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류씨(豊山柳氏) 안동시 풍천면(豊川面) 하회리(河回里) 마을
◎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廣德里), 광디이마을
중앙고속도로를 주행하여 서안동IC, 서안동TG를 벗어나면 34번 국도를 만나게 된다. 예천쪽 방향을 잡으면 금방 풍산읍(豊山邑)의 상리(上里), 하리(下里)로 전의이씨(全義李氏), 예안이씨(禮安李氏)의 ‘우릉골’에 닿게 된다. 이어서 풍산읍 외곽을 지나 ‘매곡교’에 이르러 4거리 지점에서 시원하게 펼쳐진 풍산들녘을 흘러 916번 지방도를 달리면 곧 김청음(金淸陰)의 장동김씨 소산리(素山里)를 지나고 다시 안동권씨(安東權氏) 집성촌인 가곡리(佳谷里)를 지나 하회삼거리에 이른다. 풍천면소재지로 가는 직진로를 버리고 좌회전하여 들어가는 곳 그곳이 그 유명한 하회(河回)마을이다.
안동 하회마을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유교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상징공간으로 손꼽히는 곳으로써 가장 한국적이며 독창적인 문화를 간직한 씨족마을이다. 또 하회마을은 자연에 순응하며 서로 교감하고자 한 우리 민족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상호이해와 소통을 통해 흐트러짐 없는 건전한 공동체적 삶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10년 7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世界流産委員會)는 마을주민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는 다양한 생활 문화가 이제는 한국을 넘어 세계인들이 지키고 이어가야 할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하며 하회마을을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확정지었다.
유네스코는 세계유산(世界流産) 등재를 위한 실사를 통해 “하회마을은 주택과 서원(書院), 정자(亭子)와 정사(精舍) 등 전통 건축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마을의 공간 배치가 조선시대 사회구조와 독특한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보듬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이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어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이들이 향유한 예술 작품과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 및 문화적 성과물, 공동체놀이, 세시풍속과 관·혼·상·제례 등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신앙에 관계된 무형유산이 세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이후 유네스코는 하회마을을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결정하는 결의문에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생활공간이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Living Heritage)으로써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한국인의 삶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등재 이유를 밝히고 있다.
풍산류씨(豊山柳氏)가 하회(河回)에 자리 잡은 것은 고려(高麗) 후기이다. 겸암(謙庵)과 서애(西厓)의 6대조인 전서공(典書公) 류종혜(柳從惠)가 풍산 상리(上里)에 세거하다가 길지(吉地)를 찾아 지금의 하회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사실 류씨들이 하회에 세거지를 마련한 것은 전서공이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기 훨씬 이전, 곧 전서공의 할아버지이자 고려의 도염서령(都染署令)이라는 벼슬자리에 있던 류난옥(柳蘭玉)이 풍수가를 찾아가서 택지(宅地)를 구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3대가 적선을 해야만 훌륭한 길지를 구할 수 있다고 하는 풍수가의 말에 따라 류서령은 하회마을 밖 큰길가에 관가정(觀稼亭)이라는 집을 짓고,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적선(積善)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 일은 아들과 손자대까지 이어졌다. 전서공이 류서령의 뜻을 이은 것이다. 이러한 적선의 공덕으로 마침내 길지를 잡아 지금의 하회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는데, 이러한 사정은 마을 입구를 조금 지나 있는 류종혜의 기적비(紀蹟碑)에 자세히 새겨져 있다.
풍산류씨들이 화천(花川)의 하안(河岸)에 터를 잡을 당시 이 일대는 울창한 숲과 늪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삼신당 곁에 절이 하나 있었으나,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스님들이 견디지 못하고 떠나 버려 절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화천의 하안은 울창한 숲이었던 듯싶다.
탑신(塔身)들이 아직 삼신당 주변에 하나 둘 흩어져 있어 사찰이 있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데, 지금도 그 탑신 가운데 하나가 삼신당의 제단(祭壇)처럼 이용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전서공이 직접 화산을 답사한 뒤에 주변의 허씨와 안씨의 묘지를 피하여 울창한 숲을 헤치고 절 주변에 터를 잡고 나무를 베어 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집이 완성될 듯싶다가 거듭 무너지는 괴이한 일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나가던 도사가, “아직 이 땅을 가질 운세가 아니니, 꼭 이 땅을 가지고 싶다면 앞으로 3년간 덕을 쌓고 적선을 해야 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전서공은 큰고개 밖에 정자를 지어 놓고 식량과 옷가지, 짚신 등을 마련하고는, 큰 가마솥에다가 밥을 하여 인근 주민과 나그네들에게 먹이고 입히며 적선하기를 3년 동안 했다. 그런 연후에 지은 것이 지금의 양진당(養眞堂) 사랑채 일부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전서공이 하회에 터를 잡고자 양진당 자리에 집을 지었는데, 지어놓기만 하면 밤새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서공의 꿈에 도사가 나타나 이르기를, 이 터에 집을 지으려면 마을로 들어오는 고갯길에서 3년 동안 만인(萬人)에게 적선을 하라고 이르므로, 고개에다 원두막을 지어놓고 길 가는 사람들에게 적선하고 집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전서공이 길지를 잡아 발복을 한 까닭인지 점차 류씨 가문은 번성하고 겸암(謙庵)과 서애(西厓) 이후 대단한 문벌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화산 기슭의 허씨와 안씨 들은 문중이 위축되어 마을을 뜨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하회마을의 중심지가 화산 기슭에서 지금의 화천 가 하안(河岸)에 자리 잡은 류씨들의 세거지로 옮겨 오게 된 것이다.
풍산류씨(豊山柳氏)는 고려(高麗) 때 호장(戶長)을 지낸 시조 류절(柳節)의 증손 류백(柳伯)이 충열왕(忠烈王) 때 출사(出仕)하여 가문을 일으켰고, 류절의 7세손 류종혜(柳從惠)가 조선 초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풍산현으로 낙향하여 정착 세거하면서 크게 번창한 가문으로 형성되었다.
류종혜는 친구인 배상공(裵尙恭)과 함께 산수가 아름다운 하회촌으로 이거하였다. 이후 배상공의 아들 배소(裵素)의 사위 권옹(權雍)이 이어서 살게 되고 류종혜의 손자 류소(柳沼)가 권옹의 사위가 되어 다시 하회촌으로 복귀한 이래로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류소의 큰아들 류자형(柳子泂)의 후손은 자형의 아들 류공지(柳公智)가 예안 서촌에 살던 영양김씨(英陽金氏)의 사위가 되면서 예안으로 이거하였으나 현황은 알 수 없다.
류소의 둘째 아들 류자온(柳子溫)은 진사에 급제하고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류공탁(柳公綽)은 간성군수(干城郡守)를 지냈고, 류공탁의 아들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 1515∼1573)은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내 외직을 두루 거치고 풍산부원군(豊山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류중영의 아들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은 원주목사(原州牧使),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이들의 후손은 각각 겸암파(謙庵派)와 서애파(西厓派)로 분류된다.
류자온의 둘째 아들 류공권(柳公權)도 문과에 올라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냈고, 류공권의 아들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 1516∼1571)은 문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류운룡의 증손 회당(悔堂) 류세철(柳世哲, 1627∼1681)은 1666년 복제 문제를 논하는 영남유림소의 소수(疏首)가 되었고, 우헌(寓軒) 류세명(柳世鳴, 1636∼1690)은 문과를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고 도학(道學)에 깊었다. 류세철의 증손 류영(柳泳, 1687∼1761)은 『겸암문집(謙庵文集)』과 『풍산류씨족보(豊山柳氏族譜)』를 편찬·간행하고 퇴락한 겸암정사(謙庵精舍)를 중수·복원하였다.
류성룡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은 풍수지리설을 따라 상주(尙州) 낙동(洛東)으로 이거하였는데 고종(高宗) 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류후조(柳厚祖, 1798∼1876)가 그의 7세손이다. 서애 류성룡의 장손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1598∼1674), 현손 주일재(主一齋) 류후장(柳後章, 1650∼1706), 6세손 임여재(臨汝齋) 류규(柳奎) 등은 학문과 도덕으로 추앙되었다.
류원지의 6세손 일우(逸愚) 류상조(柳相祖, 1763∼1831)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정간(貞簡)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학서(鶴棲) 류태좌(柳台佐, 1763∼1837)가 이조참판(吏曹參判), 류지영(柳芝榮, 1828∼1896)이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내는 등 많은 이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류성룡의 10세손 회은(晦隱) 류도발(柳道發, 1822∼1910)은 경술국치의 비분을 이기지 못해 식음을 끊어 순절(殉節)하였다.
풍산류씨는 하회에 터를 잡은 이래 문과 급제자 20명, 생원진사시 합격자 35명 등 많은 명신과 선비를 배출하며 명문거족으로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위의 인물들 중 류중영, 류운룡, 류성룡은 불천위로 추대되어 있다. 지역에서는 세거지 이름을 따서 ‘하회류씨(河回柳氏)’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류경심의 후손은 참판공파로 분파하여 풍천면 하회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류자온의 셋째 류공석(柳公奭)의 아들 류중청(柳仲淸)의 후손은 모하당파(慕河堂派)로, 넷째 류공계(柳公系)의 아들 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의 후손은 파산파(巴山派)로 분파하여 풍천면 광덕리(廣德里) 일원에 살고 있다.
관련유적으로는 서후면 성곡리 능골에 류중영의 묘소와 신도비, 재사가 있고, 풍천면 하회리 일원에 류운룡과 류성룡의 종택인 양진당(養眞堂)과 충효당(忠孝堂)과 불천위(不遷位) 사당, 류운룡을 제향(祭享)한 화천서원(花川書院), 류성룡을 모신 병산서원(屛山書院), 북촌댁(北村宅), 남촌댁(南村宅), 주일재(主一齋) 등 고택, 겸암정사(謙庵精舍), 옥연정사(玉淵精舍), 상봉정(翔鳳亭), 파산정(巴山亭) 등이 있다. 이들을 포함한 수많은 유적과 유물을 비롯하여 하회류씨 500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안동 하회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기타 참고 사항>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풍산류씨 동성 마을
마을 주변으로 물이 돌아 흐른다고 하여 물돌이동이라 하였다. 하회(河回)는 물돌이동의 한자 표기이다.
입향조 류종혜(柳從惠)는 원래 풍산 상리리에 살고 있었는데 하회마을의 아름다운 경관에 이끌려 옮겨 살게 되었다. 당시 류종혜와 허물없이 지내던 흥해배씨 배상공(裵尙恭)도 함께 옮겨 왔다고 한다. 후손인 류중영(柳仲郢)과 류중영의 아들 류운룡(柳雲龍)·류성룡(柳成龍) 등 뛰어난 인물을 배출함으로써 풍산류씨 집성촌으로서의 위상을 다졌다.
마을 뒤쪽으로 태백산맥 줄기인 일월산 지맥의 화산(花山)이 주산(主山)을 이루고, 서북쪽으로 부용대(芙蓉臺)가 우뚝 서 있다. 부용대 앞으로 강둑을 따라 평사(平沙)라 불리는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고, 주변에 약 700여 그루의 소나무들이 울창한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숲이 있다.
하회리는 하회1리의 하회·돌고개, 하회2리의 웃밀골·아랫밀골·목골·서원마·새동네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하회리에 거주하는 총 104가구 가운데 풍산류씨는 약 70가구가 살고 있다. 관련 유적으로 류운룡이 후학을 양성하고 수양하던 하회 겸암정사(謙菴精舍), 하회 빈연정사(賓淵精舍), 류운룡의 학덕을 기리고자 세운 화천서원(花川書院), 류운룡의 증손인 류세철(柳世哲)이 세운 상봉정(翔鳳亭), 류성룡과 류성룡의 셋째 아들 류진(柳袗)을 배향한 병산서원(屛山書院), 류성룡이 학문을 연마하던 하회 옥연정사(玉淵精舍), 하회 원지정사(遠志精舍) 등이 있다. 류중영, 류운룡, 류성룡은 불천위로 추대되어 있다.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풍산류씨 집성촌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심동·형호동·하회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광덕리라 하였다. 풍산류씨 집성촌인 광디이마을은 광덕(廣德)의 방언으로, 광덕은 마을에 넓은 둔덕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광디이마을은 안동 하회마을과 인접해 있어 풍산류씨들의 출입이 잦았던 곳이지만, 풍산류씨들이 본격적으로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약 150년 전 류자온(柳子溫)의 넷째 아들 류공계(柳公季)의 후손들이 정착하면서부터이다. 특히 류공계의 아들인 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이 불천위로 추대되면서 광덕리 풍산류씨 집성촌으로서의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동쪽으로 하회리, 서쪽으로 기산리, 북쪽으로 갈전리·도양리과 접하고, 남쪽에는 나지막한 구릉지가 형성되어 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안동 하회마을을 휘감아 돈 뒤 화천서원 앞에서 방향을 바꾸어 광디이마을을 감아 돌면서 산태극과 수태극의 형국을 그려 내고 있다.
광덕리는 솔안·저우리·앞개·광디이·건잣·안심이·심못골·섬마·솔미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광덕리에 거주하는 223여 가구 중 풍산류씨는 45가구로 광디이마을에 모여 살고 있다. 그 밖에 김씨 13가구, 박씨 10가구, 엄씨 10가구 등이 살고 있다. 관련 유적으로는 중요민속자료 제88호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창건한 하회 옥연정사(玉淵亭舍)가 있다. 류성룡은 이곳에서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였다. 저우리마을에는 중요민속자료 제89호로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이 창건한 하회 겸암정사(謙庵精舍)가 있다. 당호는 스승인 퇴계 이황(李滉)이 지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