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에서 느낌으로...오쇼 라즈니쉬
지성은 타고난 지각 능력이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 지성이 넘치지만 사회에 의해 우둔해진다. 사회는 아이를 교육시켜 우둔한 존재로 만든다.
지성은 숨쉬고 보고 하는 것처럼 자연스런 현상이다. 지성은 직관으로 내면을 보는 것이다. 지성은 지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점을 명심하라. 지성과 지식을 결코 혼동하지 말라.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극이다. 지식은 머리에서 나온다. 외부로부터 강요되고 주입된 것이다. 사람들은 지식을 갈고 닦는다. 본질적으로 지식은 타고난 것이 아니며 꾸어온 것이요 이물질이다.
지성은 타고난 것이다. 지성은 자신의 존재요 본성이다. 동물은 모두 지성적이다. 비록 지식은 없지만 지성은 있다. 나무도 지성적이고 온 존재계가 지성적이다. 아이도 지성적으로 태어난다. 멍청한 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멍청한 아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성이 있는 어른은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어떤 친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내왔다. 그 이야기를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다. 이야기의 제목은 ‘동물학교’다.
어느 날 동물들이 숲 속에 모여 회의를 했다. 회의 결과, 학교를 열기로 했다. 숲 속에는 토끼, 새, 다람쥐, 물고기, 뱀장어 등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이사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토끼는 교과과정에 ‘달리기’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들은 ‘날기’ 과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고기는 ‘수영’이, 다람쥐는 ‘나무타기’가 필수과목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동물들은 모든 것을 교과과정에 넣기로 합의했다. 결국 모든 동물은 모든 과목을 배워야 했다.
토끼는 달리기에서 ‘수’를 받았지만 나무타기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나무타기에서 토끼는 자꾸만 미끄러졌다. 어느 날 토끼는 나무타기를 하다가 미끄러져 머리를 다친 뒤, 달리기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달리기에서는 ‘미’를, 나무타기에서는 ‘가’를 받았다. 새는 날기 과목에서는 뛰어난 소질을 보였지만 땅파기 과목에서는 기를 펴지 못했다. 새는 땅파기 수업에서 부리와 날개 여기저기를 다쳤다. 그러다 이내 새는 날기 과목에서 ‘미’를, 땅파기에서 ‘가’를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나무타기 과목은 정말 괴로운 시간이 되었다.
이리하여 학교를 졸업할 때 모든 과목에서 중간을 겨우 유지한 뱀장어가 수석을 차지하였다. 모든 학생이 모든 수업을 이수하자 선생들이 모두 기뻐했다. 이것이 세칭 평준화 교육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지만 세상이 이렇고 세상 교육이 이렇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평준화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파괴한다.
타인을 모방하면 지성은 죽는다. 자신의 지성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은 모방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 지성은 죽는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처럼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지성의 세계에서 추락하여 우둔함의 세계로 떨어진다.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는 순간부터 자연이 부여한 가능성을 상실한다. 그런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다. 맑고 밝을 수 없다. 맑은 눈을 잃고 밝은 눈을 상실한다. 그리고 나서 다른 사람의 눈을 빌려온다. 어떻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가? 세상을 맑고 밝게 보려면 자신의 눈이 있어야 한다. 걸으려면 자신의 다리가 있어야 하고 맥박이 고동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심장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빌려온 삶을 산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불구가 된다. 그래서 우둔하게 보이는 것이다.
교육은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학교에서는 시인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학생이 수학으로 망치고 수학분야에 천재성을 가진 아이가 역사를 외우느라 자신의 참 소질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다. 세상 교육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세상 교육은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다.
모두를 일정한 틀에 집어넣고 찍어낸다. 일부가 세상의 틀에 맞을지 모르나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을 상실하고 불행 속에서 산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어리석고 무가치하고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리석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모두 존재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존재계는 순수 지혜 자체이다. 우리는 세상에 나올 때 피안의 맛과 향기를 가지고 온다. 우리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사회가 달려들어서 우리를 자르고 깎고 변화시키고 가르치고 주입하고 조작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상실하고 만다. 사회는 구성원 모두가 순종적이고 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때문에 인간의 지성은 파괴되고 만다.
이런 사회는 일종의 감옥이다. 우리는 이 감옥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우리는 이 감옥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빠져나오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다. 옷을 벗듯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감옥은 옷이 아니라 거의 인간의 피부가 되었다. 그렇게 장구한 세월 동안 사회라는 감옥 속에서 산 것이다. 감옥 속에 있는 나를 참나라고 여기기 때문에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일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참 존재를 알고 싶은 사람은 감옥을 떨쳐내야 한다.
지혜로운 자는 반역자가 된다. 반역의 사람만이 지혜롭다. 여기서 반역이란 무슨 뜻인가? 반역이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가 나에게 주입한 모든 것을 과감히 벗어던지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것이요 ABC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회가 주입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따라 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모두 허비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과 비슷하지 않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독특한 것이다. 지성의 본성 또한 그렇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 나는 나고 너는 너일 뿐이다. 나는 어느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으며, 그래서 비교는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항상 비교하라는 교육을 받았다.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삶은 비교하는 삶이다. 비교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존중할 수 없다. 누가 나보다 아름답고, 누가 나보다 크고, 누가 나보다 건강하고, 누가 나보다 노래를 잘 부르고…… 여기서 누구는 사물일 수도 있다. 이렇게 비교하는 삶은 참으로 무겁고 답답한 삶일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숨이 막힐 것이다.
인간에게는 활짝 꽃피어나고 싶은 아름다운 영혼이 있고 아름다운 존재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
어깨에 진 짐들을 내려놓으라. 그리고 자신의 순수성을 되찾으라. 다시 어린아이가 되라. 예수는 말한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맞는 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자신에게 주입된 쓰레기는 모두 버려라. 심신을 새롭게 하고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라. 그러면 놀랍게도 지성과 지혜가 끊임없이 우러나온다. 그렇게 우러나오는 지성이야말로 참 지성이다.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 타인을 따르고 모방하고 맹종하는 것.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지식을 맹종하는 것, 이것이 어리석음이다.
그래서 학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는 이전 사람들의 지식을 되풀이하는 앵무새다. 녹음기다. 아주 능숙하게 되풀이하지만 느닷없이 책에 없는 새로운 상황이 생기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학자에게서는 지성을 찾아볼 수 없다. 지성이란 순간순간 변하는 삶에 반응을 보이는 능력이다. 프로그램에 따라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지성이 없는 사람들은 프로그래밍에 따라 움직인다. 그들은 삶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삶에 맞설 만한 지성이 없음을 안다. 그래서 반복 훈련을 통해 준비한다. 미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한다. 이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다. 의문과 문제는 끊임없이 변한다. 매일같이 새로운 문제와 도전이 생기고 매 순간 의문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미리 답을 만들어놓으면 새로 생기는 의문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다. 마음은 이미 만들어놓은 해답들로 가득차서 문제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새로운 상황에 열려 있지 않다. 하는 것마다 이미 준비한 답―현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에 따라 할 것이다.
지성은 아무런 준비 없이 실재 현실과 관계하는 것이다. 미리 준비하지 않고 맞이하는 삶에는 엄청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런 삶 속에는 새로움과 젊음이 있고 생기와 자연스러움이 있다. 매 순간이 경이로움이다. 경이로 넘쳐나는 삶에는 권태가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어리석은 사람의 삶은 항상 권태롭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서 주워듣고 그 스스로가 되풀이하는 답 때문에 권태로울 수밖에 없다. 지식으로 가득찬 눈으로는 실재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도 알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지적일 뿐, 지혜롭지 않다. 그는 장미꽃을 볼 때도 장미꽃을 보지 못한다. 책 속에서 읽은 장미, 시인들이 노래한 장미, 화가가 그린 장미, 철학자들이 토론한 장미 따위를 본다. 수많은 지식과 정보와 기억이 그의 눈을 가린다. 그 앞에 놓인 장미는 그의 기억과 정보의 홍수로 인해 사라진다. 단순한 장미꽃조차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그리고 수없이 되풀이한 말을 또 되풀이한다. “이 장미꽃 아름답다.” 이 말은 그의 내면에서, 가슴에서 나오는 진실한 말이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주워들은 말을 그는 녹음기처럼 재생한다.
어리석음은 반복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을 무작정 따라하는 것이다. 쉽다, 배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쉽다. 배우는 데는 힘이 든다. 배움에 뛰어드는 용기가 필요하다. 배우겠다는 것은 겸손하겠다는 뜻이다. 언제든지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겠다는 뜻이다. 배움 자체를 위해서는 언제든 에고를 내려놓겠다는 뜻이다.
배움이 어디로 인도할지 우리는 모른다. 예언도 예측도 할 수 없다. 배우는 자의 삶은 예측 불가능하게 흐른다. 자신도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디로 갈지 모른다. 그는 지식으로 살지 않는다. 지식 없이 살아야 참다운 배움이 일어난다.
그래서 아이들은 참으로 훌륭하게 배운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배움을 멈추고 지식을 쌓는다. 모방하고 되풀이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정해진 패턴을 따라가는 일은 쉽고 간단하다. 같은 원을 빙빙 도는 일이다. 그러면 권태가 자리를 잡는다. 어리석음과 권태는 항상 같이 간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 햇살의 이슬처럼 신선하고 밤하늘의 별처럼 영롱하다. 지혜로운 이에게서는 산들바람처럼 상쾌한 향기가 난다. 지성은 매 순간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과거에 죽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 사는 것이다.
머리에서 나오는 지혜는 지혜가 아니다. 그것은 학식이다. 가슴에서 나오는 지혜야말로 참 지혜다. 머리는 단순히 지식을 긁어모을 뿐이다. 긁어모으는 것들은 옛것이지, 새것이나 창조적인 것이 아니다. 세상일을 하는 데는 머리에 쌓은 지식이 필요하다. 참으로 유용하다. 머리에 담은 기억도 필요하다. 마음과 머리는 생체컴퓨터다. 계속 정보를 저장해서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이는 수학이나 계산, 일상생활, 경제생활에 필요하다. 그러나 생체컴퓨터와 같은 일이 자기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어리석음을 벗어날 길이 없다. 느낌의 아름다움을 알 길이 없고 가슴의 축복을 체험할 길이 없다. 가슴을 통해 내려오는 은총을 알 수도 없고 가슴을 통해 들어오는 신성(神性)을 알 수도 없다. 기도도, 시도, 사랑도 알 수 없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는 삶의 시를 짓고 발걸음이 춤이 되게 하고 삶을 기쁨과 찬미, 축제, 웃음으로 변형시킨다. 유머가 넘쳐흐르게 한다. 서로 사랑하고 나눌 수 있게 한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삶이다. 머리로 사는 삶은 기계적인 삶이다. 일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로봇과 같이 메마른 삶이다. 머리로는 돈을 많이 벌지 모르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 생활수준은 높을지 모르나 삶에 향기가 나지 않는다.
삶이란 가슴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가슴의 밭에서 삶은 제대로 성장한다. 가슴의 밭에서는 사랑이 자라고, 삶이 자라고, 신성이 자란다. 아름다운 것, 소중한 것, 의미 있는 것 등의 모든 것은 가슴에서 나온다. 가슴이야말로 인간의 중심이다. 머리는 주변부다. 머리로 사는 것은 중심의 아름다움과 보물을 모르는 채, 주변에 머무는 것이다. 주변부에 머무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머리로 삶을 사는 것은 어리석다. 머리는 필요할 때 사용하면서 가슴으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주인은 존재의 중심에 있다. 가슴이 주인이요 머리는 하인으로 사는 것, 이것이 지혜로움이다. 머리가 주인이 되고 가슴에 대해서는 모두 망각하는 것, 이것은 어리석음이다.
선택은 각자에 달렸다. 머리가 하인이 되어 기능을 하면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주인이 되면 위험하다. 인생 전체가 머리의 인생이 될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사람들의 삶은 온통 병들어 있다. 머리에 의해 중독되어 있다. 머리로 인해 병든 사람들은 삶을 느끼지 못한다. 느낌이 둔감해진 그들은 무엇을 봐도 감동하지 않는다. 새벽에 일출을 보고도 시큰둥하다. 공허한 눈으로 본다. 밤하늘에 별들이 신비롭고 찬란해도 그들의 가슴에서는 아무런 울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새는 여전히 노래를 부르지만 인간은 노래를 잊어버렸다. 구름이 하늘을 떠다니고 공작이 춤을 추지만 인간은 춤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불구가 되었다. 나무는 꽃피어난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만 할 뿐, 나무의 꽃피어남을 느끼지 못한다.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결코 꽃피어날 수 없다.
그대의 삶을 다시 보라. 살펴보고 관찰해보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대는 너무나 오랫동안 타인을 의지했다. 그렇게 하여 어리석은 삶을 살았다. 이제 정신을 차릴 때다.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다루어왔는지 깊게 꿰뚫어봐야 한다. 가슴에 시가 떠오르는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시간 낭비하지 말라. 가슴으로 하여금 시를 노래하게 하라. 자신의 삶에 낭만이 없는가? 만약 삶에 낭만이 없다면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세상이라는 무덤 속에서 사는 것이다.
무덤에서 나오라. 삶에 낭만의 향기를 부으라. 모험의 빛깔을 칠하라. 탐험하라!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과 찬란함이 기다리고 있다. 왜 주변을 떠도는가? 삶의 신전 안으로 들어가라. 신전의 문은 어디에 있는가? 가슴에 있다.
생각에서 느낌으로 가야 한다. 이를 명심하라. 느낌은 내면의 직관에 다가가지만 생각은 직관의 세계에서 멀어져간다. 직관은 외부로부터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관은 내면에서 절로 꽃피어나는 것이다. 학교도 대학교도 아무도 직관을 가르쳐줄 수 없다. 아무런 가르침 없이도 내면에서 절로 폭발하는 것, 이것이 직관이다. 온 세상을 떠돌 필요없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느낌은 직관에 근접해 있다. 나는 불가능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냥 직관이 되라.” 아니다. 그것은 지금 가능하지 않다. 지금은 생각에서 느낌으로 옮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때 느낌에서 직관의 세계로 나아가는 일이 한결 쉬워진다. 그러나 생각에서 직관의 세계로 곧장 가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둘은 양 극단이다. 느낌이 중앙에 있다. 느낌은 생각과 직관 사이, 정 중앙에 있다. 느낌에서 이쪽 길로 가면 생각이요 저쪽 길로 가면 직관의 세계다.
느낌의 세계에서 생각과 직관이 만난다. 느낌의 세계에는 사념적인 요소와 직관적인 요소가 공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