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7k3C7OfbouI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성경 어휘 연구를 계속합니다. 오늘은 좀 더 중요한 또 하나의 어휘 단어를 깊이 연구하고자 합니다. 성경 어휘 연구를 하는 목적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각 단어가 갖고 있는 성경적 의미를 통해서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마침내 올바르고 건전한 신학을 수립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은 65번째 시간으로 '로고스(Logos)'라는 단어에 대한 연구를 하겠습니다.
로고스는 아마 교회 생활을 통해서나 안식일학교, 주일학교 교과를 통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로고스는 아주 중요한 단어이며, 헬라어입니다. 로고스가 무슨 뜻인지 먼저 사전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앞에서 한번 이 사전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헬라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아주 중요한 사전(BDAG)입니다. 신약과 고대 문헌에 나타나 있는 헬라어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사전입니다. 거기에 로고스라는 단어는 598쪽에서 601쪽에 걸쳐 자세히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한 서너 페이지에 걸쳐서 로고스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뜻 세 가지만 들겠습니다.
Communication whereby mind finds expression: 우리의 생각 또는 마음이 표현을 찾는 하나의 소통, 즉 생각을 표현하는 말이자 말씀입니다.
Computation, reckoning: 계산하는 것입니다. 원래 컴퓨터는 계산하는 계산기입니다. 계산 또는 'reckoning', 이것도 계산이자 셈입니다. 계산 또는 결산(회개)이라는 뜻으로서 로고스라는 단어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신약 성경에도 로고스가 사용되었는데, 재정 계산이나 결산하는 의미로 번역된 경우가 몇 번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독립적이고도 의인화된 표현: 오늘 우리가 공부하면서 주목할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표현할 때, 하나님과는 독립적으로 따로 별도로 존재하면서도 의인화하여 인격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의인화라는 말은 사람이 아닌데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도록 하는 것을 뜻합니다. 나무가 말을 한다고 할 때, 나무를 의인화한 것입니다. 바람이 속삭인다고 할 때, 사람이 속삭이듯이 의인화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는 별도의 존재이지만 독립적이고 의인화된 표현을 한다고 사전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단어의 의미를 이 정도로 하고, 이것이 서양 철학과 우리 신약 성경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헬라 철학(그리스 철학)에서의 로고스입니다. 헬라 철학에서는 로고스를 '우주에 내재하는 신의 이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성이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주에 내재하는 신의 이성이자 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로고스입니다. 우주가 생성되고 의미를 가지게 하는 힘입니다. 어떤 힘이 작용해서 무언가를 표현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주를 통할하거나 조정하는 원칙이자 법입니다. 이성(Reason), 힘(Force), 원칙(Principle), 법(Law)처럼 인격적인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 힘은 저항할 수 없는 힘이어서 우리는 모두 그 힘을 따라가야 합니다. 전 세계와 전 피조물을 공통의 목적으로 이끌어가는 힘, 이것이 헬라 철학에 나타난 로고스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그 원칙이나 법은 필연적이고 신성한 것이어서 어떠한 사물도 벗어날 수 없고, 어떠한 이성적인 인간도 기꺼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연의 법이자 이치로 로고스를 이해했습니다.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서, 이 로고스 이론을 힘과 원칙으로 맨 처음 말한 사람이 누구냐면 에베소의 헤라클리토스(Heraclitus)입니다. 주전(BC) 6세기 후반부터 5세기까지 살았던 사람입니다. 헤라클리토스는 '만물유전설(萬物流轉說)'을 주장했습니다. 만물은 정체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한다는 설입니다. 이를 주장하면서 우주의 근원이요 만물을 움직이는 기본 질서가 되는 그 힘을 '로고스'라고 칭했습니다. 이 사람뿐만 아니라 그를 포함한 많은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신이 우주를 통치하는 어떤 힘이나 법칙을 로고스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신약에 와서 요한이 그리스도를 로고스라고 칭하자, 교부 유스티누스(영어로 저스틴, AD 2세기 사람으로 약 100년부터 165년까지 살았던 교부)는 이 헤라클리토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헤라클리토스를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 4~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우주의 힘이 로고스라고 말했고, 요한복음에서는 그 로고스가 곧 예수님이라고 했으니, 헤라클리토스는 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참 좋은 표현입니다. 헤라클리토스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불은 가만히 있지 않고 활활 타오르며 무언가를 태우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고스는 불과 같고 만물은 불이 변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다른 것들을 태우고 새롭게 모양을 바꿔가는 힘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로고스는 세계를 생동하게 하고 통치하는 우주적 원칙(Universal Principle)이라는 경지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 무렵에 살았던 소크라테스(BC 470~399년)나 플라톤, 그 후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은 많은 담론과 책을 남겼지만 이 로고스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헤라클리토스는 로고스가 우주의 힘이라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이 그림이나 조각품에 나오는 사람이 바로 에베소의 헤라클리토스입니다.
그러다가 하나의 철학 학파가 나옵니다. BC 4세기 중반에서 BC 3세기경에 시작된 헬라 시대의 주도적인 철학 체계 중 하나인 '스토아학파'입니다. 이 학파의 창시자는 키티움(Citium)에 살던 제논(Zeno)입니다. 그는 BC 334년부터 262년까지 살았던 사람입니다. 왜 스토아학파라고 부르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영어로는 플라톤을 '플레이토'라고 하지만 우리는 원래대로 플라톤이라고 부릅니다. 영국이나 미국 식 발음이 아니라 헬라 사람이 원래 부르던 대로 제논, 플라톤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제논은 키티움 사람인데, 키티움은 성경 창세기 10장 4절을 보면 야완(Javan)의 아들로 나옵니다. 민수기에도 나옵니다. 야완이 산 곳이 그리스이고, 그의 아들 기띰(Kittim)이 산 곳이 바로 키프로스(Cyprus)입니다. 영어로는 사이프러스라고 부르는 그 키프로스를 구약 시대 사람들은 기띰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마식으로 가장 큰 도시입니다. 제가 몇 달 전에 구브로에 다녀왔습니다. 성경 용어로는 구브로인데, 키프로스 중간쯤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곳에는 초기 교회 사도들의 유적이 많이 있습니다. 바나바의 유적도 있고, 바울의 유적도 있고,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유적도 있습니다. 나사로는 그곳의 초대 감독이었습니다.
제논은 BC 300년경, 40대쯤 되었을 때 아테네의 아고라(장터)에 있는 '스토아'에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완전히 막힌 건물이 아니라 위에 지붕이 있고 아래는 기둥만 있어서 해와 비를 피하며 사람들이 만나 토론하는 곳을 '행각'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 행각이 헬라어로 '스토아(Stoa)'입니다. 영어로는 폴치(Porch)이고 우리말로는 행각입니다. 그 스토아에서 만나 철학적인 대화를 많이 나누었기 때문에 그 학파의 이름이 스토아학파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유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고라에 있는 스토아에서 철학자들과 모여 강연을 하고 학술을 논했기 때문에 스토아학파라고 부르며, 그 창시자가 바로 제논입니다.
그들의 도덕 사상을 보면 키노사르게스(Cynosarges)라는 곳이 나옵니다. '키온(Kyon)'은 개라는 뜻이고, 키노사르게스는 '하얀 개의 장소'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학술과 철학을 논했기 때문에 그들을 견유학파(Cynics)라고도 부릅니다. 그들은 "너희가 돈이 많다고 뽐낼 거 있느냐? 지위가 높다고 자랑할 거 없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덕성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덕성과 인격을 가져야지 명예나 부귀영화, 벼슬, 학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상입니다. 제논은 이를 강조하며 부귀영화와 권력 등 인간의 욕망에 대해 아주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 철학은 헬라 시대로부터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큰 인기를 끌며 주된 철학 사상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참 좋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참고로 원래 발음은 파일로가 아니라 필론이고, 플레이토가 아니라 플라톤입니다. 우리가 발음하는 것이 원음에 가깝습니다. 스트라보도 영어식 발음이 아니라 원래대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스토아학파에 들어오게 된 제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은 삶의 선한 흐름이다. 그리고 이것은 만물을 통할하는 우주적 이성인 로고스와 일치하는 올바른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성취된다." 행복은 로고스를 따라가는 것이고 우주적인 원칙에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시 고관대작이 되거나 부자가 되는 것은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여기서 주의를 끄는 것은 로고를 '만물을 통할하는 우주적 이성'으로 간주했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개념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우주적인 힘이라는 점에서는 상당히 좋은 발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BC 334년부터 262년까지 살았던 제논입니다. 아주 냉소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서 "너희들이 뽐내봤자 별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가 BC 20년부터 AD 40년까지 약 60년을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과 동시대 사람입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BC 4년경에 태어나셨지만 이분은 BC 20년에 태어났습니다. 필론은 유대에 살지 않고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에 살았습니다. 그는 유대인 사상가로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로고스 이론에 집중하면서, 유대 철학과 헬라 철학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유대 사상에 철저하면서도 헬라 사상 역시 높은 수준임을 인정하고, 이 두 사상 사이에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없을까 끊임없이 생각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유대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을 보면, 히브리어 '다바르(Dabar, 말/말씀)'가 헬라 철학의 '로고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를 보고 필론은 우주의 원칙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32장 45절~47절에 말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여기 나오는 '말씀'과 '말'을 70인역에서 보니 모두 '로고스'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헬라 철학에서는 로고스를 우주를 통치하는 원칙, 힘, 법이라고 했는데, 성경을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주의 원칙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며 헬라 철학과 유대 사상을 접목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론입니다. 헬라화된 유대인 학자였습니다.
필론의 이론에 따르면, 이 말씀과 로고스는 욥기와 잠언에 나오는 '지혜(헬라어로 소피아)'와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욥기와 잠언을 보면 지혜가 만물을 다스리고 무언가를 행했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지혜가 곧 로고스라고 연결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로고스를 '여호와의 사자'와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여호와와 구별된 존재로 이해하기도 하면서 다양하게 사용했습니다. 필론에게 있어서 로고는 하나님에게서 첫 번째로 난 존재였습니다. 생물학적으로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존재하게 된 첫 번째 존재라는 경지까지 발전시킨 것입니다.
참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하나님보다는 열등한 존재로 보았으며 독립적인 신적 존재로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로고스를 통해 나타내신다고 생각했을 뿐, 그 나타난 존재가 또 다른 하나님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로고스를 완전한 인격체로 보지 않았고, 요한복음처럼 메시아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지도 못했습니다. 아직 예수님에게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필론은 로고스를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나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어떤 존재로만 이해했지, 하나님과 동등한 신적 존재로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 필론의 한계였습니다. 헬라 철학에서 시작해 스토아학파의 제논을 거쳐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에 이르기까지 로고스 개념이 이렇게 발전해 왔습니다.
세 번째로, 구약 성경과 유대교에서는 로고스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유대교에서 로고스(말씀)는 창조의 힘입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곧 창조의 힘입니다. 이사야 55장 11절에도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씀에는 힘이 있어서 없는 것을 존재하게 하고 무언가를 행하게 만듭니다. 시편 147편 15절에서는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라고 표현합니다. 말씀이 막 달려가서 일을 한다는 성경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33편 6절과 9절에는 "여호와의 말씀으로(헬라어로 로고스, 히브리어로 다바르)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무언가 이루어지고 견고해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이 참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시편 107편 20절에는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하여, 말씀이 파견되어 걸어가는 듯한 의인화의 여지를 줍니다. 시편 119편 89절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굳게 선다는 것을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도 말씀(로고스)이 역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구약의 외경과 위경에서도 로고스가 마치 인간인 것처럼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말하고, 걸어가고, 일을 하고, 만물을 만드는 식으로 묘사됩니다. 위경 중 하나인 집회서(Ecclesiasticus) 42장 15절을 보면 "이제 나는 너에게 주님의 업적을 일깨워주고 내가 본 바를 말하겠다 주님은 당신 말씀으로 그 업적을 이루시고 피조물은 그 뜻을 따른다"라고 공동번역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또 다른 외경인 지혜서 9장 1절을 보면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시며 자비로우신 주님 당신은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셨고"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 3절과 같은 맥락입니다. 또한 위경인 희년서(Jubilees)를 보면 아주 두꺼운 책인데, "그가 말씀과 기도를 끝내시고 그리하여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아브라함에게) 보내졌는데 나를 통하여(여기서 '나'는 천사입니다)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주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창세기 12장 1~2절의 "너는 너의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보내졌다고 표현하며, 말씀이 어떤 생명체나 물건처럼 보내진 것으로 의인화했습니다. 유대교에서도 이미 말씀이 의인화되었다는 사실에 착안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로 해설한 '타르굼(Targum)'이 있습니다. 번역이 아니라 말을 덧붙여 설명한 해설서입니다. 아람어로 된 타르굼에서는 '밈라(Memra, 아람어로 말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신성한 능력의 현현이나 하나님을 대신하는 기별자를 가리키는 말로 폭넓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일하게 하는 메신저로 이해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1장 32절의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를 믿지 아니하였도다"라는 우리 성경 구절을 타르굼 해설에서는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였다"라고 해설했습니다. '여호와를 믿지 않았다'는 것을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로 바꾸어 해설한 것입니다. 여호와와 여호와의 말씀을 동등하게 의인화한 것입니다.
또 신명기 18장 19절을 보면, 우리 성경에는 "그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친히 그에게 추궁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타르굼에서는 이를 "그가 내 이름으로 하는 말을 전할 때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내 말이 그에게 추궁할 것이다"라고 해설합니다. '내가'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말이' 추궁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출애굽기 본문 중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를 타르굼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백성을 치시니"라고 바꾸어 해설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여호와의 말씀(밈라)'이 했다고 인격화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6장 7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라는 말씀도 타르굼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라고 삽입하여 해설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말씀이 했다고 자꾸 해설해 놓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요한복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제 신약성경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로고스라는 단어는 총 331회 사용되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말이 많이 필요하니 굉장히 많이 사용된 것입니다. 개역한글판 성경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가장 많이 사용된 뜻은 '말, 말씀, 글'로, 331회 중 약 300번이 이렇게 번역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조금씩 다르게 번역되었는데, '도(道)'(예: 십자가의 도)로 9번, '일'로 6번, '회개(결산), 계산'으로 3번 번역되었고, 이 밖에도 전파, 소리, 이야기, 사정, 송사, 구변, 모양, 전도, 상관, 이유 등 여러 가지 의미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그리스도를 직접 가리키는 로고스는 오직 6회뿐입니다. 모두 요한의 글에만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세 번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14절에 한 번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또한 요한일서 1장 1절의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요한계시록 19장 13절의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까지 합쳐서 총 여섯 번입니다. 오직 요한의 글에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로고스가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로고스의 개념은 철학과 그리스도교 사상에 중대하고 광범위한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로고스라는 용어는 긴 역사적 배경을 가졌고, 그 개념의 발전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넓혀주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로고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접근하시며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시는지를 인간이 알려고 노력할 때 사용되기 시작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는 더 높은 개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고전 헬라어에서 로고스는 이성이나 말씀을 의미했지만, 그 단어에 가장 근사한 번역은 '생각(아이디어, 이데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고스는 한편으로는 이성의 능력이나 마음속에 내재된 생각을 가리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를 매개로 하여 외적으로 표현된 생각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휘 연구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단어를 통하지 않고는 사상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사랑'이라는 단어 없이 사랑을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향해 가지고 계신 생각과 아이디어가 있는데, 그 생각을 나타내려고 하니 '말'이 필요했고 그 말이 곧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라는 용어 속에는 '생각'과 그것의 '외적 표현'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철학에서나 기독교 신학에서나 생각과 그것의 외적 표현인 로고스가 합쳐져 이 두 개념이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소 복잡할 수 있지만, 마음속의 생각(아이디어)과 그것의 표현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로고스라는 점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이해하고 만질 수 있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아주 중요한 선언이며, 깊은 위대한 사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로고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이 곧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14절에 가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라고 하여 바로 예수님이 로고스이심을 밝힙니다.
이어지는 요한복음 1장 5~14절 말씀을 보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은 과거의 개념들을 능가하고 초월하여 화룡점정을 찍습니다. 로고스는 세상의 어떤 원리나 힘, 법칙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만드신 초월적인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은 확실하게 주장합니다. 말씀이신 로고스 예수님은 영원하시고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아가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을 통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로고스는 우리 가운데 오셔서 사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사신 것입니다('스케노', 텐트를 치다).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쓸 때 이미 널리 알려진 헤라클리토스의 철학이나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독자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헬라 철학자들이나 유대 학자들이 말하는 로고스를 염두에 두면서, 그것을 능가하고 초월하며 교정해 줍니다. 요한이 의도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로고스 기독론의 의미와 중요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로고스의 역사와 발전 과정을 볼 때 요한은 로고스의 두 측면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창조의 측면입니다. 로고스를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이는 창조의 매체입니다. 여기서 매체라는 것은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인격체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시며 또 다른 하나님이신 예수라는 로고스를 통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둘째는 계시의 측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로고스를 통해 창조하시고, 로고스를 통해 직접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로고스가 직접 말씀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로고스는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의 소유자이시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빛이며, 모든 광명과 지성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성육신하여 인간이 되셨다는 진리를 이 로고스 이론을 통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앞에 배운 헬라 철학, 유대 철학,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타난 로고스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로고스에 대해 공부해 보았습니다. 개념이 크고 깊기 때문에 오늘 시간을 많이 할애한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그분, 그리고 그분이 가르치신 로고스(말씀)를 생각할 때, 비록 우리는 육신을 입고 비천한 가운데 있지만 그분과 같이 되는 동화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로고스에 대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잘 인내하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또 다른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