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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바보회의 조직
근로기준법의 발견
141쪽
전태일의 아버지 전상수 씨는 젊은 시절에 대구에서 방직공장에 다녔는데, 어느 땐가 대구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하게 되어서 그 파업에 가담하였던 경력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해방 직후의 혼란기여서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해방직후의 혼란기여서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
해방은 1945년이다. 전태일 이전에도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다. 그 당시에 전상수 씨가 가담했던 파업도 ‘기업주와 경찰의 이중탄압을 받아 꺾였다’고 한다. ‘회사 측에서는 새로 직공들을 모집하여 파업을 깨려 하였는데, 파업노동자들이 완장을 두르고 공장 문 앞에 진을 치고 막아서서 새로 온 일꾼들을 돌려보내며 버티어서, 파업은 한 달 넘도록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회사 측이 파업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을 끝내 듣지 아니하고 공장 문을 닫고 계속 버티는 바람에 먹고살 것이 당장 없었던 노동자들이 동요되었고, 거기에다 경찰이 파업주동자들을 검거해버리는 바람에 파업이 결국 깨어졌다.’
정경유착의 역사는 깊구나. 작년에 본 만화/드라마 ‘송곳’이 생각 난다.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고 하루아침에 문을 닫아서 노동자들을 쫓아내 버린 기타제조사 콜트/콜텍이며 쌍용차 파업도 생각도 난다. 해방부터 2016년 오늘날까지 노동자의 처지는 어쩌면 달라진 것이 없을까!
‘해방직후의 혼란기여서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라는 부분을 읽으며 20대 초반에 읽은 ‘스스로를 비둘기라고 믿는 까치에게’라는 책이 생각났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 즉 자기가 속한 사회에 의해 규정되는 측면이 큰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완성을 위해서는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를 올바르게 바꾸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중략)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란 학생이든 회사원이든 선생이든 농민이든 노동자이든 대개는 무력하고 나약하며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다…(중략) 그러나 그러한 눈에 보이는 모습들이 고정적인 것이거나 본성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속한 사회의 개인적 반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중략)
나는 군에서 제대한 80년 3월 다시 교단에 설 때 그것을 보았었다. 10∙26으로 박정희가 죽었을 대 나는 군에 있었다… (중략) 어느날인가 박정희의 사망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해방감을 느끼게 했고 나 자신을 변화시켰다. 80년 봄 내가 제대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 이러한 우리 사회의 변화가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그러한 사람들의 변화가 다시 사회를 변화시키는 더 큰 힘으로 작용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던 때였다.
당시 내가 근무하고 있던 학교에서도 변화의 물결은 일고 있었다. 학생들은 자율적인 학생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였고, 평소에 그렇게 나약하고 이기적이었던 선생들이 학교 운영의 주체가 되기 위해 문제를 제기하고 단합해갔다. 그러나 5월 18일, 하루아침에 요술처럼 상황은 바뀌었다.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계엄 확대로 무거운 마음이 되어 학교에 출근했는데 선생이나 학생이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옛날로 돌아가 있었다. 선생들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늘 피곤한 표정을 지은 채 나약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고, 학생들도 통제에 잘 순응하는 순치된 아이들로 돌아가 있었다. (스스로를 비둘기라고 믿는 까치에게, 도서출판 푸른나무, 1988, 134-135쪽)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따라가자면, 저 책을 읽은 20대 초반에 친구들과 나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레나 올린이 주연한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우월한 기럭지에 빠졌던 건지도. 하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다. 영화는 우울했고 현실은 더 우울했다. ‘대망의 80년대’를 막 통과하고서 20대를 맞은 우리에게 영화는 ‘시체 파먹기 놀이’, 아름다운/허깨비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일장춘몽… 현실은 ‘에드워드 가위손’의 풍경만큼 기괴했다.
141-142쪽
그는 그 시절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던 사람들이 예외 없이 일생을 그르치는 피해를 당하는 것을 무수히 목격하였다.
…차라리 모두 다 아는 대로 이야기하여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아니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또 노동운동을 하면 장래 어떤 화(禍)를 입게 될 것인지도 알려주어 이 기회에 아주 단념하도록 만드는 것이 낫겠다는… (후략)
143쪽
특히 아버지와 얘기 도중에 우연히 근로기준법의 존재와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의 전신에 새로운 희망과 확신과 환희가 벅차올랐다.
근로자에게도, 모든 것을 빼앗긴 지지리도 천한 핫빠리 인생에게도 인간답게 살 권리는 있는 것이로구나. … (중략) 이러한 눈물겨운 자각이야말로 자유를 위한 모든 저항의 시초가 아니던가? 그것은 일순간에 곧 저주받은 현실에 대한 무서운 분노로 변하여 끓어오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145쪽
나라의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근로조건을 쟁취하지 못하고 죽은 듯이 혹사당하고만 있는 평화시장 일대의 모든 노동자들이 다 ‘바보’라고 생각되었다.
재단사 친구들
150쪽
그는 모든 재단사들이 자기 마음과 같지 않다는 사실이 몹시 안타까웠고 노동운동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이런 가운데 태일은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그것은 거액의 돈을 마련하여 평화시장 안에 모범적인 업체를 만들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노동자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면서도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업체들이 그 뒤를 따르도록 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151쪽
“한두 목숨 없어져야 근로조건 개선이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사회적 기업과 비슷한 모범 기업. 목숨은 지금까지도 너무 많이 없어지고 있다...
바보회의 사상
152쪽
재단사 모임을 시작하면서 그는 나이가 든 선배 재단사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청하였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뭘 안다고 너희가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이려 하느냐?”고 막으면서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설치는 놈은 ‘바보’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오늘날을 맞이해 ‘나이 든’ 사람이 되었다. ‘나이 든 선배 재단사’ 같은 말을 하지는 않는지, 그런 마음으로 나보다 젊은 사람들을 쳐다보지는 않는지, 너희들은 모르는 현실을 안다고 재고 있지는 않은지…
115쪽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참된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헌하고 봉사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중략) 말하자면 지배하고 명령하는 강자의 이익에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는 사람… (중략) 하나의 존엄하고 독립된 주체적 인간으로 모든 내면적 욕구와 의지와 희망의 충족을 포기하고 강자를 위한 하나의 도구∙기능∙노동력으로 전락해버린 인간상이며, 또 그 참혹한 전락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상이다.
남이 시킬 필요가 뭐가 있나, 스스로 알아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뼈를 깎으며 애를 쓰는데…
아버지의 죽음과 바보회의 출발
l 바보회의 활동지침
1) 평화시장 일대 3만 근로자의 근로조건이 근로기준법대로 준수되도록 투쟁, 특히 하루 8시간 노동제, 주휴제 등
2) 조직만이 유일한 밑천이요, 희망이므로 조직을 확장하여 바보회를 점차 노동조합으로 발전시킴
3) 노동실태 조사하여 사회에 알리고 근로감독관에게 시정을 요구하기
4) 독지가에게 5,000만원 정도 투자를 받아 평화시장 안에 모범업체 설립
노력
어머니에게 빚을 얻어달라고 해서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사보다. 옆 동네 나이 많은 대학생 광식이 아저씨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 보다. ‘바보회 회장 전태일’ 명함을 들고 다니며 평화시장 일대 작업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설명하다.
좌절 속에서
평화시장에 ‘위험분자’로 소문이 나 재취업이 불가하게 되다. 일을 제대로 못하면서도 평화시장 일대를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을 만나거나 각 작업장의 노동실태를 조사하다. 고리 사채를 얻어 쓰다. 동생들이 자라 학교 갈 나이가 되었지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다. 1969년 초가을에 바보회 회원 중 그나마 열의가 있던 두세 사람이 군에 입대하자 제대로 모이기가 어려워지다. 1969년 8-9월 경 노동조건 실태조사용 설문지 100여 부를 평화시장에 돌렸으나 70부 정도는 업주에게 발각되어 회수되지 못하고 30부 정도만 회수되다. 이 일로 바보회는 거의 해체되기에 이르다. 회수된 설문지를 분석, 집계하여 시청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가다.
174쪽
나라에서 근로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근로기준법을 제정한 줄로 생각하였고, 그랬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에 모든 희망을 걸다시피 하고 있었던 태일은… (중략) 근로감독관에게 기대를 걸었다. 우리 사회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리에 대해서는 산전수전을 다 겪어 훤하게 알고 있었지만 상층부에서 몰래 행해지고 있는 부정부패나 부조리에 대해서는 전혀 알 리가 없는 그는 근로감독관이 기업주와 결탁하여 서로 돕고 서로 봐주면서 짜고 해먹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175쪽
정작 충격을 받은 것은 태일이었다. 이 근로감독관이라는 사람은 평화시장의 실정에 대하여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자기의 당당한 권한으로 그것을 시정하지 못하였단 말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묵인하였다는 말인데 과연 그럴 수도 있는 일인가? … (중략)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노동청을 찾아가서 진정해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실태조사라는 것을 한 번 나오기는 나왔으나 아무런 대책도 없이 종무소식이었다.
176쪽
만약 노동청이 기업주들과 결탁하고 있는 것이라면? … (중략) 그렇다면 나는 기업주들만이 아니라 근로감독관, 노동청, 아니 그 이상까지도 상대로 하여 싸워야 한단 말인가? 이 현실에서 근로기준법이 지켜지기를 도대체 어떻게 바랄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저들 모두를 상대하여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저 악마와 같은 현실의 벽은 도대체 얼마나 두꺼우며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인가?
150쪽
그는 모든 재단사들/사람이 자기 마음과 같지 않다는 사실이 몹시 안타까웠고 노동운동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사회를 신임하고 있던 J가 사회를 신임하지 않게 된 동기’
177쪽
“현실의 조롱과 냉소가 너무나도 잔혹하고 괴로웠다.”
좌절과 자학을 거듭하다. 인간과 사회의 현실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자라나다. 분노와 연민과 투지. 부조리한 현실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고 맹세.
정희진 선생의 칼럼 중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제정하라가 아니라)고 외치며 분신했다’는 대목을 읽었다. 가슴을 치고 땅을 친다. 법이 없어 부조리가 판을 치는 사회가 아니라 있는 법을 지키지 않아 부조리가 판을 치는 사회라.
아버지의 무능력으로 온가족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자라 그런 아버지의 삶을 되풀이할까 두려워했으면서도 노동운동을 하느라 일을 못하고, 빚을 지고, 동생들 학비를 못 댔다. 나와 가족의 안위…를 대가로 하는 삶이라…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실제로 가족의 안위가 뒷전이 된 삶이 아직도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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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고님 이야기가 더 듣고 싶네요. 이따 봬요. 오늘은 꼭, 홍대입구에서 내리세요.
네, 오늘은 잘 내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