도의 응답으로 그를 회복시켜 주신다면 자기들은 아무 제재도 없이 건강하지 못한 습관과 더러운 정욕을 마음대로 계속할 자유를 가진 것이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데 이적을 행하신다면 이것은 곧 죄를 장려하시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질병을 치료하시는 구원자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르치면서 그들의 건강에 해로운 습관을 버리라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된 수고이다.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자 할진대 행악하는 일을 그치고 선행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들의 주위는 위생적이어야 하고 그들의 생활 습관은 정당하여야 한다. 그들은 자연률에 있어서나 도덕률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법칙과 일치한 생애를 하여야 한다.
건강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자연률이거나 도덕률이거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은 곧 죄요 또한 하나님의 축복을 얻고자 하는 자는 죄를 자복하고 버리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밝히 일러 주어야 한다.
성경에 명령하시되 "너희 죄를 서로 고하고 병 낫기를 서로 기도하라"(약 5:16)고 하셨다. 기도해 주기를 청하는 사람에게 아래와 같은 뜻을 제시해 줄 것이다. "우리는 마음 속을 알아 낼 수 없고 또한 그대의 생애의 비밀을 알 수 없다. 이는 다만 그대 자신과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죄를 회개한다면 그 죄를 고백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사사로운 성질의 범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고백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사람이 죄를 범하면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 앞에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요일 2:1). 모든 죄는 곧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되나니 그러므로 죄를 범한 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그 죄를 고하여야 할 것이다. 공개된 범죄는 공중 앞에 고백할 것이요 이웃에게 범한 과실은 해를 당한 그 이웃에게 보상하여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건강을 얻고자 하는 자가 만일 욕설한 죄를 범하였거나 그들의 가정과 이웃과 혹은 교회에 불화를 심어 분리와 당파를 일으켰거나 또는 어떤 나쁜 행사로써 다른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였으면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 앞에와 그 해를 받은 당사자 앞에 고백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는 과실을 다 바로잡은 다음에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병자의 요구를 하나님 앞에 아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각 사람을 보호하시되 마치 그가 당신의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주신 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그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신 것처럼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심히 크고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므로 병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기뻐하라고 권장해야 한다. 자신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은 쇠약과 질병을 일으킨다. 만일 그들이 실망과 침울한 감정을 초월하면 회복의 희망이 커질 것이다. 이는 "여호와는 …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시 33:18) 시기 때문이다.
병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롬 8:26)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기원하는 축복이 가장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에는 아래와 같은 의미의 말을 포함시켜야 한다. "주여 당신께서는 심령의 모든 비밀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들의 대언자이신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사랑보다 큽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것이 주의 영광을 나타내고 병자들의 유익이 된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오니 그들에게 건강을 주시옵소서. 만일 그들에게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옵거든 구하오니 당신의 은혜로써 그들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임재로 그들을 그 고통 중에서 붙들어 주소서"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신다. 주께서는 모든 사람의 심중을 알고 계시다. 주께서는 사람의 모든 비밀을 보고 계시다. 건강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 드리는 바 되는 자들이 만일 희생하여 살게 되면 그들에게 이르는 시험을 능히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를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애가 그들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하여 축복이 될지 저주가 될지를 아신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정성껏 올리면서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드려야 할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하실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실 때에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와 뜻에 복종하시는 의미를 첨가하여 말씀하셨던 것이다. 과연 이런 말씀을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께서 하셔야 한다면 하물며 우리 유한하고 범죄한 인간의 입으로써야 얼마나 더욱 해야 할 것인가!
바른 순서로 말하면 먼저 우리의 소원을 전지(全知)하신 하늘 아버지께 드리고 다음에는 완전한 신념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여 주실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순종의 정신이 없이 우리의 기구(祈求)를 강요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우리의 기도는 명령의 형식을 취하지 말고 중재하는 형식을 취하여야 할 것이다.
건강을 회복시키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현저히 당신의 신령한 능력을 나타내시어 역사하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든 병자가 다 나음을 받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잠들어버린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도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이로써 보건대 비록 사람들의 건강이 회복되지 못한다. 하여도 그 이유로써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기도가 곧 그대로 응답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거나 혹은 의외의 형식으로 오게 되므로 우리는 흔히 실망하게 되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매우 지혜로우셔서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소원을 받아야 할 꼭 적당한 때에 꼭 적당한 방법으로 응답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소원을 성취시켜 주시되 우리의 소원 이상 더 좋게 이루어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신뢰할 수 있은즉 하나님께 우리의 뜻을 이루어 주시기를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이를 성취하시기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소원과 취미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소멸되어야 할 것이다. 믿음을 시험하는 경험들은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이러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이 과연 참되고 진실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하여 있는가 또는 환경에 따라서 변하는 확실하지 못한 것인가를 밝히 나타낸다. 믿음은 실천으로 말미암아 강하여진다. 우리는 성경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신 귀중한 약속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인내력을 최고도로 발휘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이상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더러 있다. 주의 고쳐 주시는 은혜를 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저희의 기도에 대하여 즉시 그대로 응답을 받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병으로 쇠약해진 사람들은 그들이 신중히 행동하기 위하여 지혜 있는 충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뒤에 살아 남아 있을 근친들에 대한 의무를 무시할 수 없으며 또한 건강의 회복을 위하여 천연의 작용을 이용함에도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흔히 과오를 범하기 쉽다. 기도의 응답으로 나음을 받을 것을 믿음으로써 어떤 이들은 무슨 일이든지 믿음의 부족을 표시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행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일을 정리하기를 마치 그들이 죽어서 떠날 것을 알게 될 때에 하고자 할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이 임종시에 있어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그런 권면과 충고의 말을 발표하기를 두려워하지 말 것이다.
기도로써 나음을 받기를 구하는 자들도 그들의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의약의 치료를 이용하기를 등한히 하지 말 것이다. 고통을 적게 하고 몸 자체의 소생력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여 주신 치료법을 사용함은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회복을 위하여 가장 유효한 조건 밑에 저희 자신들을 두는 것은 하나님과 협력하고자 하는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법칙에 관한 지식을 얻는 힘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 지식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놓여 있다. 우리는 건강의 회복을 위한 모든 편이를 취택하여 쓰고 모든 가능한 이익을 취하며 또한 천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일할 것이다. 우리가 병자들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면 우리는 더욱 큰 힘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협력하여 일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여 주신 그 방법의 위에 주의 축복을 더하여 주시기를 구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도 우리가 의약으로 치료하는 데 대하여 시인하신 바가 있다. "이스라엘"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에 하나님의 선지자는 그가 죽으리라는 기별을 전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15 년간 그의 수한을 연장한다는 기별을 그에게 보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도 능히 히스기야왕을 즉시로 낫게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특실한 지시를 하셨으니 "한 뭉치 무화과를 취하여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사 38:21) 하신 것이다.
우리가 병자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그 결과의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말 것이다. 우리가 만일 사별(死別)을 당하게 되는 경우라도 하늘 아버지의 손이 이 잔을 우리의 입에 대어 주신 것을 기억하고 그 쓴 잔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는 조물주 하나님께 새로운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열 사람의 문둥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았을 때에 다만 한 사람이 돌아와서 예수를 찾고 주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들은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마음에 감동을 받지 아니한 그 무지한 아홉 사람 같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 치료봉사, 225-233(영문).
제 55 장 의료 사업
의료 선교 사업은 복음의 개척 사업으로서 이 시기를 위한 진리가 많은 가정에 들어가게 하는 문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실한 의료 선교사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저들이야말로 사람의 심령과 육체 양쪽의 필요를 도와 주는 방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역자들이 실제적인 사업을 통하여 얻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병자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나아갈 때에 저들은 가장 고결한 이타심을 보여야 한다. 저들이 집집을 방문할 때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복음 기별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을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하게 될 것이다. 건강 개혁의 원칙에 대한 실증은 우리의 전도 사업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는 데 큰 유익을 줄 것이다. 의료 선교 사업의 창시자이신 위대하신 의사께서 이와 같이 이 시기를 위한 진리를 전하고자 힘쓰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을 주실 것이다.
신체의 치료는 복음 사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첫번 선교 여행으로 내보내셨을 때에 그들에게 분부하시기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 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라"(마 10:7, 8)고 하셨다.
하나님의 명령은 개혁을 요하지 않는다. 진리를 전파하는 데 대한 그리스도의 방법에는 개량을 가할 수가 없다.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실제적인 교훈을 주시고 영혼들을 진리 안에서 어떻게 기쁘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일할까를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구주께서는 피곤한 자, 무거운 짐진 자, 억압당하는 자들을 동정하셨다. 그는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고 병자를 치료하셨다. 그는 항상 돌아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셨다. 구주께서는 그가 이루어 놓으신 선행으로 당신의 사랑의 말과 친절한 행위로써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명하셨다.
사람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계속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사(大使)들도 그와 같은 모양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잃어버린 바 되고 멸망하는 영혼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자비하신 사랑을 나타내어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 대한 이기심 없는 관심을 가짊으로써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실제로 증거하여야 한다. 이 사업에는 단순히 설교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큰 사업이 포함되어 있다. 세상에서의 복음 전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들에게 주신 사업이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어 멸망으로 빠져가는 자들에게 그의 온유하고 자비로우신 사랑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위하여 일하되 이 시기를 위한 진리를 아는 자들에게 설교하는 방법으로써가 아니요 마지막 자비의 기별을 도무지 들은 적이 없는 자들을 경고함으로써 일하기를 요구 하신다. 영혼들에 대한 진지한 열망으로 충만한 마음을 가지고 일하라. 의료 선교 사업을 행하라. 이와 같이 함으로써 그대는 사람들의 마음에 접근하게 될 것이며 진리를 한층 더 결정적으로 선포할 수 있는 길이 준비될 것이다. ― CH, 497-499.
설립되어야 할 병원
의료 선교 사업이 요구되는 곳이 여러 군데나 있는데 그런 곳에는 작은 건물이 세워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병원들이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수단이 되도록 계획하신다. 이 병원들을 잘 경영해서 병원의 사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기별에 주목이 끌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CH, 501.
신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대한 봉사는 병행하여야 하며 그리하여 고통당하는 자들로 하늘의 의원되시는 분의 능력에 신뢰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합당한 치료를 가하면서 그리스도의 치유하시는 은혜를 또한 간구하는 사람들은 환자의 마음 속에 믿음을 불어넣을 것이다. 저들 자신의 행동은 저희 사정이 소망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자들에게 한 격려가 될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 병원이 설립된 이유인 바 즉 합당한 치료와 신체적, 영적인 정당한 생애에 대한 교훈에 믿음의 기도를 함께 드림으로써 소망 없는 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이런 봉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게 될 것이다. 우리 병원의 의사들은 영혼의 치유를 위한 명백한 복음 기별을 전하여야 한다. ― MM, 248.
복음의 개척 사업
어느 나라에서나 우리가 부름을 받아 가는 곳에서 도덕 수준을 향상시키기 원한다면 저들의 신체적 습관을 교정함으로써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 CH, 505.
의료 선교 사업은 인류에게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복음을 전하여 준다. 그것은 복음의 개척 사업이다. 그것은 실현된 복음이요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바 인자하심이다. 이 사업이 크게 요구되고 있으며 세상은 이 사업을 위하여 열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료 선교 사업의 중요성이 이해를 받아 새로운 지방들에 즉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 때에 목회 사업은 주님의 명령을 따르게 될 것이니 곧 병자가 나음을 받을 것이요 불쌍하고 고통받는 인간은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 MM, 239.
그대는 많은 편견과 많은 거짓 열성 및 그릇된 경건 등에 부딪힐 것이다. 그러나 본국에서나 외지에서나 하나님께서 진리의 씨를 받도록 준비시키신 심령들이 그대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더 많음을 그대는 발견하게 될 것이요 기별이 저들에게 소개될 때에 저들은 기쁨으로 그 하늘의 기별을 환영해 마지 아니할 것이다. ― CH, 502.
의료 선교 사업은 총괄적으로 다름 아닌 팔이 몸에 대한 관계와 똑같은 관계를 가진 사업으로만 내게 제시되어 왔다. 복음 사업은 몸이요, 의료 선교 사업은 팔이요, 그리스도는 그 전부를 다스리는 머리이시다. 이와 같이 그 일이 내게 소개되었다.
그대가 수중에 가진 시설들을 가지고 의료 선교 사업을 시작하라. 이와 같이 할 때에 그대가 성경을 연구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병든 자들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야 할 자들과 그대가 관련을 가지도록 해주실 것이다. 질병을 치료하는 일에 대해서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을 실천에 옮기라. 이와 같이 할 때에 고통은 덜어질 것이요 그대는 굶주린 영혼들에게 생명의 떡을 나누어 줄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 MM, 237, 239.
모든 사람들이 연합해야 하는 사업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은 의료 선교 사업과 연합해야 하는 바 그 까닭은 이 사업이 이 세상에서 진리에 대항하여 존재하는 편견을 무너뜨리는 사업으로써 항상 내게 제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만일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안다면 그 복음 목사는 그의 사업에서 두 배의 성공을 할 것이다.
그 지위가 어떠하든 그 상태가 어떠하든간에 사람들을 그 있는 곳으로 찾아 가서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을 도와 주는 것이 복음 봉사이다. 목사들이 환자의 집에 들어가서 "나는 당신을 도와줄 용의가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의사는 아닙니다만 목사이므로 앓는 자와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합니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병을 앓는 자들은 거의 심령도 병이 드는 법이요 심령이 병들었을 때에는 신체도 병들어 버린다.
목회 사업과 의료 사업과의 사이에 분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의사는 목사와 평등하게 노력해야 할 것이며 육체의 회복을 위해서 하는 것처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서도 열성과 철저함으로 노력해야 한다. 마음과 육체를 관할하는 의사가 되도록 청년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 시간을 바치는 의료 선교사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십일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말에 답변하기 위하여 환경의 진상을 참작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을 편협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의료 선교사를 겸한, 즉 신체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복음 목사는 이를 할 수 없는 목사보다 훨씬 더 유능한 일꾼인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목사로서의 그의 사업은 훨씬 더 완전한 것이다.
주께서는 교육받은 의사가 다른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우리의 도시들에 들어갈 것이라고 언명하셨다. 건강 개혁에 대한 기별을 가르치라. 이것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칠 것이다.
현명한 의사가 성경의 원칙을 제시하는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큰 무게를 가질 것이다. 의사의 사업과 복음을 전하는 목사의 사업을 그 감화 가운데서 연결시킬 수 있는 자에게는 능률과 능력이 있다. 그의 하는 일은 사람들의 선한 판단력에 의하여 좋은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사들도 이와 같이 활동해야 할 것이다. 저들은 전도자로서 주 예수로 말미암아 영혼이 어떻게 치유함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교훈을 주면서 활동하면 그것은 주의 사업을 행하고 있는 것이 된다. 모든 의사는 합당한 치료를 주는 동시에 그 병자를 위하여 믿음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한 목사로서 활동해야 한다. 이런 병행하는 활동은 그의 경험을 넓힐 것이요 그의 감화를 크게 확장시킬 것이다. ― MM, 237-247.
의료 사업은 진리에 대한 문호를 개방할 것이다.
선교 간호원들이 추진한 많은 분야의 사업이 있다. 잘 훈련받은 간호원들이 가정들 사이에 들어가서 진리에 대한 흥미를 깨우치도록 힘쓸 기회들이 있다. 거의 모든 동리마다 아무런 종교적 예배에도 참여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만일 복음이 저들에게 전하여진다면 그 복음은 저희의 가정에 전하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흔히 저들의 육체적 필요의 제거가 저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경우가 있다. 선교 간호원들이 앓는 자들을 간호하고 빈핍한 자들의 근심을 덜어 줄 때에 저들은 그들과 더불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들에게 읽어 주며 구주에 대한 얘기를 하여 줄 많은 기회들을 발견할 것이다. 저들은 정욕으로 인하여 타락한 식욕을 지배할 의지력이 없는 무력한 자들과 더불어 또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저들은 패배하고 상심한 자들의 생애에 인류의 희망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사심 없는 친절한 행위 가운데서 나타난 저들의 이타적인 사랑은 이 고통을 당하는 자들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다 더 쉽게 믿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의료 선교 사업에 의하여 한때 훌륭한 마음씨와 가장 풍성한 자격을 갖추었던 사람들이 타락의 깊은 구렁 속에 빠져 있는 것이 발견될 것이요 합당한 활동을 통하여 저희의 타락한 상태에서 구원함을 받게 될 것을 나는 보았다. 저들이 인정있게 간호를 받고 저희의 육체적 필요가 충족되었을 때에 예수 안에 있는 진리가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오게 된다. 성령께서는 이와 같은 영혼들을 위하여 수고하는 인간의 능력과 더불어 역사하시고 이에 협조하신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저희 종교적 신앙이 반석 위에다 터를 세움을 인하여 감사할 것이다.
오른손은 몸이 들어갈 수 있는 문호를 여는 데 사용된다. 이것이 곧 의료 선교 사업이 행하여야 할 역할이다. 이 사업은 이 때를 위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길을 널리 예비하게 할 것이다. 손이 없는 신체는 소용이 없다. 신체에게 영예를 돌릴 때에 그 영예는 돕는 손에게도 역시 주어져야 하는 바 그것은 손이 없이는 신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매개물인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른손을 무관심하게 취급하고 그 도움을 거절하는 몸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가 없다.
복음대로 사는 것. 복음의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것은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향기이다. 단지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는 닫혀졌던 문호들이 슬기로운 의료 선교사에게는 열려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적 고통을 덜어 주심으로써 사람의 마음과 접촉하신다. 진리의 씨가 마음 속에 떨어지고 하나님께서 이에 물을 주신다. 이 씨가 생명의 조짐을 보여 주기까지는 많은 인내가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종국에 그 씨가 솟아나서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 MM, 238-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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