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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 이봉상.
그는 충청병사로 근무할때 이인좌의 반란군과 내통한 기생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다. 일본 교토대 박물관 소장.
고전에는 지방수령들과 지방기생들의 스캔들이 다수 다뤄진다. 지방 수령들은 민생에 힘을 써도 모자랄 판에, 어이없게도 서로 기생을 차지하려고 볼썽 사나운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조선 전기 문신 이륙(1438~1498)이 지은 <청파극담>에 따르면, 유 씨 성을 가진 임천(부여)군수는 늙은 나이에도 미모의 기생을 관아로 불러들이는 일이 잦았다. 군수의 상관인 성씨 성의 충청수사(수군절도사)가 그 기생의 얘기를 전해 듣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임천으로 직접 행차했다.
수사는 동헌에 들어서기 무섭게 "ㅇㅇ기생은 잘 있냐"고 기생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러자 모두들 입을 맞춰 "병들어 죽게 돼 나올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수사가 몽둥이를 들고 아전들을 위협하자 머지않아 기생이 남루한 차림으로 수사 앞에 대령했다. 수사가 재차 명해 기생을 깨끗하게 단장시키니 과연 외모가 여러 기생 중 으뜸이었다.
크게 만족한 수사는 기생을 데리고 수영으로 돌아갔다. 아끼던 기생을 빼앗겨 화가 잔뜩 난 군수는 관노를 보내 기생에게 "너희 어머니가 죽었으니 속히 돌아오라"고 전하게 했다. 그러자 기생은 웃으며 수사에게 고했다.
"저의 어머니는 죽지 않았습니다. 제가 비록 관아에 있었으나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늙은) 군수가 볼 때마다 마음이 놀랍고 끔찍했던 차에 수사께서 인연을 맺어 고통을 면하게 해주신 것이지요. 참으로 은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진2. 고위 관료와 기생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충무공의 5대손 이봉상(1676~1728)은 지방수령으로 근무하다가 데리고 있던 기생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해 벼슬이 종2품에 이르지만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는다.
작자 미상의 <좌계부담>에 의하면, 이봉상은 훈련대장과 어영대장을 지낸 뒤 충청병마절도사로 나갔는데, 때마침 그곳에서 이인좌의 난(영조 4년 이인좌 등의 소론이 일으킨 반란사건으로 무신년에 발생해 '무신란'이라고도 함)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서울을 공격하기에 앞서 충청병영에서 무기를 탈취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충청병사 이봉상을 모시는 기생 월례를 사주해 침소에 둔 칼을 훔쳐내게 했다. 깊은 잠에 빠졌던 이봉상은 반란군이 쳐들어오는 소리에 놀라 칼을 찾았지만 칼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봉상은 달아나 병영 후원에 몰래 숨었으나 적에게 발각돼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봉상의 비장이던 홍림도 함께 반란군에게 살해됐다.
<좌계부담>은 "홍림이 몸으로 대장을 감싸고 덮었으나 구하지 못하고 난도질당하여 죽었으니, 아! 그 충의가 빛나는 도다"라고 적고 있다. 이순신의 후손은 기생에게 속아 달아나다가 죽었는데 그의 부하가 그런 상관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이다.
사진3. 기생과 술 마시는 사람.
<하재일기>의 저자 지규식은 신분이 낮았지만 재력을 갖고 있어 애인을 여러명 뒀다. 캘리포니아 디지털도서관 소장.
중종 때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김안로의 아들 김시(1524~1593)도 지방기생과의 염문이 고전에 전해진다. 그는 아버지가 사사된 후 벼슬길이 막히자 화가의 길을 걸었다.
선조때 대사간을 지낸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따르면, 김시는 산수, 인물, 우마, 화조, 초충 등 여러 분야의 화화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했다. 국보 제240호 자화상의 작자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가 그를 안견에 버금가는 화가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김시는 대머리였다. 어느날 홍주(충청도 홍성) 수령에게 그림을 그려준 댓가로 접대를 받게 되었다. 홍주 수령은 나이 어린 기생을 특별히 선발해 그를 모시게 했다.
김시는 다음 날 장난기가 발동해 우두머리 기생에게 "어제 그 아이가 늙은 중과 정을 통한다는 데 사실이냐"고 따져 물었다. 행수기생은 "당치도 않은 말"이라고 발끈했고 이 말을 전해들은 어린 기생도 "억울하다"며 눈물까지 뚝뚝 떨구었다. 그제서야 김시는 모자를 벗고 머리를 보여주며 "내가 바로 그 중이니라"고 놀려대면서 웃었다.
관리들 뿐만 아니라, 중인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돈만 있으면 기생을 애인으로 둘 수 있었다. 요즘 남성들은 애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각종 선물공세를 펼치지만 조선시대에도 기생 애인을 두려면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선 말 궁궐과 관청에 각종 그릇을 납품하는 공인의 일상을 적은 <하재일기>의 저자 지규식은 엄연히 가정이 있는 가장이었지만 기생에 소속된 애인도 있었다. 그는 장춘헌이라는 기생집의 난인이라는 기생과 각별히 가깝게 지냈다. 돈과 귀중품 뿐만 아니라 생필품까지 그 기생에게 수시로 갖다 바쳤다.
항라(견직물의 일종) 3필을 90냥에 사서 1필은 장춘헌에 보내고 2필은 본가에 보내는 식이었다. 또 아내와 아이들이 우산동 묘소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는데, 지규식은 그 틈에 장춘헌에 가서 귀걸이를 주고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돌아오기도 했다고 일기에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장춘헌의 기생이 요구하는 게 많았던지 이별과 재회를 되풀이한다. "밤에 장춘헌에 가서 영원히 절교하고 돌아왔다"고 썼다가, 한 달 뒤에는 "밤에 장춘헌에 가서 정담을 나누고 돌아왔다"고 썼다.
그는 조카가 죽은 날에도 애인의 집을 찾았다. "날이 저물어 집에 돌아오니 조카아이가 이질로 죽어서 이제 막 내다 묻었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으나 어찌하겠는가. 흰 모시 1필과 참빗 2개를 장춘헌에게 주려고 들렀다."
조카가 죽어 놀랐다면서도 기가 막히게도 애인에게 달려가 선물공세를 퍼붓고 왔다는 것이다. 고전은 거울처럼 그시대의 세태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17.기생에게 속아 목숨을 잃은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 [해어화2]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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