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독교인들>
“그는 여름만 되면 미국 메인 주에 있는 농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직접 땅을 파고 열매를 따면서 세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철학자로서 생각의 밭을 일군다. 몇 년 전에는 나도 그곳에 초대받아 즐거운 한때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영락없는 시골 할아버지였다. 그 매력에 다시 이끌려 지금 나는 그의 큰 날개에 다시 한 번 매달려 있다. 이번에는 나를 어떤 세계로 데려다줄지 벌써부터 흥분된다.”
미국의 대표적인 무신론 철학자 데닛(Daniel C. Dennet)에 관한 얘기다. 땅을 일구며 땀의 소중함을 알고 직접 캐낸 밭의 산물을 즐기는 그의 모습에서 멋과 가치를 아는 인품이 느껴진다. 통섭을 쓴 무신론 생물학자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은 마침내 환경의 소중함을 깨닫고 「생명의 편지」를 썼다. 그들에게서 배운 기독인이었던 장대익이 데닛을 비롯한 무신론자들과의 교류 속에서 마침내 무신론자가 되어 그들의 큰 날개에 매달려 있는 것에 만족한다.
시골의 무당들은 굿판을 벌인 후 마을 주민들과 떡을 나누며 제법 베풀줄을 안다고 한다. 무신론자, 비기독교인들이라 해서 인생의 가치를 상실한 혐오스럽고 역겨운(detestable) 존재들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주님은 주님의 종 예언자들을 시켜서 이방 백성이 살면서 역겨운 일을 하여 땅의 구석 구석까지 더러워지지 않은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다(에스라 9:10)
해서,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와 에스라는 이방 백성과의 관계를 끊으려 한다. 이방 여인과 결혼한 113명과 그 여인들에게서 난 아이들까지 가족과의 생이별이 시작되었다. 그 이별의 현장은 눈물바다였고, 하늘도 슬퍼했던지 큰 장대비까지 내리고 있었다.(에스라 10:9) 개중에는 이방 종교의 인신 제사라는 역겨운 풍습에 물든 사람도 있었을 터이나, 모두가 그랬겠는가?
청춘 남녀의 사랑은 많은 영화, 드라마, 대중가요의 주제다. 가족영화에서는 가족의 끈끈한 사랑을 최고요 최상의 가치로 둔다. 비기독교인 기독교인 할 것 없이 그 가치를 폄훼할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이방 민족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는데에는 반드시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페르시아 본토에서는 하만의 계략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말살될 위기를 넘겼다. 포로에서 귀환한 소수 민족 유다도 민족의 소멸이라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바로 남녀의 사랑과 가족애라는 가치가 더 우선시되는 경우에. 유다가 이방 민족과 섞이는 경우에는 민족과 신앙의 순수성이 희석된다. 소수인 유다가 다수인인 이방민족과 섞인다는 것은 곧 민족과 신앙의 소멸을 뜻한다. 북이스라엘은 진작에 앗시리아의 혼합 정책에 의해 민족의 소멸을 경험하였다. 이보다 더 역겨운 일이 있을까?
창세기에서도 인류의 불행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데 있었다고 말씀한다(창 6:1~3). 그 결과는 곧 궁극의 실재(Ultimate reality)되는 이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담지해야할 민족의 소멸과 궤를 같이 한다.
현상을 묘사하는 다양한 수준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1) 먼저, 제일 낮은 단계의 단순한 관찰적 언어다. 예) 꽃이 만개하다. 잡초가 무성하다
2) 그보다 상위 수준의 묘사로서, 관찰적 언어지만 가치를 내포하도록 발전한다. 예) 꽃의 배열이 미적 감각을 나타낸다.
3) 최고 수준은 지향적-수준(intentional-level)으로서 암시적이다. 예) 꽃의 배열이 누군가가 손질했음이 틀림없다
우리 인생을 묘사하는 최고 수준은 궁극의 실재와 맞닿아 있다. 무신론자를 포함한 비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1)과 2) 수준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줄 알고 인생에 깃든 가치를 보고 기뻐할 줄 안다. 그러나 궁극의 실재로 가면 달라진다. 무신론자는 인생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물질로 보고 결국에는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무속은 운명론으로 귀결될 것이다. 범신론은 궁극의 실재까지 다른 모든 사물 중의 하나로 깍아내린다.「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 223」
우리는 그 궁극의 실재가 여호와 하나님이란 사실을 고백한다. 우주가 생겨나기 전, 빅뱅 이전부터 지상 세계의 종말 이후까지. 비기독교인과 기독교인은 만난들 만날 듯 하면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린다. 만님을 이루기 위해 섞이면 희석되고 희석되다 보면 소멸된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담지할 그릇이 없어져 버린다.
에스라 시대에 유다인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는 예수님 오실 때까지 민족의 소멸을 막고 여호와의 그 이름을 지켜내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가 있을 것이다.
이 현대의 다원주의 시대에도 어쩌면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이 소멸될 위험과 도전에 직면해 있는지도 모른다.