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개요
북한 함경남도의 소재지. 성천강 하구 함흥평야에 자리잡은 공업도시이다. 광복 당시에는 함주군, 흥남시와 경계를 접했다.
함흥냉면으로 유명하며, 함흥차사라는 사자성어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도시의 서쪽을 성천강(城川江)이 흘러 동해로 빠져나간다.
2008년 기준으로 인구 약 77만 명. 북한에서 평양과 남포에 이어 3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이 정도면 남한 기준으로도 어지간한 지방 대도시급이다. 해방 전 함흥과 흥남을 합친 인구는 대구와 인천보다도 많았기 때문에 분단 없이 이곳이 이남의 도시처럼 제대로 성장했다면 현재 한반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인천은 수도권 버프 때문에 무리라 쳐도 대구 정도는 제칠만 할 것이다. 현재 함흥보다 인구는 많지만 평양의 위성도시이자 여러 지역이 한 행정구역으로 묶여 형성된 남포와 달리, 함흥은 함경도 지역의 대표도시이고 함흥대극장과 신흥관등 평양과 비견될 문화관광 시설들이 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북한 제 2의 도시로 여겨지기도 한다. 통일되면 광역시의 지위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함흥 역시 인구가 36만 명에 달했던 흥남시를 흡수한 도시이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청진시의 지위를 좀 더 높게 본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2002년 기준으로 도와 동급인 평양, 남포, 라선을 제외하고 인민위원회에 처급 부서가 편성되어 있는 일반시는 오직 청진시뿐이다. 단, 청진시가 함북 행정구역 특성상 워낙 면적이 넓어 홍천군과 면적이 비슷한 것을 생각하면 청진시의 지위는 중앙정부의 정치적 통제를 위해 높여준 것이 강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함흥시는 '문화와 역사의 도시'의 성격이 강한 것에 비해, 청진시는 '경제와 공업의 도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역사적으로도 조선시대 함흥부는 조선왕조의 발상지 중 하나로 꼽혔을 만큼 그 문화적 위치도 높았다.
서울에서 철도로 약 350km, 속초에서 뱃길로 200km. 함경도와 함길도의 '함'이 이 도시이다.
2. 역사
한사군 시대에는 임둔군(臨屯郡) 부조현(夫租縣)으로 추정된다. 원삼국시대에는 대략 옥저 땅이었다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진흥왕 대에 잠깐 신라 땅이 되었다가 다시 고구려에 빼앗기고 이후 발해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천리장성 이북으로 여진족의 영역이었으며, 고려의 여진 정벌 때 윤관의 활약으로 확보한 동북 9성 가운데 하나인 함주(咸州)였다. 그러나 고려는 동북 9성에서 철수하면서 다시 함주를 여진족들에게 반환했고, 이 땅은 몽골(원나라)에게 정복되어 요양행성 합란부로 불렸다.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펴면서 쌍성총관부를 수복할 때 진출해 1108년 함주 설치가 실패한지로는 150년만에, 제대로 영유한 것 기준으로는 발해 멸망 이후 400여 년만에 한민족의 판도에 들어오게 되었고, 다시 함주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함흥부라 불리며 관북 최대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함주와 화령(영흥군. 오늘날 금야군)을 오가며 자랐고, '풍패지향(豊沛之鄕)'이란 별명이 있었다. 경흥동에 정화릉(定和陵)·덕안릉(德安陵) 등 왕릉이 있고, 귀루동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선원전(璿源殿), 경흥동에는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 가운데 하나인 경흥전(慶興殿)이 있다. 별궁 격인 함흥본궁(구 사포구역 → 흥남시 소재) 역시 존재했으며, 흑백사진으로만 남은 이성계의 젊은 어진은 함흥본궁에서 촬영된 것이다. 함흥차사라는 관용구도 물론 여기에서 유래.
일제강점기인 1910년에는 함흥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동북부 지역을 신흥군으로 분리하였다. 1930년 함흥면이 함흥부로 승격되고, 함흥군의 잔여지역은 함주군으로 개칭되었다.
해방 이후 소련군정 치하에서 함흥부가 함흥시로 개칭되었다. 1946년 3월에는 소련군정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있어 사망자도 발생했다.
북한 치하에서는 다른 도시들처럼 파란만장한 변천을 겪었다. 6.25 전쟁 때 크게 파괴되었으나, 소련과 동독의 지원을 얻어 재건되었다. 한때 함흥에는 동독의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딴 '빌헬름 피크 거리'가 있었을 정도다. 1952년 12월 함주군을 일부 흡수했다가, 다시 1954년 함주와 오로군(현 영광군)에 일부지역을 편입시켰다. 1960년 함흥시가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이 과정에서 흥남시, 퇴조군(현 락원군), 함주군, 오로군을 함흥시로 편입하였다가, 1970년 8월 다시 함경남도 도청소재지인 일반시로 격하되었다. 이때 덕산구역, 퇴조구역을 덕산군, 퇴조군으로 독립시켰으나, 덕산군은 1974년 1월 다시 함흥시 회상구역에 편입되었으며, 이때 본궁구역이 사포구역에 통합되었다. 그해 8월에는 반룡구역이 동흥산구역으로 개칭되었다.
2001년 8월에 인구 약 36만의 흥남구역, 해안구역, 흥덕구역, 사포구역의 일부를 독립시인 흥남시로 만들었으나, 4년만인 2005년에 다시 폐지하고 흥남시는 함흥시로 돌아왔다. 2001년 당시 함흥시는 흥남시가 분리되면서 동흥산구역, 성천강구역, 회상구역 등 각 구역들을 폐지하였으나 2005년 흥남시가 다시 편입되면서 구역이 되살아났다.
1961년부터 흥남에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있으나 알다시피 비날론("주체섬유")이란 것이 계륵같은 존재이다.
3. 교통
철도 시설로는 함흥역, 흥남역, 창흥역등이 있다. 북한 철도망의 가운데에 함흥이 있고 북한 서부와 동부는 함흥을 거쳐야만 지나다닐 수 있는 형태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신흥선, 장진선, 서호선 등이 지난다. 참고로 이 기준은 두개 이상의 노선이 지나가는 기차역만 넣은 것이다.
원산과 라선을 잇는 1급 도로(대한민국 기준 7번 국도)가 지나고, 영광군을 통해 개마고원으로 가는 2급 도로도 지난다.
2018년 기준 장거리 택시의 함경도 북부와 평안도 사이의 중간 기점이라고 한다. 여기서 이 두 지역을 오가는 사람들이 환승한다고 한다.
4. 기후
겨울이 길고 혹독하게 추운 북한치고는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최한월인 1월의 평균기온은 -4.1℃[21]로 위도상 더 남쪽인 강원도 춘천시, 경상북도 봉화군과 비슷하고 남한 강원도 북부 및 파주보다는 따뜻하며 비슷한 위도인 평안북도 구성시보다도 3℃ 정도 더 따뜻하며 서울보다는 약 2도정도 춥다. 함흥의 겨울철이 비교적 따뜻한 이유는 한반도의 지붕이라 불리는 개마고원이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주고 수심이 깊은 동해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 내에서도 겨울이 따뜻한 곳에 속한다. 최난월인 8월의 기온도 23.2℃로 서늘한 편이고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를 강하게 띄는 북한 내에서는 연교차가 27℃ 정도로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다만 이는 유라시아 동안에 한정해서 비교적 따뜻하다는 것이다. 편서풍의 영향을 받는 대륙 동안은 대륙 서안에 비해 추울 수 밖에 없다. 함흥의 위도는 북위 39°54'45"로 북위 39°28'인 스페인의 발렌시아와 비슷하다. 그러나 함흥과 발렌시아의 1월 평균 기온은 각각 -4.1℃와 11.6℃로 16도나 차이가 난다. 발렌시아의 1월 평균 기온은 오히려 북위 26도에 있는 푸젠 성과 비슷하다.
그리고 함경도 지방답게 연 강수량은 847mm로 매우 적은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전통적으로 벼농사 대신에 감자 농사가 성행했다. 그 유명한 함흥냉면이 바로 감자 전분으로 만든 것인데 함흥 지방은 강수량이 적고 일교차가 매우 큰 곳이라 감자를 기르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다. 함경도 지방에서 생산된 감자의 질은 남한의 강원도, 제주도에서 생산된 감자보다 그 품질이 월등히 더 높다고 한다. 다만, 북한의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인해 저장 기술이 매우 낙후되어 제철이 아니면 제대로 먹을 수는 없다고 한다.
5. 경제
공식적으로 11개의 시장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평수시장이라는 시장이 가장 크고 전국 4위 규모의 시장이다, 사포시장은 의류 등을 취급하는 도매시장이라 이곳 말로 '써래기'라는 업자가 옷을 가공하는 산업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함흥 인근의 농촌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다.
6. 명승지
함흥본궁
만세교: 성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원래는 목교였다. 1928년 홍수로 유실되자 2년 뒤 콘크리트로 재건되었다. 정월 대보름에 다리밟기를 하는 풍속이 있었다.
함흥향교: 현존하고 있는 것은 누각인 제월루(霽月樓)뿐이다.
함흥 선화당
구천각(九千閣): 반룡산(북한명: 동흥산) 기슭에 있는 함흥읍성의 북장대였다.
치마대(馳馬臺): 구천각 부근에 있으며, 태조 이성계가 말을 달리며 무예를 익히던 곳이라고 한다.
경흥전
덕안릉, 정화릉
귀주사(歸州寺): 설봉산 아래 있는 절로 고려 문종 때 창건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31본산의 하나였으며, 이 부근에는 김일성의 지시로 동물원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반룡산의 경치, 성천강의 은반(겨울철 얼어붙은 강), 만세교의 낙조, 치마대의 가을달, 귀주사의 단풍, 함흥본궁의 밤비(夜雨), 서호진의 돛단배를 함흥팔경이라고 한다.#
6.1. 기타 유명지
신흥관: 북한에서 세운 냉면집으로 평양의 옥류관에 비견된다.
마전해수욕장, 마전 리조트: 2009년에 건설되었다.
7. 남북통일 이후 전망
남한 주도의 통일이 이뤄지면 함경남도의 주요 거점도시로서 평양, 청진과 함께 광역시 승격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옛 함흥, 함주, 흥남 지역을 다 엮으면 대충 100만 정도의 인구가 되고, 또 함경도에 대한 배려 차원도 고려한다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단,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첫 번째로 통일 이후에는 인구 유동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야 인구 통제를 하지만, 통일 이후 대한민국의 경우 적어도 이북 5도간의 인구 유동을 막을 필요성도 명분도 없는지라, 이미 껍데기만 남은 함흥의 인구가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적다.
두 번째로 함경남도가 두 토막 나 버린다. 마지막으로 일제가 나눠놓기 이전의 함흥 지역을 다 합친다면[25] 4,121.89㎢라는 거대하다 못해 무지막지한 행정구역이 탄생한다. 신흥군을 제외하면 2,900㎢ 정도로 많이 작아진다만, 서울이 605.18㎢, 그 넓은 평양이 1,260㎢, 남한 최대 면적 행정구역인 홍천이 1,819.6㎢인데 이 셋을 합친 것보다 더 넓다!(3,684.78㎢) 애초에 일본이 저래 쪼개 놓은 이유가 함흥이 너무 넓어서 라고 한다. 이런 건 수원-화성-오산 통합 같은 일종의 시나리오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행정구역 통합을 한다면 어디까지를 통합 함흥시의 범주로 삼아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듯 하다.
8. 기타
함흥 사람들을 얄개와 같다고 하는데 사막에 떨어뜨려도 살아남을 정도로 억세고 강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편견은 의외로 꽤 오래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에 함흥부의 풍속은 강하고 사납다라고 기록되었을 정도.
함흥에 관광 갔던 한 외국인이 몰래 찍은 영상으로 보인다. 2012년 영상으로 추정된다.
함흥 사투리와 역사, 문화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영상이다. 평양과 사투리가 굉장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경상도 말투와 어감이 유사하다는 의견이 있다. 표준어의 영향을 받기 전을 기준으로 하면 영남 지방과 경기~충청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보다 고유 사투리가 더 서울말과 차이가 큰 곳은 함경북도 최북단의 구 육진 지역 밖에 없다. 이곳은 너무 심한 사투리를 써서 제주도처럼 젊은 세대는 억양은 몰라도 오히려 표준어에 더 가까운 말투를 쓴다고 한다. 다만 표준어인 문화어를 북한은 서울말에 가까운데도 평양말이라고 세뇌시키고 한국에서도 반박을 안하니 문화어에 가까운 말투를 평안도 말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과거 '네다'로 대표되던 평안도 말과도 차이가 크기는 하다.
북한의 주요 대도시 중 유일하게 구글 맵스에서 도시와 그 구역들이 모두 표시되는 곳이다. 다만 사포1동 인근의 지역이 사포구역이 아닌 성천강구역으로 표기되는 등 다소 오류가 있다. 평양이나 청진은 일부 구역이 표시되지 않는다.
마약 생산의 거점이라는 오명이 있다. 함흥 출신 탈북민 조선일보 김명성 기자는 국가과학원 함흥분원과 함흥약학대학, 흥남제약공장 등 마약연구ㆍ제조와 관련된 기관 및 인력이 집결돼 있다면서 이곳에서 필로폰과 같은 마약이 생산된다고 하였다. 북한 안에서도 이 도시가 마약을 많이 한다는 소문이 돌며, 국가에서 혈액 채취 등의 검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도 탈북을 하면 이렇게 한탄하기도 한다. 추적60분도 한국 유통 필로폰의 출처를 함흥으로 꼽았다.
북한판 ADD인 국방과학원의 화학재료 연구소가 이곳에 위치한다.
9.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함흥시: 시청 소재지 소화정1정목
하위 행정구역: 8행정동 84법정동, 법정리
면적: 274.14㎢
인구: 112,157명
인구밀도: 409.12명/㎢
아래 행정동과 법정동은 《이북5도 명예읍·면·동장 위촉에 관한 규정》 제8조 별표2에 규정되어 있다. 광복 당시 행정구역이니만큼 일본식 지명도 많이 보이며, 일부 지명은 겹치기도 한다.
경흥동(慶興洞): 경흥리(慶興里)·부평리(富坪里)·상수리(上水里)·심동리(深洞里)·하수리(下水里)
반룡동(盤龍洞): 금일리(錦一里)·반룡리(盤龍里)·산수리(山手里)·서일리(曙一里)·운흥리(雲興里)·지락리(知樂里)·출운리(出雲里) 현 동흥산구역
보고동(保古洞): 보고리(保古里)·상보리(上保里)·신보리(新保里)·자흥리(自興里)·중보리(中保里)
사포동(沙浦洞): 사포리(沙浦里)·신흥리(新興里)·용호리(龍湖里)현 사포구역
서상동(西祥洞): 서상리(西祥里)·신흥리(新興里)·풍호리(豊湖里)·흥도리(興島里)
성천동(城川洞): 만세리(萬歲里)·성천리(城川里)·황금리(黃金里)현 성천강구역
중앙동(中央洞): 남문리(南門里)·대화리(大和里)·복부리(福富里)·소화리(昭和里)·연지리(蓮池里)·조일리(朝日里)·중앙리(中央里) 시청 소재지
치마동(馳馬洞): 일출리(日出里)·춘일리(春日里)·치마리(馳馬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함흥시 항목에는 광복 당시의 행정구역이 다음과 같은 84개 동으로 구성된 것으로 나와 있다.
소화1가(昭和一街)·소화2가·중앙1가(中央一街)·중앙2가·중앙3가·서1가(曙一街)·서2가·산수1가(山手一街)·산수2가·산수3가·금1가(錦一街)·금2가·군영1가(軍營一街)·군영2가·대화1가(大和一街)·대화2가·대화3가·대화4가·성천1가(城川一街)·성천2가·성천3가·성천4가·황금1가(黃金一街)·황금2가·황금3가·황금4가·본1가(本一街)·본2가·본3가·본4가·본5가·복부1가(福富一街)·복부2가·복부3가·사포1가(沙浦一街)·사포2가·사포3가·일출1가(日出一街)·춘일1가(春日一街)·춘일2가·치마(馳馬)·동운(東雲)·조일(朝日)·반룡대(盤龍臺)·지락(知樂)·주길(住吉)·낙민(樂民)·유락(有樂)·만세(萬歲)·신흥(新興)·낙(樂)·용흥(龍興)·회상(會上)·출운(出雲)·하신흥(下新興)·서흥(西興)·당북(塘北)·당흥(塘興)·상보(上保)·연봉(蓮峰)·대흥(大興)·중흥(中興)·자흥(自興)·풍동(豐東)·인흥(仁興)·남신흥(南新興)·운곡(雲谷)·초흥(草興)·동흥(東興)·보고(保古)·서상(西上)·신상(新上)·풍호(豐湖)·흥도(興島)·십이(十二)·구억(九億)·회양(會陽)·중보(中保)·상수(上水)·하수(下水)·부평(富坪)·경흥(慶興)·심흥(深興)·신보(新保)
광복 당시 행정구역을 보면 주요 도시에 소화동(昭和洞), 명치동(明治洞)이라는 지명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당시 일제가 히로히토의 연호인 쇼와(昭和), 그리고 할아버지 메이지(明治)의 연호를 따서 붙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정(町)으로 표기했는데, 이북 5도 한정으로 이를 현대 한국식 동(洞)으로 구역만 바꾸어서 일단 표기하고 있는 상태로, 비슷한 경우로 일본의 고대 국가였다는 야마토에서 따온 대화동(大和洞)도 이 때문에 많이 띄는 것. 단 고양시 대화동(大化洞)이나 평창군 대화면(大和面) 같은 경우는 이와 연관이 없다. 그 외에 이즈모, 후쿠토미, 아사히, 히노데, 카스가 같은 것도 보인다.
광복 직후 북한에서는 소화1·2정목(町目)을 해방리(解放里)1·2구로, 서1·2정목을 용마리(龍馬里)로, 산수1~3정목을 운흥리(雲興里)1~3구로, 일출1정목 및 금1·2정목을 금사리(金絲里)1·2구로, 군영통1·2정목 및 조일정을 동문리(東門里)로, 대화1~4정목을 삼일리(三一里)1~4구로, 황금1~4정목을 통남리(通南里)1~4구로, 본1~3정목 및 복부1정목을 연지리(蓮池里)로, 본정4·5정목 및 황금정4·5정목을 남문리(南門里)1~5구로, 복부2·3정목 및 영정을 광화리(光華里)로, 춘일정1·2정목을 지장[31]리(智將里)1·2구로, 동문정을 이화리(梨花里)로, 주길정을 신창리(新昌里)로, 지락정을 낙산리(樂山里)1·2구 및 지락리로, 유락정을 서문리(西門里)로, 출운정을 서운리(西雲里)로 개칭했다. 1953년까지 사용한 이들 지명은 1.4 후퇴 이전 함흥에 살았던 실향민들의 회상에 등장하기도 하니 특별히 언급해둔다.
대한민국의 국도 체계로는 5번 국도 및 7번 국도가 지나간다.
10. 출신 인물
권진규
김완룡
도상록
문용형: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문재인의 부친
문예봉
이성계
이임학
주세죽
홍덕영
정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