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하면 우선적으로 연상되는 단어들이다. 선운사 동백(冬柏)은 천연기념물(제184호)로 지정될 만큼 수령(樹齡)도 오래려니와 그 자태가 무척 빼어나다. 하지만 동백이 지는 모습은 너무 처연해서 마음이 짠하다. 가수 송창식은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이라 노래했지만, 실제 동백의 낙화를 보노라면 송창식의 노래 가사보다 더 잔인한 정경이 떠오른다. 이 꽃은 마치 참수당한 모가지가 땅에 떨어지듯 무참하게 떨어지는 것이다. 선운사에 간다. 동백꽃은 이미 졌고 동구 앞 주막도 사라져 주모의 걸쭉한 육자배기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 나는 선운사로 향한다. 송창식의 노래를 들으며 호남고속도로를 타는 것이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 바람불어 설운 날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임아 /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 가는 길은 바람 한 점 없이 한여름의 뙤약볕만 내리 쬐였다. 선운사에는 임으로부터 버림받은 서러움을 달래기 위해 가는 게 제격이라고 송창식은 노래하고 있지만, 우리는 모처럼의 가족여행으로 기분이 한창 고양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아직 방학을 하지 않았으나 현장 학습을 핑계로 당당히 결석을 했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제도가 생겨난 덕택이다. 가족여행을 통해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며 가족애를 확인하라는 의미에서 만든 현장 학습제. 그 제도를 적절히 활용할 수 없는 대부분의 서민들에게는 좌절감과 위화감만 더욱 조장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들뜬 기분을 가라앉힌다.
선운사로 가는 길
회덕분기점에서 호남고속도로로 들어서자 차선이 줄어들었으나 오가는 차량 또한 눈에 띠게 적어 거침없이 달리기를 사십여 분, 정읍 인터체인지에서 22번 국도로 빠졌다. 지난 봄부터 가뭄이 계속되어 남부 지방은 물 사정이 심각하다는 얘길 들었는데, 선운사 부근의 반암 저수지에는 시퍼런 물이 찰랑거려 가뭄의 심각함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반암 저수지를 끼고 돌아 조금 더 가니 도로가 갑자기 넓어지고 풍천장어 간판이 붙은 음식점들과 동백호텔 등 숙박시설이 멀리 눈에 들어온다. 풍천장어와 복분자술은 최근 고창 선운사의 명물로 각광받기 시작한 대표적 음식이다. 복분자(覆盆子), 이 술을 먹고 오줌을 싸면 요강이 엎어질 정도로 오줌발이 세진다는 술. 흔히 복분자를 산딸기라고 잘못 알고 있는데 산딸기와 비슷 하긴 해도 전혀 다른 열매이다. 선운사 계곡물이 바다물과 합쳐지는 풍천(豊川)의 장어는 다른 곳의 장어보다 싱싱하고 힘이 좋아 예로부터 일품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음식점에서 파는 장어는 대부분 양식된 것이고 풍천에서 직접 잡은 장어는 매우 귀하다고 한다. 요즘은 어딜 가나 그곳의 명물 음식이 있다. 지방의 특산명품은 앞으로도 계속 발굴하고 개발해야 할 터이나, 너무 먹고 마시는 음식에만 치우치는 게 아닌가 하여 아쉽다. 여행을 하며 그곳만의 특이한 음식을 맛보는 일은 빠뜨릴 수 없는 즐거움이지만, 우리의 여행 문화는 지나치게 그쪽으로만 발달되어 있다. 선운사에 와서도 절 구경은 하는 둥 마는 둥 삽시간에 지나치면서 풍천장어와 복분자술을 맛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기갈스럽게 찾는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외국 여행을 갔다 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곳의 박물관이 어떻고 문화가 어떻고 하면서도 정작 국내 여행을 다녀와서는 음식 얘기에만 열을 올리는 점이다. 우리 문화는 볼 것이 없을 만큼 형편없거나 아니면 보지 않아도 다 안다는 것일까. 7월 중순 토요일 오후의 선운사 가는 길은 더없이 고즈넉했다. 절 옆을 흐르는 냇가에서는 수업을 마친 하동(河童) 예닐곱 명이 옷을 입은 채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게 노는 그 아이들을 보니 문득 잊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고, 비로소 서울을 벗어났다는 게 실감되었다. 도시 아이들은 저 물놀이의 즐거움을 모른다. 도시 아이들은 고작해야 실내 수영장의 소독물에서 전문 강사에게 체계적인 수업으로 수영을 배울 뿐이다. 하지만 이곳의 아이들은 물과 친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헤엄을 치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겐 영법(泳法)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물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즐겁게 놀면 그만이다. 때로는 깊은 소(沼)나 여울에서 생때같은 목숨을 잃기도 하지만, 저 아이들에게 맑은 개울물은 더없이 훌륭한 놀이감인 것이다. 도시아이들이 열광하는 스타크래프트나 포켓몬과는 비교도 안 된다. 선운사 일주문 초입에 예의 ‘선운사가비’와 ‘미당시비’가 서 있다. ‘선운사가비’는 노래 가사 없이 관련 설화만 전하는 백제 가요 「선운사가」를 미당 서정주가 새로 짓고 평강 정주환이 쓴 비문이다.
나라 위한 싸움에 나간 지아비 / 돌아올 때 지내도 돌아오지 안으매 그 님 그린 지어미 이 산에 올라 / 그 가슴에 서린 시름 동백꽃같이 피어 노래하여 구름에 맞닿고 있었나니 / 그대 누구신지 너무도 은근하여 성도 이름도 알려지진 안했지만 / 넋이여 먼 백제 그때 그러시던 그대로 영원히 여기 숨어 그 노래 불러 / 이 겨레의 맑은 사랑에 늘 보태옵소서
「고려사」에 전하는 「선운산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사(長沙)에 사는 한 사내가 군대에 뽑혀 갔는데, 올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매 그 아내가 늘 선운산에 올라 남편을 그리며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요컨대 「선운산가」는
‘망부가(望夫歌)’인 셈이다. 이 노래는 유일하게 전해 내려오는 백제 가요 「정읍사」의 내용과 대단히 유사하다. “달ㅎ 노피곰 도ㄷ샤 멀리곰 비취오시라”로 시작되는 「정읍사」는 장(場, 저자)에 간 남편이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온갖 근심으로 애태우는 아녀자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한 가편(佳篇)이다.
선운사 골째기로 /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 /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디다
미당의 붓글씨는 격식을 제대로 갖춰 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소위 ‘명필‘과는 거리가 멀다. 미당의 붓글씨는 그 독특한 서체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다. 다소 비뚤비뚤하면서도 선이 매우 날카롭고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그 글씨는 오직 미당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미당체로 인쇄된 T-셔츠를 입고 선운사에 간다
지난 5월인가, 정지용문학제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용의 시가 인쇄된 T-셔츠를 입고 있었다. 주최측에서 미리 마련한 것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무척 흐뭇했던 기억이 새롭다.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는 매년 여름방학이면 ‘창작교실’이란 걸 연다. 재학생들과 선배 문인들이 숙식을 함께 하며 작품 합평회를 하는 행사인데, 몇 년 전 미당의 시 구절을 새긴 T-셔츠를 준비했더니 선배들이 무척 좋아했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이 구절은 미당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란 시를 약간 변형한 것이다.
“섭섭하게, / 그러나 / 아조 섭섭치는 말고 / 좀 섭섭한듯만 하게 // 이별이게 / 그러나 / 아주 영 이별은 말고 / 어디 내생에서라도 / 다시 만나기로하는 이별이게, // 연꽃 / 만나러 가는 / 바람 아니라 /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 엇그제 /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 한 두 철 전 /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지금 생각해도 아쉬웠던 것은, 미당체를 그대로 살려 쓰지 못했던 점이다. 미당의 빼어난 시를 미당체로 인쇄한 T-셔츠를 입고 선운사에 간다! 그럴 듯 하지 않은가. 비록 조잡한 활자체이긴 하지만 예전의 그 셔츠를 입고 올 걸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선운사 경내로 들어선다. 먼저 대웅전에 들어가 참배를 한 뒤 살펴보니, 특이하게도 부처님이 세 분이나 모셔져 있다. 가운데가 ‘나무청정법신비로자나불(南無淸淨法身毘盧遮那佛)’이고 좌측 협시불이 ‘나무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南無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 우측 협시불이 ‘나무원만보신노사나불(南無圓滿報身盧舍那佛)’이다. 선운사에는 보물이 많다. 선운사 대웅전부터 시작하여, 관음전 금동보살좌상(279호), 도솔암 내원궁 지장보살좌상(280호), 참당암 대웅전, 도솔암 마애불 등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도솔암 마애불은 40m나 되는 암벽에 여래불을 새긴 것으로,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처님 명치 부위에는 감실(龕室)이 있는데, 거기에는 신비한 비결이 숨겨져 있고 그 비결이 세상에 출현하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다고 한다. 1892년 8월, 동학접주 손화중 등이 석불 감실을 깨고 비결을 꺼냈으나 나중에 이 일이 관아에 알려져 주모자 3명이 사형에 처해지고 나머지 100여명도 곤장을 맞았다는 기록이 ‘동학사’에 전한다. 1892년이면 동학운동이 발발하기 불과 2년 전의 일로, 이 유언비어에는 부패한 조선 정권의 몰락을 바라는 민중들의 희원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참조)
선운사에 가거든 추사의 백파선사 비문을 찾아보라!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눈에 띠지 않지만, 유홍준 교수는 선운사에 가거든 추사 김정희의 백파선사 비문을 꼭 찾아 볼 것을 권한다.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라 쓰여진 이 석문(石文)은 추사체의 진경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추사와 백파의 인연은 구한말의 선승 석전 박한영에게 이어지는데, 박한영의 특별한 배려에 의해 동국대학교 전신 혜화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한 서정주 또한 그 아름다운 인연의 한 자락에 몸을 싣고 있음일까. 견강부회일지 몰라도 세계에 내놓아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우리나라 최고의 현대시인 미당 서정주가 추사, 백파, 그리고 석전 스님 등의 정신적 법통을 한 가닥이나마 이어받았다고 생각해도 그리 큰 망발은 아닐 것이다. 선운사 주차장 부근에 천연기념물(제367호) 송악이 암벽을 온통 감싸고 있다. 드릅나무과에 속하는 덩굴식물인 선운사의 송악은 내륙에 자생하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냇가 건너에 있어 좀더 자세히 살필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 미당 생가를 찾는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 흥덕과 부안면이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대한여객 7-3번 버스가 회차를 한다. 버스에는 서너 명의 승객이 무료하게 부채질을 하며 차가 떠나기만 기다린다. 기사는 주현미의 노래에 취해 언제 출발해야 할 지를 잊은 듯 하고. 차량과 인적이 뜸한 그 삼거리에 선운산을 배경으로 하여 새로 단장한 건물이 한낮의 무더위에 졸 듯 앉아 있다. 폐교된 교사를 개수하고 중앙 건물을 새로 지은 미당기념관. 하지만 작년에 공사가 중단되어 움직이는 것이라곤 산자락의 흰구름 뿐이다. 담장이 허술한 틈으로 들어가보니 건물 내부 또한 휑뎅그레 비어 있다. 들으니,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에서 이곳에 전시할 기념품을 선정한다고 하는데, 속히 그 사업이 진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미당의 문학을 좀더 쉽게 접근하고 이해하기를 바랄 뿐이다. 미당 생가는 바로 지호지간에 있었다. 불과 3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당의 실제(實弟)가 옆집에 기거했다고 하나 지금은 일산으로 이주해 명실상부한 빈집이 되고 말았다. 미당 생가는 거의 폐가나 다름없었다. 누구 하나 제대로 돌보지 않는 그곳은 마치 김동리의 「무녀도」에 묘사되어 있는 모화의 집을 연상케 한다. 몇 년 전 어느 문학단체에서 행사를 가졌던지 담쟁이덩굴 우거진 행랑채에 찢어진 현수막이 흉물스럽게 매달려 있어 폐가 분위기를 배가시켜 준다. 이래도 좋은가. 일제 때 친일작품을 쓰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TV에서 어처구니없는 발언으로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는 했어도, 우리나라 최고 시인의 생가를 이렇게 함부로 방치해도 괜찮은 것일까. 독일에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고등학교 시절 가곡으로 배웠던 로렐라이 언덕을 직접 보고 여간 실망이 아니라지만 관광객들의 발길은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하나의 상품이 되어 여러 가지 캐릭터가 개발되어 지방자치단체의 재원에 큰 보탬이 된다고 하는데, 미당은 더 큰 상품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향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한 채 잊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당의 과거 불미스러운 전력만 문제 삼는 것은 소아적 태도이다. 부끄러운 과거도 정확히 알려 후학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하지만, 자랑거리에 인색해서는 안 될 터이다. 여장을 풀기 위해 숙소로 돌아오면서도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고창 읍성을 찾았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은 조선조 단종 원년(1453년)에 외침을 막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나주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을 방어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했다. 둘레 1,684m, 성의 높이 4∼6m, 면적 5만172평의 광범위한 규모를 자랑하는 고창 읍성에는 동헌과 객사, 풍화루, 공북루, 진서루, 등양루, 성황사 등 각종 건물이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중양절(9월 9일) 모양성제를 열고, 윤달이 든 해에는 답성놀이를 한다. 처음에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사실 고창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바로 이 읍성이었다. 평일 오전이어서 관람객이 없었던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우선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가 도시의 번잡스러움을 떨쳐버릴 수 있게 해주었고, 복원된 건물들이 요란스레 치장을 하지 않고 단아하고 기품있게 보존되어 있어 무엇보다 만족스러웠다. 성곽을 따라 오르며 땀을 흘리다가 문득 소로(小路)로 접어들면 노송이 순식간에 땀을 식혀준다. 우거진 풀숲에 수줍게 숨어있는 산딸기를 따먹으며 걷는 동안 문득 시공을 초월해 조선조의 한 시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왕이면 그 기분을 더욱 만끽하고자 동헌을 찾았다. 웬만한 사적지에 가면, 건물에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이 위압적으로 버티고 있는데 반하여, 이곳의 동헌 마루에는 “신을 벗고 들어가세요”라고 은근히 권하는 듯한 팻말이 맞아주어 여간 반갑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모두 신발을 벗고 동헌 마루에 앉고 누우며 킬킬거렸다. 마침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저절로 잠이 오는데, 동헌 앞마당에 있는 육중한 나무에는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미끄럼을 탄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으니 춘향가 한 대목이 끊어질 듯 이어진다. 땡볕에 일하는 인부만 보일 뿐 관람객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직 이런 곳도 있는 것이다. 보고 느낄 것 많고 분위기 최상인데 사람마저 적은 곳. 이상하게도 관광객들은 시끄럽고 복잡하여 심신을 함께 지치게 만드는 곳을 더 좋아한다. 고창 읍성은 지금도 복원 중인데 무엇보다 풍광이 빼어나고 산책길에 노송이 즐비하여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저절로 삼림욕을 할 수 있으며 조선조 관아의 모습을 가깝게 대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이곳은 외형만 그럴 듯하게 복원해 놓고 음식과 특산품을 팔며 관광객을 유혹하는 다른 읍성과는 다르다. 교양있는 규방의 처녀가 함부로 눈길을 주지 않듯, 고창읍성은 고고하게 자태를 뽐내는 것이 낫다. 고창 읍성 바로 앞에는 동리 신재효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그러고 보니 고창 읍성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왔던 소리가 바로 김소희 명창의 춘향가 한 구절이었던 모양이다. 신재효는 순조 12년(1812년) 11월 6일 현재의 고창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천대받던 판소리의 예술성에 주목하여 이를 정리함으로써 우리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 기이하게도 그는 난 날(生日)과 죽은 날이 똑같은데, 고창 사람들은 이 사실을 영국의 셰익스피어와 비교하여 동리(桐里)를 ‘한국의 사옹(沙翁)’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리보다 꼭 한 세기를 건너 뛰어 흥덕면 사포리에서 또 한 사람의 천재 예술가가 태어난다. 국창 김소희 여사. 김소희는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자질을 드러냈는데, 열세살의 나이에 남원명창대회에서 1등을 함으로써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녀가 득음(得音)을 위해 폭포 밑에서 피를 토하며 소리를 한 것이라든가 인분(人糞) 썩은 물을 마셨다는 일화는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예인의 생가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신재효와 김소희, 그리고 서정주. 이 세 사람의 예인(藝人)은 비단 고창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한국 예술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재효 생가의 보존 상태는 매우 허술했다. 동리 생가에서는 고창 읍성을 원상대로 복원하려 노력한 섬세하고 진지한 애정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부엌에는 형식적으로 가마솥 하나만 덩그렇게 걸려 있었고, 뒷뜰의 연못은 말라 있었으며, 덩굴나무의 밑둥은 콘크리트로 조잡스럽게 가려져 있었다. 이런 식의 생가 복원과 전시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모처럼 찾은 방문객들에게 혐오감과 불쾌감만 심어주어 고인에게 누만 끼칠 뿐이다. 고창 읍성과 동리 생가는 고창의 중심에 있어 오히려 사람들에게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두 곳은 고창의 명소로 내세워도 전혀 남부끄럽지 않을 만한 곳이 다. 지금 동리생가는 무슨 공사를 하는지 포크레인이 요란스러운 굉음(轟音)과 시커먼 매연을 토해내고 있었는데, 이왕 생가 복원공사를 할 바에는 누가 보더라도 감탄하여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 정도로 원형 그대로 복원했으면 한다. 고창 읍성에서 서쪽 방향으로 3km쯤 가면 도산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과 매산 마을 일대가 북방식 고인돌이 광범위하게 널려 있는 곳이다. 이곳의 고인돌(支石墓)은 약 2500년 전부터 500여년 간 이 지역을 지배했던 족장의 가족 묘역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규모로나 형식에 있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흔치 않은 밀집성을 자랑하고 있다. 1965년 국립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처음 3개가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442개가 조사되었으며, 파괴되고 매몰된 것까지 포함하면 550여기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조사 이전에 파괴된 것도 적지 않았을 터이나 그 개수는 정확히 산출하기 어렵다. 고창의 고인돌은 그 숫자의 방대함에서만 주목받는 게 아니라 북방식, 탁자식, 지상석곽형, 바둑판식(남방식) 등 그 형식도 무척 다양하고 상석의 크기도 작은 것에서 점차 거석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동북아시아의 지석묘 변천사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는 문화 유산이다. 하여, 이곳을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줄 것을 신청해 놓고 있는 중이라 하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한다. 고창에는 문화 유산만 있는 게 아니다. 동호 해수욕장과 구시포 해수욕장은 모래밭과 뻘이 아득하게 펼쳐 있는 천혜의 해수욕장이다. 썰물이 진 구시포는 100여m를 걸어 들어가도 가슴팍에 간신히 물이 찰 정도로 수심이 얕은데, 바닥은 크림처럼 부드러운 진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진흙을 퍼내어 온몸에 바르면 그대로 머드팩이 되는데, 몸에 바를 때의 부드러운 감촉은 뭐라 설명하기 곤란하다. 그리고 이곳 뻘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거리가 무진장하다. 물놀이를 하다 지친 아이들은 뻘을 파내 무언가를 쉴 새 없이 잡아낸다. 가장 눈에 많이 띠는 것이 소라게였다. 죽은 소라껍질을 터전으로 삼는 손톱만큼이나 작은 게가 뻘밭을 살아 숨쉬게 한다.
고창,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문화예술의 고장
해수욕으로 피곤해진 몸을 쉬기 위해서는 해수탕도 좋지만 석정온천의 게르마늄 온천욕을 권할 만하다. 이곳의 설명에 따르면, 게르마늄 온천은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발견되었다 하는데, 지금은 목욕탕만 운영하고 있지만 이곳에 대규모 위락시설 단지가 들어설 것이라고 한다. 이 시설이 완공되면 고창은 유명한 관광단지로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마치 부곡 하와이나 용인 놀이동산이 그렇듯이, 고창은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고장이다. 보물과 사적, 그리고 천연기념물이 군데군데 있는 것만으로도 그렇고, 신재효, 서정주, 김소희 등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가가 태어난 곳이며, 무엇보다 까마득한 옛날 우리 선조들의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고인돌이 무더기로 퍼져 있는 고창은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문화와 예술의 고장인 것이다. 흔히 광주를 ‘예향(藝鄕)’이라 일컫지만, 고창도 광주 못지않게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 풍부한 곳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고향의 문화 예술에 긍지를 느끼고 그것을 널리 알리는 일에 관심을 갖느냐 하는 점이다. 광주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아끼고 자랑하는 정도는 약간 지나치다 싶을 때가 있다. 그들은 자기 고향이 ‘예향’으로 알려진 것에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영예를 지키기 위해 무척 애쓴다. 그런데 고창 사람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이곳에 오기 전에 누구의 소개를 받을까 생각도 했으나, 그냥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게 쓰려고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잘못이었다. 고창 사람들의 자기 고향에 대한 애증을 확인하는 게 오히려 고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을 것이다.
신재효, 김소희, 서정주와 관련된 다양한 캐릭터상품 개발했으면…
고창 읍성의 보존 상태는 무척 양호했으나, 동리 생가와 미당 생가는 여간 실망스러운게 아니었다. 그리고 석정리조트의 개발도 염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곳이 완공되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밀려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은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겠으나, 고창은 더 이상 문화관광명소가 아니라 단순한 위락단지로 인식될지 모른다. 선사 시대의 유적과 초현대 위락시설이 사이좋게 병존하는 곳, 고창. 보다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석정리조트같은 위락시설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곳은 고창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풍천장어와 복분자술, 그리고 고창수박은 굳이 고창에 가지 않더라도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다. 그러나 고인돌과 동백꽃은 고창에서만 그 진수를 감상할 수 있으며, 신재효, 김소희, 서정주의 뛰어난 예술성도 고창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선운사 동백을 서울에 이식한다손 치더라도 선운사 동백의 ‘아우라(Aura)’는 증발되어 그윽한 정취를 느끼지는 못할 터이다. 고창은 문화관광지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민 전체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여러 가지 상품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천여 가지 고인돌 모양을 축소 제작하여 판매하는 것도 한 방법이고, 신재효, 김소희, 서정주 등과 관련된 다양한 캐릭터 상품을 개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천여 기나 되는 고인돌을 원래 모습 그대로 깔끔하게 축소해 놓은 모형을 수집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수입이 될 것이며, 미당 생가와 기념관에서 미당 시집이나 캐릭터 상품을 사는 것도 오래 기억될 일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것들을 얼마나 다양하고 정교하며 정성스럽게 만들어 관광객의 주머니를 열게 하느냐 하는 점이다. 고창을 떠나는데 하늘이 꾸물거리더니 삽시간에 장대비가 쏟아진다. 마른 장마 끝에 태풍이 몰려온 것이다. 다행히 태풍은 알맞은 비만 뿌려주어 효자 노릇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